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화 울리지 않는 전화삼 일이 지나도록 그 사람에게서 연락 한 통 없었다. 물건 배송이라고 뻔질나게 전화하던 사람이었다.처음 하루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강현은 애초에 타인에게 다정한 온기를 내어주는 부류가 아니라는 걸. 그런데 이틀째가 되자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스마트폰으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검게 꺼진 액정 앞에서 설화는 몇 번이나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사흘째가 되던 날, 그녀는 결국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지금 그 오만하고 위험한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이 너무 초라해서, 설화는 자신을 더 바쁘게 몰아붙였다.부르릉, 낮은 기계음과 함께 오토바이가 골목 앞에 멈췄다. 설화가 낮 동안 붙잡은 일은 배달 대행이었다. 정해진 출근 시간도 없고, 오래 붙잡아 둘 상사도 없는 일. 콜만 받으면 움직이고, 필요 없으면 앱을 끄면 그만인 일. 그 남자가 부르면 달려가야 하기에.그 선택이 스스로 우스웠다. 아무 약속도 없는 사람이, 오직 한 사람의 연락 하나를 기다리겠다고 하루를 비워 두는 꼴이라니.“또 오셨네요, 기사님.”골목 초입의 분식집 주인이 붉은 플라스틱 테이블 위로 포장 봉투를 놓으며 넉살 좋게 아는 체를 했다. 설화는 헬멧 끈을 거칠게 조이며 입꼬리만 겨우 올려 웃었다.“근처에 콜이 자주 잡혀서요.” “요즘 아주 자주 보이시네. 바쁜가 봐요.” “네. 그냥…… 시간이 좀 남아서요.”설화는 봉투를 배달 가방에 넣으며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사실은 시간을 맞추는 게 아니라 비워 두는 중이었다. 누군가 부르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어떤 약속에도 묶이지 않도록.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설화는 무심코 화면을 확인했다. 배달 앱 알림 두 개, 카드 승인 문자 하나,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기다리는 거 아니야.작게 중얼거린 말에 헬멧 안
Terakhir Diperbarui: 2026-07-31
Chapter: 32화 차가운 계산전통 창살 사이로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최고급 한정식집, 담초.상 위에는 코스 요리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지만, 테이블을 사이에 둔 두 남자는 좀처럼 손을 대지 않았다. 서강현은 맞은편의 박 회장을 응시한 채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방 안을 채운 건 숨 막힐 듯 묵직한 침묵뿐이었다.강현은 잔을 들어 목을 축인 뒤,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그러나 도자기가 받침에 닿는 순간 맑은 울림이 오히려 공기의 긴장을 더 또렷하게 드러냈다.“서 대표, 본론으로 들어가지.”박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어조에는 노련한 여유가 묻어 있었다. 강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 단계에서 미래드림이 주도권을 내려놓을 이유는 없습니다. 회장님도 이미 수익 구조와 리스크는 검토하고 오셨을 텐데요.”“자네가 상황을 단순하게 보는군.”박 회장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내가 어떤 카드까지 고려하고 있는지, 정말 모른다고 생각하나?”강현은 짧게 시선을 내리며 서류를 넘겼다. 감정 대신 숫자를 꺼내 드는 태도였다.“그렇다면 확인하죠. 자금 운용은 어느 라인으로 정리하실 계획입니까.” “기존 루트를 유지한다. 다만 변수를 대비해 우회 계좌 하나를 추가로 확보할 생각이야.” “익명 계좌 말씀이시군요.”강현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이미 그 가능성을 계산에 넣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리스크 분산 측면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다만 추적 가능성은 최소화해야 합니다. 최근 규제가 강화됐으니까요.”박 회장이 옅게 웃었다.“그 정도 대비 없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나?” “아니요. 그래서 이렇게 직접 뵙고 조건을 맞추는 겁니다.”박 회장은 망설임 없이 서류에 서명했다.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이미 결론은 굳어진 분위기였다. 강현이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시선은 끊임없이 맞물렸다. 상대의 의도를 읽고, 빈틈을 가늠하며, 다음 수를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식탁 위에는 정갈한 요리가 놓여 있었지만, 그 아래에서는 수십억 단위의 이해관계
Terakhir Diperbarui: 2026-07-29
Chapter: 31화 흐트러진 아침강현은 고요가 내려앉은 호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방금 전까지 남아 있던 열기는 몸 어딘가에 얇게 붙어 있었지만, 복도의 공기는 차가웠다. 거울 속에는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과 오차 없이 반듯하게 떨어진 넥타이, 정돈된 슈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구두 굽 소리가 서늘했다. 자동문이 열리자 날카로운 새벽 공기가 목덜미를 스쳤다.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지만, 바로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저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멈춰 섰다.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드는 밤의 잔열이 가슴속을 무겁게 눌렀다.신호등 앞에 멈춰 서서 가로등 불빛을 응시하던 강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불현듯, 제 입으로 설화에게 내뱉었던 조소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부서진 사람은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해.오만한 확신이었다. 그녀를 완전히 제 손아귀에 뒀다고 생각했는데, 손끝이 이상하리만큼 시렸다. 강현은 잇새로 거친 숨을 뱉으며 지포 라이터를 켰다. 챙,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불꽃이 일렁였다.“하여간에, 씨발.”낮게 읊조린 욕설이 연기와 함께 흩어졌다. 그래도 속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방 안에 남겨 둔 여자, 테이블 위에 놓아둔 카드,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걸어 나왔는데도 끝내 떨어지지 않는 체온의 잔상.강현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담배 끝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타들어 갔다. 붉은 점 위로 잠깐, 침대 위에 혼자 남아 있던 물끄러미 쳐다보던 여자의 얼굴이 겹쳤다.하지만 그는 곧장 잡념을 털어냈다.통유리창 너머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밀려들 때, 벽면의 디스플레이에서는 건조한 경제 뉴스가 흘러나왔다. 강현은 평소와 다름없이 정해진 루틴을 시작했다. 40분간의 웨이트 트레이닝. 쇳덩이가 맞물리는 묵직한 금속음이 거실을 채웠다.이어서 러닝머신의 벨트가 세차게 돌기 시작했다. 강현은 속도를 높였다. 20분. 체온이 달아오르고 땀방울이 턱선을 타고 떨어졌다. 화면 속 앵커는 환율과
Terakhir Diperbarui: 2026-07-27
Chapter: 30화 아직은 괜찮지 않아도카드키가 삑, 하고 낮게 울렸다. 문틈 사이로 먼저 들어온 조명은 너무 깨끗했다. 흰 침구, 반듯한 테이블, 검은 가죽 의자, 가지런히 놓인 잔. 모든 것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준비되어 있었다. 설화는 그 정돈된 방이 오히려 불편했다. 이곳에서는 자신만 흐트러져 보일 것 같았다.문이 닫히자 낯선 향이 코끝을 스쳤다. 강현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설화를 침대 쪽으로 이끌었다. 서두르지는 않았지만, 걸음마다 손끝의 힘은 분명했다.“앉아.”설화가 침대 끝에 앉자, 강현이 물 한 잔을 따라 건넸다. 유리잔 바깥에 맺힌 물방울이 조명 아래 작게 빛났다.“마셔. 얼음은 뺐어.”설화는 잔을 받아 들었다. 손가락에 닿은 유리의 차가움이 잠깐 전해졌다. 강현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그녀가 잔을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자, 손을 뻗어 그것을 정리하듯 옮겨 두었다.이어서 그녀의 손등 위로 손을 얹었다. 아주 짧은 스침이었지만, 그 뒤로 이어질 움직임은 이미 정해져 있는 듯했다.그제야 강현은 조금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설화가 숨을 삼키는 순간, 그는 그녀를 천천히 침대 위로 눕혔다. 시트가 구겨지는 소리가 작게 났다. 그의 손이 옆구리에 닿는 순간, 설화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찰나의 변화를 느낀 강현이 멈췄다.“그만할까?”그 말은 다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잔인하게 들렸다. 선택권을 내어주는 듯하면서도, 이미 자신이 어디까지 와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설화는 대답 대신 그의 셔츠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말로 해.”“그만두자는 뜻 아니에요.”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강현은 한동안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낮췄다. 입술이 목선 가까이에 닿았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웠다. 확인하듯 스치고, 기다렸다가, 설화가 피하지 않으면 조금 더 깊어졌다. 그의 숨결이 귀에 스칠 때마다 설화는 저도 모르게 시트를 움켜쥐었다.원피스의 지퍼가 천천히 내려갔다. 차가운 공기가 맨살에 닿자, 설화의 숨이 가늘게 흔들렸다. 강현은
Terakhir Diperbarui: 2026-07-24
Chapter: 29화 피하지 않은 밤설화는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Noir Lounge의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어지럽게 번지고 있었다. 외벽을 타고 흐르는 푸른 조명이 유리 표면을 미끄러지듯 내려앉았고, 멀리 대교 위를 지나는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가르며 스쳐 갔다.강현은 긴 손가락으로 설화의 턱을 잡은 채 그녀의 얼굴을 돌려세우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눈을 내리깔거나 억지로 웃었을 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설화는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 밀어내지도, 기대지도 않는 시선이었다.강현의 손끝이 턱 아래에서 잠깐 멈췄다. 느긋하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도 아주 조금 굳었다. 그는 혀끝으로 치열을 훑고는 짧게 웃었다.“생각보다 잘 마시네.”설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잔을 내려놓은 손끝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강현의 눈이 그곳을 스치고 다시 그녀의 얼굴로 돌아왔다. 말없이 버티는 그 얼굴 앞에서, 그의 웃음은 더 얇아졌다.“불편한 건 아니지?” “괜찮아요.”가느다란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대답 끝에는 거절도 순응도 아닌 단단한 선이 남아 있었다. 강현의 시선이 한순간 멈췄다. 입가에는 여유가 남아 있었지만, 설화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조금 전보다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재밌네.”설화는 잔 안에 남은 위스키를 내려다봤다. 얼음은 거의 녹아 얇은 물기를 남기고 있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팔목 안쪽에서 술기운이 느리게 번졌다. 취한 건지 긴장한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다만 강현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피부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위스키병이 거의 비워질 무렵, 라운지는 한층 어두워져 있었다. 옆 테이블의 웃음소리는 멀어지고, 잔과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만 가끔 낮게 섞였다. 강현은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빈 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굴리던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참 이상하지.”설화가 고개를 돌렸다. 강현은 반쯤 비워진 술병을 흘끗 보다가 다시 그녀를 보았다.“그날 네가 그렇게 울고 나서, 머릿속이 조용해졌어.”그가 말을 멈추고 픽
Terakhir Diperbarui: 2026-07-22
Chapter: 28화 Noir Lounge유월이 지나고 칠월로 접어들자, 대지는 한층 더 눅눅하고 뜨겁게 달아올랐다.어느덧 한 달 동안 익숙해져 버린 배달 업무를 마친 뒤, 설화는 고깃집 아르바이트 장소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문 너머로 한여름의 강렬한 햇살이 길게 번져 왔다. 차창에 흐릿하게 비친 자신 얼굴이 전과는 다르게 어딘가 변해 있는 것 같았다.그때, 주머니 속에서 잔잔한 진동이 일었다. 액정 위로는 언제부터인지 저장돼 있던 서강현 대표의 이름과 메시지가 나란히 떠올랐다.[오늘 8시. L호텔 1층. Noir Lounge.] 참으로 그 사람다웠다. 차갑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고급 호텔 이름이 화면에 떠 있는 게 어색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설화는 화면을 한 번 더 내려다본 뒤, 잠시 망설이며 아르바이트하는 고깃집 번호를 눌렀다.“사장님, 죄송한데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출근이 어려울 것 같아요.” 설화는 괜히 말이 길어지지 않게 염치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덧붙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했다. 분명 그 사람에 초대였지만,그녀는 그것이 초대라는 형식을 빌린 다른 무엇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거기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위험한 불빛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이 마음 한쪽에서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버스 안에서 스마트폰 액정 위 숫자를 확인했다. 오후 4시 24분. 설화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뒀다.집에 도착한 설화는 문을 닫자마자 현관에 등을 기대고 멈춰 섰다. 좁은 복도 안의 공기는 덥고 눅눅했다. 그런데 숨을 막는 건 더위가 아니었다. 가슴 안쪽이 이상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설화는 천천히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 손잡이를 돌리자, 물줄기가 등을 타고 내려왔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였다. 몸이 조금씩 현실을 따라오기 시작했다.그냥 또 한 번 넘어가는 거야.설화는 눈을 감았다. 물소리만 좁은 욕실을 가득 채웠다. 얼
Terakhir Diperbarui: 2026-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