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아버지의 빚으로 벼랑 끝에 선 유설화는 권력과 비밀을 쥔 남자 서강현과 위험한 거래를 시작한다. 서로를 이용하려던 관계는 점차 감정으로 변하고, 설화는 강현의 세계 깊숙이 끌려 들어간다. 정치와 돈, 배신이 얽힌 그곳에서 그녀는 그의 약점이자 표적이 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끝내 놓지 못한다.
Ver más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여름의 문턱을 먼저 넘어와 있었다. 인문관 계단은 오후 햇살을 오래 머금어 뜨끈했고, 문을 나서는 순간 에어컨의 냉기는 금세 뒤로 밀려났다. 잔디밭 위로 흘러가는 바람마저 미지근했다.
"아… 더워. 진짜 여름 됐네." 설화는 손에 든 과제물을 부채처럼 파닥이며 인문관을 나섰다. 프린트 가장자리가 손바닥을 스칠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방금 전까지 강의실 안에서 교수님 목소리에 졸음 섞인 집중을 붙들고 있던 애들이 맞나 싶게 캠퍼스는 벌써 한껏 풀어진 분위기였다. 잔디밭에는 삼삼오오 모여 앉은 학생들이 있었다. 편의점 아이스커피를 들고 수다를 떠는 애들과 슬리퍼를 벗어 둔 채 그늘 아래 퍼져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축제는 진작 끝났는데도 한쪽에는 아직 철거하지 못한 현수막이 여름 바람에 축 늘어진 채 매달려 있었다. 유설화도 그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시험이랑 과제, 알바 시간표, 그리고 가끔 친구들 연애사까지. 그런 걸로 하루가 일상인 스물한 살. "야, 유설화!"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설화가 고개를 돌리자 채유정이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친 채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뛰어온 사람치고는 숨보다 표정이 먼저 앞섰다. 유정은 오자마자 설화 팔을 덥석 붙잡았다. "너 어디 가? 지금 다 같이 카페 간다는데." "나 알바." "또?" "응." 설화가 너무 태연하게 말하며 픽 웃자, 한순간 유정의 표정이 구겨졌다. "너 진짜 알바가 네 연인인 줄 안다?" "연인은 돈 주는 쪽이 맞지." "아, 진짜 얘 말하는 거 봐." "돈 벌어야 살아. 누가 대신 벌어주냐." "너는 매번 말을 해도 꼭." 설화는 어깨를 으쓱했고, 유정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고는 괜히 운동화 끝으로 잔디를 툭툭 찼다. "너 오늘도 야근 알바야?" "응." "미쳤다. 사람 사는 거 맞냐?" "사람이니까 가는 거지." "하여간 한마디도 안 져." 유정이 한숨을 푹 쉬었다. 설화는 그런 반응이 익숙했다. 안쓰럽다며, 힘들겠다며 바라보는 얼굴. 설화는 그래서 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너야말로 어디 가는데? 카페?" "그놈한테 사과받으러." "남친한테 그놈이 뭐야." "됐고, 네가 뭘 알아." "그래. 내가 뭘 알겠냐. 너희는 싸우고 붙고 싸우고 붙고 아주 바쁘던데." "그게 연애야." "연애의 달인 나셨네." 설화가 혀를 차자 유정이 눈을 흘겼다. 하지만 그 눈에 큰 힘은 별로 없었다. 채유정, 김민철. 학과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시끄러운 커플이었다. 싸우는 것도 요란했고, 화해하는 것도 요란했다. 둘이 지나간 자리는 늘 작은 드라마 한 편이 지나간 것처럼 소란스러웠다. 설화는 손에 든 과제물을 다시 흔들며 툴툴거렸다. "징그럽다. 적당히 좀 싸워. 애인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냐." "애인 없는 네가 승자일 수도 있어." "방금까지 사과받으러 간다는 사람이 할 말이냐?"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연애? 해봐. 생각보다 별거 없다." "별거 아닌 걸 왜 그렇게 난리 치는데." 유정이 잠깐 말문이 막힌 얼굴을 했다. 그러다 곧 입꼬리를 씰룩이며 설화의 팔을 툭 쳤다. "너 은근히 사람 찌르는 거 잘한다?" "아니, 순수하게 궁금해서." "순수 같은 소리 하네. 너도 남친 생기면 안다." "뭘?" "좋다가도 짜증 나고, 짜증 나다가도 보고 싶고. 그러다 내가 미친 건가 싶고." "복잡하네." "응. 복잡해. 그러니까 하지 마. 언니 말 들어." "그럼 좋은 건 하나도 없어?" 설화가 장난스럽게 묻자, 유정이 슬그머니 한 걸음 다가서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지금 뭐가 듣고 싶은데?" "그냥… 좋은 거." "이게. 홀랑 까져가지고." "야!" 둘은 동시에 웃었다. 별것도 아닌 농담인데 웃음이 쉽게 났다. 유정의 볼은 더워진 공기 때문인지, 방금까지의 연애 타령 때문인지, 설화도 손등으로 뺨을 한번 문질렀다. 뜨거웠다. 매미 소리는 여전히 시끄러웠고, 캠퍼스 어디선가 누군가 크게 웃는 소리가 났다. 그늘 아래 앉은 학생들은 앞으로도 이런 오후가 계속될 것처럼 느긋했다. 설화는 그 소란 속에서 잠시 걸음을 늦췄다. 곧 아르바이트에 가야 했다. 유니폼을 걸친 채, 웃는 얼굴을 꺼내고, 계산대를 지키고, 끝나면 늦은 밤 버스를 타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캠퍼스 안이었다. 과제물이 손에 들려 있었고, 친구가 옆에서 투덜거렸다. 여름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야, 진짜 간다. 늦으면 점장님 또 잔소리해." "끝나면 연락해." "네 남친 욕 들어주는 건 추가 요금이야." "그래, 돈독 오른 인간아. 진상 조심하고." "너나 조심해. 화해하다 쓰러지지 말고." 설화가 농담을 던지며 손을 흔들자, 유정은 얼굴을 붉히며 꿍얼거렸다. "야, 너 지금 그 말 일부러 했지?" 설화는 웃기만 한 채 뒤돌았고, 유정은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와 입술만 깨물었다. 이 시끄러운 매미 소리와 눅진한 오후, 친구와 주고받은 별것 아닌 농담들이 그저 평범하게 여름의 한 장면으로 남을 줄만 알았다. 지금은.삼 일이 지나도록 그 사람에게서 연락 한 통 없었다. 물건 배송이라고 뻔질나게 전화하던 사람이었다.처음 하루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강현은 애초에 타인에게 다정한 온기를 내어주는 부류가 아니라는 걸. 그런데 이틀째가 되자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스마트폰으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검게 꺼진 액정 앞에서 설화는 몇 번이나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사흘째가 되던 날, 그녀는 결국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지금 그 오만하고 위험한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이 너무 초라해서, 설화는 자신을 더 바쁘게 몰아붙였다.부르릉, 낮은 기계음과 함께 오토바이가 골목 앞에 멈췄다. 설화가 낮 동안 붙잡은 일은 배달 대행이었다. 정해진 출근 시간도 없고, 오래 붙잡아 둘 상사도 없는 일. 콜만 받으면 움직이고, 필요 없으면 앱을 끄면 그만인 일. 그 남자가 부르면 달려가야 하기에.그 선택이 스스로 우스웠다. 아무 약속도 없는 사람이, 오직 한 사람의 연락 하나를 기다리겠다고 하루를 비워 두는 꼴이라니.“또 오셨네요, 기사님.”골목 초입의 분식집 주인이 붉은 플라스틱 테이블 위로 포장 봉투를 놓으며 넉살 좋게 아는 체를 했다. 설화는 헬멧 끈을 거칠게 조이며 입꼬리만 겨우 올려 웃었다.“근처에 콜이 자주 잡혀서요.” “요즘 아주 자주 보이시네. 바쁜가 봐요.” “네. 그냥…… 시간이 좀 남아서요.”설화는 봉투를 배달 가방에 넣으며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사실은 시간을 맞추는 게 아니라 비워 두는 중이었다. 누군가 부르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어떤 약속에도 묶이지 않도록.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설화는 무심코 화면을 확인했다. 배달 앱 알림 두 개, 카드 승인 문자 하나,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기다리는 거 아니야.작게 중얼거린 말에 헬멧 안
전통 창살 사이로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최고급 한정식집, 담초.상 위에는 코스 요리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지만, 테이블을 사이에 둔 두 남자는 좀처럼 손을 대지 않았다. 서강현은 맞은편의 박 회장을 응시한 채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방 안을 채운 건 숨 막힐 듯 묵직한 침묵뿐이었다.강현은 잔을 들어 목을 축인 뒤,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그러나 도자기가 받침에 닿는 순간 맑은 울림이 오히려 공기의 긴장을 더 또렷하게 드러냈다.“서 대표, 본론으로 들어가지.”박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어조에는 노련한 여유가 묻어 있었다. 강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 단계에서 미래드림이 주도권을 내려놓을 이유는 없습니다. 회장님도 이미 수익 구조와 리스크는 검토하고 오셨을 텐데요.”“자네가 상황을 단순하게 보는군.”박 회장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내가 어떤 카드까지 고려하고 있는지, 정말 모른다고 생각하나?”강현은 짧게 시선을 내리며 서류를 넘겼다. 감정 대신 숫자를 꺼내 드는 태도였다.“그렇다면 확인하죠. 자금 운용은 어느 라인으로 정리하실 계획입니까.” “기존 루트를 유지한다. 다만 변수를 대비해 우회 계좌 하나를 추가로 확보할 생각이야.” “익명 계좌 말씀이시군요.”강현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이미 그 가능성을 계산에 넣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리스크 분산 측면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다만 추적 가능성은 최소화해야 합니다. 최근 규제가 강화됐으니까요.”박 회장이 옅게 웃었다.“그 정도 대비 없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나?” “아니요. 그래서 이렇게 직접 뵙고 조건을 맞추는 겁니다.”박 회장은 망설임 없이 서류에 서명했다.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이미 결론은 굳어진 분위기였다. 강현이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시선은 끊임없이 맞물렸다. 상대의 의도를 읽고, 빈틈을 가늠하며, 다음 수를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식탁 위에는 정갈한 요리가 놓여 있었지만, 그 아래에서는 수십억 단위의 이해관계
강현은 고요가 내려앉은 호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방금 전까지 남아 있던 열기는 몸 어딘가에 얇게 붙어 있었지만, 복도의 공기는 차가웠다. 거울 속에는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과 오차 없이 반듯하게 떨어진 넥타이, 정돈된 슈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구두 굽 소리가 서늘했다. 자동문이 열리자 날카로운 새벽 공기가 목덜미를 스쳤다.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지만, 바로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저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멈춰 섰다.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드는 밤의 잔열이 가슴속을 무겁게 눌렀다.신호등 앞에 멈춰 서서 가로등 불빛을 응시하던 강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불현듯, 제 입으로 설화에게 내뱉었던 조소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부서진 사람은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해.오만한 확신이었다. 그녀를 완전히 제 손아귀에 뒀다고 생각했는데, 손끝이 이상하리만큼 시렸다. 강현은 잇새로 거친 숨을 뱉으며 지포 라이터를 켰다. 챙,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불꽃이 일렁였다.“하여간에, 씨발.”낮게 읊조린 욕설이 연기와 함께 흩어졌다. 그래도 속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방 안에 남겨 둔 여자, 테이블 위에 놓아둔 카드,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걸어 나왔는데도 끝내 떨어지지 않는 체온의 잔상.강현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담배 끝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타들어 갔다. 붉은 점 위로 잠깐, 침대 위에 혼자 남아 있던 물끄러미 쳐다보던 여자의 얼굴이 겹쳤다.하지만 그는 곧장 잡념을 털어냈다.통유리창 너머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밀려들 때, 벽면의 디스플레이에서는 건조한 경제 뉴스가 흘러나왔다. 강현은 평소와 다름없이 정해진 루틴을 시작했다. 40분간의 웨이트 트레이닝. 쇳덩이가 맞물리는 묵직한 금속음이 거실을 채웠다.이어서 러닝머신의 벨트가 세차게 돌기 시작했다. 강현은 속도를 높였다. 20분. 체온이 달아오르고 땀방울이 턱선을 타고 떨어졌다. 화면 속 앵커는 환율과
카드키가 삑, 하고 낮게 울렸다. 문틈 사이로 먼저 들어온 조명은 너무 깨끗했다. 흰 침구, 반듯한 테이블, 검은 가죽 의자, 가지런히 놓인 잔. 모든 것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준비되어 있었다. 설화는 그 정돈된 방이 오히려 불편했다. 이곳에서는 자신만 흐트러져 보일 것 같았다.문이 닫히자 낯선 향이 코끝을 스쳤다. 강현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설화를 침대 쪽으로 이끌었다. 서두르지는 않았지만, 걸음마다 손끝의 힘은 분명했다.“앉아.”설화가 침대 끝에 앉자, 강현이 물 한 잔을 따라 건넸다. 유리잔 바깥에 맺힌 물방울이 조명 아래 작게 빛났다.“마셔. 얼음은 뺐어.”설화는 잔을 받아 들었다. 손가락에 닿은 유리의 차가움이 잠깐 전해졌다. 강현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그녀가 잔을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자, 손을 뻗어 그것을 정리하듯 옮겨 두었다.이어서 그녀의 손등 위로 손을 얹었다. 아주 짧은 스침이었지만, 그 뒤로 이어질 움직임은 이미 정해져 있는 듯했다.그제야 강현은 조금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설화가 숨을 삼키는 순간, 그는 그녀를 천천히 침대 위로 눕혔다. 시트가 구겨지는 소리가 작게 났다. 그의 손이 옆구리에 닿는 순간, 설화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찰나의 변화를 느낀 강현이 멈췄다.“그만할까?”그 말은 다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잔인하게 들렸다. 선택권을 내어주는 듯하면서도, 이미 자신이 어디까지 와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설화는 대답 대신 그의 셔츠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말로 해.”“그만두자는 뜻 아니에요.”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강현은 한동안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낮췄다. 입술이 목선 가까이에 닿았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웠다. 확인하듯 스치고, 기다렸다가, 설화가 피하지 않으면 조금 더 깊어졌다. 그의 숨결이 귀에 스칠 때마다 설화는 저도 모르게 시트를 움켜쥐었다.원피스의 지퍼가 천천히 내려갔다. 차가운 공기가 맨살에 닿자, 설화의 숨이 가늘게 흔들렸다. 강현은
축 늘어진 설화를 품에 안은 채, 강현은 빗속을 가로질렀다. 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의식 없는 몸 하나쯤 옮기는 일에 버거움을 느낄 남자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품 안에 닿은 체온이 신경을 거슬렀다. 그런데도 그 작고 힘없는 무게가 불쾌할 만큼 선명하게 남았다.강현은 설화를 조수석에 눕힌 뒤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벨트가 가느다란 몸 위로 걸리는 순간,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마치 그 멈칫거림조차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그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뒷좌석의 재킷을 집어 들었다.축축하게 젖은 상체 위로 재킷을 덮어 주는
설화는 다리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빗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목덜미 아래로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손끝은 점점 차가워지고, 온몸이 젖어들수록 오한이 몸을 감싸 안았다. 가로등 불빛마저 거센 빗속에서 흐릿하게 번져 눈앞을 어지럽혔다.그 순간, 머리 위로 툭— 소리와 함께 암전처럼 검은 우산이 펼쳐졌다."그래서… 여기서 끝낼 생각이야?"낯설지만 낮고 묵직하게 깔리는 남자의 목소리. 설화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며 천천히 남자를 응시했다.우산 아래 서 있는 남자는 빗물에 젖은 검은 셔츠 사이로 단단한 어깨를 드러낸 채
밖으로 나오자 낮의 열기는 간데없이 습하고 차가운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오늘따라 유독 부치는 몸에 남은 것은 뼈마디를 파고드는 피로와 공허함뿐이었다.조금만 더. 진짜 조금만 어떻게 버티면…….그렇게 되뇌면서도, 정작 버티고 난 끝에 자신에게 뭐가 남아 있을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텅 빈 미래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툭 꺼져 내리듯 아팠다.가방끈이 젖은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무게보다 마음 한구석에 뚫린 구멍이 더 무겁고 저릿하게 가라앉았다.어느새 멈추었던 비가 다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비 오는 거리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목적지인 고깃집 앞에 도착했다. 설화는 낡아빠진 우산을 접고, 눅눅해진 옷을 추슬렀다. 기름진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후끈한 열기와 고기 냄새, 연기가 한꺼번에 얼굴을 덮쳤다.사장님이 설화를 보고 눈짓으로 인사했다. 가게 안은 이미 손님들로 북적였고, 빈 테이블 위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굳은 고기와 빈 소주병, 흩어진 쌈 채소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불판을 들고 움직이던 지원 언니가 설화를 보자 장난스럽게 볼을 한 번 잡아당기며 피식 웃었다."왔어? 오늘따라 손님 오지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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