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서른을 앞둔 평범한 회사원 키리시마 슌은 무료한 일상 속에서 주식 투자에 빠져든다. 작은 수익이 만들어낸 감각은 점점 그의 삶을 잠식해간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회사 신입사원 아마네 미호와 마주친다. 단정한 외형과 달리 어딘가 위태로운 그녀. 두 사람의 관계는 돈과 욕망, 통제와 파괴가 얽히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Voir plus어른이 된다고 해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가. 서른 살이 되면, 집이 있고, 차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있을 거라고. 그게 보통의 사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스물아홉 살이다. 도쿄 외곽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평범하다. 집은 말할 것도 없고, 매일 아침 8시 전철에 몸을 실어 출근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은 커녕, 연애조차 없다. 아니, 그보다도— 통장 잔고를 확인할 때마다 한숨부터 나오는 삶에 익숙해진 내가 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여자친구가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다가 슬슬 결혼 준비를 시작하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를 꺼냈는데, 그녀의 대답은 계획 밖이었다. "넌... 뭔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이프로 접시 위의 음식을 천천히 잘랐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는 한참 동안 앉은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그녀의 말. 잠시 뜸을 들이다 완전히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 채로 내뱉었다. "그럴지도..." “그래서… 나도 더는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 그녀는 끝까지 내 눈을 보지 않았다. 접시 위의 음식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른의 시간이라는 건 원래 그렇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학 시절까지는 달랐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학년이 올라갔다. 주어진 공부를 하고, 과제를 하고, 그 나이대에 맞는 과정을 밟아가며 마치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생이 게임이라면, 대학 시절까지는 튜토리얼이다. 그 이후부터가 본편이다. ...어쩌면 나는, 그 게임에 적성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현관문을 열면 아무도 없다. 이 집에는 나 혼자 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사이타마의 주택가에 있는 다소 허름한 1K 원룸이다. 침대와 얇은 이불, 그 옆에는 작은 책상과 컴퓨터가 있다. 주방이 있지만 거의 쓰지 않는다. 주로 컵라면과 편의점 음식을 먹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그나마 장점이라고 한다면 근처 역까지 멀지 않다는 점 정도. 이제야 생각이 났는데, 택배 상자를 버리기로 해놓고 그냥 출근해버렸다. 지금 버려도 되겠지만— 귀찮으니 내일 버릴까. 오늘은 쌓여 있는 빨래부터 해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지금이 몇 시지. 휴대폰을 켰다. 이 시간에도 아직 해가 떠 있는 걸 보면 슬슬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는 모양이다. 빨래를 대충 세탁기에 넣어두고, 전원을 눌렀다. 돌아가는 소리를 잠시 듣다가, 자연스럽게 책상 앞에 앉았다. 컴퓨터는 이미 켜져 있었다. 화면에는 오늘의 종가(終價)가 떠 있었다. 화면 속 숫자는 이미 움직임을 멈췄지만, 시선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장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늘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마우스를 움직여 종목 하나를 눌렀다. 오늘 하루 종일 눈에 밟히던 종목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몇 번이나 차트를 열어봤다는 것만으로,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내일은 오를 것 같다. 근거는 없었다. 뉴스도, 실적도,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커서를 매수 버튼 위에 올려놓는다. 손이 멈췄다. 이 정도 금액이면 큰 부담은 아니다. 잃어도 괜찮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손가락 끝이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클릭 한 번일 뿐인데. …아니,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괜히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그리고— 클릭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화면에는 ‘주문 완료’라는 문구가 떴다. 그것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앨범 CD를 컴퓨터에 넣었다. 곡 제목은 시이나 링고의 마루노우치 새디스틱(丸の内サディスティック). 음악이 흘러나오며 내 손은 책상을 가볍게 톡톡 치고 있었다. 늘 듣던 음악인데도, 오늘따라 이상하리만큼 가사가 마음에 와닿았다. 보수는 입사 후 거의 평행선이고, 도쿄는 사랑해도 아무것도 없고, 지금 수입으로는 미래에 원하는 만큼 풍족하게 생활할 수도 없다. 참으로 목표도 없고 희망도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지난주부터 문득 내 눈을 사로잡아버린 것이 있었으니... 화면 한쪽에 켜져 있던 증권 프로그램이었다. 장은 이미 끝났는데도, 차트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선들이 오르내리고 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주식이었다. 화려했던 버블이 끝나고, 세기말을 지나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사람들은 여전히— 인생이 한 번쯤은 바뀔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같은 전철을 타고, 같은 자리 근처에 서 있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도, 머릿속에는 어제 보던 차트가 떠올랐다. 그 종목— 오늘은 오를까. 아무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어제도, 그 전날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신경이 쓰였다. 점심시간. 식당 한쪽에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확인해보고 싶었다. 화면에는 빨간 숫자가 떠 있었다. 잠시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른 건가. 다시 한 번 숫자를 확인했다. 분명, 어제 내가 매수했던 가격보다 위에 있었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금액은 크지 않았다. 점심 한두 끼 정도의 차이.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물을 마시고 식당에서 나와 회사로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동료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좋은 일 있냐?”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아니, 그냥.” 짧게 대답하고는 시선을 피했다.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야.” 동료의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우리 부서에 신입 들어온대. 진짜 예쁘다던데?” 나는 잠시 그 말을 듣고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아직도 아까 봤던 숫자가 남아 있었다. “…그래?”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다시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이미 시세는 변해 있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해보고 싶었다. 퇴근길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같은 전철, 같은 풍경. 집에 도착해 계단을 올라가는데, 복도에 낯선 짐들이 놓여 있었다. 이사인가. 잠깐 그렇게 생각하고는, 별다른 관심 없이 지나쳤다. 현관문 앞에서 열쇠를 꺼내려는데, 옆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나와 비슷한 타이밍에 집에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힐끗 옆을 봤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신발을 벗어던졌다. 불을 켜지도 않은 채, 곧장 책상 앞으로 향했다.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른다. 잠깐의 로딩. 그 짧은 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화면이 켜지자마자, 나는 곧바로 증권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화면 속 숫자는 이미 한 번 나를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다. 오늘 낮에 봤던 그 가격. 그때 샀더라면— 그런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차트를 다시 열었다. 조금 더 올라 있었다. 이유는 없었다. 왜 오른 건지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마우스를 움직인다. 매수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려놓고, 잠깐 숫자를 확인했다. 어제보다 조금 더 큰 금액. 이 정도면 괜찮겠지. 스스로에게 묻는 동시에,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클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문 완료’라는 문구가 뜬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심장은 어제보다 조금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알람 시계를 실수로 30분 늦게 맞춰놓고 자버린 것이다. 급하게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데, 어제 처음 봤던 여자와 또 다시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여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아, 네.”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어질 말은 없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30분이나 늦었기 때문에, 전철 역까지 최대한 속도를 높혀 뛰어갔다. 좋아, 이 정도면 지각은 면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드는 순간, 아까 그 여자의 뒷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같은 방향이었다. 그녀도 전철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정한 속도로 앞서 걷고 있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괜히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따라갈 생각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시야에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어깨를 조금 넘는 길이의 웨이브펌을 하고 있었다.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였지만, 흐트러짐 없이 정돈되어 있었다. 회색 정장에 검은색 하이힐. 특별할 것 없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회사원 차림이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딱 출근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의 속도였다. 그리고 전철이 들어왔다. 밀려 들어가듯 사람들 틈에 섞여 올라타고 나서야, 다시 그녀를 발견했다. 문 옆,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별다른 생각 없이 그쪽을 바라봤다. 그때— 전철이 흔들리며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생각보다, 굉장한 미인이다. 그걸 인식하는 데까지는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한 번 본 얼굴이 쉽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아까의 일은 이미 지나간 일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메일을 확인하고, 오늘 처리해야 할 업무 목록을 훑어본다. 그러다 문득, 아까 전철에서 봤던 얼굴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굉장한 미인이었다. 그 정도로 정리하고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커피를 한 잔 뽑아 들고 자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무실 한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된 신입입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별생각 없이 그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멈췄다. 아까 전철에서 마주쳤던, 그 여자였다. 같은 회색 정장. 같은 표정. 다만 이번에는, 더 가까운 거리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짧은 인사 한마디가, 이상하게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커피를 들고 선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기소개 한 번 해주실래요?” 누군가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녀는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시선을 정리하듯 아래로 내렸다. “…” 짧은 침묵. 그리고— “아마네 미호입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 한마디로 충분하다는 듯, 그녀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 같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 나는 그 이름을 속으로 한 번 되뇌었다. 아마네 미호. 그 순간, 아까 전철에서 마주쳤던 얼굴과,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완전히 같은 사람으로 이어졌다.아마네의 서늘한 명령은 내 온몸을 전율케 했다. 나는 다시 그녀의 몸을 핥으며, 수치심에 젖은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내게 허락된 것은 오직 그녀를 만족시키는 것뿐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순간보다 선명하게 머릿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녀의 명령에 따라 나는 더욱 필사적으로 혀를 움직였다. 그녀의 살결은 매끄럽고 따뜻했으며, 혀끝으로 전해지는 감각은 묘한 중독성을 띠고 있었다. 아마네는 내 머리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자신의 몸으로 나를 강하게 밀착시켰다. 내가 정신없이 그녀의 몸을 탐하는 동안, 아마네는 발끝에 힘을 주며 뒤로 살짝 젖혀졌다. 그녀의 신음이 방 안의 정적을 깨뜨리며 낮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나를 내려다보며 차가우면서도 쾌락에 젖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목줄을 쥔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더... 더 깊게 굴어.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게 뭔지 잊지 마. 넌 내 것이고, 내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그녀의 서늘한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수치심과 알 수 없는 정복감에 휩싸여, 그녀가 원하는 대로 더욱 거칠고 집요하게 그녀의 은밀한 곳을 핥아 올렸다. 방 안의 공기는 그녀의 체향과 내 숨소리로 가득 찼고,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완전히 종속된 채 기이한 정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마네의 호흡이 거칠어짐에 따라 그녀가 쥐고 있던 목줄의 장력도 점점 더 강해졌다. 내 목을 압박하는 가죽의 감각이 뇌를 찌릿하게 자극하며, 마치 내 모든 자아를 그녀의 손안으로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가락에 힘을 주며, 내 고개를 자신의 몸에 더욱더 밀착시켰다. "더 잘해봐. 지금 네가 핥고 있는 그 맛, 잊지 않게 뇌에 새겨놔." 그녀의 도발적인 말에 내 혀는 마치 홀린 듯 더 집요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뜨거운 살결이 내 입안에 가득 찼고, 나는 수치심마저 쾌락의 일부로 삼켜버린 채 그녀가 원하는 박자에 맞춰 리듬을 탔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
그녀의 질문은 물음이 아니라 통보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 한가운데, 노을이 져 가는 창가 옆에 나를 세워둔 채 아마네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팽팽하게 당겨진 목줄 너머로 그녀의 향수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사무실의 건조한 공기와는 완전히 다른, 어딘가 아찔하게 밀폐된 향이었다. 아마네의 시선이 내 셔츠 깃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내가 입고 있는 이 평범한 사무용 셔츠조차 감당하기 어렵다는 듯, 노골적이고도 차가운 비판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잡고 있던 목줄을 살짝 풀어주는가 싶더니, 곧 내 셔츠의 첫 번째 단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이런 넥타이, 이런 셔츠... 정말이지, 회사원답게 지루하기 짝이 없네." 그녀의 손가락이 단추 하나를 능숙하게 풀어냈다. 차가운 공기가 벌어진 틈으로 스며들어 살갗에 닿았다. 나는 숨을 멈춘 채, 거부할 수 없는 그녀의 손길을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아마네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나머지 단추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풀어내려 갔다. "전부 벗어. 그 답답한 셔츠도, 네가 쓰고 있는 그 평범한 가면도." 그녀의 손끝이 마지막 단추를 풀어내자 셔츠가 양옆으로 힘없이 벌어졌다. 아마네는 셔츠 자락을 움켜쥐고 단번에 옆으로 밀어내며, 내 어깨를 거칠게 밀어 뒤로 물러나게 했다. 바닥으로 셔츠가 힘없이 떨어지는 소리가 적막한 거실에 건조하게 울렸다. "이제 조금은... 내게 보여줄 준비가 된 것 같네." 아마네는 만족스러운 듯, 목줄을 잡고 있던 손을 들어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반쯤 풀린 셔츠 사이로 드러난 내 맨살 위로,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마치 낙인을 찍듯 머물렀다. 이제 나는 그녀의 공간에서, 그녀가 원하는 방식대로만 존재해야 하는 하나의 피사체가 된 것만 같았다. 아마네는 내 상체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녀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마치 뜨거운 열기가 스치듯
월요일 아침. 출근길 전철은 평소처럼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손잡이를 잡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회색 건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스쳐 지나갔다.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어젯밤 늦게 잠든 탓일까. 아니면, 잠들기 전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오래된 기사 때문일까. 나는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지모토그룹 장남의 아내.'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던 기사. 그 짧은 제목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괜한 생각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몇 년 전 일이다. 그것도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였다. 더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일부러 고개를 저었다. 전철이 천천히 감속하기 시작했다. 곧 회사가 있는 역이었다. 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익숙한 걸음으로 승강장으로 쏟아져 나갔다. 나 역시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개찰구를 향해 걸었다. 오늘도 평소와 다르지 않은 월요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공기가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이미 몇몇 직원들이 줄을 서 있었다. 누군가는 커피를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신문을 접어 가방에 넣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줄 끝에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하나둘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층수를 바라봤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기계가 움직이는 진동만이 발끝으로 희미하게 전해졌다. 잠시 뒤 익숙한 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사무실로 흩어졌다. 나도 가방을 멘 채 조용히 내 자리로 향했다. 컴퓨터를 켜고 의자에 앉았다. 본체가 낮은 소리를 내며 부팅되는 동안, 나는 무심코 사무실 안을 한 번 둘러봤다. 아직 출근하지 않은 직원도 몇 명 보였다. 그리고 창가 쪽 자리. 아마네의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시계를 올려다봤다. 출근 시간까지는 아직 몇
일요일 오후. 나는 침대에 등을 대고 천장을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딱히 보고 싶은 프로그램은 없었다. 채널만 몇 번 바꾸다가 결국 손을 멈췄다. TV에서는 주말 예능 프로그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출연자들의 웃음소리가 좁은 방 안을 채웠지만, 이상하게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베개를 조금 끌어안은 채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나는 리모컨을 집어 들어 채널을 하나 넘겼다. 주말 예능 대신 경제 뉴스가 화면에 나타났다. 앵커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번 주 증시를 정리하고 있었다. 화면 아래로 주가 지수가 천천히 흘러갔다. 익숙한 숫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자, 나는 무심코 몸을 조금 일으켰다. "..." 손은 이미 휴대전화를 향하고 있었다. 증권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일은 이제 거의 습관이었다. 익숙한 종목명이 화면에 나타났다. 나는 천천히 차트를 훑었다. 지난주 금요일 종가. 거래량. 이동평균선. 그리고, 문득 손이 멈췄다. '...적어야 하나.'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기록하고 싶었다. 어제처럼. 아니, 정확히는 그 사람 앞에서 했던 것처럼.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작은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펜꽂이에서 볼펜을 꺼내고, 습관처럼 서랍을 열었다. ...없었다. 한 번 더 안을 들여다봤다. 영수증 몇 장, 사용하지 않는 충전기, 낡은 계산기. 그뿐이었다. 그제야 아주 천천히 기억이 떠올랐다. "...아." 노트. 내 주식 노트는. 아직 아마네의 집에 있었다. 나는 열린 서랍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내 것이었다. 몇 년 동안 직접 적어 온 기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그 노트가 내 방이 아니라 그녀의 집에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에 가면 이어서 쓰면 되겠네.' 그 생각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떠오른 순간이었다. 나는 볼펜을 쥔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 그제야 아주 늦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서랍을 닫았다. 철컥.
나는 손을 그대로 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요구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이미 괜찮은 걸로 정해진 것처럼. 아마네 씨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닿아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언제든 다시 닿을 수 있는 거리.“기억하고 계세요?” 갑자기 물었다.나는 잠깐 고개를 들었다. “뭐를…”말을 흐리자, 그녀는 아주 조금 눈을 좁혔다.“대가요.” 짧게 말했다.그 한마디에, 머릿속이 잠깐 멈췄다. 카페에서의 대화가,그대로 떠올랐다.“손해는 안 보게 해드릴게요.”나는 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네.”짧게
카페는 회사에서 몇 분 떨어진, 평범한 곳이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라 그런지,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마주 보는 자리. 주문은 간단했다. 나는 아메리카노,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같은 걸 골랐다. 커피가 나오기까지, 대화는 없었다. 시선을 둘 곳이 애매했다. 창밖을 보다가, 테이블을 보다가, 결국 다시 그녀를 보게 된다. 아마네 씨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자주 오세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요.” 짧은 대답. 그걸로 끝이었다. 다시 조용해졌다. 커피가 나
전철에 올라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창문 밖 풍경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면, 언제나 도쿄에 도착해 있었다.사람들 틈에 섞여 플랫폼으로 내려섰다.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발걸음들. 누구 하나 멈추지 않고, 누구 하나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렇게 생각했는데. 시야 한쪽에, 낯익은 머리색이 스쳤다. 밝은 갈색. 어깨를 넘는 길이의 웨이브 머리.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아마네 씨였다.
회사에 출근해서도 주식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해야 할 일들을 잠시 미뤄둔 채, 나는 아무 의미도 없이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분명 업무용 메일을 읽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어제 봤던 차트가 계속 떠올랐다.테이블 위에 커피 한 잔을 올려놓고, 간단한 업무부터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파일을 열고, 숫자를 정리한다. 익숙한 작업이었다. 몸은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다시 읽고 나서야, 내가 방금 무슨 내용을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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