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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신청했습니다

죽음을 신청했습니다

By:  루루Kumpleto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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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임 씨, S국 조력사망 기관입니다. 12월 25일 예약된 절차를 본인이 직접 신청하신 게 맞으실까요?] 강하임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네.” [확인되었습니다. 심사는 통과되셨고, 남은 보름 동안 필요한 주변 정리를 마치시면 됩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안방 문이 열렸다. 양수원이 찬 바깥 공기를 묻힌 채 들어왔다. 강하임을 보자 정성스럽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생일 축하해.” 강하임은 희미하게 웃었다. “내 생일은 어제였어.” 양수원은 잠시 말을 잃었다. 미안함과 당혹감이 뒤섞인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미안. 요즘 일이 너무 바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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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banata 1

제1화

말을 마친 양수원은 쪼그려 앉아 강하임의 종아리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은 어때? 다리는 불편하지 않아?”

힘이 너무 들어간 탓에 길고 곧은 손가락이 붉어졌고,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는 마사지하는 손길과 힘 조절은 익숙했다.

하지만 강하임은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대답이 없자 양수원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을 꺼내려던 순간,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반가움이 스친 얼굴이었다.

목 끝까지 차올랐던 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곧장 일어나 서재 쪽으로 향하며 한마디만 남겼다.

“일 때문에 잠깐 처리할 게 있어. 이따가 다시 주물러 줄게.”

강하임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양수원이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남편의 모습이 문밖에서 사라진 뒤에도, 강하임의 머릿속에는 방금 양수원이 숨기지 못했던 웃음이 오래 남았다.

‘일 때문이라면 저렇게 웃을 수 있어?’

‘저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온 듯한 기쁜 표정은... 좋아하는 사람을 대할 때 나오는 것 아닌가?’

강하임은 양수원의 그런 웃음을 예전에 수도 없이 보았다.

고등학교 때마다 아침이면 강하임은 우유를 급히 마시고 집을 내려갔다.

고개를 들면 늘 그렇게 웃고 있는 양수원이 보였다.

그는 웃음을 머금은 채 다가와 무거운 책가방을 받아 들고, 자전거에 그녀를 태워 학교로 향했다.

그때 두 사람은 18살이었다. 아직 어려서 풋풋했고, 모든 것이 빛났고, 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두 사람은 흔한 청춘소설의 한 장면처럼 자연스레 서로에게 마음을 주었다.

학교와 부모님 몰래 연애를 시작했고, 같은 대학에 합격한 뒤 당당하게 연인임을 밝히자고 약속했다.

서로를 다독이며 공부했고, 결국 두 사람은 높은 성적으로 나란히 같은 명문대에 들어갔다.

모든 것은 그곳에서 아름답게 이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사고가 났다.

입학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두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했고, 위험이 덮쳐 오던 때 강하임은 가장 먼저 양수원을 밀쳐내서 구했다.

그날 양수원은 무사했지만, 강하임은 두 다리를 잃었다.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왔다.

같은 해, 강하임의 부모님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강하임은 연이어 닥친 충격을 견디지 못했고, 그 뒤로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양수원은 그런 그녀를 몹시 안쓰러워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청혼했다.

그는 평생 강하임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결혼 후, 3년 동안 양수원은 정말 그렇게 살았다.

보름 전, 강하임이 남편의 일기장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던 남편은, 일기장 속에서 늘 고통을 토해 내고 있었다.

양수원은 이런 내용을 썼다.

강하임에게 청혼한 이유가 사랑만은 아니었다고.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과, 그러지 않으면 모두에게 비난받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숨이 막혔다고.

강하임 곁에 머무는 매분 매초가 견디기 힘든 시간이라고.

심지어 이런 말까지 썼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차라리 강하임이 자신을 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차라리 자신이 평생 휠체어를 탔더라면 이렇게 무거운 죄책감은 없었을 것이라고.

또한, 강하임 몰래 한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그 여자의 이름은 예나혜였다.

뜨겁고, 밝고, 눈부신 여자.

사고가 나기 전의 강하임을 꼭 닮은 여자라고.

다음 날, 강하임은 예나혜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강하임 씨, 수원 오빠한테 들었어요. 하임 씨 다리, 평생 불구라면서요? 그렇게 오래 알고 지냈으면 이제 오빠 좀 놓아줄 때도 되지 않았어요?]

[모르죠? 강하임 씨 때문에 오빠가 매일 너무 힘들대요. 죽고 싶을 만큼요. 그런데 죽지도 못해요. 강하임 씨를 돌봐야 하니까 억지로 웃고 사는 거예요. 그런 인생, 너무 불쌍하지 않아요?]

[저를 안 만났으면 오빠는 언젠가 정말 무너졌을지도 몰라요. 미안한 마음 안 들어요? 저는 오빠가 너무 안쓰러워요.]

[지금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은 저예요. 제발 더 붙잡지 말고 이혼해 주세요. 우리 좀 놓아달라고요!]

곧이어 예나혜는 두 사람이 다정하게 붙어 있는 사진을 십여 장이나 보내왔다.

사진마다 양수원이 있었다.

그는 웃으며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예나혜가 셀카를 찍자 장난스럽게 다가와 손가락 브이를 올렸다.

그는 새우 한 접시를 전부 까서 예나혜 앞에 놓아주고, 손가락에 묻은 양념까지 닦아주었다.

그는 바닷가에서 예나혜의 발자국을 따라 걷다가, 환하게 웃으며 소라를 한 가득 가져다주었다.

사진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강하임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이라는 말도 모자랐다.

하지만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남은 것은 텅 빈 눈뿐이었다.

강하임은 답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나혜는 멈추지 않았다.

그 뒤로도 매일 새로운 일상을 보내왔다. 사진마다 저장된 시간이 워터마크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11월 21일, 두 사람은 해 질 녘 공원을 함께 걸었다.

11월 26일, 두 사람은 도예 공방에 가서 함께 꽃병을 만들었다.

12월 1일, 두 사람은 콘서트를 보러 갔고 음악과 미래에 대해 오래 이야기했다.

...

사진 속 시간은 모두 양수원이 야근한다고 전화했던 시간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어제, 강하임의 생일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집에서 하루 종일, 밤새 남편을 기다렸지만, 양수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오지 않은 이유는 예나혜와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예나혜가 보낸 사진을 보던 그 순간, 강하임은 웃다가 끝내 눈물을 흘렸다.

18살의 양수원은 18살의 강하임을 그렇게 뜨겁게 사랑했다.

하지만 25살의 양수원은 25살의 장애를 입은 강하임을 더는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그날 밤, 강하임은 창가에 앉아 밤을 새웠다.

다음 날 해외 조력사망 기관에 자료를 제출해 자신의 생을 끝내기 위해 신청서를 냈다.

‘양수원, 나한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너밖에 없었어.’

‘그런데 너는 나를 피하고 싶은 짐처럼 여겼지.’

‘그러니 나는 너를 놓아줄게.’

‘나도... 나 자신을 놓아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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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Kabanata
제1화
말을 마친 양수원은 쪼그려 앉아 강하임의 종아리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오늘은 어때? 다리는 불편하지 않아?”힘이 너무 들어간 탓에 길고 곧은 손가락이 붉어졌고,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그는 마사지하는 손길과 힘 조절은 익숙했다. 하지만 강하임은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대답이 없자 양수원이 고개를 들었다.무슨 말을 꺼내려던 순간,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반가움이 스친 얼굴이었다.목 끝까지 차올랐던 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그는 곧장 일어나 서재 쪽으로 향하며 한마디만 남겼다.“일 때문에 잠깐 처리할 게 있어. 이따가 다시 주물러 줄게.”강하임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양수원이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남편의 모습이 문밖에서 사라진 뒤에도, 강하임의 머릿속에는 방금 양수원이 숨기지 못했던 웃음이 오래 남았다.‘일 때문이라면 저렇게 웃을 수 있어?’‘저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온 듯한 기쁜 표정은... 좋아하는 사람을 대할 때 나오는 것 아닌가?’강하임은 양수원의 그런 웃음을 예전에 수도 없이 보았다.고등학교 때마다 아침이면 강하임은 우유를 급히 마시고 집을 내려갔다. 고개를 들면 늘 그렇게 웃고 있는 양수원이 보였다. 그는 웃음을 머금은 채 다가와 무거운 책가방을 받아 들고, 자전거에 그녀를 태워 학교로 향했다.그때 두 사람은 18살이었다. 아직 어려서 풋풋했고, 모든 것이 빛났고, 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두 사람은 흔한 청춘소설의 한 장면처럼 자연스레 서로에게 마음을 주었다.학교와 부모님 몰래 연애를 시작했고, 같은 대학에 합격한 뒤 당당하게 연인임을 밝히자고 약속했다.서로를 다독이며 공부했고, 결국 두 사람은 높은 성적으로 나란히 같은 명문대에 들어갔다.모든 것은 그곳에서 아름답게 이어질 줄 알았다.하지만 사고가 났다.입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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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강하임은 거실에 혼자 오래 앉아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휠체어를 밀고 서재 앞까지 가서 문을 두드렸다.양수원은 급히 전화를 끊고 나왔다.“여보, 내가 자기 생일을 잘못 기억했잖아. 곧 우리 결혼 3주년이니까 같이 축하하자. 어디 가고 싶어? 자기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같이 갈게.”강하임은 그를 한 번 바라보고 낮게 말했다.“S국. 가서 첫눈을 보고 싶어.”그 말을 들은 양수원의 눈빛에 의아함이 스쳤다.“첫눈? 한 달만 기다리면 여기에도 눈 올 거야. 집에서 기념하자. 자기가 움직이기도 불편한데 굳이 그렇게 멀리 갈 필요 없잖아.”강하임은 고개를 저었다. 드물게 남편의 제안을 거절했다.‘내 삶은 이제 15일밖에 안 남았어. 한 달을 기다릴 수 없지.’그녀가 물러서지 않자 양수원도 더 말하지 않았다. 곧바로 크리스마스에 S국으로 가는 항공권을 예매했다.강하임은 그가 결국 허락할 것을 알고 있었다.이유는 단순했다. 일기장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예나혜와 데이트하고 돌아온 날마다, 양수원의 죄책감은 더 짙어졌고 그는 어떻게든 강하임에게 보상하려 했다.강하임은 핸드폰을 꺼내 시계 앱을 열고, 타이머 하나를 설정했다. 이름은 이렇게 붙였다.‘죽음까지 남은 시간’이었다.항공권을 예매한 뒤, 양수원은 다정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목소리에는 강하임을 다 받아 주겠다는 듯한 부드러움이 묻어 있었다.“크리스마스에 S국으로 가는 표, 끊어 뒀어.”강하임은 남자의 시선이 자신의 핸드폰 위를 스치고도 그냥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수긍하는 것을 보고 양수원도 마음을 놓은 듯 욕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강하임은 작게 웃었다.예전의 양수원은 그녀가 무엇을 하든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들이밀고 이것저것 물었다. 어떻게든 강하임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지금 강하임의 핸드폰에는 이렇게 크게 죽음까지 남은 시간이 떠 있었다. 그리고 눈길이 분명 닿았는데도, 양수원은 알아보지 못했다.‘역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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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다음 날, 강하임은 아주 일찍 일어났다.양수원은 10시가 되어서야 깼다. 이어 안방에서 나와 아내가 식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쓰는 모습을 보고,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노트에는 빼곡하게 글자가 적혀 있었다. 양수원은 한 줄씩 훑어보다가 그것이 오늘 강하임이 할 일들의 목록이라는 걸 알아차렸다.[첫 번째, 본가에 한 번 간 후, 친구들을 만나기.][두 번째, 호숫가에 가서 비둘기 먹이 주기.][세 번째, 술집에 가서 한 번 취해 보기.][...]“이런 건 왜 적고 있어?”강하임은 펜을 쥔 손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버킷 리스트.”그 말을 듣자 양수원은 무언가 떠올린 듯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너 17살 때도 버킷 리스트를 썼었잖아.”말은 중간에서 끊겼고, 그 표정에는 뒤늦은 후회가 번졌다.강하임은 알았다. 양수원은 자신이 옛일을 꺼내 그녀를 아프게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하지만 이제 강하임은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먼저 말을 이어받았다.“맞아. 그때는 18살이 되기 전에 하고 싶은 백 가지를 썼지. 번지점프도 하고, 스키도 타고, 래프팅이랑 서핑도 해 보고...”“하나같이 무모한 것들이었어. 그런데 너는 나보다 더했지. 전부 기록해 주고, 나랑 같이 다 해 봤잖아.”그리운 말투를 듣자 양수원의 머릿속에도 오래된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는 웃었다.“내가 그만큼 너를 좋아했으니까. 네가 뭘 하든 따라가고 싶었어. 그땐 네가 옆에 있으면 아무것도 겁나는 게 없었거든. 눈 감고 몇백 미터 위에서 뛰어내릴 수 있을 정도로...”강하임은 들뜬 표정으로 말하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양수원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와 그녀에게 닿았을 때, 강하임은 문득 엉뚱한 말을 했다.“이렇게 즐겁게 웃는 너... 정말 오랜만에 봐.”양수원의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는 곧 화제를 돌렸다.“이번 리스트들도 내가 같이 해 줄까?”강하임은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고집이 있었다.“내 소원이야. 너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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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그 뒤 며칠 동안 양수원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출장중이라는 메시지만 하나 보냈다.대신 예나혜가 양수원의 동선을 강하임에게 전부 알려주고 있었다.강하임은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출력해 하나씩 보관했다.빈 시간에는 혼자 버킷 리스트에 적은 소원들을 하나씩 해 나갔다.열 번째 소원에 이르렀을 때, 강하임은 ‘꽃 보러 가기’라는 글자를 보고 핸드폰을 열어 찾아보았다. 결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공원에 새로 핀 매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평일이라 공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녀는 휠체어를 밀며 산책로를 천천히 지나갔다.오후 4시쯤 광장에 버스킹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기타를 치며 잔잔한 사랑 노래를 불렀다.강하임은 노랫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다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양수원과 예나혜를 보았다.두 사람은 컵떡볶이를 하나 들고, 나눠 먹으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예나혜가 자기 포크로 떡 하나를 찍어 양수원에게 내밀자, 그는 자연스럽게 받아먹었다.남자의 눈가에 스민 웃음을 보자 강하임은 잠시 굳었다.여기서 두 사람을 마주칠 줄은 몰랐다.강하임은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양수원이 갑자기 일어나 버스킹을 하던 사람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여 몇 마디 하는 것을 보았다. 그 버스커는 곧 자리를 비켜 주었다.양수원은 마이크를 맞추고, 호기심 어린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기타 줄을 튕겼다.“이 노래는 예나혜 씨에게 바칩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입니다.”말이 끝나자 맑고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기타 선율을 타고 흘러나왔다.주변은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애틋한 사랑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옆에 있던 몇몇 여자들이 눈을 반짝이며 작은 목소리로 감탄했다.“진짜 멋있다. 저 여자분 부럽다. 내 남자친구는 저런 행동 절대 못 해.”“노래 너무 슬프다. 처음 듣는데, 자작곡인가?”“네.”강하임이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이 대답이 그 여자들에게 한 대답인지, 지나간 시간을 향한 혼잣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강하임은 16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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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강하임도 양수원을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여긴 웬일이야?”양수원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눈빛에 당황이 스쳤다.“친구랑 근처에서 밥 먹으러 왔다가 네가 보여서 내려왔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 문이 열렸다. 예나혜가 웃으며 두 사람 사이로 걸어왔다.“선배님, 이분이 사모님이시죠?”양수원은 예나혜가 내려올 줄 몰랐다. 더 당황했지만 억지로 태연한 척 소개했다.“이쪽은... 내 후배, 예나혜 씨.”예나혜는 예의 바르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사모님. 이렇게 나오시기 힘드실 텐데, 무슨 일 있으세요?”강하임은 그 손을 보지 않은 사람처럼 시선을 내렸다.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생일 소원 하나 이루러요. 사진 찍으러 가는 길이에요.”그 말에 예나혜의 눈이 반짝였다.“사진이요? 저도 같이 가도 돼요? 저 보는 눈 꽤 좋아요. 옷이나 콘셉트 고르는 거 도와드릴게요.”강하임은 양수원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거절하지 않았다.세 사람은 차에 올랐다. 강하임은 혼자 뒷좌석에 앉아 창밖 풍경을 보았다.처음 차 안은 조용했다. 양수원은 눈치를 보느라 말을 아꼈다.얼마 지나지 않아 예나혜가 먼저 화제를 꺼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이야기를 했다.양수원은 예의상 몇 마디 대답했다. 하필 예나혜가 꺼낸 주제들이 전부 그가 관심이 있는 것들이었다.조금씩 대화에 빠져든 양수원은 뒷좌석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예나혜와 먼저 걸어갔다.두 사람이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강하임은 혼자 옆에 놓인 휠체어를 차에서 내렸다. 어렵게 몸을 옮겨 앉은 뒤,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따라갔다.세 사람이 앞뒤로 나뉘어 스튜디오 입구에 도착하자, 직원이 웃으며 양수원과 예나혜 앞으로 다가왔다.“두 분, 웨딩 촬영 오셨나요? 두 분 분위기가 워낙 잘 어울리셔서...”웨딩이라는 말에 양수원이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소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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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강하임은 밖에서 두 사람이 서로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둘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옆에 있던 사진작가를 불렀다.“제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실 수 있을까요? 흰색 배경으로요.”사진작가는 다른 촬영장으로 휠체어를 밀어주며 단색 배경은 너무 평범하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강하임은 뜻을 바꾸지 않았다.그녀가 찍으려는 것은 애초에 영정 사진이었다.사진작가는 더 말리지 못하고 강하임의 뜻대로 한 장을 찍었다.사진이 출력될 때쯤, 옆 촬영장도 겨우 조용해졌다.예나혜는 방금 받은 사진을 들고 다가왔다. 얼굴에는 미안하다는 표정이 가득했다.“죄송해요, 사모님. 선배님이랑 찍다 보니 너무 재밌어서 사모님을 잊었어요. 지금 두 분 사진도 찍으실래요?”강하임은 예나혜 뒤에서 시선을 피하는 양수원을 보다가, 희미하게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양수원도 방금 자신의 행동이 부적절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죄책감이 더욱 짙어졌다. 그는 급히 앞으로 다가와 휠체어를 밀며, 목걸이를 하나 사 주고 싶다고 했다.예나혜도 따라가겠다고 했다. 귀걸이도 사고 싶고, 겸사겸사 강하임에게 어울릴 만한 것도 봐 주겠다고 했다.세 사람은 백화점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다 양수원이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그는 먼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강하임은 무엇을 봐도 마음이 가지 않아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예나혜는 휠체어를 밀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몇 걸음 가지 않았을 때 화재 경보음이 갑자기 울렸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거센 인파에 휠체어가 그대로 넘어졌다. 강하임은 바닥에 세게 떨어졌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여러 번 밟혔다.그녀는 가까스로 옆 난간을 붙잡았다. 힘겹게 고개를 들자, 사람 흐름을 거슬러 뛰어오는 양수원이 보였다.그는 창백하게 질린 채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와, 강하임이 아닌 예나혜를 끌어안았다.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여보, 무사해서 다행이야. 정말 놀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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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집으로 돌아온 뒤, 양수원은 강하임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닦고 붕대를 감아 주었다. 마음은 후회와 안쓰러움으로 가득했다.그 뒤 며칠 동안 그는 밖에 나가지 않고, 매일 강하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그가 보이는 죄책감 앞에서도 강하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밤이 깊었을 때, 그녀는 휠체어를 밀고 서재로 들어갔다. 양수원이 나름 잘 숨겼다고 믿는 일기장을 찾아냈다.일기장을 펼치자, 한 페이지 가득 ‘양수원, 넌 정말 최악이다’라는 자책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강하임은 다시 일기장을 덮었다.그녀가 서재를 나서자 안방 문이 열렸다. 양수원이 흐트러진 옷차림에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뛰쳐나왔다.강하임이 무사한 것을 보고서야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이 늦은 시간에 혼자 왜 나왔어?”강하임은 시선을 돌리고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했다.“목말라서. 물 마시려고.”양수원은 급히 주방으로 가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따라 그녀 손에 쥐여 주었다. 목소리에는 아직 놀란 기색이 남아 있었다.“앞으로 이런 일에는 날 불러. 너한테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 정말 심장 멎을 것 같아.”그 말을 듣고 강하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보았다.“요즘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양수원은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없어.”사실 그가 진실을 말하기만 했다면, 강하임은 담담하게 놓아줄 수 있었다.하지만 여기까지 온 뒤에도 양수원은 여전히 솔직하지 못했다.강하임은 눈을 감고 조용히 웃었다. 눈에 깔린 실망을 감췄다....다음 날, 강하임은 앨범을 꺼냈다. 숨기지도 않고 모든 사진을 잘라 버렸다.바닥 가득 흩어진 조각들을 보고 양수원은 완전히 굳었다.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멀쩡한 사진을 왜 다 잘랐어?”강하임은 이유를 만들기조차 귀찮았다. 습기 때문에 색이 다 바랐고, 보관해 봐야 소용없으니 나중에 다시 찍으면 된다고만 말했다.그녀가 너무 태연하게 말하자 양수원의 마음에는 이상한 불안이 스몄다. 아내의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할지 믿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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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강하임은 3시간을 꼬박 기다렸지만 양수원은 돌아오지 않았다.오후가 되자 가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더 기다릴 마음이 사라진 그녀는 혼자 휠체어를 밀고 내려가려 했다.추모공원에는 무장애 통로가 있었지만 경사가 가파르고 비스듬했다. 손에 힘 조절을 잘못한 탓에 휠체어가 난간에 부딪히며 넘어졌다.강하임은 통로를 따라 아래까지 굴러떨어졌다. 손과 얼굴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생겼고, 이마도 찢어져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빗방울이 그 피를 다 씻어 냈다.그녀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곳에 혼자 누워, 떨어지는 빗방울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차가운 비의 한기가 몸속까지 스며들어 강하임의 몸은 멈추지 않고 떨렸다. 그녀는 온몸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견디며 이를 악물었다.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도 길었다.얼마나 버텼는지 알 수 없었다. 이대로 얼어 죽는 게 아닐지 생각했을 무렵, 양수원이 우산을 든 채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는 아내를 안아 올리며 아프게 사과했다.강하임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에는 무감각한 빈자리만 남아 있었다.“내 다리가 있었다면, 오늘 나는 여기서 혼자 내려갈 수 있었겠지.”그렇게 아침햇살처럼 밝았던 강하임은 18살에 완전히 죽었다.양수원의 가슴이 크게 흔들렸다. 자책과 부끄러움이 밀려와, 그는 품 안의 사람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이어 손을 들어 자기 뺨을 세게 때렸다.“미안해. 여보, 맹세할게.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할게.”그 뒤 며칠 동안 양수원의 죄책감은 다시 살아났다. 그는 언제나 강하임 곁을 지켰다.강하임이 햇볕을 쬐러 가든 멍하니 앉아 있든, 그는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물을 가져오고, 필요한 것을 챙기고, 그녀가 무심코 한 말에도 빠짐없이 대답했다.두 사람의 모습은 사고가 나기 전, 7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하지만 강하임은 알고 있었다. 인생은 다시 시작할 수 없다.양수원이 하는 모든 일 역시 잠시 떠오른 그림자일 뿐,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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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병원에서 나온 뒤, 양수원은 강하임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전화받지 않자 갑자기 불안해졌다.그는 급히 택시를 타고 공항을 향해, S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항공권을 샀다.대기하는 동안에도 메시지를 여러 통 보냈지만 아무 답도 오지 않았다.시간이 흐를수록 양수원의 심장은 더 빨리 뛰었다. 마음이 불안한 생각들로 어지러워졌다.S국을 떠나기 전의 일들을 떠올리며, 그는 어딘가 이상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하지만 무엇이 이상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강하임이 마지막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잔잔하고 깊은 눈만 남아 있었다.다시 S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26일이었다.양수원은 쉬지 않고 호텔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 방은 텅 비어 있고,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이어서 방 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옷장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강하임은 완전히 사라지고 흔적도 없었다.양수원은 귓가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머리가 하얘지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그는 허둥지둥 핸드폰을 꺼내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차갑게 흘러나오는 ‘전원이 꺼져 있어 연결할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 음성을 듣는 동안, 이성은 점점 무너졌다. 양수원은 비틀거리며 프런트로 내려가 말을 더듬었다.“저, 저기요. 607호 투숙객이... 체크아웃했나요?”프런트 직원은 컴퓨터를 확인하고 고개를 저었다.“아직 체크아웃하지 않으셨습니다. 내일 정오가 퇴실 시간입니다.”그 말을 듣고서야 양수원은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그는 옆의 의자를 짚고 천천히 앉았다.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자신을 달랬다.“괜찮아. 그냥 잠깐 나갔을 거야. 메시지를 볼 시간이 없었을 뿐이야. 괜찮아.”그 말을 수십 번 되뇌던 끝에,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우리 S국에 첫눈을 보러 온 것이 아니었나?’양수원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기만 했다.‘S국에 눈이 안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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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원강시에 도착한 뒤, 양수원이 맨 먼저 한 일은 핸드폰을 켜는 것이었다. 화면에는 어머니의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찍혀 있었고, 읽지 않은 메시지도 100개가 넘게 쌓여 있었다.빽빽한 알림을 보자 심장이 세게 조여 왔다. 전화를 걸려던 때, 고개를 들자 입국장 앞에서 기다리는 어머니 장영주가 보였다.장영주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처럼 초췌했다. 아들을 바라보는 눈은 당황과 두려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수원아! 하임이 집에 없어. 얘가 어디 간 거야? 너는 모르니?”그 몇 마디에... 비행기 안에서 겨우 세워 둔 양수원의 마음은 한꺼번에 무너졌다.그는 짐도 챙기지 못한 채 미친 사람처럼 입국장을 뛰쳐나왔다.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가득했다.“집에 없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장영주도 큰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의문을 급히 쏟아 냈다.“집에 갔는데 하임이 없었어. 집 안을 전부 뒤져 봤는데 하임이 물건이 하나도 안 보이더라. 옷장에도 옷 한 벌 없고, 평소에 사 두던 소품이랑 간식도 다 사라졌어. 너희 싸웠니?”양수원이 무심코 지나쳐 버렸던 기억들이 어머니의 말 속에서 되살아났다.그는 추모 공원에 가기 전, 강하임이 계속 자기 물건을 치우던 일을 떠올렸다.그녀는 매일 조금씩 무언가를 버렸다. 양수원도 보았지만 매번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마음은 다음 달 예나혜와 가기로 했던 여행에 가 있었다.‘하임이 버린 것은 쓸모없다고 말한 물건이 아니라... 자기 흔적을 지우는 거였나?’‘처음부터 내 곁을 떠나려고 했어...’그 사실을 깨닫자 양수원은 그 자리에서 굳었다. 온몸이 얼음 속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이어서 문득 헤어지기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냈던 눈빛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이제야 양수원은 그때 지나쳤던 이상한 감각이 무엇이었는지 알았다.그가 단호하게 떠날 때, 강하임은 어디 가느냐고 묻지도 않았고 붙잡지도 않았다.그 눈에 담긴 것은 평온함이라기보다 냉담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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