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thor-banner
moominkiller
moominkiller
Author

Novels by moominkiller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역모 누명으로 가문과 함께 처형당한 황후 심월령. 죽음의 순간 그녀를 구하러 온 이는 남편인 황제가 아니라 냉혹한 섭정왕 위지헌이었다. 혼례 3년 전으로 회귀한 월령은 더 이상 황후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번 생, 그녀는 자신을 죽인 황실을 무너뜨리기 위해 섭정왕의 손을 잡는다.
Read
Chapter: 107. 두려운데도 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한씨를 몰아붙이지 마라."위지헌은 곧장 답했다."이미 알고 있습니다.""알고도 흔들릴 수 있다."그 말이 너무 정확해, 월령은 입술을 다물었다. 위지헌의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매 끝을 쥐고 있었다."손."월령은 흠칫했다."네 손을 다치게 잡지 마라."월령은 손을 풀었다. 손바닥에는 옅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위지헌은 그 자국을 오래 보지 않았다. 오래 보면 그녀가 숨을 멈출 것을 아는 사람처럼, 시선을 곧장 종이로 돌렸다."위조된 글은 서윤을 닮았지만 서윤이 아니다. 그것을 밝히려면 서윤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글을 쓴 손의 습관을 보여야 한다.""끝 획.""그래."그의 눈에 아주 희미한 빛이 스쳤다."그걸 보았군."월령은 이상하게도 칭찬받은 아이처럼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 마음이 부끄러워 고개를 더 숙였다."서윤이는 첫 획이 빠르고, 위조문은 끝 획이 무겁습니다.""끝을 누르는 손은 궁의 필사관에게 많다. 조서와 교지는 끝을 흐리면 안 된다. 마지막 획에 힘을 남기는 훈련을 한다."월령의 눈빛이 선명해졌다."문상궁의 손 아래 필사하는 사람.""혹은 그런 훈련을 받은 사람."위지헌은 탁자 위에 작은 종이를 하나 놓았다. 거기에는 이름 셋이 적혀 있었다.조계.연무.문선.월령은 첫 이름을 보았다."조계는 붙잡혀 있지 않습니까.""살아 있다."월령은 숨을 멈췄다."그 아이가 말을 했습니까.""아직은. 하지만 조계의 혀 밑 독낭은 비어 있었다."월령은 그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위지헌은 어렵지 않게 풀어 주었다."죽으려던 자가 아니라, 죽는 척하라 배운 자였을 수 있다."서실의 등불이 작게 흔들렸다. 조계는 성급하고 얇은 목소리의 내시였다. 첫 음절이 걸리고, 외운 말은 또렷해지던 사람. 그도 누군가가 내민 손끝이었다. 오래 쓰인 손끝은 제 팔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잊기도 한다."조계를 내일 예부 정전에 세우실 겁니까.""아직 아니다.""
Last Updated: 2026-07-02
Chapter: 106. 손
새벽이 오기 전, 심가가 가장 깊이 숨죽인 시각이었다.월령은 서원당 곁 작은 서실에 앉아 있었다. 등불은 낮췄고, 탁자 위에는 서윤의 오래된 글과 허도겸이 보낸 등초, 문상궁의 먹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종이와 먹과 사람의 손. 전부 말이 없는데도, 방 안은 너무 많은 말로 가득 찬 듯했다.그녀는 위조된 글의 마지막 획을 다시 보았다.받겠다.그 끝이 유난히 무거웠다. 서윤은 끝을 그렇게 누르지 않는다.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의 손은 마지막에서 긴장이 풀린다. 그러나 이 글은 마지막에서 힘이 들어갔다.누군가 결말을 꼭 눌러 닫은 것이다. 마치 도망갈 문을 막듯이."잠을 자지 않았군."문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위지헌이었다.그는 문턱을 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먹색 대창포 자락에는 새벽 안개가 희미하게 묻었고, 신 끝이 젖어 어두웠다. 감송향이 서실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월령은 일어나 예를 갖췄다."왕야.""앉아 있어라."말은 낮았지만 딱딱하지 않았다. 그는 곧 제가 너무 짧게 말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덧붙였다."네가 일어서면 종이가 날린다."월령은 잠시 멈췄다. 그 말이 명령인지 배려인지 구별하지 못했다.위지헌은 문턱을 넘었다. 탁자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가까이 오면 그녀가 숨을 더 조심할 것을 아는 듯했다. 그러나 감송향은 이미 가까웠다."먹을 보았느냐.""예.""무슨 생각을 했지.""자녕궁의 종이, 서윤의 글씨, 문상궁의 먹. 세 가지가 한 줄로 묶였습니다.""그 줄을 누가 잡고 있나.""숙비마마라 보기에는 너무 자세합니다. 삼전하라 보기에는 심가 안쪽을 너무 잘 압니다. 문상궁이라 보기에는…"월령은 말을 멈췄다."보기에는?""문상궁은 명을 실행하는 쪽에 가깝습니다."위지헌의 눈빛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말해 보아라.""궁에서 오래 산 사람은 직접 명을 남기기보다 일을 맡길 사람을 고릅니다. 문상궁은 숙비마마의 뜻을 읽고 물건을 놓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서윤이 오래 제 글씨를 따라 썼다는 사실까
Last Updated: 2026-07-02
Chapter: 105. 한씨의 등불
그날 밤, 심가 안채에는 작은 움직임들이 생겼다.은매와 청아는 약방 하녀들에게 더운 물을 나누어 주며, 궁에서 온 먹상자를 누가 옮겼는지 물었다. 기윤은 서윤의 처소 처마 위에서 한 번도 소리 내지 않았다. 윤백은 담장 너머에서 너무 오래 기다리다, 심가의 늙은 문지기에게 떡 한 조각을 얻었다.강무진이 그 떡을 보았다."군량입니까."윤백은 떡을 등 뒤로 감췄다."문지기 어르신이 주셨습니다."강무진은 더 묻지 않았다.*그들이 각자의 자리에 서 있는 동안, 한씨의 처소에는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한씨는 홀로 앉아 있었다. 손에는 서윤의 오래된 글씨 한 장이 들려 있었다.그 종이는 월령의 붓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한씨가 오래 따로 보관해 둔 것이었다. 서윤이 월령의 글을 따라 쓰던 어느 날, 차마 버리지 못해 접어 둔 종이.한씨는 그것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없었다. 눈물보다 더 오래 묵은 것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그때 금지가 문밖에서 낮게 말했다."마님."한씨는 종이를 접었다."들어오너라."금지는 방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남쪽 편문에 사람이 왔습니다."한씨의 손이 멈췄다."누구냐.""궁에서 온 사람은 아닙니다."금지는 망설이다 말했다."문상궁의 사람이라 했습니다."등불이 한 번 흔들렸다. 한씨는 오래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접어 둔 종이를 소매 안에 넣었다."서윤이는 자고 있느냐.""아직 불이 켜져 있습니다."한씨의 얼굴에 짧은 고통이 지나갔다."그 아이는 보지 못하게 해라."금지는 고개를 숙였다."예."그러나 금지가 물러난 뒤에도, 한씨는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자식의 앞길을 열어 주려던 손이, 어느새 딸의 목을 조르는 줄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도 그 사실을, 조금씩 알기 시작한 얼굴이었다.남쪽 편문 쪽에서 발소리 하나가 어둠을 디뎠다.그리고 그 발소리가 처음 향한 곳을, 처마 위의 기윤이 보고 있었다.
Last Updated: 2026-07-02
Chapter: 104. 먼저 보는 쪽
밤이 조금 더 깊어졌을 때, 기윤이 돌아왔다.그는 처마 밖에서 먼저 기척을 냈다. 청아가 이번에는 놀라지 않으려고 미리 물그릇을 내려놓았는데, 정작 그 그릇이 굴러 은호의 발끝에 닿았다.은호가 엄숙하게 그릇을 붙잡았다."살았습니다."청아는 눈을 감았다."고맙다."기윤은 이 작은 소란을 보았으나,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다만 아주 잠깐 시선이 그릇에 머물렀다가 돌아왔다."아가씨. 왕야께서, 남쪽 편문으로 올 사람이 누구를 먼저 보는지 확인하라 하셨습니다."월령은 숨을 낮췄다."누구의 시선을 말합니까."기윤은 잠시 말을 골랐다. 그는 설명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말은 늘 필요한 만큼만 나왔다. 그래서 월령은 기윤이 스스로 고른 말일 때와, 위지헌의 말을 옮길 때를 조금씩 구별하게 되었다."남쪽 편문으로 누가 오든, 그 사람이 먼저 보는 쪽을 확인하라 하셨습니다. 종이는 위조할 수 있지만, 급한 사람의 눈은 숨기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월령은 문상궁을 떠올렸다. 그 뒤로 태후와 위명서의 얼굴이 차례로 겹쳤고, 한씨의 떨리던 손까지 밀려왔다. 그리고 심가 안에서 마음의 순서를 아는 누군가가, 그 모든 얼굴 사이에 얇게 숨어 있었다."오늘 밤 남쪽 편문에서 누가 서윤을 먼저 보는지, 누가 숙모를 먼저 보는지 보라는 말씀이군요."기윤의 눈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예."그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왕야께서, 역시 그 말은 한 번에 알아들을 것이라 하셨습니다."월령의 얼굴이 미세하게 뜨거워졌다."그런 말씀도 전하라 하셨습니까."기윤은 대답하지 못했다.문밖 어둠에서 아주 낮은 헛기침이 들렸다. 윤백이었다."그 부분은 제가 덧붙였습니다."기윤의 표정이 처음으로 조금 굳었다. 청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윤백 나리께서는 꼭 숨어서 말씀하십니다.""숨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뿐입니다.""그게 숨어 있는 겁니다."강무진의 낮은 목소리가 뒤따랐다."윤백."윤백은 곧 조용해졌다.서윤은 그 소
Last Updated: 2026-07-02
Chapter: 103. 딸로 서는 일
은매는 은호의 이불을 여며 주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제가 약방 쪽 사람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먹 냄새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궁 물품이 심가에 들어왔을 때 누가 손댔는지는 하인들이 기억할 겁니다.""위험해.""알고 있습니다."은매는 고개를 들었다."그래도 제가 해야 합니다. 제가 한 번 눈을 감았기 때문에 어머니가…"말이 멈췄다.월령은 은매의 얼굴을 보았다. 그 아이는 아직 어미를 찾지 못했다. 내수사 수레가 빼앗아 간 길 끝에 무엇이 남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희망은 남았지만, 희망이라는 말은 때로 사람을 오래 아프게 한다."너 혼자 움직이지 마. 청아와 같이 가."청아가 자신을 가리켰다."저요?""너는 하인들이 경계하지 않아.""제가 좀 순해 보여서요?"은호가 고개를 저었다."시끄러워서요."청아는 배신당한 얼굴로 은호를 보았다."너 오늘 자꾸 정확한 말을 하는구나."은호는 이불 속으로 천천히 숨었다. 그 모습에 은매의 눈가가 잠시 풀렸다.*월령은 그 풀림을 보며, 문득 자신의 빈 손을 내려다보았다.은매의 손은 은호의 이불 끝을 오래 여미고 있었다. 서윤은 아직 제 이름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종이만 만지작거렸다. 두 손 다 무언가를 붙들고 있었다.월령의 빈손은, 자꾸 감송향으로 이어질 뻔했다. 월령은 얼른 시선을 내렸다.그는 이 일에 들어온 왕이다. 심가와 북문군, 황실의 균형을 보는 사람이다. 제 마음이 흔들린다고 해서, 그 뜻을 함부로 다정함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그런데도 윤백이 가져온 먹은 너무 조용한 손길 같았다. 월령이 묻기 전에, 그가 먼저 필요한 것을 보냈다. 그것이 정치라 해도, 이상하게 손등 위에 놓인 따뜻한 천처럼 느껴졌다.월령은 그 느낌이 못내 불안해 손끝을 접었다.서윤이 오래된 종이를 다시 접었다."언니. 제가 그 글씨를 따라 쓴 걸, 어머니도 알고 계셨을 거예요."월령은 대답하지 않았다."어머니는 모르는 척하셨지만요. 제가 잘 쓴 날은 간식이 조금 더 예쁘게 나왔고, 망
Last Updated: 2026-07-01
Chapter: 102. 선
밤이 깊도록 심가의 등불은 쉬이 꺼지지 않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집 전체가 숨을 작게 쉬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웠다.월령은 목갑 속 먹을 다시 닫았다.문상궁이 두고 간 먹과 같은 냄새. 그 말 하나만으로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궁의 물건은 여러 손을 지난다. 문상궁이 들고 왔다고 해서 문상궁이 썼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태후의 뜻이라 해도 태후가 직접 먹을 갈았을 리 없고, 위명서가 필요로 했다고 해서 그가 손끝에 먹을 묻혔을 리 없다.궁의 명은 대개 남의 손끝에 묻어 왔다. 손끝은 씻기 쉽고, 명은 더 쉽게 사라졌다."언니."서윤이 아주 낮게 불렀다. 월령은 고개를 돌렸다.서윤은 아직 붓함 곁에 앉아 있었다. 오래된 종이들이 펼쳐져 있고, 그 사이에 아이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얇게 놓여 있었다. 서윤은 그것들을 다시 접지 못했다."제가 예전에 언니 글씨를 따라 쓴 걸, 아는 사람이 있었을까요.""있었겠지."월령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서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서 월령은 말을 낮췄다."하녀가 보았을 수도 있고, 숙모께서 보셨을 수도 있고, 글씨를 가르치던 사람이 기억했을 수도 있어.""그럼 제가…""아니야."월령은 서윤의 말을 부드럽게 막았다."네가 누군가에게 칼을 준 것이 아니야. 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칼로 갈았을 뿐이야."서윤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 이해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덜 무너진 얼굴이었다.*그때 청아가 조심스럽게 낮은 상 위에 찻잔을 올렸다."차는 아니고 보리물입니다.""왜 그렇게 작게 말하니.""궁에서 차가 나오면 늘 일이 생겨서요. 소인은 당분간 차를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은호가 작은 이불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보리도 볶으면 검습니다."청아가 눈을 크게 떴다."그런 말 하지 마. 보리까지 의심하면 먹을 게 없어."은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보리는 믿겠습니다."서윤의 입술 끝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Last Updated: 2026-07-01
설야팔부 (雪夜八部)

설야팔부 (雪夜八部)

평범한 의녀로 살고 싶었던 여자가, 자신의 핏줄이 곧 강호의 재앙으로 규정되고 사랑이 곧 원한이며 떠안은 힘이 곧 형벌임을 눈[雪]처럼 천천히 깨달으며, 끝내 복수가 아니라 놓아줌을 택하는 비극.
Read
Chapter: 30. 눈마당
"안에 있으시오." 그가 말했다.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무슨 소리가 나도."그는 달빛 마당을 가로질러 숲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두르지 않는 걸음 그대로, 밤 마실이라도 가는 사람처럼.운설은 문설주를 붙들고 어둠에 귀를 세웠다. 낮게 주고받는 말소리가 먼저 왔다. 계집을 내놓으면 검신 나리의 이름에는 흠이 안 가게 해 주겠다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 여럿이었다. 대여섯은 되었다. 그다음에 들린 것은 답이 아니라 쇳소리 한 번, 눈 떨어지는 소리 두어 번. 나무 위에서 눈덩이가 제풀에 미끄러지는, 겨울 숲의 흔한 소리 같은 것들.그리고 아주 오랜 정적.강물 소리가 가슴 안에서 반 뼘쯤 차올랐다가, 도로 내려앉았다. 나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물도 아는 모양이었다.그가 돌아온 것은 차 한 잔 식을 참이 지나서였다. 어깨에 눈이 앉아 있었고, 검은 이미 검집 속이었고, 걸음은 나갈 때와 같았다. 다른 것은 하나, 왼팔 소매가 어둠 속에서도 표 나게 무거워 보인다는 것뿐이었다."죽였습니까.""보냈소." 그가 말했다. "혀는 성하게 두었으니, 가서 소문을 낼 것이오. 검신이 계집을 독차지하려 든다고." 그는 그 말이 우스운지 우습지 않은지 알 수 없는 낯으로 잠깐 사이를 두었다. "맹에 올라가기에는 나쁘지 않은 소문이오. 수장이 먹이를 곁에 두고 지킨다는 소문보다는.""왼팔." 운설이 말했다."스쳤소.""환자가 의원 말을 —""환자가 아니오."같은 문답이 두 번째였다. 두 번째라는 사실이 어쩐지 방 안의 공기를 반 뼘 데웠다. 그는 이번에도 결국 소매를 걷었다. 팔뚝 바깥쪽으로 두 치, 얕지만 깨끗하지 못한 상처였다. 낭인의 칼은 이가 나가 있었을 것이다. 운설은 남은 지혈초를 개어 바르고 무명을 감았다. 사람의 살을 만지는 동안만은 손끝에 아무 망설임이 없었다. 그 없음이 좋아서, 그녀는 필요한 것보다 조금 천천히 감았는지도 모른다.치료를 받는 동안 그는 시선 둘 곳을 못 찾는 사람처럼 빛바랜 산신 그림만 보고 있었다. 좌중을 누르
Last Updated: 2026-07-03
Chapter: 29. 산신당
눈보라는 밤이 되며 이빨을 세웠다.동행 이틀째까지 두 사람이 나눈 말은 길 이름과 초소 위치가 거의 전부였다. 그는 앞서 걷지 않았다. 늘 반 장 비낀 곳에서 같은 속도로 걸었고, 갈림길에서만 먼저 방향을 잡았다. 밥은 따로 먹었다. 그녀가 언 주먹밥을 꺼내면 그는 말없이 등을 돌리고 육포를 씹었다. 베어야 할 사람과 겸상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다른 무엇인지 그녀는 묻지 않았다.무너진 산신당을 찾아낸 것은 그였다. 지붕 반쪽이 내려앉고 산신 그림은 빛이 바래 호랑이인지 고양이인지 모를 것이 되어 있었으나, 성한 반쪽 아래는 바람이 들지 않았다. 불은 피우지 못했다. 눈보라 속에서도 연기 냄새는 십 리를 간다고 그가 말했고, 그 말이 옳다는 것을 그녀도 알았다."산신께는 미안한 일이오." 자리를 잡으며 그가 말했다. 농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어조여서, 운설은 어둠 속에서 잠깐 그의 얼굴을 살폈다. 빛바랜 호랑이 아래 앉은 검신이라니, 미안할 쪽이 어느 쪽인지 모를 일이기는 했다."젖은 옷은 벗어서 짜야 합니다." 운설이 말했다. "고뿔은 약으로 잡아도 얼어 죽는 건 약이 없습니다.""나는 되었소.""환자가 의원 말을 안 들으면 —""환자가 아니오.""오늘 밤 안으로 됩니다."그가 이쪽을 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낯을 검신의 격으로 지으면 저런 얼굴이 되는구나, 싶은 얼굴이었다. 결국 그는 겉옷을 벗어 물기를 짜서 벽에 걸었다. 의녀의 말은 검보다 무르되 검만큼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배워 가는 중이었다.당(堂) 안의 어둠에 눈이 익자 서로의 윤곽만 남았다. 반 장의 간격을 두고 벽에 기대앉아, 두 사람은 눈보라가 문풍지 대신 우는 소리를 들었다."물어도 되겠습니까." 운설이 먼저 침묵을 걷었다. "검은 어쩌다 잡으셨습니까.""집안의 아이들은 다섯에 목검을 잡소. 나는 넷에 잡았다 하오." 어둠 속의 목소리는 낮고 고르았다. "기억에도 없는 나이요. 검을 잡은 기억이 없으니, 잡지 않은 나를 알지 못하오.""잡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
Last Updated: 2026-07-03
Chapter: 28. 매듭
검이 손안에서 눕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날이 비틀리며 손아귀를 미끄러져 나갔다. 물고기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 같은,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회수였다. 강이 주춤한 그 한순간을 그는 놓치지 않았고,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녀의 손가락 하나 다치게 하지 않는 각도로만 검을 물렸다. 반 치의 사람이 반 치로 물러난 셈이었다.물러난 검이 검집에 잠기는 소리가 났다.강물은 소리를 낮추며 가라앉았다. 이번에는 침이 없이도 내려갔다. 눈을 마주친 탓인지, 검이 물러난 탓인지, 두 번째라 물이 덜 불었던 탓인지 — 알 수 없었으나 내려갔다는 사실만은 분명해서, 운설은 그 자리에 선 채 조용히 숨을 몰아쉬었다. 세상이 어두워지고, 눈송이가 다시 눈송이로 돌아왔다.고요가 벌판에 되돌아오자, 방금 지나간 것들의 크기가 뒤늦게 몸으로 왔다. 무릎이 가늘게 떨렸다. 검신의 검을 맨손으로 물고, 강호에서 가장 빠르다는 검객을 물가로 끌어당기고 — 소문 속의 여자가 한 일들을 이 몸이 했다. 그런데도 이 몸의 임자는 그 일들을 구경한 기억밖에 없었다. 힘을 얻는다는 것이 이렇게 저를 잃는 일이라면, 강이 다 차오르는 날 이 자리에 남는 것은 누구인가."언덕 뒤의 둘." 선우현이 벌판이 울리도록 소리를 높인 것은 그때였다. "보았느냐."한참 만에 언덕 너머에서 젊은 무사 둘이 엉거주춤 모습을 드러냈다. 얼어붙은 낯들이 멀리서도 희었다."가서 본 대로 고하라. 계집의 힘은 소문을 웃돌며, 정면으로 베려면 맹의 검 수십이 꺾인다. 하여 수장은 곁을 떠나지 않고 힘의 근원을 캐며 기회를 기다리겠다 — 한 자도 보태지 말고, 한 자도 빼지 말고."두 사람은 도망치듯 남쪽으로 사라졌다. 눈 벌판에 다시 둘만 남았다."기회를 기다린다." 운설이 그 말을 되뇌었다. "그 보고는 참입니까.""한 자도 보태지 않았소." 그는 태연했다. "기회가 무엇의 기회인지를 말하지 않았을 뿐."손바닥이 그제야 아파 왔다. 검날을 물었던 오른손을 펴자 살이 갈라진 자리로 피가 배어 나왔다.
Last Updated: 2026-07-03
Chapter: 27. 검끝
뽑힌 검은 그러나 그녀를 겨누지 않았다. 검끝은 눈밭을 향해 낮게 늘어진 채였고,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그녀의 어깨 너머 언덕 쪽을 스쳤다."언덕 뒤에 둘." 입술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말이었다. "집법당의 눈이오. 사흘째 나를 밟고 있소."운설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수장이 계집과 마주 서서 문답만 하다 보냈다고 올라가면, 다음에 오는 것은 나 하나가 아니오." 그는 여전히 그녀만 들을 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내 검이 그대를 죽이려 들 것이오."숨 한 번의 사이를 두고, 그가 덧붙였다."죽지 마시오."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몸이 먼저 알았다. 머리가 따라잡기도 전에 목덜미의 서늘함이 등줄기까지 내리꽂혔고 — 검이 왔다.베는 검이었다. 봐주는 검이 흉내 낼 수 없는, 정확하게 목숨을 물러 오는 검. 언 땅이 갈라지는 소리 같은 것이 귓전을 스쳤고, 운설의 몸이 뒤로 물러난 것은 그녀의 뜻이 절반, 나머지 절반은 저 깊은 데서 눈을 뜬 강이었다. 물소리가 삽시간에 차올랐다. 세상이 다시 환해지기 시작했다. 눈송이의 결, 검이 그리는 길, 그 길이 반 치 비켜 갈 자리.첫 합에서 그녀가 배운 것은 검신이라는 이름의 뜻이었다. 장정들의 창칼은 소리부터 왔고, 사냥꾼의 쇠뇌는 살기부터 왔다. 이 검은 아무것도 앞세우지 않고 왔다. 강이 아니었다면 첫 합에 끝났을 것이다. 강이 있어도, 검이 그리는 길들은 매번 물살보다 반 호흡 빨랐다. 다만 그 빠른 길들이 하나같이 급소의 반 치 곁을 지났다.반 치. 그 반 치가 보이는 순간 운설은 알았다. 이 사람은 지금 베면서 빌고 있다. 검은 죽이려 들되, 검을 쥔 사람은 그 반 치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감찰의 눈이 닿지 못하는, 검신(劍神)만이 다룰 수 있는 반 치였다.그러나 강은 그 반 치를 몰랐다.세 합째였는지 네 합째였는지, 그녀의 오른손이 저 혼자 올라가 검날을 잡았다. 맨손이 쇠를 무는 소리가 벌판에 울렸다. 손바닥이 타는 듯했지만 아픔은 멀리 있었다. 소문
Last Updated: 2026-07-03
Chapter: 26. 대면
내려가지 않는 길은 없었다.언덕 위에서 운설은 그것을 한눈에 헤아렸다. 벌판을 가로지르지 않고 북으로 가는 길은 없고, 벌판 가운데는 그 사람이 있었다. 어둠을 기다려 볼까 하는 생각은 떠오르기도 전에 부질없어졌다. 나흘 동안 간격을 지키던 기척이다. 밤이 그의 눈을 가려 줄 리 없었다.그녀는 언덕을 내려갔다.거리가 줄어드는 동안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스무 걸음쯤에 이르렀을 때에야 운설은 걸음을 멈추었다. 눈 그친 벌판에는 바람 소리조차 없어서, 두 사람 사이의 스무 걸음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거리처럼 고요했다.골목에서 보았던 그 얼굴이었다. 곁을 스치던 낮은 목소리, 눈발 속에 비켜서던 어깨. 다만 그때 그의 등 뒤에는 무너지는 그녀의 집이 있었고, 지금 그의 등 뒤에는 그녀가 가야 할 북쪽 하늘이 있었다.가까이서 보는 그는 골목의 기억보다 젊고, 기억보다 고요했다. 눈 벌판 한가운데 서 있는데도 그의 둘레만 바람이 비켜 가는 듯했다. 화톳불 가의 장사치들이 왜 그 이름 앞에서 숙연해졌는지,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알 것 같았다. 격이라는 것은 소문으로 듣는 것과 마주 서는 것이 이렇게 달랐다."열나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멀리 왔소.""길을 일러 준 이가 있어서."그 말에 그의 눈매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이라 부르기에는 모자라고, 아니라 하기에는 남는 것이었다."무림맹 토벌 수장 선우현이오." 그가 말했다. 화톳불 가에서 주워들은 이름이 눈 벌판 위에서 임자를 찾았다. "그대를 베라는 명을 받고 왔소.""끌어오라는 명이 아니고요.""베라 하였소."숨길 것도 에두를 것도 없다는 말투였다. 이상하게도 그 서슬이 두렵지 않았다. 두려움보다 먼저, 목덜미의 그 서늘함이 왔다. 나흘 내 등에 얹혀 있던 것과 같은 서늘함이 이제 정면에서 불어오고 있었다.운설은 소매 속 신패의 모서리를 옷 위로 가만히 눌렀다. 도망칠 수 없다면 숨길 것도 없었다. 이 사람은 폐사의 눈밭에서 그녀의 사흘을 다 읽어 낸 눈이다.
Last Updated: 2026-07-03
Chapter: 25. 검 (선우현)
눈은 거짓말을 못 한다. 검을 배우기 전에 배운 것이 그것이었다.선우현은 폐사 마당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이 하는 말을 읽었다. 산문 기둥에 박힌 쇠뇌 살은 깃까지 얼어 있었다. 사흘 전. 살이 박힌 깊이와 각도를 눈으로 재고, 그는 살이 날아왔을 자리를 돌아보았다. 외길 어귀. 거기서 법당 계단까지 스무 걸음. 그 스무 걸음 사이에 장정 셋이 쓰러졌던 자국이 눈 밑에 아직 남아 있었다.피는 없었다.그는 그 사실을 두 번 확인했다. 왕가 삼 형제라면 그도 이름을 들었다. 범을 맨 창으로 받는 자들이다. 그 셋을 스무 걸음 안에서 꺾으면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게 하는 손속이란, 맹의 장로들 중에도 몇 없다. 그런데 그 손속의 임자는 무공을 배운 적이 없는 의녀라 했다.마당 구석에는 액막이 소금이 뿌려져 있었다. 왕가 막내의 짓일 것이다. 소금 알갱이들이 눈과 섞여 반짝였다. 요녀의 자리라고 소금을 치고 간 그 손들을, 그 요녀가 며칠 전 부목으로 감아 주었다. 소문이라는 것이 어느 대목을 삼키고 어느 대목을 뱉는지, 그는 장터 벽에 붙는 방(榜)을 만드는 자리에 있어 봐서 알았다.계단 아래 눈을 걷어 내자 찢긴 무명 조각이 나왔다. 치맛단이었다. 부목을 동인 매듭 방식은 북변 의원들의 것. 부수고, 그 자리에서 감았다. 같은 손으로.선우현은 오래 그 매듭 자국을 내려다보았다.일어서려다, 그는 계단 틈에서 가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은침 한 대. 끝에 마른 피가 한 점 얼어붙어 있었다. 누구의 피인지는 물을 것도 없었다. 부러진 뼈들 곁에 피가 없었으니, 이 피는 침의 임자가 저에게 쓴 것이다. 제 몸에 침을 놓아 가면서까지 눌러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 눈은 거기까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그는 은침을 집어 소매에 넣었다. 넣고 나서, 제가 방금 한 일이 증좌의 수습인지 다른 무엇인지 잠깐 생각했고, 생각을 거기서 끊었다.맹을 떠나던 날의 문답이 눈길 위로 되돌아왔다.수장의 인(印)을 내리며 집법당주는 웃고 있었다. 노인의 웃음은 상
Last Updated: 2026-07-03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