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채원은 유명한 마성의 여인이었다. 붉은 입술은 늘 살짝 올라가 있었고, 눈 끝은 사람을 홀리는 듯했다. 한서준은 재벌가 최고의 후계자였다. 범접하기 어려운 고고한 존재, 금욕적이고 절제된 남자였다. 아무도 몰랐다. 이렇게 극과 극인 두 사람이 깊은 밤 마이바흐 뒷좌석에서 뜨겁게 얽히고, 자선 만찬의 화장실에서 미친 듯 서로를 탐하고, 개인 와이너리의 통유리창 앞에서 부둥켜안고 키스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의 관계가 끝난 뒤, 욕실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서채원은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서경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강시 그 곧 죽는다는 재벌 집 아들한테 액막이 결혼을 해줄 수는 있어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전화기 너머로 감추지 못한 기쁨이 터져 나왔다. “말해! 네가 결혼만 해준다면 무슨 조건이든 아빠가 다 들어주마!” “집에 가서 자세히 얘기할게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서채원은 전화를 끊고 몸을 일으켜 옷을 입으려다, 문득 한서준이 옆에 둔 노트북을 발견했다. 화면이 켜져 있었다. 가장 최근 메시지는 ‘수아’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여자에게서 온 것이었다. [서준 오빠, 천둥이 쳐서 너무 무서워...] 서채원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며 한서준이 걸어 나왔다. 물방울이 쇄골을 타고 흘러내렸고, 셔츠 단추 두 개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금욕적인 분위기 속에 나른한 섹시함이 배어 있었다. “회사에 일이 좀 생겨서 먼저 갈게.” 그는 외투를 집어 들며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채원이 붉은 입술을 살짝 올렸다. “회사 일이야, 아니면 첫사랑 만나러 가는 거야?”
View More서채원이 순종하는 법을 배운 건 감금된 지 27일째 되는 날이었다.더는 반항하지 않았다.단식도 그만뒀고, 가끔은 한서준에게 웃어주기까지 했다.처음엔 한서준도 경계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녀가 정말 체념했다고 믿기 시작했다.“오늘은 뭐 먹고 싶어?”어느 아침, 넥타이를 매던 한서준이 침대 옆에서 물었다.서채원은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있었다. 긴 머리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서준 씨가 만든 거.”한서준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눈빛에 놀라움이 스쳤지만 곧 미소로 바뀌었다.“좋아.”바로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오랜만에 긴장이 풀린 듯한 뒷모습이었다.서채원은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재빨리 이불을 걷어냈다.그리고 침대 매트리스 아래 숨겨둔 초소형 컴퓨터를 꺼냈다.지난주 한서준의 서재에서 몰래 훔쳐 온 것이었다.빠르게 코드를 입력한 뒤 키보드를 쉴 새 없이 두들겼다.섬의 보안 시스템이 조용히 해킹되고, 암호화된 구조 요청 신호가 외부로 전송됐다.사흘 뒤, 깊은 밤.서채원은 절벽 끝에 서 있었다.거센 바닷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치맛자락을 거칠게 흔들었다.뒤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심태현이 사람들을 데리고 도착한 것이다.“누나!”창백한 얼굴로 서채원에게 달려왔다.“나랑 같이 가!”뒤쫓아오는 경호원들을 힐끗 바라본 서채원은 말없이 웃었다.“태현아, 너 고소공포증 있어?”심태현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서채원은 그의 손을 잡고 그대로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아래에는 거센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지만, 절벽 벽면에는 그녀가 미리 확인해둔 발 디딜 곳이 있었다.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던 경호원들은 두 사람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파도가 바위에 세차게 부딪혔다.온몸이 흠뻑 젖은 서채원과 심태현은 힘겹게 해안 위로 기어 올라왔다.“빨리 가자!”심태현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보트 쪽으로 달리려는 순간, 강렬한 조명이 두 사람을 비췄다.한서준이 해안가에 서 있었고, 그 뒤로 수십 명의 경호원이 늘어서
한성 그룹 업무가 너무 많이 밀린 탓에 한서준은 결국 직접 돌아가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개인 섬의 황혼, 한서준이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서채원은 통유리창 앞에 서서 수평선 너머 마지막 햇빛이 사라지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가정부가 조심스럽게 들어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내려놓았다.“사모님, 조금이라도 드세요.”서채원은 움직이지 않은 채 물었다.“그 사람 언제 돌아온대요?”“한 대표님께서 회사 일 처리 끝나면 바로...”쨍그랑!유리컵이 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우유가 바닥에 쏟아져 카펫에 흰 얼룩이 졌다.“전 사모님이 아니에요.”서채원이 차갑게 웃었다.“나가요.”가정부는 겁에 질려 황급히 물러났다.서채원은 몸을 숙여 가장 날카로운 유리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같은 시간.북강시, 한성 그룹 본사.회의실에서 한서준은 상석에 앉아 임원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하지만 손끝은 무의식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화면에는 어젯밤 받은 CCTV 화면 캡처가 떠 있었다.서채원이 해변에 서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그 뒷모습은 금방이라도 바닷바람에 흩어질 듯 위태로웠다.“한 대표님? 이 인수합병 건은...”“연기해.”한마디 한 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차 준비해. 공항으로 갈 거야.”비서가 당황했다.“하지만 이사회가...”“어서.”헬기장.한서준은 전용기가 막 착륙하자마자 곧장 계단을 내려왔다.사흘 동안 못 본 탓에 서채원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한 대표님, 선물 전부 준비됐습니다.”뒤따라오던 비서가 정교한 선물 상자들을 들고 말했다.“말씀하신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랑, 사모님께서 좋아하시는...”“채원이는?”한서준이 말을 끊었다.“안, 안방에 계십니다...”가정부의 머뭇거리는 태도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한서준은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그러더니 곧장 별장 안으로 달려갔다.안방.쾅!문이 거칠게 열렸다.서채원은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손목에는 선명한 상처가 나 있었
개인 섬, 새벽.헬리콥터가 섬 중앙 헬기장에 착륙했다.프로펠러 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이내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만 남았다.서채원은 한서준의 품에서 내려오자마자 그를 세게 밀어냈다.“이건 불법 감금이야.”경멸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바닷바람에 웨딩드레스 자락이 거세게 흔들렸다.“한 대표도 이런 치졸한 짓을 할 줄은 몰랐네.”하지만 한서준은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피식 웃었다.“그래서?”손을 들어 서채원의 뺨을 쓸었다.손끝은 차가웠지만 눈빛은 뜨겁게 타올랐다.“채원아, 넌 내 거야. 이번 생엔 절대 다른 남자한테 시집 못 가.”별장 안, 한서준이 그녀를 데리고 섬 전체를 보여줬다.“여기 있는 모든 게 다 네 거야.”통유리창을 열자 짠 바다 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콧속에 스며들었다.“정원도, 수영장도, 도서관도... 심지어 저 바다까지.”하지만 서채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돌아갈래.”“채원아, 이전 일들은 다 잊어.”한서준이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턱을 그녀의 머리 위에 댄 채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다시 시작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그의 품에서 벗어나 뒤돌아선 서채원은 차갑게 웃었다.“한서준, 정신 좀 차려! 스스로에게 좀 솔직해지란 말이야!”순간 온몸이 굳은 한서준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채원아... 모든 걸 예전으로 돌려놓을 거야. 우리 사이도, 너도.”그 뒤로 한서준은 거의 미친 사람처럼 그녀에게 잘했다.맨발로 해변을 걸었더니 다음 날 북유럽에서 공수한 부드러운 백사장이 해안 전체에 깔렸다.한밤중 잠에서 깨자 침대 머리맡에는 달빛처럼 은은한 조명이 놓여 있었다.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지키고 있는 한서준은 눈가에 아직도 핏발이 서 있었다.무심코 망고가 먹고 싶다고 말하면 다음 날 망고나무 한 그루가 통째로 섬으로 옮겨와 정원에 심어졌다.서채원도 이런 한서준의 모습을 처음 봤다.다정하고, 그녀에게 집착하며 끝없이 그녀를 감쌌다.그래서 아주 잠깐 흔들렸다.만약 한서준이 예전에
결혼식 전날, 심씨 가문의 개인 저택.서채원은 신부 대기실 화장대 앞에 앉아 웨딩드레스 위에 박힌 작은 다이아몬드들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따뜻한 창밖 햇살을 맞으며 저택 안에서는 고용인들이 내일 있을 결혼식 준비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바라봤다.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그때 누군가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누나?”심태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한 손에는 따뜻한 장미 홍차가 담긴 찻잔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고급스러운 벨벳 상자를 들고 있었다.몸에 딱 맞는 검은 슈트를 입고 있었지만 셔츠 깃이 살짝 풀려 있어 우아하면서도 캐주얼한 느낌이 잔뜩 풍겼다. 금테 안경 너머의 눈빛은 믿기 어려울 만큼 다정했다.“아침 거의 안 먹었지?”심태현은 따뜻한 홍차를 그녀 손 옆에 내려놓으며 살짝 난처한 듯 말했다.“주방에서 그러는데 우유도 반 컵밖에 안 마셨다고?”서채원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심 대표, 설마 나 혼내려고 온 거야?”“그럴 리가.”심태현이 몸을 숙여 벨벳 상자를 서채원에게 건넸다.“그냥 누나 배고플까 봐.”상자를 열자 안에 정교한 초콜릿 몇 개가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예전에 누나가 이 가게 초콜릿 좋아했다는 얘길 들었어.”심태현이 조용히 말했다.“스위스에서 직접 공수했어.”서채원은 잠시 멍해졌다.이런 사소한 취향까지 알아봤을 줄은 몰랐다.막 입을 열려는 순간, 저택 전체에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무슨 일이야?”심태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즉시 이어폰을 눌렀다.“보안팀, 무슨 상황이야?”이어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심 대표님! 시스템이 해킹당했습니다! 모든 감시 카메라랑 출입 통제가 전부 먹통입니다!”얼굴이 순식간에 굳은 심태현은 돌아서서 서채원에게 말했다.“누나, 여기 있어. 절대 움직이지 마.”빠른 속도로 방을 나간 뒤 복도에서는 심태현의 차가운 명령이 들려왔다.“출구 전부 봉쇄해!”하지만 서채원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스위트룸
서채원은 떨리는 손으로 서경진에게 전화를 걸었다.“다신 연락 안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서경진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부녀 관계 단절 합의서는 이미 보냈다. 이제 곧 월말이니까 오늘이든 내일이든 꼭 남강시로 가야 해!”“하나만 물어볼게요.”서채원의 목소리는 쉰 듯 갈라져 있었다.“처음에 절 한서준한테 맡긴 거, 아빠였어요? 아니면 그 사람이 먼저 원한 거예요?”“그걸 왜 물어?”“말해요!”서경진은 잠시 침묵했다.“한서준이었어. 성남 프로젝트랑 바꿨지. 어차피 넌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났는데 서로 좋았잖아.”그
서채원은 말없이 천장만 바라봤다.그 모습에 한서준의 가슴속에서 이유 모를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막 입을 열려던 순간, 간호사가 급히 들어왔다.“한 대표님, 임수아 씨가 또 아프다고 하세요...”“혼자 잘 생각해 봐.”한서준은 몸을 돌려 나갔다.“다시는 사고 치지 말고.”그 후 서채원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졌다.임수아는 매일 한서준이 자신을 돌봐주는 사진을 보내왔지만,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퇴원하는 날, 임수아가 직접 병실로 찾아왔다.“언니는 3일 만에 퇴원하네?”그러면서 붕대를 감은 오른손을 흔들었다
처절한 비명이 연회장 전체에 울렸다.임수아의 손에서 분수처럼 터져 나온 피가 서채원의 새하얀 치맛자락에 튀자 마치 붉은 꽃이 피어난 것 같았다.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하지만 서채원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차가운 시선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안 좋은 모습 보여드렸네요. 우리 엄마 일찍 돌아가셔서 아무도 가르쳐준 사람이 없거든요. 그래서 저는 원한이 생기면...”칼을 뽑자 피가 얼굴 위로 튀었다.“그 자리에서 바로 갚아요.”임수아의 울음소리가 경매장 전체를 뒤덮
무표정하게 자리에 앉은 서채원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정면의 경매대를 바라봤다.경매가 중반에 접어들 때까지도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한참 후 경매사가 벨벳 트레이 위 붉은 천을 걷어내자 서채원이 그토록 찾던 진주 목걸이가 스포트라이트 아래 은은한 빛을 띠며 모습을 드러냈다.순간 동공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눈빛이 흔들렸다.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서채원의 엄마는 늘 그 목걸이를 하고 연회에 참석하곤 했다.가느다란 목덜미에 닿은 진주가 우아한 걸음에 따라 살짝살짝 흔들리던 모습... 마치 부드러운 달빛 같았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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