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최준혁의 시점.오늘은 오후부터 지방 본사에서 중요한 미팅이 잡혀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사무실 업무를 마무리한 나는 운전기사가 공항까지 태워준 차에서 내린 뒤, 빠른 걸음으로 탑승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공항은 사람들로 붐볐다. 오가는 관광객들 사이를 헤치며 걷던 중, 문득 비스듬한 앞쪽에서 몇 명의 정장 차림 여성들이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단정하게 올려 묶은 머리와 꼿꼿하게 허리를 편 아름다운 자세. 북적이는 공항 로비에서도 마치 그 공간만 따로 떼어낸 듯 우아했고,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아니, 단순히 옷차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해인이 다도 교실 강사로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길거리에서 정장 차림의 여성을 볼 때마다 혹시 서해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심장이 먼저 뛰었고,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하곤 했다. 이혼한 지 벌써 십 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내 머릿속은 여전히 서해인으로 가득했다. '해인도... 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건 아닐까......' 매일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처럼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희미한 기대를 품고 곁눈질로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 눈을 한 번 깜빡인 뒤 다시 바라봤다. ……착각이 아니었다. 연한 연둣빛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서해인이 몇몇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서해인은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에 푹 빠져 있었는지 내가 보내는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이따금 손을 입가에 살짝 가져다 대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부드럽게 피어나는 미소는 우리가 행복했던 결혼 생활을 하던 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동시에, 이제는 더 이상 그녀가 내 곁에 없다는 외로움이 함께 밀려왔다. 주변 여성들의 분위기를 보니 아마 다도 교실
최준혁의 시점.“그 사람을 원망하느냐…… 인가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원하정은 힘없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시 먼 곳을 바라보듯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응시했다. 그 옆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묘한 놀라움을 느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탁하게 가라앉은 원망도, 새까맣게 응어리진 집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미 그녀에게 '아주 먼 과거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팽팽한 삶 속에서 그 존재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조용히 마음속에 묻어둔 듯했다. “최 회장님과는 서로의 의지로 헤어졌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요. 당시에는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당함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분의 뜻이 아니라 가문의 결정이었어요. 저는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까, 최 회장님 개인을 원망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다르네요. 굳이 말하자면…… 나는 '운명' 그 자체를 몹시 원망하고 미워했죠.” “운명…… 말입니까?” “그래요.” “특정한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해 봤자 결국 닳아 없어지는 건 자기 자신 뿐이에요. 설령 복수에 성공해서 그분이 새로운 사람과 행복해지지 못했다고 해도, 그분이 제게 돌아오는 건 아니잖아요. 결국 또 다른 최 씨 가문이 원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뿐이겠죠. 그런 허망한 증오에 제 자신을 태우는 건…… 비참하고, 허무할 뿐이에요.” 마치 모든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담담하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는 거짓도 꾸밈도 느껴지지 않았다.나는 오늘 이곳에 오기 전까지 원하정이 신우석과 깊게 연결되어 있으며, 최 씨 가문을 향한 집요한 공격도 그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속마음을 직접 듣고 보니, 이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이 이제 와서 신우석까지 이용하며 최 씨 가문을 상대로 복수를 꾸밀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신우석은 사모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알고 있습
최준혁의 시점.“'투자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이 아니라, 시장 규모가 훨씬 큰 미국에서 경제와 투자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한 우석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국을 떠나 미국 대학으로 유학을 갔죠.”원하정은 이야기를 마치고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손에 들고 있던 찻잔으로 시선을 내렸다.“대학 유학을 계기로 그 아이가 이 별채를 떠난 뒤의 일은 저도 잘 몰라요. 소문으로는 한국에 돌아와 자신의 법인을 몇 개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고, 곧 그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매각한 뒤 이번에는 미국의 대형 투자펀드에 입사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어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제가 그 아이의 상황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은 경제 매체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한 이후부터였어요. 그러니까…… 나도 최 사장과 비슷한 정도의 정보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아요.”“……그래도 사모님과 그는 거의 열 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같은 저택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으셨습니까?”내가 떠보듯 묻자 원하정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후후, 최 사장. 우리는 피가 이어진 부모 자식도 아니고, 가족관계등록부상으로도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같은 저택에서 살았고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가까웠을 뿐, 서로의 근황을 일부러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어요. 우석이도 마찬가지였어요. 유학을 간 첫해에 단 한 번 생일 축하 메일을 보내 준 것이 전부였고, 그 이후로는 아무 연락도…….”원하정의 말에서는 거짓이나 모순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지금 말하지 않았을 뿐, 두 사람 사이에는 메일이나 전화 같은 단순한 연락 수단을 넘어서는, 더 깊은 정신적인 연결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함께 살던 시절에는 독서 말고도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저택에 오기 전 이야기나 친구들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었나요?” “……최 사장,
원하정의 시점.그날 이후 신우석은 더 이상 자신의 불우한 처지만 원망하며 인생을 비관하는 아이가 아니었다.어떻게 하면 자신을 버린 친어머니와, 자신을 짐짝 취급한 아버지, 그리고 본채에 있는 할아버지들에게 자신을 증명할 수 있을지.그러기 위해 지금의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그 아이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선실에서 가정부들과 있었던 그 사건 이후, 신우석은 완전히 나에게 마음을 연 것 같았다.주변에 사람이 없는 시간을 골라 내게 자주 찾아와 이것저것 열심히 말을 걸기 시작했다.“사모님…… 지금 뭐 읽고 있어요?”“이거? 비즈니스 관련 책이야. 세계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시장이 어떤 사이클로 움직이는지에 대해 쓰여 있는 책이지.”“경제? 사이클……?”“그래. 경제와 정치의 흐름을 제대로 아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단다.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지식을 쌓아 두면, 그건 앞으로 살아가면서 분명 큰 자산이 될 거야.”아직 열 살짜리 아이에게는 어려운 내용이었겠지.신우석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분명한 흥미를 보였다. 그 뒤에도 이것저것 탐욕스럽게 파고들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 아이는 누구보다 호기심이 많았다. 한 번 궁금한 것이 생기면 끝까지 그 본질을 파헤치려는 성향을 가진 아이였다.그 날카로운 탐구심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묘하게 재미있기도 했고, 든든하기도 했던 나는 제 책장에서 비즈니스 서적 한 권을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이건 네게 줄게. 어려운 용어나 수식도 많겠지만, 읽을 수 있다면 한번 읽어 보렴.”“……사모님, 정말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감사합니다!”신우석은 푸른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고, 마치 보물이라도 얻은 사람처럼 두꺼운 책을 소중히 품에 안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아무리 그래도 어른을 대상으로 쓰인 책이니 금세 포기하겠지.나는 그렇게 생각했다.그래서 며칠 뒤 서점에 들렀을 때 중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
원하정의 시점.내가 복도를 지나가던 때였다. 식당 안쪽에 있는 배선실에서 쨍그랑하고 값비싼 도자기가 산산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가정부들의 날카로운 고함이 들려왔다. “뭘 하는 거니!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깜짝 놀라 안을 들여다보니, 바닥에 흩어진 고급 수프 접시 파편 앞에서 겁에 질린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신우석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의 작은 배에는 뜨거운 수프가 그대로 쏟아져 옷이 흠뻑 젖어 있었고, 김까지 피어오르고 있었다. “죄송해요…… 배가 고파서, 도와드리려고…….” 신우석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목소리로 사과했지만, 가정부장은 아이의 화상은 안중에도 없는 듯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차갑게 내뱉었다. “도와준다고? 웃기지 마세요. 본채 사모님들께서 쓰시는 귀한 식기에 너 같은 더러운 손을 대지 마. 불륜 끝에 태어난 너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불명예스러운 일이야. 더 이상 우리를 귀찮게 하지 말고, 얼른 여기부터 치운 뒤 방으로 돌아가!” 가정부들은 우석이에게 걸레를 던져 주더니, 화상으로 붉게 달아오른 아이의 손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서둘러 배선실을 나가려 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나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와, 그보다도 지금까지 이런 광경을 묵인해 온 나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감에 휩싸였다. 그 아이의 모습은 아이를 낳지 못했고, 남편마저 잃어 가문에서 마치 대형 폐기물처럼 취급받던 내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거기까지 하세요.” 나는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배선실 안으로 들어섰다. 가정부들은 놀라 뒤돌아보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사모님……! 이건, 도련님이 멋대로…….” “조용히 하세요.” 나는 그들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당신들의 직무 태만과 이 저택의 주인인 나에 대한 무례, 모두 본채 회장님께 보고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이 저택에서 나가세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한 치의 여지도 없는 내
최준혁의 시점. “최 사장, 나는 우석이를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아이의 행방을 물으셔도 정말 아는 것이 아무것도…….” “옛날이야기라도 괜찮습니다. 사모님과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말입니다. 친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의지할 가족마저 잃은 그에게 사모님은 분명 큰 존재였을 겁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사모님이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들려주십시오.” 내가 진지한 눈빛으로 거듭 부탁하자, 원하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옆모습에는 자조 섞인 옅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미안해요. 우석이에 대해 그렇게까지 알고 싶어 하며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라서요…….”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는 그 가문의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본채와 건물은 달랐지만 같은 부지에서 살고 있었음에도 다른 친척들이나 사용인들은 모두 그 아이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대했죠.”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차분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길어질 수도 있지만, 그 시절 우석이에 대해 얘기할게요.” 원하정은 찻잔을 들어 호박빛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원하정의 시점.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남편을 잃고 아이도 갖지 못해 가문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나는 홀로 별채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런 내게 신우석이라는 소년이 맡겨진 것은 그 아이가 열 살이 되던 봄이었다. “사모님, 소개해 드릴 분이 있습니다. 지금 잠시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본채에서 파견 나온 집사장의 부름을 받고 읽고 있던 책을 덮은 뒤 방을 나서자, 그곳에는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아이가 홀로 서 있었다. 살짝 곱슬거리는 금발과 빨려 들어갈 듯 맑은 푸른 눈동자.지금의 건장한 모습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당시 그 아이는 왜소했고 병색이 돌 정도로 몹시 말라 있었다.“오늘부터 이 별채에서 생활하게 되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