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마차 문이 닫히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고, 시선은 낮아져 있었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시선만,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안장 위. 카일. 그는 이미 그림 하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눈. 하지만 그 시선이 닿는 순간, 그림 하일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목이 아주 미세하게 조여드는 느낌이 되살아났다. "..."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한 걸음, 천천히 마차 옆으로 다가가 발을 올리고, 안장 위로 올라탔다. 움직임은 조심스러웠고,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시선은 다시 앞으로 고정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옆에 있는 시선은 느껴지고 있었다. 카일이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그림 하일드를 바라봤다. 아주 잠시, 침묵. 그리고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씨익. 소리 없는 웃음. 짧지만 분명한 의미를 담은 웃음. 그림 하일드의 숨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긴장이 그대로 굳어졌다. 카일은 그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찰싹. 짧은 소리. "...가자." 낮은 목소리. 말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ㅡ 바퀴가 굴러갔다. 자갈 위를 밟으며 일정한 리듬으로. 마차가 다시 길 위로 나아갔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마차는 조용히 길을 따라 움직였다. 말들은 고개를 흔들며 걸었고, 바람은 옆을 스치듯 흘러갔다. 안장 위의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손끝은 아주 미세히 굳어져 있었다. 그때,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너." 짧은 한 음절. 그림 하일드의 어깨가 굳었다. 숨이 한 번, 얕게 끊겼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아주 조금 돌렸다. 카일. 그가 옆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림 하일드의 눈이 아주 살짝 커졌다. 겁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눈. 조심스러운 시선. 카일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내 부탁 하나 들어줘야겠다." 말투는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림 하일드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부탁...이요?" 말이 거의 숨처럼 흘러나왔다. 카일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대로 말했다. "넌—" 짧은 정적. "저 계집의 하녀니까."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마차 쪽으로 향했다.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사이 아니냐." 그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다는 말투. 그림 하일드의 손이 조금 더 굳었다. 대답하지 못했다. 카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회를 봐서—" 말이 아주 느리게 이어졌다. "지금 저 계집이 목에 하고 있는 목걸이." 짧은 숨. 그의 눈이 다시 그림 하일드를 향했다. "...저 목걸이를 훔쳐와라." 그 말이 조용히 떨어졌다. 하지만 그 무게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그림 하일드의 눈이 확실하게 흔들렸다. "그건..." 반사적으로 입이 열렸다.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ㅡ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카일의 손이 고삐 위에서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그 순간. 그림 하일드의 숨이 갑자기 막혔다. "...윽ㅡ!"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목이ㅡ 또 다시 보이지 않는힘에 조여들었다. 손이 본능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카일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앞을 보고 있었다. "못하겠다고 하면ㅡ" 주먹이 조금 더 단단히 쥐어졌다. 그림 하일드의 눈이 흔들렸다. 숨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될지ㅡ" 그가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알지?" 그 말은 위협이 아니라, 이미 겪어본 사실의 확인이었다. 그림 하일드의 눈가가 아주 미세하게 젖었다. 고개가 작게ㅡ 아주 작게 끄덕여졌다. "...네..." 겨우 나온 소리. 숨이 끊어질 듯 이어졌다. 카일의 주먹이 천천히 풀렸다. 그 순간ㅡ 조이던 힘이 사라졌다. 그림 하일드가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카일은 그 모습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괜히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다. "넌 하녀잖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는 다시 앞을 보았다. 고삐를 가볍게 당겼다. 말들이 속도를 조금 올렸다. 덜컹ㅡ 마차가 더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카일의 마지막 말이 떨어졌다. "실수하지 마라." 그림 하일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인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곳에 서 있다는 걸. "진정됐냐." 잠깐의 정적 후, 옆에서 아무렇지않게 떨어진 말. 그림 하일드는 대답을 해야하는지 잠시 망설였다. "...네." 결국 나온 건 짧은 한마디였다. 카일은 대답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삐를 쥔 손을 조금 더 조정했을 뿐이었다. 말들이 방향을 살짝 틀었다. 그리고ㅡ 다시 말했다. "잘 들어라." 목소리는 낮았고, 일정했다. 감정이 전혀 실려 있지 않은 톤. 그래서 더 거부하기 어려운 톤. "지금 당장 하라는 게 아니다." 짧은 정적. "기회를 보라는 거다." 그림 하일드는 고개를 더 숙였다. 말을 끊지 않겠다는 태도. 그대로 듣겠다는 자세. 카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침에 머리 손질할 때도 있고. 옷 갈아입을 때도 있고. 잠들었을 때도 있겠지." 하나하나ㅡ 가능한 상황을 짚듯이. "그 목걸이. 항상 목에 걸려 있는 건 아니다." 그림 하일드의 손이 떨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매일 아침, 거울 앞. 엘로이즈의 머리를 빗겨주던 순간들. 리본을 매던 손. 그리고ㅡ 목. 그 위에 항상 걸려있던 진주 목걸이. "..." 입술이 약간 움직였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카일은 그걸 다 보고 있었다. "너라면ㅡ"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옆으로 움직였다. 그림 하일드를 향해. "할 수 있다." 그 말은 칭찬이 아니었다. 그저 조건을 확인하는 말. 그림 하일드의 가슴이 한 번 크게 뛰었다. "그건.." 입이 열렸다. 아주 작게. 하지만 다시 닫혔다.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거절? 설명? 변명? 그 어떤 것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때, 카일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천천히 주먹이 만들어졌다. 그림 하일드의 숨이 다시 막혔다. "...!" 이번에는 신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목이 보이지 않는 힘에 눌렸다. 조금 전보다 더 정확하게. 더 익숙하게. 그녀의 손이 다시 올라갔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카일은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 눈도, 얼굴도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괜히 말 돌리지 마라."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시간 끌 생각도 하지 말고." 주먹이 조금 더 쥐어졌다. 그림 하일드의 눈이 흔들렸다. 숨이 끊어질 듯 흔들렸다. "너—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이미 봤잖아." 그 말은 설명이 아니었다. 확인. 그리고 경고. 그림 하일드의 고개가 아주 작게 끄덕여졌다. "...네..."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 그제야 카일의 주먹이 풀렸다. 힘이 사라졌다. 그림 하일드가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 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숨이 거칠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입을 다물었다. 소리를 줄였다. 다시 조용한 하녀로 돌아가기 위해. 카일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잘하네." 짧은 한 마디. 그 말이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만 하면 된다." 그는 다시 앞을 보았다. 고삐를 한 번 더 당겼다. 말들이 조금 더 속도를 냈다. 마차가 더 크게 흔들렸다. 덜컹— 그림 하일드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ㅡ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다. 끝까지ㅡ 무너지지 않으려 했다. 카일의 마지막 말이 조용히 떨어졌다. "잊지 마라." 짧은 숨. "넌— 이미 선택 된거다." 그 말 이후ㅡ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아까와 달랐다.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가 이미 결정된 뒤의 침묵이었다. 그림 하일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한 문장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아가씨...' 그리고 그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잠시 후. 마차는 저택 앞에서 천천히 멈췄다. 덜컹ㅡ 마지막으로 바퀴가 한 번 흔들리고, 말들이 고개를 낮췄다. 그림 하일드는 안장에서 내려섰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아주 잠깐 중심이 흔들렸지만 곧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마차 문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고, 숨을 한 번 고른 뒤— 문을 열었다. 덜컥. 안쪽의 어둠이 잠깐 드러났다. "아가씨, 마님."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먼저 귀족 부인이 몸을 내밀었다. 손을 가볍게 짚고 천천히 내려섰다. 검은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부드럽게 닿았다. 뒤이어 엘로이즈가 움직였다. 문가에 손을 짚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렸다. 햇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림 하일드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목. 진주 목걸이. 그녀의 눈이 아주 잠깐 멈췄다. 시선이 떼어지지 않았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했다. '...아가씨.' 숨이 얇게 이어졌다. '정말—' 말이 막혔다. 목 안쪽이 조여왔다. 그래도 이어갔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말은 완전히 속으로만 흘러갔다. 입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그때, 엘로이즈의 시선이 내려왔다. 그림 하일드를 향해. 잠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림 하일드?" 부드러운 목소리.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 닿는 톤. "너— 왜 그러니?" 그림 하일드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숨이 한 번 끊겼다. 그리고 바로 대답했다. "아—" 짧은 끊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은 빨랐고 조금 억지로 정리된 느낌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더 숙였다. 시선을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엘로이즈는 잠시 더 바라봤다. 그 얼굴을. 숨의 흐름. 말투. 아주 미세한 틈. 하지만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래." 짧은 대답. 그리고 시선을 거두었다. 그 순간ㅡ 옆에 있던 귀족 부인의 눈이 움직였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림 하일드를 향했다.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아이.작고, 조심스럽고, 자신을 최대한 지우고 있는 존재.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선. 얼굴의 윤곽. 눈의 위치. 자세. 부인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했다. '...이 아이.' 그녀의 시선이 조금 더 길어졌다. 관찰하듯. 재듯. '조금만 더—' 그 생각이 이어졌다. '조금만 더 맞추면...'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엘로이즈를 한 번. 그리고— 다시 그림 하일드를 한 번. '...우리 애처럼— 보일 수 있다.' 그 결론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녀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리고 다음 생각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더 낮고, 더 차갑게. '그럼—' 짧은 숨. '만약...' 시선이 아주 잠깐 멀어졌다. 과거를 스치는 듯. '누군가가—' 그 문장이 천천히 완성되었다. '우리 애를 또다시 암살하려 한다 해도—' 부인의 눈이 다시 그림 하일드에게 고정되었다. 고개를 숙인 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서 있는 아이. '...이 아이를—' 다시 짧은 정적. 그리고 완전히 굳은 결론. '우리 애로— 보이게 만들면.' 그 생각은 조용했지만,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미 계산이 끝난 사람의 눈이었다. 부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들어가자." 짧은 한마디. 엘로이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두 사람은 먼저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림 하일드는 한 박자 늦게 그 뒤를 따랐다. 고개를 숙인 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하지만 그녀의 뒤에서는, 또 다른 계획이 이미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쾅!! 번개가 밤하늘을 찢었다. 순간 모든 것이 하얗게 번쩍였다가,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돌. 무너져 내린 절벽 아래. 그 밑에 노파가 깔려 있었다. 숨이 가쁘게 끊어지고 있었다. "...하..." 갈라진 숨소리. 가슴 위에 얹힌 돌은 여전히 무거웠고, 몸은 더 이상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피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파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초점이 흐려졌다가, 다시 모였다. 그리고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마차. 묘지. 사과나무. 목걸이. 엘로이즈. 그리고 자신. 그 모든 장면들이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아가씨..." 입술이 떨렸다. 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만약...내가...' 숨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가슴이 눌린 채로 억지로 이어졌다. '그때...' 기억이 더 또렷해졌다. 그 때의 저택 앞. 마차. 진주 목걸이. 그리고 자신의 시선. '아가씨 대신...' 그 문장이 천천히 완성되었다. '내가 죽었다면...' 숨이 끊겼다.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랬다면...' 그 다음은 이어지지 못했다. 무언가가 목을 막았다. 말이 아니라, 감정이. 후회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이제 와서야 떠오른 선택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이 더 크게 떨렸다. 돌 위로 떨어진 빗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피와 섞였다. "...하..." 숨이 더 얕아졌다. '그랬다면...' 다시. 같은 문장. 같은 생각. 하지만 이번에는 끝까지 가지 못했다. 그녀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자신은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 못했다는 걸.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걸. 그 결과로 여기까지 왔다는 걸. 노파의 눈이 아주 천천히 감겼다가, 다시 떴다. 어둠이 더 가까워졌다. "...늦었..." 말이 부서졌다.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돌은 여전히 무거웠고, 숨은 점점 더 짧아졌다. 하지만 기억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또렷해지고 있었다.마굿간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희미한 등불이 흔들리고, 짚 냄새와 말들의 낮은 숨소리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퍼져 나갔다. 하인은 여전히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루시안은 낡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하지만 모자 아래에 가려진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사과나무만큼... 마력이 잘 스며드는 과일나무도 없지. 열매도. 껍질도. 뿌리조차도." 허공을 바라보며 조용히 이어갔다. "옛날부터 그랬다. 사과는.. 참 순순한 아이들이었지. 조금만 속삭여주면 아주 잘 자라주고, 아주 잘 물들어주니까." 그의 눈빛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산길. 후레지아. 사과나무라... 참 아름다운 조합이군." 그 순간, 루시안의 그림자 뒤편 어둠이 아주 잠깐 일렁였다. 마치 누군가가 웃는 것처럼. 일주일 후. 점심 햇살이 드 로베르 저택의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 현관 앞에는 이미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검은 말들이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었고, 하인들은 양옆으로 가지런히 서 있었다. 끼익. 현관문이 열렸다. 먼저 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갈한 외출복 차림으로. 그 뒤로 부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뒤. 엘로이즈와 클레르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엘로이즈는 오늘도 단정했다. 흑발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햇빛 아래에서 그녀는 조용하고 우아하게 부모를 바라보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어머니, 아버지. 잘 다녀오세요." 대신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역시 아주 옅게 미소지었다. "...그래. 오늘도 중요한 연회가 있어서..." 그녀는 장갑 낀 손으로 목걸이 끝을 살짝 만지며 말을 이었다. "...좀 늦을 거란다." "...네." 그 순간, 부인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클레르. 연한 노란빛 드레스를 입은 둘째 딸이 조용히 서 있었다. 평소처럼 들떠 뛰어나가지는 않았지만, 며칠 전처럼 풀이 죽은 얼굴도 아니었
그날 밤. 드 로베르 저택은 이미 깊은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복도에는 촛불 몇 개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창밖 정원은 달빛 아래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하인들의 발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저택 뒤편,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오래된 마굿간 쪽으로 한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망토를 깊게 눌러쓴 젊은 남자 하인. 그는 몇 번이고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는 최대한 죽여져 있었다. 끼익. 낡은 마굿간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안쪽에서는 희미한 등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른 짚 냄새. 낡은 나무 냄새. 그리고 말들의 낮은 숨소리. 남자 하인은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마굿간 안쪽 구석. 낡은 의자 하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허리가 굽은 늙은 마부. 해진 외투. 거칠게 갈라진 손. 깊게 눌러쓴 모자 아래로는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공기만큼은, 평범한 늙은이의 것이 아니었다. 카일 로웬의 아버지. 그리고 오래전부터 그림자 속에서 움직여 온 마법사, 루시안 로웬. 남자 하인이 낮게 고개를 숙였다. "...루시안 님." "말해라." "...다음 주에 후레지아 꽃을 꺾으러 산으로 간답니다." "...산으로." "예. 둘째 영애와 큰 영애 둘이서요." "...그래. 드디어 때가 왔구나. 꽃을 좋아하는 계집 아이들은... 늘 경계가 없지." "...그리고 마침, 그 산으로 가는 길에 사과나무를 심어놓기 좋은 장소가 있다고 합니다." "...사과나무." "예. 햇빛도 잘 들고, 땅도 꽤 깊다고 들었습니다."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자 아래 그림자 속에서, 그의 입가가 아주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사과나무. 그 단어가 마굿간 안에서 조용히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등불 불꽃이 다시 한 번 길게 흔들렸다. 루시안의 눈빛이 천천히 깊어졌다. "...그래. 좋군." 루시안은 천천히 몸을 뒤로 기대었다. 늙은 마부의 허름한 그림자 아래
엘로이즈는 끝까지 말을 끊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손이 굳어 있었다. 마침내 클레르의 떨리는 목소리가 다시 작게 이어졌다. "...언니. 정말... 어머니, 아버지도 나 싫어하시고...언니도 나 싫어할 거야?" "아니야." 엘로이즈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영애가.. 괜히 심술 부린거야." "아니야.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내 얼굴을 보고 웃어주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고.. 어머니도.. 항상 나만 보면 한숨 쉬셨고... 방금도 아버지가 나 조심성없다고 혼내신 것도..." "아니야." 엘로이즈가 조금 더 빠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두 분 다. 너가 걱정돼서 그러신거야. 네가 다칠까봐, 또 남들이 함부로 말할까봐. 그래서 엄하게 말씀하시는 거지." "...나. 그런 것도 모를 정도로 바보 아니야." 엘로이즈의 눈이 멈췄다. 클레르는 울먹이는 얼굴로 계속 말했다. "...사람이 진짜 좋아하는 사람 볼 때 어떤 눈 하는지는 나도 알아..."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식당 안 공기가 아주 조용히 가라앉았다. 엘로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울음을 참으려 애쓰는 동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아주 작게 밀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클레르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멈춰섰다. 클레르는 눈물을 훔치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순간, 툭. 엘로이즈의 손이 조용히 클레르의 어깨를 붙잡았다. 클레르의 몸이 아주 작게 움찔했다. "...클레르. 너 언니 눈 똑바로 봐."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언니 말 못 믿겠어?" 클레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게 젖어 있었다. 눈물 때문에 흐려진 시선 너머로, 엘로이즈의 얼굴이 보였다. 엘로이즈는 그런 동생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언니는 거짓말 안 해." 그녀가
엘로이즈는 잠시 말없이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금방 "죄송해요..."하고 웃어 넘겼을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클레르는 달랐다. 너무 조용했다. 엘로이즈의 시선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클레르..." 클레르의 어깨가 움찔했다. 엘로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걱정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푹 숙인 동생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신은 잠시 더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아이. 테이블 위에 번진 소스. 굳어버린 손끝. 그는 낮게 혀를 찼다. "쯧." 그리고 냅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밀며 낮은 소리를 냈다. 부인이 눈을 들었다. "왜, 더 안 드시고요?" "입맛이 없어졌소." 대신은 아무 말도 더 하지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무거운 발소리가 멀어졌다. 식당 안은 더 조용해졌다. 클레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포크를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고, 입술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클레르... 아버지 앞에서 그런 모습 보이면..." 말이 거기서 멈췄다. 클레르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큰 눈 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울음을 참고있는 얼굴.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부인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클레르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한숨에는 피곤함과 복잡한 감정이 함께 섞여 있었다. 부인은 결국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 위를 조용히 스쳤다. "...먼저 일어나마." 그녀는 잠시 두 딸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곧 문이 조용히 닫혔다. 덜컥. 이제 식당 안에는 엘로이즈와 클레르 둘만 남았다. 엘로이즈는 한동안 말없이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참고있는 동생. 평소처럼 밝게 웃지도 못하고, 포크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던 모습. 엘로이
덜컥. 살롱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다시 조용함이 내려 앉았다. 복도에는 늦은 오후의 햇빛만 길게 깔려 있었다. 클레르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방금 전 넘어졌던 자세 그대로. 작은 손에는 하얀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하녀가 다가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작은 아가씨. 괜찮으세요?" 하지만 클레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눈은 멍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이네스가 서 있던 자리. 부드럽게 웃던 얼굴. 다정했던 목소리. '언니분까지 영애를 창피해하시고, 싫어하게 되실지도 모르잖아요.' 그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클레르의 손이 떨렸다. "...아가씨?" 하녀가 다시 조심스럽게 불렀다. 클레르는 그제야 아주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손수건. 자기 손 안에 쥐어진 새하얀 천. 조금 전까지는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차갑게 느껴졌다. 손가락이 천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 꾸깃. 하얀 천이 손안에서 천천히 구겨졌다. 하녀의 얼굴이 더 굳었다. "...작은 아가씨, 어디 다치신 건 아니시죠?" "...진짜.." "...네?" "내가 진짜로... 언니를 창피하게 만들어?" "아가씨..." "내가 자꾸 뛰어다녀서... 말도 안 듣고... 그래서 언니도...나 싫어하게 되는 거야?"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작은 아가씨." 하녀가 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클레르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손수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까지 그렇게 신나게 뛰어다니던 아이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복도 창문 사이로 바람이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에 클레르의 금빛 머리카락 끝이 아주 약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손안에서, 하얀 손수건이 점점 더 작게 구겨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드 로베르 저택의 식당은 조용했다. 하인들이 벽 쪽에 조용히 서 있었고, 식당 안에는 나이프와 포크가 부딪히는 작은 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엘로이즈는 평소처
이네스는 아주 천천히 입가를 움직였다. "...괜찮아요." 미소였다. 완벽하게 단정하고, 부드럽게 만들어낸 귀족 영애의 미소. 이네스는 구겨진 소매를 가볍게 정리한 뒤, 천천히 클레르 쪽으로 다가갔다. 클레르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이네스는 그런 반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영애께서... 드 로베르 가문의 둘째 영애신가요...?" 이네스는 잠시 클레르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그녀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손수건을 꺼냈다. 하얀 손수건 끝이 클레르의 드레스에 묻은 먼지와 흙자국을 아주 천천히 털어냈다. 툭, 툭. 동작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이네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치진 않았나요, 영애?" "...네." 클레르는 눈을 깜빡이며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작게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무서워 보였던 얼굴이, 갑자기 너무 다정해진 탓이었다. 이네스의 입가가 아주 부드럽게 올라갔다. "다행이네요." 그녀는 여전히 손수건으로 드레스 끝을 정리해주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드 로베르 영애께... 동생분 이야기는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어요." "언니가요?" "네." 이네스는 미소지었다. "동생분이 참 착하고..." 손수건이 천천히 멈췄다. "...순수한 아이라고 하셨거든요." 그녀의 눈이 아주 천천히 클레르를 향했다. "정말 그런 것 같네요." 말은 다정했다.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나 친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미소를 보고 있으면 묘하게 숨이 막혔다. 이네스는 조금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앞으로는 조금 조심해서 다니셔야겠어요, 영애." 클레르의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이네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다치지 않으시려면요." 그 말에 클레르의 눈이 아주 살짝 커졌다. 이네스는 그
살롱 안에는 은은한 차 향이 퍼져 있었다.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는 작았고, 웃음소리도 지나치게 커지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귀족 영애들의 다과 시간. 하지만 왕의 양쪽 팔이라 불리는 두 가문의 외동딸이 마주 앉아 있는 이상, 이 자리는 단 한 번도 단순한 사교 모임이었던 적이 없었다. 엘로이즈 드 로베르. 그리고 재무대신 가문의 영애, 이네스 드 몽브랑. 두 사람의 대화는 언제나 부드러웠고, 언제나 우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늘 얇은 칼날 같은 긴장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같이 차를 마시러 온 다른 영애들은
저택 안.문이 열리자, 바깥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밀려왔다. 조용하고, 정돈되어있고,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유지된 공간.엘로이즈가 먼저 들어섰다. 걸음은 일정했고,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뒤를 귀족 부인이 따랐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그림 하일드가 문턱을 넘었다. 문이 닫혔다. 덜컥. 소리와 함께, 바깥의 일은 완전히 끊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세 사람 모두 잠시 말이 없었다. 하인들은 멀리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고, 복도는 여전히 정숙했다.귀족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엘로이즈."부드러운 목
쾅!!굵은 가지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짧게, 아주 짧게 엘로이즈의 목에 걸려 있던 진주 목걸이가 빛을 받았다. 햇빛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반응하듯, 한 점에서 번져 나오는 미세한 반짝임. 그 반짝임이 공기를 스쳤다. 그리고,툭. 가지의 낙하 궤도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정확히 머리 위로 떨어지던 것이 한 치 옆으로 어긋났다. 쾅!가지가 엘로이즈의 바로 옆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흙이 튀었고, 꽃잎 몇 장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엘로이즈!" 부인의 목소리가 터졌다. 그녀가
철문이 완전히 닫힌 뒤에도 마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여전히 고삐 위에 얹혀 있었고, 시선은 묘지 한쪽ㅡ 그림 하일드의 뒷모습이 사라진 방향에 머물러 있었다. 바람이 한번 스쳤다. 마른 풀들이 낮게 스쳤고, 철문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부는 그제야 고개를 조금 숙였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아무도 없는 쪽을 향해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괜히 겁줘서... 미안했다." 말은 조용했지만, 아까의 위협과는 전혀 다른 결이였다. "암살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면ㅡ" 잠깐 말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