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희미한 실루엣의 그대에게: Chapter 1 - Chapter 9

9 Chapters

1화. 차가운 겨울, 태성 기획에 입사하다

​​스물일곱의 겨울은 잔인할 만큼 시렸다.​하연수는 목덜미를 파고드는 칼바람을 막으려 회색 울 코트의 깃을 턱 끝까지 바짝 끌어올렸다. 매서운 빌딩풍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얇게 바른 립스틱 위로 겨울 공기가 닿아 입술이 감각 없이 굳어갔다. 입을 열면 금방이라도 하얀 입김과 함께 나약한 소리가 새어 나올 것만 같아 연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오늘 그녀의 차림새는 단정하다 못해 엄숙했다. 면접을 위해 큰맘 먹고 구입했던 짙은 네이비색 정장 재킷에 구김 하나 없는 흰 블라우스. 대학 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를 뛰며 신어 앞코가 살짝 닳아버린 검은 구두는 오늘 아침, 구두약으로 몇 번이고 깨끗하게 닦아낸 상태였다. 품에 안은 서류 가방 안에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수백 번도 더 확인한 입사 증빙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대한민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서울 한복판.눈앞에는 업계 최고이자 대학생들의 드림 컴퍼니로 꼽히는 광고·기획사, ‘태성 기획’의 사옥이 거대한 얼음 성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유리 외벽은 차가운 겨울 햇살을 서슬 퍼렇게 반사하고 있었고, 회전문 너머로 언뜻 보이는 로비는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처럼 번쩍이며 사람을 압도했다.​‘드디어…… 여기까지 왔어.’​연수는 심장 언저리를 지그시 누르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화려하게 꾸밀 줄 몰라 그저 깨끗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의 맑고 투명한 피부와 동양적인 이목구비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하지만 지금 연수의 머릿속에는 제 외모에 대한 자각 따윈 없었다.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본능만이 가득했다. 갑작스러운 집안의 몰락, 매일 밤 이어지던 어머니의 마른 한숨, 한때 당당했던 아버지의 구부정한 등 언저리. 새벽편의점 알바와 과외를 전전하며 밤새 불을 밝히던 고시원의 쪽방까지. 그 지독했던 가난의 기억들이 거대한 그림자가 되어 그녀의 등 뒤를 바짝 쫓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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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혼자였던 상류층 소녀

​​로비의 반짝이는 대리석을 밟으며 걸어가던 연수는, 번쩍이는 빛의 잔상 속에서 묘한 데자뷔를 느꼈다. 사방이 거울처럼 매끄럽게 닦인 사옥의 풍경은, 그녀의 기억을 가장 깊은 곳, 아주 오래전의 겨울로 미끄러뜨렸다.​여덟 살의 하연수. 그때의 그녀는 지금처럼 위축되거나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지 않은, 말 그대로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아이였다.​그날, 연수는 사각거리는 감촉이 낯설었던 크림색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유난히 딸을 아꼈던 어머니가 백화점을 몇 바퀴나 돌며 직접 골라준 최고급 드레스였다. 허리춤에는 커다란 실크 리본이 사랑스럽게 묶여 있었고, 에나멜 소재의 반짝이는 구두는 아이가 한 걸음씩 뗄 때마다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냈다.​장소는 서울의 한 최고급 호텔 대연회장.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정재계 인사들이 모이는 사교 파티였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샹들리에는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그대로 쏟아부은 것처럼 찬란하게 빛났고, 길게 늘어선 테이블 위에는 눈이 부신 은빛 식기와 생화 장식이 만발해 있었다. 어른들은 숨이 막힐 정도로 진한 향수 내음과 샴페인 향이 섞인 공기 속에서, 서로의 부와 권력을 탐색하는 계산적인 웃음을 주고받았다.​하지만 그 화려한 세계의 중심에서, 어린 연수는 철저히 혼자였다.​“우리 연수, 엄마 아빠가 저기 회장님께 인사만 드리고 금방 올게. 착하지? 여기서 얌전히 맛있는 거 먹고 있어.”​어머니의 다정한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고 멀어지면, 연수는 약속이라도 한 듯 연회장 가장 구석에 위치한 커다란 통유리창가로 향했다. 그곳이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연회장 중앙에는 연수와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화려한 아동 정장과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들은, 어른들의 세계를 고스란히 복제한 것처럼 끼리끼리 무리를 짓고 있었다.​“너네 집 이번에 교외에 새 별장 샀다며? 수영장도 있어?”“당연하지. 우리 아빠는 이번에 독일제 외제차로 바꿨단 말이야. 너희 집 차는 뭔데?”​어린아이들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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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재킷을 벗어준 열일곱 소년

​“꼬맹이.”​낮고 무심한, 그러나 소년 특유의 맑음이 서려 있는 목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연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맞춤 정장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아니, 겨우 여덟 살이었던 연수의 눈에는 완벽한 어른이자, 동화 속에서 걸어 나온 왕자님처럼 보였다.​소년은 열일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키가 컸고 어깨가 곧게 벌어져 있었다. 이마를 단정하게 드러낸 머리카락 아래로, 서늘하면서도 깊은 눈빛이 연수를 향했다. 귀찮다는 듯 살짝 찌푸려진 미간마저도 기품이 넘쳤다.​어른들이 ‘강씨 가문의 천재 장남’이라 부르며 입이 마르게 칭찬하던 소년. 연수의 기억 속에서 그는 ‘강서준’이라는 이름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사실 그것이 그의 본명이 아닌, 집안에서 불리던 아명과도 같은 것이었음을 어린 연수는 알지 못했다.)​“왜 여기서 혼자 청승맞게 떨고 있어?”“……저 안 떨어요.”​연수는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려 일부러 통통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새하얀 뺨과 작게 들썩이는 어깨는 추위와 외로움을 숨기지 못했다.​소년은 잠시 연수를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낮게 쉬며 아무런 말도 없이 제 정장 재킷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연수의 작은 어깨 위로 툭, 덮어주었다.​열일곱 소년의 재킷은 여덟 살 꼬맹이에게 지나치게 비대했다. 소매는 손끝을 한참 지나쳐 대롱거렸고, 옷자락은 거의 발목까지 내려와 마치 커다란 이불을 뒤집어쓴 꼴이 되었다.​하지만 이상했다. 옷이 몸에 닿는 순간, 연수는 마법이라도 걸린 듯 온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재킷의 두꺼운 울 원단 사이사이로 소년의 따스한 체온과 싱그러운 나무 향 같은 체향이 짙게 배어 있었다.​연수는 재킷의 커다란 깃 안으로 쏙 들어간 채, 까만 눈동자만 깜빡이며 소년을 올려다보았다.​“……오빠는 안 추워요? 셔츠만 입었잖아요.”“난 원래 열이 많아서 안 추워.”​덤덤하게 대꾸하는 소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연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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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초콜릿과 별빛의 약속

​그 소년, 서준은 결코 다정한 말을 연발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늘 말이 없었고,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기 일쑤였다.​하지만 신기하게도 연수가 파티장 구석에서 혼자 발을 동동 구르고 있거나, 어른들의 지루한 대화 틈에서 시들어갈 때면 귀신같이 그녀의 곁에 나타났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어두운 테라스 복도, 화려한 정원으로 이어지는 유리문 앞, 혹은 대리석 계단 그늘진 곳에서 서준은 늘 연수의 그림자가 되어주었다.​“야, 꼬맹이. 또 울 것 같은 얼굴이네.”“저 진짜 안 울었거든요?”“알았으니까 이거 먹고 입 다물어.”​서준은 툭명스럽게 말하며 제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초콜릿을 꺼내 연수의 고사리 같은 손바닥 위에 툭 던져주곤 했다.​그가 건넨 초콜릿 포장지는 늘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어떤 날은 금색, 어떤 날은 은색, 때로는 깊은 풍미를 예고하는 짙은 갈색. 연수는 먹기도 아까운 그 작은 초콜릿을 보물처럼 손바닥 안에 꼭 감싸 안았다. 입안에 넣으면 싸늘했던 마음까지 달콤하게 녹여버리는 마법의 묘약이었다.​유난히 눈발이 날리던 어느 겨울밤, 두 사람은 소란스러운 연회장을 빠져나와 아무도 없는 야외 테라스에 나란히 서 있었다. 연수는 하얀 퍼 장식이 달린 귀여운 코트를 입고 있었고, 서준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짙은 감색 정장 차림이었다.​“오빠, 저기 하늘 좀 봐요. 별이 진짜 많아요!”연수가 까만 밤하늘을 가리키며 어린아이답게 소리쳤다. 서준은 그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더니,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바보냐. 서울 하늘에 별이 저렇게 많을 리가 없잖아. 저건 별이 아니라 건너편 빌딩들의 불빛이야.”“……치, 그래도 반짝이니까 예쁘잖아요. 별이라고 생각하면 별인 거죠.”​서준은 입술을 삐죽이는 연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추위 때문에 코끝과 뺨이 발갛게 물든 채로도, 눈동자만큼은 세상의 모든 빛을 담은 듯 청초하게 빛나는 아이. 서준은 이상하게도 그 순간, 제 가슴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무거운 의무감들이 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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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아홉 살의 거리

​어린 연수에게 강서준이라는 존재는 미지의 세계이자 우주였다.그와 자신의 나이 차이는 무려 아홉 살. 그는 어른들이 나누는 복잡하고 어려운 주식이나 경영 이야기를 알아들었고,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정장 신사였다. 또래 아이들처럼 유치한 장난을 치거나 큰 소리로 웃는 법도 없었다.​하지만 연수는 그 철벽 같은 서준의 곁에 있을 때 가장 완벽한 평온을 느꼈다.그의 주변에는 어른들의 계산적인 웃음 유령도, 아이들의 잔인한 자랑질도 침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꼬맹이, 너 또 혼자 돌아다니지.”“저 진짜 꼬맹이 아니라고요! 이제 아홉 살이에요!”“내 눈엔 평생 꼬맹이야.”​연수는 매번 자존심을 세우며 토라졌지만, 사실 서준이 저를 ‘꼬맹이’라 부를 때마다 묘한 소속감을 느꼈다. 온 세상이 냉정해도, 이 키 큰 오빠만큼은 제 편이 되어줄 것 같았다.​서준은 약속을 지키는 남자였다. 파티장에서 다른 가문의 아이들이 은근히 연수의 집안을 깎아내리거나 무시하려 들면, 서준은 어느새 나타나 연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어른 뺨치는 차갑고 서슬 퍼런 눈빛으로 그 아이들을 조용히 압도해 물러나게 만들었다.​연수는 언제나 서준의 넓고 단단한 등 뒤에 숨어 세상을 보았다.‘오빠는 꼭 거대한 성벽 같아.’차갑고 거대해서 다가가기 힘들지만, 오직 자신에게만큼은 세상의 모든 모진 바람을 막아주는 가장 완벽한 벽.​그러나 당시 아홉 살의 나이 차이가 주는 거리감을 어린 연수는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 아홉 살이라는 세월의 간극이, 훗날 집안의 몰락과 함께 두 사람 사이에 결코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되어 가로막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리고 서준 역시 알지 못했다.자신의 차가운 마음에 유일하게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던 그 작고 외롭던 아이가, ‘태성’이라는 본명으로 거대 기업의 왕좌에 오른 지금까지도 심장 가장 깊은 곳에서 지우지 못한 단 하나의 이름이 될 줄은.​“하연수…….”​현재의 시간, 태성 기획의 화려한 로비.스물일곱의 연수를 스쳐 지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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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가장 따뜻했던 오빠

​태성의 차가운 시선이 스쳐 지나간 태성 기획의 로비, 연수는 제 자리에 얼어붙은 채 커져가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방금 스쳐 지나간 그 오만한 남자의 실루엣에서 왜 이토록 지독한 기시감이 드는 걸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재벌 2세 CEO가 제 기억 속의 그 다정한 소년일 리 없었다.​연수의 기억 속 그 오빠, ‘서준’은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외피를 두르고 가장 따뜻한 속살을 보여주던 사람이었다.​열 살이 되던 해의 가을, 연수는 처음으로 눈물이라는 것을 남 앞에서 쏟아냈다. 연회장 한구석에서 친하게 지내던 대기업 가문의 또래 아이들에게 철저히 따돌림을 당한 날이었다. 아이들은 연수가 입은 드레스가 작년 시즌 제품이라며, 대놓고 소외감을 조장했다.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은 연수는 아무도 없는 호텔 별관의 어두운 정원 벤치에 쪼그려 앉아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였다.​“거기서 뭐 하냐, 꼬맹이.”​어둠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에 연수는 황급히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서준이었다. 그는 화려한 파티의 소음이 싫은지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푼 채 서 있었다. 연수가 고개를 돌리며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웅얼거렸지만, 붉어진 눈시울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서준은 한숨을 쉬며 연수의 곁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그의 넓은 어깨가 곁에 닿자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서준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평소보다 훨씬 커다란 고급 수제 초콜릿 상자를 통째로 연수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누가 울렸어.”“안 울었다니까요…….”“거짓말하지 마. 눈이 붕어처럼 부었구만.”​서준의 툭명스러운 핀잔에 연수는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애들이…… 내 드레스 구리다고 놀렸단 말이에요. 나랑 안 놀아준대요.” 아이 같은 투정에 서준은 피식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커다란 손을 뻗어 연수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아주 조심스럽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다루듯 쓸어내렸다.​“멍청하긴. 저 안에서 가장 빛나는 게 누군지도 모르는 눈먼 녀석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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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무너지는 아버지의 사업

​행복은 영원할 것 같았고, 상류층이라는 견고한 성벽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줄 알았다. 연수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그 아름답던 유리 성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시작은 아주 작은 소문이었다. 아버지가 무리하게 추진하던 해외 리조트 개발 사업이 현지 자금 경색으로 난항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 처음에는 늘 있는 비즈니스의 리스크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집안의 공기는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졌다.​매일 밤, 서재에서는 아버의 격앙된 목소리와 어머니의 억눌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거실을 가득 채우던 화려한 웃음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집안에는 오직 무거운 침묵과 줄담배 연기만이 매캐하게 감돌았다.​“연수야, 혹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딸은 강하게 버텨야 한다. 알았지?”​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유난히 붉어진 눈으로 연수의 손을 꼭 잡았다. 한때 대한민국 재계에서 당당하게 어깨를 펴던 아버의 손은 눈에 띄게 거칠어져 있었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연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차마 무슨 일이냐고 되묻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를 위로하려 애썼을 뿐이다.​그 무렵, 연수는 파티장에서 서준을 만나는 횟수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하씨 가문의 위기가 상류층 사교계에 소문이 나면서, 어른들은 은근히 연수의 가족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파티에 참석해도 예전처럼 환대해 주는 이는 없었고, 차가운 멸시와 동정 어린 시선만이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그 지옥 같은 공간에서 연수가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오직 서준의 존재였다. 서준은 주변의 평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연수가 보이면 다가와 무심하게 초콜릿을 쥐여주었다.​“얼굴이 왜 이렇게 반쪽이 됐어. 밥 안 먹고 다니냐?”“그냥…… 요즘 공부하느라 그래요.”“거짓말은.”​서준은 연수의 안색이 파리해진 이유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더 이상 깊게 묻지 않는 배려를 보이며, 연수의 머리를 꾹 눌렀다.“무슨 일이 있어도 넌 내 꼬맹이야. 잊지 마.”​그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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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모든 것

​폭풍은 예고도 없이 몰아쳤다. ​연수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겨울, 아버의 회사는 결국 최종 부도 처리가 되었다. ‘파산’이라는 두 글자는 연수의 삶을 통째로 집어삼킨 괴물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연수의 악몽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돌아온 집은 더 이상 그녀가 알던 따뜻한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현관문에는 거친 글씨로 압류 통지서가 붙어 있었고, 집안 가구마다 붉은색 딱지가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 거실 바닥에는 아버지가 평소 아끼던 도자기와 액자들이 산산조각 난 채 뒹굴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 파편들 사이에 주저앉아 넋을 잃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 ​“이제 우린 어디로 가니…… 여보, 이제 우린 어떻게 살아!” ​정장을 입은 험악한 인상의 사채업자들이 거실을 점령한 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들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모님의 무력한 모습에 연수는 가방끈을 쥔 채 문앞에 굳어버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소리조차 낼 수 없는 극도의 공포가 그녀를 지배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화려한 이층집, 매일 타던 고급 승용차, 아름다운 드레스와 피아노, 그리고 자신을 공주처럼 아껴주던 부모님의 여유로운 미소까지. 남은 것은 수십억의 빚더미와 당장 오늘 밤 누울 곳조차 없는 비참한 현실뿐이었다. ​그들은 쫓기듯 서울 변두리의 허름한 지하 단칸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르고, 겨울이면 보일러조차 제대로 돌지 않아 입김이 나오는 좁은 방. 연수는 그곳에서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죽여 울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비비며, 연수는 지독한 현실 속에서 자꾸만 서준을 떠올렸다.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나를 구원해 줄 사람은 오직 그 오빠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킷을 벗어주며 ‘내 눈엔 너만 보인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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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가장 잔인한 것은 물질적인 가난보다 사람들의 돌변한 태도였다. ​아버의 부도 소식이 완전히 알려지자, 그동안 ‘가족’이라 부르며 살갑게 굴던 친척들마저 일제히 연락을 끊었다. 혹여나 돈을 빌려달라고 할까 봐 무서워 전화를 피하고, 길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오물을 본 것처럼 고개를 돌리며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어머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과거 친하게 지내던 상류층 사모님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연수는 옆에서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아야 했다. ​“아이고, 연수 어머니. 어쩌나, 우리도 요즘 형편이 말이 아니라서…… 연락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네.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은 생각이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냉정한 거절과 뚝 끊기는 신호음. 어머니는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내려놓고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세상은 그토록 차가웠다. 부와 명예가 있을 때는 간을 빼줄 것처럼 굴던 이들이, 그것이 사라지자마자 가장 잔인한 가해자가 되어 등을 돌렸다.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넘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릴 뿐이었다. ​학교에서도 지옥은 이어졌다.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던 연수는 친구들의 노골적인 따돌림과 비아냥을 견뎌야 했다. “야, 하연수네 집 망해서 완전 거지 됐다며?” “대박, 어쩐지 요즘 맨날 똑같은 옷만 입고 오더라. 냄새나는 것 같아.” ​사물함에는 비방하는 낙서가 가득했고, 체육 시간에도 연수의 곁에는 아무도 서지 않았다. 세상에 홀로 던져진 듯한 극도의 고독감 속에서 연수는 이를 악물었다. 누구에게도 구걸하지 않겠다, 동정받지 않겠다며 스스로를 단단한 껍질 속에 가두었다. 야무지고 책임감 강한 그녀의 성격은 이 시기의 상처를 자양분 삼아 더욱 독해졌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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