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13#. 교실 한가운데저녁 식사가 시작된 뒤에도 방 안은 지나치게 시끄러워지지 않았다. 낮은 식탁 위에는 계절 생선과 맑은 국, 작은 그릇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은은한 조명 아래로 옻칠된 젓가락 끝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나는 등을 너무 세우지도, 그렇다고 흐트러뜨리지도 않은 채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마사노리가 낮은 목소리로 직원에게 짧게 무언가를 물었고, 옆자리의 사에코는 특별히 말을 많이 하지 않은 채 천천히 국그릇을 내려놓았다. 요시코는 자연스럽게 다음 반찬 접시를 정리하고 있었고, 노리코만이 가끔 분위기를 너무 무겁게 두지 않으려는 듯 짧은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요시노리는 평소처럼 조용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누구보다 이 집 공기에 익숙한 사람처럼.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제는 그 조용함이 전처럼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젓가락이 그릇 가장자리에 아주 작게 닿는 소리와, 멀리 복도 쪽에서 직원들이 오가는 기척만이 얇게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아주 조금만 내린 채, 국그릇 위로 천천히 올라오는 김을 바라봤다. 도쿄에서 누군가와 식사를 할 때는 대부분 말이 훨씬 빨랐다. 분위기가 끊기지 않도록 웃음이 이어졌고, 누군가는 계속 다음 화제를 꺼냈다. 침묵이 길어지면 괜히 어색해지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집에서는, 말이 잠깐 멈추는 순간에도 아무도 굳이 서둘러 그 공백을 메우려 하지 않았다.“…오늘 수업은 어떠셨습니까.”잠시 뒤, 마사노리가 낮고 안정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의 말투는 부드러운 쪽에 가까웠지만, 이상하게도 자연스럽게 자세를 바로잡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마사노리는 나의 예비 시아버지로, 평상시에는 말수가 적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존재감이 옅은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다. 그는 굳이 목소리를 높이거나 분위기를 주도하지 않아도, 식탁 끝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주변 공기를 정리하는 쪽에 가까웠다. 직원들도 그 앞에서는 괜히 움직임이
Huling Na-update: 2026-06-16
Chapter: 012#.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란코는 문이 닫힌 뒤에도 바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방 안에는 방금 전까지 남아 있던 인기척이 아주 희미하게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다다미 위에 조용히 앉은 채, 그녀가 소매 끝을 한 번 천천히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작은 체구인데도 이상하게 자세가 흐트러져 보이지 않는 사람. 란코는 언제나 그랬다. 굳이 시선을 강하게 두지 않아도, 방 안 공기를 자연스럽게 정리해버리는 쪽에 가까웠다. 잠시 뒤 그녀는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오늘은 걷는 것부터 다시 보겠습니다.”나는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란코는 바로 설명을 이어가지 않았다. 대신 잠깐 시선을 내린 채, 내가 앉아 있는 자세와 발끝 방향을 조용히 바라봤다. 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복도 너머에서 직원들이 지나가는 기척이 아주 희미하게만 들렸고, 이른 햇빛은 다다미 위에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몇 초 뒤, 란코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스카 씨는.” 아주 잠깐 멈췄다. “생각보다 먼저 시선을 움직이는 편입니다.”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한 번 천천히 깜빡였다. 란코는 나를 곧바로 나무라지 않았다. 다만 방 안 공기를 정리하듯, 조용한 속도로 말을 이었다.“걷는 자세 자체는 많이 자연스러워졌어요. 그런데.” 그녀는 아주 미세하게 시선을 들었다. “누군가를 의식하는 순간, 먼저 반응을 확인하려는 쪽으로 몸이 조금 빨라집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아주 조금만 내린 채, 손끝을 가볍게 모았다. 이상하게도, 그 말은 생각보다 부정하기 어려웠다.나는 시선을 내린 채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다미 위로 아침 햇빛이 아주 얇게 번지고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란코 역시 굳이 다음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조금 전 노리코가 했던 말이 아주 희미하게 다시 떠올랐다. 굳이 먼저 확인하지 않게 된 느낌. 나는 눈을 한 번 천천히 깜빡였다. 그런데 란코의 말은 그와는 조금 달랐다. 확인하지 않게 되었다기보다
Huling Na-update: 2026-06-09
Chapter: 011#.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에도수화기를 내려놓은 뒤에도, 손끝에는 아주 미세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린 채, 그대로 몇 초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방 안은 조용했다. 창문 너머로는 불빛이 아주 희미하게만 들어오고 있었다. 아까까지 귀 가까이에 닿아 있던 숨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완전히 끝난 느낌은 아니었다.나는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반쯤 접힌 종이가 아직 그대로 놓여 있었다. 손가락 끝이 그 모서리를 아주 약하게 눌렀다가 멈췄다. 굳이 다시 펼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치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나는 등을 소파에 아주 천천히 기댔다. 방 안 공기는 아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시계 초침 소리도 그대로였고, 창문 바깥의 불빛도 여전히 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 전까지 이어지던 침묵이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전화에서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말이 멈추는 간격이나 숨을 고르는 소리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나는 눈을 한 번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아마도요.”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다시 이어졌다. 나는 입꼬리를 아주 조금만 올렸다가, 다시 지웠다. 이상한 사람이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그 말이 전처럼 가볍게 정리되지는 않았다.나는 시선을 천천히 옆으로 흘렸다. 창문 유리에는 희미하게 어두운 실내만 비치고 있었다. 문득, 몇 달 전 도쿄의 밤공기가 아주 짧게 떠올랐다. 젖은 아스팔트 냄새와, 늦은 시간까지 열려 있던 가게 불빛. 사람들 웃음소리와 음악이 섞여도 이상하지 않던 거리. 그 안에서는 대부분의 말이 빠르게 지나갔고, 대부분의 관계도 오래 멈춰 있지 않았다. 나 역시 그 흐름 속에 있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었다. 시선을 끌고, 분위기를 읽고, 어느 순간에는 먼저 자리를 떠나는 것까지 포함해서.나는 눈을 한 번 천천히 깜빡였다. 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멀리 어디선가 아주 희미하게 바람 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다다미
Huling Na-update: 2026-06-08
Chapter: 010#. 전화선 너머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짧게, 숨을 고르는 쪽에 가까운 공백이 있었다. 나는 수화기를 쥔 손을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멈췄다. 전화선 너머는 조용했다. 그런데. 끊어진 느낌은 아니었다.“…네.” 그가 천천히 말했다. “괜찮습니다.”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시선을 아주 조금만 내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가 보였다. 반쯤 접혀 있었다. 나는 그걸 몇 초 동안 그대로 바라봤다.“늦었는데도요?” 짧게 물었다. 그는 잠깐 멈췄다. “아직 안 자고 있었습니다.”나는 그 대답을 그대로 들었다. 몇 초. 굳이 바로 이어가지 않았다. 전화에서는, 공백이 조금 더 길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편하지는 않았다.“…교토는.”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원래 이렇게 조용해요?”그는 아주 미세하게 숨을 고르는 듯했다. “장소에 따라 다르겠지만.” 짧게. “지금은 그렇습니다.”나는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다시 지웠다. “…요시노리 씨 답네요.”그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아주 짧은 공백. 그리고. “그렇습니까.”나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시선을 천천히 옆으로 흘렸다. 창문 너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네.” 짧게 말했다. “급하지 않은 쪽.”그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아주 미세한 숨소리만 이어졌다. 나는 시선을 그대로 두었다. 전화에서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말이 멈추는 간격이 조금 더 또렷하게 남았다.“…아스카 씨는.”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쿄 쪽 같습니까.”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짧게 숨을 고르고, 수화기를 쥔 손을 조금만 고쳐 잡았다. 몇 초. 굳이 빨리 답할 필요는 없었다.“글쎄요.” 짧게 말했다. “원래는, 그런 쪽이 더 편했는데.” 그는 그 말을 끊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아주 조금만 내렸다. 반쯤 접힌 종이가 그대로 보였다.“…요즘은 잘 모르겠네요.”말이 끝난 뒤, 짧은 공백이 이어졌다. 나는 그 상태를 그대로 두었다. 굳이 설명을
Huling Na-update: 2026-06-06
Chapter: 009#. 그대로 두었다아무것도 이어지지 않은 채로 이어져 있었다. 그 사이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태는 이미 정리된 쪽에 가까웠다. 나는 그걸 따로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는 순간, 그건 과정이 된다. 과정이 되면, 흐름이 생긴다. 그건 필요 없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다미 위에 무릎을 가지런히 두고, 허리를 세우고, 시선은 정면에 두고 있었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그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다. 손끝의 위치도, 숨을 고르는 간격도, 이미 몸에 익은 범위 안에 있었다.익숙해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건 맞추려는 쪽에서 나오는 말에 가까웠다. 지금은, 그보다 조금 더 자연스러운 쪽이었다. 그렇게 되어 있었다. 나는 시선을 아주 조금만 아래로 내렸다. 무릎 위에 놓인 손이 보였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 상태를 굳이 바꾸지 않았다.…문득, 떠오르는 건 있었다. 로비의 조명, 유리문 너머의 공기, 손에 들고 있던 얇은 종이의 감촉.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 정도의 기억은, 붙잡지 않으면 흐려진다. 굳이 남겨둘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두었다. 사라지지 않는 쪽으로. 나는 시선을 다시 올렸다. 정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상태가,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나도, 굳이 이어가지 않았다. 그 상태가 그대로 이어졌다. 말이 없는 쪽이 더 안정적이었다. 굳이 하나를 덧붙이지 않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그대로 두었다. 정면, 아무것도 없는 쪽. 그 상태를 유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익숙하네. 짧게 생각이 스쳤다. 나는 그걸 바로 지우지 않았다. 굳이 지울 필요가 없다고 느껴졌으니까. 손을 무릎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멈췄다. 그 정도의 조정이면 충분했다.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조용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거의 없었다.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 그 사이를 채우는 건 별로 없었다. 그게 더 나았다.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 동작이 끝난 뒤에도, 공기는 그대로였다.…여기서는, 변하
Huling Na-update: 2026-06-05
Chapter: 008#. 언젠가는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상태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처음에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굳이 바뀔 이유가 없었으니까. 말이 길어지지도 않았고, 시선이 늦어지지도 않았고, 거리도 그대로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게 두는 쪽이 더 편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보통은 이쯤에서 하나쯤은 어긋난다. 이유 없이 말이 끊기거나, 타이밍이 조금 늦어지거나. 그런 종류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끼어든다.그런데 이번에는 그게 없었다. 나는 그걸 그대로 두고 있었다.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상태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미세하게. 어딘가 하나가 비어 있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나는 그 빈 자리를 굳이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확인하는 순간, 거기에 이름이 붙는다. 이름이 붙으면, 그쪽으로 기울어진다. 그건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로 두었다. 손을 무릎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멈췄다. 시선은 정면에 둔 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것처럼. 그 상태를 유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미 익숙해진 범위 안에 있었으니까.그런데. 아주 짧게, 그가 떠올랐다. 말이 이어지지 않던 간격, 굳이 덧붙이지 않던 태도.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 정도의 기억은, 붙잡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건드리지 않았다. 그대로 두는 쪽이, 아직은 더 편했다.그 상태가 계속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보통은, 오래 가지 않는다. 나는 시선을 아주 조금만 옆으로 흘렸다. 거기에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 쪽이 더 자연스러웠다. 몇 초. 그보다 조금 더 긴 시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오늘도, 갈까.나는 그 생각을 바로 붙잡지 않았다. 붙잡는 순간, 의미가 생긴다. 의미가 생기면, 선택이 된다. 선택이 되면, 이유가 따라온다. 그건 필요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흘려보냈다. 손을 한 번 더 정리하듯 움직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Huling Na-update: 2026-06-04
Chapter: 제12장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시계가 더 자주 눈에 들어왔다. 일을 하고는 있었는데— 손만 움직이고 있었다. 메일을 확인하고, 파일을 열고, 숫자를 정리하고. 전부 익숙한 작업이었는데,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몇 줄을 읽었는지, 방금 뭘 처리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시선이 다시 한 번 시계로 향했다.…아직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미 늦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괜히 자세를 한 번 고쳐 앉았다. 손이 허벅지 위에 잠깐 올라갔다가, 다시 키보드로 내려왔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한 박자 늦게 스스로 인식했다.집중해야 한다. 짧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이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다른 게 먼저 떠올랐다. 현관. 문. 그리고— 나는 아주 미세하게 숨을 들이켰다. 아직 퇴근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도, 몸이 먼저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오늘도. 그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시선을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키보드를 한 번 더 두드렸다. 그리고— 다시, 시계를 봤다.초침이 한 칸 움직였다. 그 짧은 소리가, 이상하게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화면을 보고 있었는데— 의식은 전부 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시간이 조금씩 앞으로 밀리고 있었다. 나는 손을 멈췄다. 키보드 위에 올려져 있던 손가락이 그대로 굳었다. 한 글자도 더 입력하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지금 당장 일어나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너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마우스를 놓았다. 손이 키보드에서 떨어졌다. 의자가 아주 작게 뒤로 밀렸다. 나는 그걸 인식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잠깐…”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짧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서 누군가 힐끗 쳐다본 것 같았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이미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
Huling Na-update: 2026-04-21
Chapter: 제11장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다. 몇 시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이 먼저 깨어 있었다. 천장을 한 번 보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대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 시간이 된 것처럼.나는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정리하고, 발을 바닥에 내렸다. 차가운 감각이 잠깐 스쳤다가, 금방 사라졌다. 세면대로 가서 물을 틀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보였다. 잠깐, 시선이 멈췄다.…이상하지 않았다. 어딘가 바뀐 것 같은데— 정확히 뭐가 다른지,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대로 물을 받아 얼굴을 씻었다. 물방울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수건으로 대충 닦아내고, 다시 거울을 봤다. 아무 일도 없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걸 한 번 더 확인하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옷을 꺼내 입었다. 셔츠 단추를 하나씩 채우는 동작이, 생각보다 일정했다. 손이 멈추지 않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어디까지 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넥타이를 들었다가 잠깐 멈췄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선택이었다. 굳이 맬 필요도 없었고, 어울리는 자리도 아니었다. 그런데...나는 아무 말 없이 넥타이를 목에 둘렀다. 매는 과정이 어딘가 어색했는데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매듭을 정리하고, 옷깃을 한 번 더 다듬었다. 거울 속의 내가, 아까보다 조금 더 정돈되어 보였다. 나는 그걸 한 번 확인하고—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인지는 묻지 않았다.전철 안은 평소처럼 붐볐다. 사람들 사이에 끼여 선 채로, 손잡이를 잡고 몸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숨이 완전히 막히는 건 아니었지만— 편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어깨가 부딪히고, 팔이 스치고, 체온이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을 꺼냈다.이유는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려던 것도 아니고, 누가 연락을 했는지 궁금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손이 먼저 움직였다. 폴더를 열고, 증권 메뉴를 눌렀다. 작은 화면이 켜졌
Huling Na-update: 2026-04-20
Chapter: 제10장나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분명 익숙한 차트였다. 수없이 열어봤던 종목, 수없이 반복해서 봤던 흐름. 그런데— 어디를 봐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선은 그대로였다. 오르고, 내려가고, 다시 이어지는 선. 예전이라면 그 안에서 나름의 근거를 찾았을 것이다. 타이밍을 재고, 이유를 붙이고, 확신 없는 확신을 만들어냈을 것이다.…그런데 지금은. 커서가 멈춰 있었다. 마우스를 쥐고 있었는데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 지점을 눌러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니— 감이 없는 게 아니라, 내 기준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아마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로 옆에 서서,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그런데도— 그 존재감이, 화면보다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나는 아주 잠깐, 시선을 옆으로 돌릴까 고민했다. 물어보면 될 것 같았다. 어디를 봐야 하는지, 언제 들어가야 하는지. 그런데—“…보지 마.”나는 그대로 멈췄다. 고개가 아주 미묘하게 돌아가려던 순간, 그대로 고정됐다. 시선은 다시 화면으로 돌아왔다.“스스로 봐.” 짧게 덧붙였다.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상하게 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됐다. 화면은 그대로인데— 의미가 지워진 것처럼.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차트를 봤다. 선이 있었다. 숫자가 있었다.…모르겠다. 그 생각이 처음으로, 또렷하게 떠올랐다. 아마네는 그걸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깐의 정적. 그리고—“여기.”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화면 한쪽을 가리켰다. 아주 짧은 동작이었다. 설명도, 이유도 없었다. 나는 그 지점을 봤다. 아무 특징도 없는 구간이었다.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은— 애매한 위치.“…지금이야.” 낮게 말했다.나는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조금 더 줬다. 커서를 움직였다. 매수 버튼 위에 올렸다. 멈췄다. 이유는 없었다. 근거도 없었다. 그냥— 이대로 눌러도 되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망설이지 마.”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Huling Na-update: 2026-04-19
Chapter: 제9장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 들린 채찍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갔다. 도망칠 수 있는 거리였다. 한 발만 물러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갈 수 있었다.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아마네는 잠깐 나를 내려다봤다. 무언가를 재는 것처럼.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손에 들린 채찍을 한 번 들어 올렸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들어와.”낮게, 단정적으로 말했다.그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한 발을 내디뎠다.문턱을 넘는 순간—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구조는 어제와 같았다. 좁은 현관, 이어지는 거실, 같은 위치의 소파와 테이블. 그런데도, 같은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조명이 조금 더 어두웠다. 커튼은 완전히 닫혀 있었고, 바깥의 빛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한쪽 벽에만, 희미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빛이 바닥을 길게 끌고 가면서, 공간을 더 좁게 만드는 것 같았다.소리도 달랐다. 어제는 조용하다는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아무 소리도 없다는 느낌이었다. 숨을 쉬는 소리조차 신경 쓰일 정도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한 번 울리고 나서, 그 여운이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나는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움직여야 하는지,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아주 미묘하게, 어깨가 내려갔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어제랑, 다르다.짧게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아마네는 문을 닫은 뒤에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시선이,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얼굴, 목, 어깨— 그리고 다시 눈으로 돌아왔다. 마치 어디까지 변했는지, 하나씩 확인하는 것처럼.“생각보다 빨리 왔네.”낮게 말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서
Huling Na-update: 2026-04-18
Chapter: 제8장커서는 화면 위를 천천히 떠돌다가,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멈췄다. 손은 키보드 위에 올려져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아무 이유 없이— 시선이 아주 미묘하게 아래로 떨어졌다. 책상 밑. 아무 것도 없는 공간. 그런데도, 그걸 보는 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잠깐 그대로 있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괜히 주변을 한 번 훑었다.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금 전의 그 자세를,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메일을 하나 열었다. 제목을 읽고, 내용을 훑고, 답장을 쓰기 위해 커서를 옮겼다. 익숙한 순서였다. 손은 그걸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문장을 완성하고, 엔터를 눌렀다. 그런데— 보내고 나서야, 내가 방금 무슨 내용을 썼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 화면을 다시 열어봤다. 분명히 내가 쓴 문장이었는데, 어딘가 남의 글처럼 느껴졌다. 손을 떼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 사이에, 전혀 다른 감각이 끼어들었다. 아무것도 닿아 있지 않은 목 언저리. 그런데도, 어제의 감촉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아주 조금 낮췄다. 누가 보지 않는 자리에서, 이유도 없이 자세를 고치는 것처럼. 그게 더 편하다고 느껴졌다. …왜지. 생각이 아주 잠깐 스쳤다. 그 순간— “키리시마 씨.”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거의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게 세웠다.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마치— 방금 전까지의 자세를, 들키면 안 되는 것처럼. 뒤돌아봤다. 동료가 서 있었다. 별다른 표정은 아니었는데— 시선이 잠깐, 내 얼굴을 스쳤다가 내려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그 시선이, 필요 이상으로 오래 남았다. “…아, 네.”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동료는 잠깐 말을 고르다가,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이거요, 아까 부탁드린 거… 확인해주셨나요?” 나는 그걸 받아들었다. 종이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Huling Na-update: 2026-04-17
Chapter: 제7장이제 도망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채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선은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피해야 할 것 같은데, 피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네의 손이, 어깨를 잡은 채로 조금 더 가까이 당겼다.거리가 더 좁아졌다. 숨이 닿을 것 같은 거리. 나는 그대로 멈춰 있었다. 도망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셔츠.” 낮은 목소리가 다시 떨어졌다.나는 아무 말 없이, 이미 풀어놓은 단추 사이로 천천히 옷을 벗어 내렸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이상하게 또렷하게 들렸다. 그 순간— 시선이, 더 직접적으로 닿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조금 더 얕아졌다.아마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짧게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따라,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무릎이 바닥을 스쳤다. 거리가—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만큼 가까워졌다. 손이 다시 움직였다. 어깨에 닿았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턱 끝에 닿았다. 가볍게 고개를 더 들어 올렸다. 시선이 완전히 맞닿았다. 숨이, 더 이상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았다.“이제…”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낮은 목소리가 스쳤다. 그 다음 말이 이어지기 전에—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도망칠 생각도, 멈출 생각도— 전혀 들지 않은 채로. 그 다음 말이 이어지기 전에, 손이 턱을 잡은 채로 멈췄다. 아주 짧은 정적. 시선이 맞닿은 상태에서, 숨만 가까워졌다.입술이 닿았다. 갑작스러웠지만 놀랄 틈은 없었다.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보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쪽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주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숨이 어중간하게 끊겼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시선이 맞닿았다. 그 다음—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다가왔다.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숨이 섞였다. 잠깐, 다시 멈췄다. 일부러 끊은 것처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있었다.“
Huling Na-update: 2026-04-15
Chapter: 6th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간 장면이었다. 쉬는 시간이었다. 교실 안은 평소처럼 몇 개의 무리로 나뉘어 있었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사이를 보고 있었다. 쿠미가 웃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창가 쪽에서, 누군가와 말을 나누며— 평소보다 조금 더 자연스럽게. 그 아이의 얼굴에,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이상하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던 아이였다는 것을— 그 순간에야, 다시 떠올린 것 같았다. 그때였다. “쿠미.” 조용한 목소리였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치코였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얼굴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쿠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망설였다. 그건 정말로 짧아서, 다른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응.” 대답은 평소와 같았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방금 전까지 나누고 있던 대화는 그대로 끊겼다. 그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다른 아이들도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끝났다. 쿠미는 사치코 쪽으로 걸어갔다. 망설임 없이.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항상 저 타이밍일까. 쿠미가 혼자 있을 때는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고, 아무도 그 아이를 끌어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이가 다른 곳에 닿으려는 순간마다, 사치코가 불렀다. 나는 시선을 조금 늦게 거두었다. 아니— 거두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아니야. 그건, 우연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었다. 그 아이가 우연히 그 타이밍에 부른 것뿐일 수도 있고, 내가 괜히 그렇게 보았을 뿐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비슷한 장면을, 몇 번 더 본 것 같았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분명히 같은 흐름이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그걸 이제 와서야 떠올리고 있었다. 쿠미가 혼
Huling Na-update: 2026-06-18
Chapter: 5th 교실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도 여전히 부드럽게 바닥을 스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익숙한 자리에서, 익숙한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 안에 섞여 있으면서, 어딘가 어색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굳이 생각해보려 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평소와 같은 하루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웠으니까.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쿠미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평소라면,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것이다. 특별한 의미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그리고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거나, 아무 말이나 한마디 건넸을 것이다. ...그런 순간이 오지 않았다. 쿠미는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니, 들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시선이 나를 향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그 이후의 시간도, 평소와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이어졌고, 아이들은 공책 위에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누군가는 졸았고, 누군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쿠미도 똑같이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아이는, 한 번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이름이 불릴 때만 고개를 들었고, 질문을 받으면 짧게 대답했다. 그 외의 순간에는, 그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처럼. 쉬는 시간이 되어도 쿠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면 대답은 했지만, 그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몇 마디 오가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장면이 몇 번이고 반복되자, 그건 더 이상 우연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걸 보면서도, 아무 생
Huling Na-update: 2026-06-17
Chapter: 4th 쿠미는 처음 봤을 때부터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다. 교실 안에는 더 화려한 아이들도 있었고, 말을 잘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사이에서 쿠미는 언제나 한 걸음쯤 뒤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먼저 나서지 않았고, 굳이 시선을 끌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한 번 눈에 들어오면 쉽게 잊히지 않는 아이였다. 머리는 일본인 표준이라기에는 조금 밝은 갈색이었고, 햇빛을 받으면 그 색이 더 옅어 보였다. 결이 고운 머리카락이 어깨 근처에서 부드럽게 떨어졌고, 움직일 때마다 아주 조금씩 흔들렸다. 전체적으로는 청초한 분위기의 미소녀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마치 봄바람에 스치는 제비꽃처럼, 특별히 꾸민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시선이 오래 머무르는 느낌이었다. 얼굴선은 또렷하다기보다는 부드러운 쪽에 가까웠다. 눈은 크고 맑았지만, 동시에 어딘가 힘이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그 시선이 완전히 닿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아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가끔씩 내가 혼자서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어딘가 조금 멀리 있는 사람처럼. 나는 그때의 쿠미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표정, 특별할 것 없는 말투. 그렇지만— 아주 미묘하게, 다른 아이들과는 어긋나 있는 느낌. 가까이 다가가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손을 뻗으면 조금 멀어져 있는 것 같은 거리. 그건 불편함이라기보다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굳이 그 거리를 좁히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그렇게 있어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넘겨버렸다. 그런데 지금의 쿠미를 보고 있으면, 그때와 같은 이유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달라진 건 많지 않았다. 머리도, 표정도, 말투도— 겉으로 보이는 것은 여전히 비슷했다. 여전히 조용했고, 여전히 먼저 나서는 일은 없었다. 웃을 때의 얼굴도,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아이는 더 이상 시
Huling Na-update: 2026-04-15
Chapter: 3rd 사치코는 특별한 아이였다. 그 사실을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교실 안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자연스럽게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아이가 자리에 앉으면, 주변의 소리는 아주 조금 가라앉았고, 누군가가 말을 꺼낼 때면— 이유 없이 한 번쯤 그 아이의 반응을 살피게 되었다. 그건 강요된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던 것처럼. 화족 중에서도 공작에 다음가는 작위, 소문에 따르면 지금도 전통 일본식 가옥에 살고 있다고 했다. 요코하마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형태의 집이었다. 그 집안에 걸맞은 교육,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고 있는 태도까지— 그 아이는 처음부터, 우리와는 다른 위치에 서 있었다. 말을 할 때의 속도, 시선을 두는 방식, 자리에 앉아 있는 자세 하나까지도— 어딘가 빈틈이 없었다. 과하게 꾸민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흐트러진 순간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항상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햇빛이 비치는 창가에 앉아 있을 때면, 그 아이의 모습은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검은 머리는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 드러나는 얼굴에는 쓸데없는 감정이 거의 담겨 있지 않았다. 웃을 때조차, 크게 변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아주 옅게, 필요한 만큼만. 그래서일까. 그 아이의 표정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기분이 들곤 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다음 날, 쿠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학교에 나왔다. 교문을 지나 교실로 들어오는 그 아이의 모습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조용한 걸음,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 그리고— 늘 보아왔던 그 미소까지. 그것만 보면, 어제의 공백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Huling Na-update: 2026-04-15
Chapter: 2nd 나는 한 발짝을 내딛으려다, 결국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생각보다 금방 보이지 않게 되었다. 따라가려면 지금이라도 갈 수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것도, 혼자 남는 것도 아닌 채로,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미 정해진 것처럼 보였던 두 사람의 흐름 속에서, 나만이 그 밖에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겨우 실감했던 것 같다. 나는 결국 교실을 나섰다. 복도에는 아직 몇몇 아이들이 남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각자의 자리로 흩어진 뒤였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바닥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나뭇잎 그림자가 조용히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 들리던 소란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있었다. 도서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가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이, 이상하게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문을 열자, 낮은 공기가 조용히 밀려왔다. 도서실은 한산했다. 창가 쪽 자리에 몇몇 아이들이 앉아 있었고,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옮겼다. 창가에서 두 번째 자리. 그곳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사치코는 등을 곧게 편 채 책을 읽고 있었고, 쿠미는 그 옆에 앉아 같은 페이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도, 특별히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이에는 틈이 없었다. 나는 책장을 넘기는 척하며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종이 위의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소리들이 또렷하게 귀에 들어왔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 연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 그리고— 아주 짧게 오가는 몇 마디의 대화. “여기, 이거.” 사치코의 목소리였다. 쿠미가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책을 들여다보았다. “아…” 짧
Huling Na-update: 2026-04-15
Chapter: 1st 나는 끝내 S의 의미를 해석하지 못한 채, 그 아이가 남긴 유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얇은 종이 위에 적힌 글자는 놀라울 정도로 단정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아이답게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치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몇 번이나 그 문장을 되짚어 읽었지만, 결국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알아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이유를— 지금도 나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거기서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낸 것처럼, 글을 써내려가던 손을 멈췄다. * * * 푸른 하늘 아래,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날의 우리들은 마치 5월의 햇살과도 같았다. 교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나무들의 연둣빛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운동장 한쪽에서는 체육 수업이 한창이었고, 창문 사이로는 피아노 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르지 않은, 그저 평범한 하루였다. 나는 하카마 치맛자락을 한 번 고쳐 잡고, 늘 다니던 복도를 따라 교실로 향했다. 나무 바닥을 밟을 때마다 규칙적인 발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이상할 정도로, 나는 그때 주변의 소리들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교실 문을 열자, 이미 몇몇 아이들이 자리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흘러나왔고, 창가 쪽에는 햇빛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빛 속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는 순간— 나는 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아, 츠루.” 내 시선을 눈치챈 듯, 그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부드럽고 단정한 목소리였다. “왜 그렇게 서 있어?” 나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냥.” 겨우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자, 교실 안의 소음이
Huling Na-update: 2026-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