Chapter: 12화: 거울 속에 비친 초라한 나 마음을 독하게 먹었지만, 현실을 직시하는 일은 언제나 고통스러웠다. 나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 다음 날 아침, 혜진은 욕실의 전신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무런 핑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외면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거울 속에 서 있는 여자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아이를 낳고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아 불어난 몸매, 탄력을 잃고 처진 뱃살과 팔둑, 스트레스로 푸석푸석해진 피부와 눈가에 가득한 기미. 지난 10년간 남편의 건강을 위해 최고급 보양식을 대령하면서 정작 자신은 남은 잔반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던 습관이 고스란히 박힌 몸이었다. 남편이 가끔 “당신도 요즘 살이 좀 찐 것 같아”라고 눈치를 줄 때마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라며 속으로만 삼켰던 결과물이 바로 이 거울 속의 초라한 아줌마였다. “이게… 진짜 내 모습이었구나.” 강태성이 던진 “살은 뒤동뒤동 쪄가지고 아줌마 냄새 풀풀 풍기는 여자”라는 폭언이 다시금 심장을 찔렀다. 상간녀 김세은의 날씬하고 탄력 있던 몸매와 비교되던 순간의 비참함이 온몸의 세포를 깨웠다. 정신이 무너진 줄만 알았는데, 외형마저도 이미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던 것이다. 혜진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 아니었다. 자신을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것에 대한 스스로를 향한 분노이자 안타까움이었다. 외모는 정신의 거울이다. 이렇게 초라한 몰골을 하고서는 그 어떤 비즈니스도, 그 어떤 복수도 시작할 수 없었다. 당당한 인간으로서 대접받고 싶다면, 먼저 내 몸과 외면부터 완벽하게 바꾸어 놓아야 했다. 혜진은 거울을 향해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오늘이 네가 가장 초라한 마지막 날이야, 윤혜진.” 그녀는 욕실 선반에 있던 낡고 유행 지난 스킨케어 제품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Last Updated: 2026-07-02
Chapter: 11화: "나를 위해 살겠어" 마음의 다짐지독한 향수병의 늪에서 혜진을 건져 올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에 울린 짧은 알림음이었다. 한국에 있는 몇 안 되는 지인이 보내온 링크였다. 그것은 전남편 강태성과 상간녀 김세은의 화려한 재혼식 현장이 담긴 지인의 SNS 게시물이었다.화면 속 강태성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젊은 신부의 손을 잡고 활짝 웃고 있었다. 결혼식장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최고급 호텔이었고, 하객들은 그들의 새로운 출발을 아낌없이 축복하고 있었다.그 사진을 보는 순간, 혜진의 가슴속에서 차갑게 식어가던 불꽃이 다시금 맹렬하게 타올랐다.22화: "나를 위해 살겠어" 마음의 다짐‘나는 여기서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시며 향수병에 울고 있는데, 나를 밑바닥으로 처박은 인간들은 저렇게 축제를 벌이고 있구나.’지독한 각성이 찾아왔다. 혜진은 뺨에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돌아갈 고향? 익숙한 안락함?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리워했던 한국은 이미 강태성이라는 괴물에 의해 철저히 오염되고 무너진 전쟁터일 뿐이었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고향이 아니라, 그 시절 아무것도 모른 채 남편만 바라보며 바보처럼 행복해했던 ‘무능한 나 자신’이었다.“더 이상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지 않겠어.”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지난 10년은 강태성의 성공을 위한 삶이었다. 그의 입맛에 맞추고, 그의 기분을 살피고, 그의 회사를 키우기 위해 정작 윤혜진이라는 인간의 알맹이는 모두 비워내 버렸다. 그 결과가 이 비참한 배신이라면, 이제부터 남은 인생은 철저하게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쓰겠다고 혜진은 다짐했다.“나를 위해 살겠어. 내가 성공하고, 내가 아름다워지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되겠어.”그것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었다.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생존의 선언이었다. 전남편에게 보여주기 위한 유치한 복수가 아니라, 잃어버린 내 존재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내
Last Updated: 2026-07-02
Chapter: 10화: 타국에서 맞이한 지독한 향수병인간의 정신력은 밤낮으로 채찍질한다고 해서 마냥 버텨주는 기계가 아니었다. 민지를 보며 독하게 정신을 붙잡았다고 생각했지만, 필리핀 생활이 삼 주째 접어들 무렵 혜진에게 소리 없이 찾아온 것은 지독한 ‘향수병’이었다.낯선 정착 과정은 매 순간이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행정 처리는 매번 서툴렀고, 현지인들의 빠른 발음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마트에 가도 익숙한 한국 식재료 대신 정체 모를 현지 소스와 열대 과일 향이 가득했다. 물조차 마음대로 마시지 못해 늘 생수를 사다 날라야 하는 사소한 불편함들이 모여 혜진의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그날 저녁은 유독 스콜이 길게 이어졌다. 콘도 창문을 거칠게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혜진은 민지에게 줄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현지 야채와 고기를 볶아 상을 차렸지만, 민지는 한두 숟가락 깨작거리더니 이내 숟가락을 놓았다.“엄마, 나 한국에서 먹던 할머니 김치찌개 먹고 싶어. 학교 친구들도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고…… 나 그냥 한국 집으로 돌아가면 안 돼?”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던 여덟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가 혜진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민지를 달래서 겨우 재우고 난 뒤, 혜진은 식탁에 홀로 앉아 민지가 남긴 음식을 바라보았다.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덥고 습한 마닐라의 공기 속에서, 혜진은 익숙했던 한국의 모든 것이 미치도록 그리워졌다. 매일 가던 동네 마트, 편하게 대화하던 한국어, 추운 겨울날의 서늘하고 맑은 공기, 심지어 자신을 비난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마저도 이 지독한 낯섦에 비하면 차라리 익숙해서 안전한 것처럼 느껴졌다.내가 왜 이 멀리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어야 할까. 익숙하고 편안했던 나의 고향, 나의 나라. 그곳에서 밀려나 타국에서 미아처럼 떠돌고 있다는 정체성 상실감이 그녀를 덮쳤다. 향수병은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었다. 과거의 안락함으로 돌
Last Updated: 2026-07-01
Chapter: 9화: 무너진 멘탈을 붙잡는 이유허름한 셋방의 에어컨은 밤새도록 기괴한 기계음을 내며 덜덜거렸고, 창문 틈새로는 매연 섞인 마닐라의 밤공기가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혜진은 단 한 숨도 자지 못한 채 뜬눈으로 새벽을 맞이했다.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것은 얼룩진 시멘트 벽지와 삐걱거리는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는 자신과 딸 민지의 모습이었다.현실은 냉혹했다. 낯선 타국 땅, 통장에는 한국에서 명품을 급하게 처분해 쥔 고작 수천만 원 남짓의 정착 자금이 전부였고, 아는 사람이라곤 첫날밤 기적처럼 나타나 자신을 구해준 정체 모를 남자 에이든뿐이었다.‘내가 정말 잘한 선택일까?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이라도 해야 했던 건 아닐까?’순간적으로 지독한 나약함이 혜진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왔다. 전남편 강태성이 파놓은 교묘한 법적 함정에 빠져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보다, 대한민국 전체가 자신을 ‘능력 없어 버림받은 아줌마’로 몰아가며 손가락질할 때보다, 지금 이 순간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방 한구석에 고립되었다는 공포가 그녀의 멘탈을 사정없이 흔들어놓았다. 거대하고 단단해 보였던 혜진의 정신력이 모래성처럼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숨이 가빠왔다. 공황 발작과도 같은 지독한 무력감이 그녀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그때, 침대 머리맡에서 작은 뒤척임이 들렸다.“음…… 엄마…….”잠결에 엄마를 찾는 민지의 목소리였다. 민지는 작은 손을 더듬거리며 혜진의 옷자락을 꼭 쥐고는, 이내 안심했다는 듯 혜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이의 이마에 맺힌 송골송골한 땀방울과 여전히 유치원 가방을 맬 때처럼 작고 부드러운 체온이 혜진의 가슴에 닿았다.그 순간, 사정없이 흔들리던 혜진의 눈동자가 초점을 찾았다. 뇌리를 강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단 하나의 자각이 있었다.‘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내 딸 민지는 어떻게 되지?’그것이었다. 지독한 고독과 절망 속에서도 혜진이 무너진 멘탈
Last Updated: 2026-07-01
Chapter: 거울 속에 비친 초라한 나의문의 남자가 태워다 준 덕분에 혜진과 민지는 무사히 예약해 둔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는 치안이 좋은 편에 속하는 한인 타운 인근의 작은 콘도미니엄이었지만, 한국에서 살던 대형 아파트에 비하면 턱없이 좁고 허름했다. 남자는 혜진의 짐을 로비에 내려다 주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혜진을 뒤로한 채 미련 없이 차를 돌려 떠나버렸다.방으로 들어와 민지를 씻기고 간신히 침대에 눕혔다. 낯선 환경 탓에 긴장했던 아이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조용해진 방 안, 혜진은 욕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불을 켜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까 택시 기사와 실랑이를 벌이느라 찢어진 정장 상의,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긁힌 뺨 위에 맺힌 핏자국. 하지만 그보다 더 혜진을 비참하게 만든 것은 그동안 남편 사업 뒷바라지와 육아라는 핑계로 철저히 방치해 온 자기 자신의 ‘몸’이었다.스트레스로 인해 부어오른 살집,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아 푸석푸석하고 기미가 가득한 피부, 목 늘어난 티셔츠 위로 겹쳐진 뱃살.전남편 강태성이 이혼 서류를 던지며 했던 잔인한 폭언들이 환청처럼 귀를 때렸다.‘살은 뒤동뒤동 쪄가지고 아줌마 냄새 풀풀 풍기는 여자… 너 지금 네 꼴이 어떤지 알아?’그리고 남편의 무릎 위에 앉아 자신을 벌레 보듯 비웃던 김세은의 젊고 탄력 있는 몸매가 떠올랐다.“내가… 왜 이렇게 됐지?”혜진은 거울을 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남편을 위해 아침마다 보양식을 차리고, 남편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정작 자신은 몇 년 전 옷을 입으면서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이 비참한 도망자 신세였다. 남을 위해 살았던 10년의 끝은 철저한 자기상실이었다.혜진은 세면대에 찬물을 가득 받아 얼굴을 파묻었다. 차가운 물이 피부에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물을 닦아낸 혜진의 눈빛이 무섭게 돌변했다.“강태성, 김세은. 너희들이 원한 게 이거지? 내가 낯선 땅에서 무능하고 초라한 아줌마로 평생 비참하게 썩어가는 거.”혜진
Last Updated: 2026-06-30
Chapter: 위험한 순간, 손을 내민 의문의 남자운전석 창문을 부술 듯이 내려치며 서 있는 사람은 검은색 셔츠를 입은 동양인 남자였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 그리고 한눈에 봐도 좌중을 압도하는 서늘한 아우라를 풍기는 남자였다.그의 등장에 당황한 택시 기사가 창문을 살짝 내리며 현지어로 따지려 들었지만, 남자는 가차 없이 차문 틈새로 손을 집어넣어 내부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그리고는 기사의 덜미를 잡고 차 밖으로 거칠게 끌어내렸다.“악! 쾅!”순식간에 공터 바닥으로 처박힌 기사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핏기가 싹 가신 표정으로 변했다. 남자가 현지어로 몇 마디 낮게 읊조리자, 방금 전까지 혜진을 위협하던 악랄한 기사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빌기 시작했다. 마치 절대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 앞에 선 무력한 인간의 모습이었다.남자는 한심하다는 듯 기사를 발로 차 버렸고, 기사는 차를 버려둔 채 허겁지겁 도망쳐 버렸다.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온 공터. 혜진은 여전히 떨리는 몸으로 민지를 안은 채 차 뒷좌석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남자가 천천히 뒷좌석 문을 열고 허리를 숙여 안을 들여다보았다. 짙은 눈썹 아래로 빛나는 날카롭고 깊은 눈동자가 혜진의 엉망이 된 몰골을 가만히 응시했다.“괜찮습니까?”낮고 굵직한 한국어였다. 타국 땅에서 들은 모국의 언어에 혜진은 긴장이 풀리며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하지만 이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가방을 더 세게 가슴에 묻었다. 사기꾼 남편 덕분에 세상의 그 어떤 호의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누구… 신데 절 도와주시는 거죠?”혜진의 경계 섞인 질문에 남자는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살짝 움직여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밤바다처럼 차가웠다.“그저 길을 지나던 행인입니다. 이 밤중에 아이를 데리고 이런 우범지역에 올 만한 배짱 좋은 한국 여자가 보이길래 신경이 쓰여서 말이죠.”남자는 차 안에서 떨고 있는 민지를 부드러운 눈길로 한 번 바라본 뒤, 혜진의 캐리어를 차 트렁크에서 꺼내 바
Last Updated: 2026-06-30
Chapter: 9화.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가장 잔인한 것은 물질적인 가난보다 사람들의 돌변한 태도였다. 아버의 부도 소식이 완전히 알려지자, 그동안 ‘가족’이라 부르며 살갑게 굴던 친척들마저 일제히 연락을 끊었다. 혹여나 돈을 빌려달라고 할까 봐 무서워 전화를 피하고, 길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오물을 본 것처럼 고개를 돌리며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어머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과거 친하게 지내던 상류층 사모님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연수는 옆에서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아야 했다. “아이고, 연수 어머니. 어쩌나, 우리도 요즘 형편이 말이 아니라서…… 연락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네.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은 생각이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냉정한 거절과 뚝 끊기는 신호음. 어머니는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내려놓고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세상은 그토록 차가웠다. 부와 명예가 있을 때는 간을 빼줄 것처럼 굴던 이들이, 그것이 사라지자마자 가장 잔인한 가해자가 되어 등을 돌렸다.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넘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릴 뿐이었다. 학교에서도 지옥은 이어졌다.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던 연수는 친구들의 노골적인 따돌림과 비아냥을 견뎌야 했다. “야, 하연수네 집 망해서 완전 거지 됐다며?” “대박, 어쩐지 요즘 맨날 똑같은 옷만 입고 오더라. 냄새나는 것 같아.” 사물함에는 비방하는 낙서가 가득했고, 체육 시간에도 연수의 곁에는 아무도 서지 않았다. 세상에 홀로 던져진 듯한 극도의 고독감 속에서 연수는 이를 악물었다. 누구에게도 구걸하지 않겠다, 동정받지 않겠다며 스스로를 단단한 껍질 속에 가두었다. 야무지고 책임감 강한 그녀의 성격은 이 시기의 상처를 자양분 삼아 더욱 독해졌다.
Last Updated: 2026-07-02
Chapter: 8화.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모든 것 폭풍은 예고도 없이 몰아쳤다. 연수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겨울, 아버의 회사는 결국 최종 부도 처리가 되었다. ‘파산’이라는 두 글자는 연수의 삶을 통째로 집어삼킨 괴물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연수의 악몽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돌아온 집은 더 이상 그녀가 알던 따뜻한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현관문에는 거친 글씨로 압류 통지서가 붙어 있었고, 집안 가구마다 붉은색 딱지가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 거실 바닥에는 아버지가 평소 아끼던 도자기와 액자들이 산산조각 난 채 뒹굴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 파편들 사이에 주저앉아 넋을 잃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 “이제 우린 어디로 가니…… 여보, 이제 우린 어떻게 살아!” 정장을 입은 험악한 인상의 사채업자들이 거실을 점령한 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들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모님의 무력한 모습에 연수는 가방끈을 쥔 채 문앞에 굳어버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소리조차 낼 수 없는 극도의 공포가 그녀를 지배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화려한 이층집, 매일 타던 고급 승용차, 아름다운 드레스와 피아노, 그리고 자신을 공주처럼 아껴주던 부모님의 여유로운 미소까지. 남은 것은 수십억의 빚더미와 당장 오늘 밤 누울 곳조차 없는 비참한 현실뿐이었다. 그들은 쫓기듯 서울 변두리의 허름한 지하 단칸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르고, 겨울이면 보일러조차 제대로 돌지 않아 입김이 나오는 좁은 방. 연수는 그곳에서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죽여 울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비비며, 연수는 지독한 현실 속에서 자꾸만 서준을 떠올렸다.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나를 구원해 줄 사람은 오직 그 오빠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킷을 벗어주며 ‘내 눈엔 너만 보인다’고
Last Updated: 2026-07-02
Chapter: 7화. 무너지는 아버지의 사업행복은 영원할 것 같았고, 상류층이라는 견고한 성벽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줄 알았다. 연수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그 아름답던 유리 성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시작은 아주 작은 소문이었다. 아버지가 무리하게 추진하던 해외 리조트 개발 사업이 현지 자금 경색으로 난항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 처음에는 늘 있는 비즈니스의 리스크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집안의 공기는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졌다.매일 밤, 서재에서는 아버의 격앙된 목소리와 어머니의 억눌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거실을 가득 채우던 화려한 웃음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집안에는 오직 무거운 침묵과 줄담배 연기만이 매캐하게 감돌았다.“연수야, 혹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딸은 강하게 버텨야 한다. 알았지?”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유난히 붉어진 눈으로 연수의 손을 꼭 잡았다. 한때 대한민국 재계에서 당당하게 어깨를 펴던 아버의 손은 눈에 띄게 거칠어져 있었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연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차마 무슨 일이냐고 되묻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를 위로하려 애썼을 뿐이다.그 무렵, 연수는 파티장에서 서준을 만나는 횟수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하씨 가문의 위기가 상류층 사교계에 소문이 나면서, 어른들은 은근히 연수의 가족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파티에 참석해도 예전처럼 환대해 주는 이는 없었고, 차가운 멸시와 동정 어린 시선만이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그 지옥 같은 공간에서 연수가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오직 서준의 존재였다. 서준은 주변의 평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연수가 보이면 다가와 무심하게 초콜릿을 쥐여주었다.“얼굴이 왜 이렇게 반쪽이 됐어. 밥 안 먹고 다니냐?”“그냥…… 요즘 공부하느라 그래요.”“거짓말은.”서준은 연수의 안색이 파리해진 이유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더 이상 깊게 묻지 않는 배려를 보이며, 연수의 머리를 꾹 눌렀다.“무슨 일이 있어도 넌 내 꼬맹이야. 잊지 마.”그 한
Last Updated: 2026-07-01
Chapter: 6화. 가장 따뜻했던 오빠태성의 차가운 시선이 스쳐 지나간 태성 기획의 로비, 연수는 제 자리에 얼어붙은 채 커져가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방금 스쳐 지나간 그 오만한 남자의 실루엣에서 왜 이토록 지독한 기시감이 드는 걸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재벌 2세 CEO가 제 기억 속의 그 다정한 소년일 리 없었다.연수의 기억 속 그 오빠, ‘서준’은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외피를 두르고 가장 따뜻한 속살을 보여주던 사람이었다.열 살이 되던 해의 가을, 연수는 처음으로 눈물이라는 것을 남 앞에서 쏟아냈다. 연회장 한구석에서 친하게 지내던 대기업 가문의 또래 아이들에게 철저히 따돌림을 당한 날이었다. 아이들은 연수가 입은 드레스가 작년 시즌 제품이라며, 대놓고 소외감을 조장했다.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은 연수는 아무도 없는 호텔 별관의 어두운 정원 벤치에 쪼그려 앉아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였다.“거기서 뭐 하냐, 꼬맹이.”어둠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에 연수는 황급히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서준이었다. 그는 화려한 파티의 소음이 싫은지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푼 채 서 있었다. 연수가 고개를 돌리며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웅얼거렸지만, 붉어진 눈시울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서준은 한숨을 쉬며 연수의 곁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그의 넓은 어깨가 곁에 닿자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서준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평소보다 훨씬 커다란 고급 수제 초콜릿 상자를 통째로 연수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누가 울렸어.”“안 울었다니까요…….”“거짓말하지 마. 눈이 붕어처럼 부었구만.”서준의 툭명스러운 핀잔에 연수는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애들이…… 내 드레스 구리다고 놀렸단 말이에요. 나랑 안 놀아준대요.” 아이 같은 투정에 서준은 피식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커다란 손을 뻗어 연수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아주 조심스럽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다루듯 쓸어내렸다.“멍청하긴. 저 안에서 가장 빛나는 게 누군지도 모르는 눈먼 녀석들
Last Updated: 2026-07-01
Chapter: 5화. 아홉 살의 거리어린 연수에게 강서준이라는 존재는 미지의 세계이자 우주였다.그와 자신의 나이 차이는 무려 아홉 살. 그는 어른들이 나누는 복잡하고 어려운 주식이나 경영 이야기를 알아들었고,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정장 신사였다. 또래 아이들처럼 유치한 장난을 치거나 큰 소리로 웃는 법도 없었다.하지만 연수는 그 철벽 같은 서준의 곁에 있을 때 가장 완벽한 평온을 느꼈다.그의 주변에는 어른들의 계산적인 웃음 유령도, 아이들의 잔인한 자랑질도 침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꼬맹이, 너 또 혼자 돌아다니지.”“저 진짜 꼬맹이 아니라고요! 이제 아홉 살이에요!”“내 눈엔 평생 꼬맹이야.”연수는 매번 자존심을 세우며 토라졌지만, 사실 서준이 저를 ‘꼬맹이’라 부를 때마다 묘한 소속감을 느꼈다. 온 세상이 냉정해도, 이 키 큰 오빠만큼은 제 편이 되어줄 것 같았다.서준은 약속을 지키는 남자였다. 파티장에서 다른 가문의 아이들이 은근히 연수의 집안을 깎아내리거나 무시하려 들면, 서준은 어느새 나타나 연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어른 뺨치는 차갑고 서슬 퍼런 눈빛으로 그 아이들을 조용히 압도해 물러나게 만들었다.연수는 언제나 서준의 넓고 단단한 등 뒤에 숨어 세상을 보았다.‘오빠는 꼭 거대한 성벽 같아.’차갑고 거대해서 다가가기 힘들지만, 오직 자신에게만큼은 세상의 모든 모진 바람을 막아주는 가장 완벽한 벽.그러나 당시 아홉 살의 나이 차이가 주는 거리감을 어린 연수는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 아홉 살이라는 세월의 간극이, 훗날 집안의 몰락과 함께 두 사람 사이에 결코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되어 가로막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리고 서준 역시 알지 못했다.자신의 차가운 마음에 유일하게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던 그 작고 외롭던 아이가, ‘태성’이라는 본명으로 거대 기업의 왕좌에 오른 지금까지도 심장 가장 깊은 곳에서 지우지 못한 단 하나의 이름이 될 줄은.“하연수…….”현재의 시간, 태성 기획의 화려한 로비.스물일곱의 연수를 스쳐 지나
Last Updated: 2026-07-01
Chapter: 4화. 초콜릿과 별빛의 약속그 소년, 서준은 결코 다정한 말을 연발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늘 말이 없었고,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기 일쑤였다.하지만 신기하게도 연수가 파티장 구석에서 혼자 발을 동동 구르고 있거나, 어른들의 지루한 대화 틈에서 시들어갈 때면 귀신같이 그녀의 곁에 나타났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어두운 테라스 복도, 화려한 정원으로 이어지는 유리문 앞, 혹은 대리석 계단 그늘진 곳에서 서준은 늘 연수의 그림자가 되어주었다.“야, 꼬맹이. 또 울 것 같은 얼굴이네.”“저 진짜 안 울었거든요?”“알았으니까 이거 먹고 입 다물어.”서준은 툭명스럽게 말하며 제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초콜릿을 꺼내 연수의 고사리 같은 손바닥 위에 툭 던져주곤 했다.그가 건넨 초콜릿 포장지는 늘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어떤 날은 금색, 어떤 날은 은색, 때로는 깊은 풍미를 예고하는 짙은 갈색. 연수는 먹기도 아까운 그 작은 초콜릿을 보물처럼 손바닥 안에 꼭 감싸 안았다. 입안에 넣으면 싸늘했던 마음까지 달콤하게 녹여버리는 마법의 묘약이었다.유난히 눈발이 날리던 어느 겨울밤, 두 사람은 소란스러운 연회장을 빠져나와 아무도 없는 야외 테라스에 나란히 서 있었다. 연수는 하얀 퍼 장식이 달린 귀여운 코트를 입고 있었고, 서준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짙은 감색 정장 차림이었다.“오빠, 저기 하늘 좀 봐요. 별이 진짜 많아요!”연수가 까만 밤하늘을 가리키며 어린아이답게 소리쳤다. 서준은 그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더니,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바보냐. 서울 하늘에 별이 저렇게 많을 리가 없잖아. 저건 별이 아니라 건너편 빌딩들의 불빛이야.”“……치, 그래도 반짝이니까 예쁘잖아요. 별이라고 생각하면 별인 거죠.”서준은 입술을 삐죽이는 연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추위 때문에 코끝과 뺨이 발갛게 물든 채로도, 눈동자만큼은 세상의 모든 빛을 담은 듯 청초하게 빛나는 아이. 서준은 이상하게도 그 순간, 제 가슴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무거운 의무감들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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