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야팔부 (雪夜八部)

설야팔부 (雪夜八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2
By:  moominkiller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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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의녀로 살고 싶었던 여자가, 자신의 핏줄이 곧 강호의 재앙으로 규정되고 사랑이 곧 원한이며 떠안은 힘이 곧 형벌임을 눈[雪]처럼 천천히 깨달으며, 끝내 복수가 아니라 놓아줌을 택하는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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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 눈 내리는 밤

"의원, 이 손가락이 안 펴져."

노파가 약상 위에 손을 올렸다. 검지와 중지 마디가 굽어 있었고, 손등에는 오래된 흉이 한 줄 그어져 있었다. 평생 무언가를 쥐고 비틀어 온 손이었다.

운설은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차가웠다. 그녀는 노파의 손을 화로 쪽으로 가져가 손등부터 천천히 데웠다. 마디가 풀리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날이 추워 굳은 거예요. 뜨거운 물에 자주 담그세요."

노파는 대답 대신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운설은 굽은 마디를 하나씩 눌러 폈다. 노파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가 가라앉았다.

눈이 내리는 밤이었다. 눈이 오면 사람들은 약방을 찾지 않았다. 발이 빠지는 길을 건너오느니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고 하룻밤을 견뎠다. 노파도 어지간히 참다 왔을 것이었다.

노파가 돌아가고, 약방에는 약초 끓는 냄새와 화로의 숨소리만 남았다. 운설은 그 비어 있음을 좋아했다.

그녀는 마른 당귀를 손끝으로 부러뜨렸다. 똑,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손가락 마디를 타고 올라왔다. 잘 마른 약재는 그렇게 운다. 운설은 그 소리를 들으려고 일부러 천천히 부러뜨렸다.

창밖에서 눈이 내렸다. 소리도 없이.

운설은 업둥이였다. 청하 운씨의 가주 운백천이 눈 오는 길에서 거두었다고 했다.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가 눈밭에 놓여 있었고, 울지 않았다고. 운설은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대목에서 멈칫했다. 어째서 울지 않았을까. 추웠을 텐데.

어릴 적 운설은 다른 아이들처럼 칼을 배우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운백천은 고개를 저었다. "넌 손이 야무지다. 약방이나 봐라." 그뿐이었다. 서운했지만, 자라면서 그 말이 싫지 않아졌다. 약재를 다룰 때 그녀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가끔 운설은 제 손을 들여다보다 멈췄다. 이 손이 눈밭에 놓이기 전에 무엇을 하던 손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양명(養名)은 운설이었다. 그 전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생각은 김처럼 올라왔다가, 손등이 녹는 동안 흩어졌다.

밤이 깊자 눈이 굵어졌다.

운설은 등을 끄려다 손을 멈췄다. 문밖에서 소리가 났다. 바람은 아니었다. 무언가가 문에 기대어 천천히 무너지는 소리였다. 그녀는 등을 들고 문을 열었다.

눈 위에 한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 늙은 사내였다. 흰 눈 위로 검붉은 것이 번지고 있었다. 사내의 등에는 칼이 지나간 자리가 있었다. 한 번이 아니었다.

추웠겠다. 운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것이었다.

그녀는 등을 눈 위에 내려놓고 사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다. 무거웠다. 운설은 사내를 끌어 문지방을 넘었다.

사내가 눈을 떴다. 흐린 눈이 운설의 얼굴에 닿더니 흔들렸다. 오래 찾던 것을 마지막에야 찾은 사람처럼.

"……너는." 피 거품이 섞인 목소리였다. "너는, 그 눈을 가졌구나."

운설은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지금 해야 할 일은 피를 멎게 하는 것, 사내를 화로 곁에 눕히는 것이었다.

사내가 운설의 소매를 붙들었다. 죽어 가는 손이라기엔 힘이 셌다.

"삭월(朔月)의……" 그가 말했다. "마지막, 아이……"

말은 끝나지 못했다. 사내의 머리가 운설의 어깨로 떨어졌다. 가슴은 아직 얕게 오르내렸다.

눈이 내렸다. 두 사람 위로, 소리도 없이.

입안에서 곶감의 단맛이 천천히 녹고 있었다. 언제 입에 물었는지 운설은 기억하지 못했다. 어울리지 않는 단맛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낯선 사내를 안고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밤, 운설은 자신이 모르던 이름에 한 걸음 다가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도, 그녀는 문을 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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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눈 내리는 밤
"의원, 이 손가락이 안 펴져."노파가 약상 위에 손을 올렸다. 검지와 중지 마디가 굽어 있었고, 손등에는 오래된 흉이 한 줄 그어져 있었다. 평생 무언가를 쥐고 비틀어 온 손이었다.운설은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차가웠다. 그녀는 노파의 손을 화로 쪽으로 가져가 손등부터 천천히 데웠다. 마디가 풀리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날이 추워 굳은 거예요. 뜨거운 물에 자주 담그세요."노파는 대답 대신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운설은 굽은 마디를 하나씩 눌러 폈다. 노파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가 가라앉았다.눈이 내리는 밤이었다. 눈이 오면 사람들은 약방을 찾지 않았다. 발이 빠지는 길을 건너오느니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고 하룻밤을 견뎠다. 노파도 어지간히 참다 왔을 것이었다.노파가 돌아가고, 약방에는 약초 끓는 냄새와 화로의 숨소리만 남았다. 운설은 그 비어 있음을 좋아했다.그녀는 마른 당귀를 손끝으로 부러뜨렸다. 똑,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손가락 마디를 타고 올라왔다. 잘 마른 약재는 그렇게 운다. 운설은 그 소리를 들으려고 일부러 천천히 부러뜨렸다.창밖에서 눈이 내렸다. 소리도 없이.운설은 업둥이였다. 청하 운씨의 가주 운백천이 눈 오는 길에서 거두었다고 했다.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가 눈밭에 놓여 있었고, 울지 않았다고. 운설은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대목에서 멈칫했다. 어째서 울지 않았을까. 추웠을 텐데.어릴 적 운설은 다른 아이들처럼 칼을 배우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운백천은 고개를 저었다. "넌 손이 야무지다. 약방이나 봐라." 그뿐이었다. 서운했지만, 자라면서 그 말이 싫지 않아졌다. 약재를 다룰 때 그녀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가끔 운설은 제 손을 들여다보다 멈췄다. 이 손이 눈밭에 놓이기 전에 무엇을 하던 손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양명(養名)은 운설이었다. 그 전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그 생각은 김처럼 올라왔다가, 손등이 녹는 동안 흩어졌다.밤이 깊자 눈이 굵어졌다.운설은 등을 끄려다 손을 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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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로
사내는 무거웠다. 운설은 그를 화로 곁까지 끌어다 눕혔다.등을 보려면 옷을 갈라야 했다. 피가 옷감에 얼어붙어 살에 붙어 있었다. 그녀는 더운 물을 적신 천을 그 위에 얹고 기다렸다. 억지로 뜯으면 새살까지 함께 떨어진다. 얼어붙은 것은 녹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운설은 서두르지 않았다. 서둘러 본 적이 없었다.천이 식으면 다시 물에 담갔다가 얹었다. 세 번을 그러고 나서야 옷이 살에서 떨어졌다.칼자국은 셋이었다. 하나는 깊고 둘은 얕았다. 얕은 둘은 깊은 하나를 피하려다 생긴 것이었다. 쫓기며 맞은 상처였다. 운설은 그런 상처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앞에서 받은 칼과 뒤에서 받은 칼은 결이 달랐다. 이 사내는 등을 보이고 도망치다 이곳에 닿았다.그녀는 바늘을 불에 지졌다. 실을 꿰었다. 살을 여미는 동안 사내는 앓지 않았다. 앓을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었다.화로가 낮게 숨을 쉬었다.운설은 사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뜨거웠다. 상처의 열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타는 열이었다. 이런 열은 약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몸이 마지막으로 제 것을 태우는 열이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사내는 아침을 보지 못한다.그래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열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곁에 있으려는 손이었다. 죽어 가는 사람의 곁에서 운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손을 데워 주는 것. 마디를 눌러 펴 주는 것. 아까 그 노파에게 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사내가 눈을 떴다. 이번에는 흔들리지 않았다."불을……" 그가 말했다. "쬐게 해 줘서.""말하지 마세요.""아니." 사내의 입가가 조금 움직였다. 웃으려던 것 같았다. "따뜻한 데서, 가는 건…… 오랜만이라."운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화로를 그의 쪽으로 조금 밀어 주었다."삭월(朔月)을…… 아느냐.""몰라요.""모르는 게…… 낫다." 사내는 한참을 쉬었다. 숨이 짧아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알아야 하는 게 있어."그가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굳은 손가락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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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발자국
문을 열자 찬 것이 먼저 들어왔다.눈은 그쳐 있었다. 마당의 흰 바닥에 발자국이 어지러웠다. 사람이 여럿, 말이 둘. 횃불 하나가 낮게 흔들렸고, 불빛이 눈밭 위에 길게 누워 방금까지 조용하던 흰 것을 붉게 적셨다.맨 앞에 젊은 사내가 서 있었다.눈을 오래 맞은 사람이었다. 어깨에도 검은 머리에도 눈이 앉아 있는데 털어 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눈이 그의 위에만 유독 조용히 쌓이는 것 같았다. 사내가 가만히 있으면 곁의 소란한 것들이 함께 가만해졌다. 횃불을 든 자들도, 발을 구르던 말들도, 그의 반보 뒤에서 숨을 죽였다. 서 있는 것만으로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인지 알게 하는 사람이 있다. 사내가 그랬다.허리에는 검이 있었다. 운설은 상처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짐작하곤 했다. 손을 보면 더 그랬다. 사내의 손은 곱게 여문 손이었다. 마디가 굵지 않고, 함부로 휘두른 적 없이 벨 때만 정확히 벤 손. 약재를 부러뜨리는 운설의 손과는 다른 손이었다."이 길로 노인이 하나 지나갔소."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묻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확인하는 말투였다. "다쳤을 거요. 피를 흘리며."운설은 대답하기 전에 제 소매를 보았다. 소매 끝에 검붉은 것이 말라붙어 있었다. 감출 수 없었다. 감출 생각도 없었다."안에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죽었어요."사내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기다리던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의원입니다." 운설이 말했다. "죽은 사람은 눕혀 두는 게 예의예요."그러며 그녀가 등을 든 손을 조금 올렸다. 문 안의 불빛이 그녀의 얼굴로 옮겨 왔다.사내의 말이 거기서 멎었다.그는 쫓던 노인을 잊은 얼굴이었다. 눈 내린 변경의 허름한 약방 문간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서 있다는 눈이었다. 운설의 살결은 오래 눈을 본 사람의 것처럼 희었고, 그 흰 바탕 위에 눈썹과 눈이 먹을 한 번 떨어뜨린 것처럼 짙었다. 추위에도 붉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검은 머리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몇 점 얹혀, 불빛을 받아 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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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매
운설은 소매를 쥔 손을 풀지 않았다.사내는 재촉하지 않았다. 재촉하지 않는 것이 더 무서웠다. 급한 자는 손을 뻗지만, 급하지 않은 자는 기다린다. 원하는 것이 결국 제게 올 것을 아는 사람의 기다림이었다. 화로의 불빛이 그의 옆얼굴을 반쯤 물들이고, 나머지 반은 어둠에 두었다."그건 죽은 사람 것이에요." 운설이 말했다."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갖지 않소." 사내가 말했다. "산 사람만 갖지."그 말이 옳았으므로 운설은 대꾸하지 못했다. 다만 손을 풀지 않았다. 왜 풀지 않는지는 그녀도 몰랐다. 노인이 마지막 힘으로 쥐여 준 것이었다. 손바닥 한가운데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것을 이 서늘한 손에 넘기면, 밤새 지킨 무언가가 함께 넘어갈 것 같았다.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곱게 여문, 벨 때만 정확히 벤 손이었다. 그 손이 운설의 소매 앞에서 멈췄다. 빼앗으려면 한순간이었을 것이다. 손목을 비틀거나, 소매를 가르거나. 그에게는 그럴 힘도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손이 멈췄다.제 검이 벨 수 있는 것과 벨 수 없는 것을, 그는 오래 구분해 온 사람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의 손 앞에 선 것은 벨 수 없는 쪽이었다. 이유는 그도 대지 못했을 것이다.운설은 물러서지 않았다. 등불을 든 손도 떨지 않았다.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려움을 어떻게 내보이는지 배운 적이 없어서였다. 겁이 날 때 그녀는 그저 가만히 있는 사람이었다.밤은 길었고, 운설은 오래 깨어 있었다. 죽은 이를 눕히고, 산 자를 문 앞에서 맞고, 이제는 낯선 검객 앞에 서 있었다. 하루 사이에 그녀의 조용한 세계가 몇 번이나 문턱을 넘었는지 세다 말았다. 피곤했다. 피곤한 중에도 손만은 소매를 놓지 않았다.사내가 그 가만함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 안에서, 쫓는 자의 확신 같은 것이 아주 잠깐 흐트러졌다."이상한 일이군." 그가 낮게 말했다. 운설에게 하는 말인지, 제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운설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각오하고 문을 열었다. 소매를 갈리거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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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지방
두 사람은 오래 마주 보았다.운백천이 딸의 앞으로 반걸음 나섰다. 큰 동작은 없었다. 그저 딸과 검객 사이에 제 몸을 세웠을 뿐인데, 그 반걸음에 방 안의 공기가 자리를 바꾸었다. 화로의 불꽃이 두 사내의 그림자를 벽 위로 길게 끌어올려, 좁은 약방이 문득 어느 전각의 대청처럼 깊고 아득해졌다."그 노인은 죄인이오." 젊은 사내의 음성은 낮았고, 낮은 만큼 멀리 갔다. "무림맹이 십수 년을 쫓았소. 그가 품었던 것은 맹의 것이오. 죽은 자의 것도, 이 댁의 것도 아니오.""내 문 앞에서 숨을 거둔 사람이네." 운백천의 목소리에는 세월이 얹혀 있었다. 굳이 높이지 않아도 방을 가득 메우는, 오래 호령해 온 자의 울림이었다. "죄인의 주검이라 한들, 거두어 눕히는 것이 이 성읍의 법일세. 그리고 이 아이는 내 딸이야. 의원이지. 그 손에 무엇이 쥐여 있든, 자네가 밤을 틈타 검을 겨눌 사람이 아닐세."젊은 사내의 눈길이 운백천을 넘어 운설에게 닿았다. 서늘하되 차갑지는 않은, 깊은 우물을 굽어볼 때처럼 그 안에 무엇이 잠겨 있는지 가늠할 수 없어 자꾸만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눈이었다. 그 시선이 제게 머무는 동안, 등 뒤로 화로의 열이 닿는데도 운설은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그 서늘함에는 두려움에 없는 무엇이 섞여 있어, 그녀는 이름을 붙이지 못한 채 눈이 살갗에 스며드는 감각이라 여기고 말았다.찰나였다. 그 짧은 사이에 방 안의 모든 것이 — 죽은 노인도, 아버지의 곧은 등도, 문밖에 도열한 횃불도 — 뒤로 물러나 흐릿해지고, 오직 그 한 쌍의 눈만이 또렷하게 남았다. 운설은 제가 그 얼굴을 언젠가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듯한, 그럴 리 없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처음 보는 사내였다. 그런데도 그 눈을 마주하는 일은, 오래 잊고 지낸 무언가를 기어이 떠올리려 애쓰는 일과 닮아 있었다. 그를 적으로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 순간만은 까닭 없이 서러워, 운설은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한 번 스며든 것은 눈처럼 쉬이 녹지 않았다.검은 뽑히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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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눈길
노인은 성읍 밖 언덕에 묻혔다.운백천이 사람을 시켜 양지바른 자리를 골랐다. 이름조차 모르는 주검에 그만한 예를 갖추는 일은 흔치 않았다. 운설은 아버지가 어찌 그리 정성을 들이는지 묻지 않았다. 그날 밤 이후로 아버지의 둘레에는,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될 침묵이 서리처럼 둘러쳐져 있었다.초승달 패는 약방 마룻장 아래에 감추었다. 밤마다 운설은 그것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 보곤 했다. 이지러진 달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럼에도 쥐고 있으면 노인이 마지막으로 건네던 온기가 손금을 따라 되살아나는 듯했고, 강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라던 말이 귓가에 낮게 감돌았다. 그녀는 아직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성읍의 눈길이 달라진 것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눈 내리는 밤에도 약방을 찾던 노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오는 이들조차 예전처럼 선뜻 손을 맡기지 않았다. 검신이 다녀갔다는 소문이, 운씨 가주의 여식이 쫓기던 죄인을 숨겼다는 소문이, 눈 위의 발자국보다 빠르게 성읍을 돌았다. 사람들은 운설을 마주하면 눈을 오래 두지 못하다가도, 등을 돌리고 나면 그 뒤를 오래 좇았다. 그녀가 평생 사랑한 것은 눈 오는 밤의 그 비어 있음이었는데, 이제 그 고요 속으로 낯선 시선들이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하루는 어린것의 손을 잡고 온 아낙이 있었다. 아이의 손등이 얼어 터져 있었다. 운설이 늘 하던 대로 그 작은 손을 제 두 손으로 감싸 데우려 하자, 아낙이 저도 모르게 아이를 반걸음 끌어당겼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운설은 그 반걸음을 오래 잊지 못했다. 언 손을 녹여 주던 그녀의 손이, 어느새 누군가에게는 함부로 닿아서는 안 될 손이 되어 있었다.이따금 마른 약재를 부러뜨리다, 문득 그 서늘한 눈이 떠올랐다. 벨 수 있었으면서 베지 않은 사람의 눈. 떠올릴 적마다 운설은 손을 멈추었고, 어찌하여 하필 그 얼굴인지 스스로도 헤아리지 못한 채 이내 고개를 저었다. 부러뜨리다 만 당귀가 손끝에서 어정쩡하게 매달려 있었다.아버지는 그 밤 이후로 말이 줄었다. 사랑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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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름
운설은 숨을 삼켰다.발을 돌려야 했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언 땅에 붙은 발이 떨어지지 않았고, 그 사이 그녀의 입에서 하얀 김이 한 줄기 새어 나왔다. 밤은 그 작은 김조차 감추어 주지 않았다.돌아서서,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으로 잠자리에 들 수도 있었다. 아침이면 여느 때처럼 화로에 불을 지피고, 언 손을 든 환자를 맞으면 그만이었다. 그 조용한 세계로 돌아갈 마지막 문이 그녀의 등 뒤에 반쯤 열려 있었다. 운설은 그 문을 등진 채 서 있었다.운백천의 등이 굳었다. 무릎을 꿇은 채, 그는 돌아보지 않고 오래 그대로 있었다."거기 있느냐."낮은 목소리에 놀라움은 없었다. 오래 두려워하던 순간이 마침내 당도했을 때, 사람은 놀라는 대신 조용해지는 법이었다.운설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은 이미 그녀의 김으로, 눈 위의 발자국으로 적혀 있었다.운백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돌아섰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적셨다. 운설은 평생 그 얼굴에서 본 적 없는 것을 보았다. 산을 넘고 강호를 호령해 온 사람의 이마에, 어린아이 같은 두려움이 얹혀 있었다.문득 아주 어린 날이 떠올랐다. 다른 아이들처럼 칼을 배우고 싶다 했을 때, 이 사람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었다. 넌 손이 야무지니 약방이나 보아라. 그때는 서운했고, 자라면서는 그 말이 싫지 않아졌다. 이제 운설은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었다. 제 손에 칼 대신 약초를 쥐여 준 그 일이, 말보다 깊은 무엇을 감추고 있었음을.두 사람 사이에 노인의 무덤이 있었다. 갓 덮은 흙 위로 눈이 얇게 앉아 있었다."아버지." 운설의 목소리가 떨렸다. 약재를 다룰 때에도 흔들리지 않던 목소리였다. "그 노인을… 아셨어요."운백천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눈이 두 사람 사이로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다."알았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부정할 기력조차 남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였다."그 사람이 말한 '그 아이'가—" 운설은 말을 맺지 못했다. 끝을 맺는 순간, 무언가가 영영 되돌릴 수 없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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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손
운백천은 오래 말이 없었다.눈이 그의 어깨에 소복이 쌓이도록, 그는 무덤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십팔 년을 건너온 것처럼 멀었다."열여덟 해 전, 북막에 눈이 내렸다."그해 겨울은 유난히 깊었다고 했다. 중원의 검이 북방의 한 부족을 향해 올라갔고, 그 밤 눈은 붉게 젖었다고. 운백천은 그 자리에 있었다. 무엇을 위해 올라갔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그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다만 불타는 장막들 사이에서, 울지 않는 갓난아이 하나를 안아 들었노라 했다."눈밭에 놓여 있었다. 강보째로. 사방이 불이고 비명인데, 그 아이만 소리가 없었어." 목소리가 잠겼다. "나는 그 애를 안고 남으로 내려왔다. 그게… 열여덟 해 전이다."그 말을 하는 동안 운백천의 눈은 무덤을 지나 그 너머 아득한 어딘가에 가 있었다. 눈 덮인 능선, 재로 사위어 가던 장막, 아직 온기가 남은 잿더미. 운설은 아버지가 여러 밤 홀로 이 언덕을 오른 까닭을 이제야 헤아렸다. 죽은 노인을 찾아오는 걸음이자, 열여덟 해 전 그 밤으로 되돌아가는 걸음이었다.운설은 제가 태어난 곳이 눈 내리는 북방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곳이 불탔다는 것을 그렇게 처음 알았다. 늘 비어 있던 그녀의 시작 자리에 이제 불빛과 비명과 붉은 눈이 들어찼다. 그 그림 속에서 우는 사람은 많았고, 울지 않는 것은 그녀 하나였다.평생 사람들은 그 이야기의 그 대목에서 감탄하곤 했다. 눈밭에 놓이고도 울지 않았다니 될성부른 아이였다고. 운설도 한때는 그 대목을 좋아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달리 물었다. 갓난것이 어찌하여 울지 않았을까. 울음소리가 곧 죽음을 부르는 밤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 작은 몸이 살아남기 위해 가장 먼저 배운 말이 침묵이었다면, 사람들이 될성부름이라 부른 그 고요는, 실은 공포가 아이에게 새긴 첫 흔적이었을 것이다.마룻장 아래 감춘 초승달 패가 떠올랐다. 이지러진 달, 삭월(朔月). 그것이 어찌하여 제게로 왔는지, 노인이 무엇 때문에 마지막 힘을 다해 그것을 쥐여 주었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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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침
눈은 새벽녘에 그쳤다.부녀는 말없이 언덕을 내려왔다. 밤새 쌓인 눈이 두 사람의 발자국을 나란히 받아 냈다가, 뒤따르는 바람에 조금씩 지웠다. 운백천은 앞서 걸으며 한 번도 딸을 돌아보지 않았고, 운설은 아버지의 등에 얹힌 무게를 바라보며 걸었다. 저택의 문이 열렸을 때, 그 무게가 어찌하여 그리 무거웠는지 그녀는 곧 알게 되었다.마당에 사람이 그득했다.간밤의 횃불 몇으로 그치지 않았다. 무림맹의 깃발이 아침 바람에 무겁게 젖어 펄럭였고, 흰 무복의 맹도들이 마당을 빙 둘러섰다. 담장 밖으로는 성읍 사람들이 목을 뺐다. 소문이 밤을 새워 이 많은 눈을 불러 모은 것이었다.운백천이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아주 잠깐, 그의 어깨가 펴졌다. 밤새 무덤 앞에서 굽어 있던 등이 딸을 등 뒤에 두는 순간 다시 산맥의 높이를 되찾았다. 운설은 그 등을 바라보며, 이 사람이 무엇을 하든 저를 지키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앎이 고마우면서도 어쩐지 더 시렸다.그 한가운데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무림맹의 법을 집행하는 자리에 오래 앉아 온 사람이었다. 젊은 검객이 가만함으로 좌중을 눌렀다면, 이 노인은 서슬로 눌렀다. 눈매가 얇고 차가웠으며, 웃지 않는 입가에는 오랜 판결의 습관이 굳어 있었다. 죄를 다루어 온 세월만이 새길 수 있는, 사람을 물건처럼 저울에 올리는 눈이었다.그 곁에 간밤의 젊은 검객이 서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의 얼굴에는 밤의 서늘함 대신 다른 것이 어려 있었다. 마지못함, 이라고 운설은 읽었다. 그의 눈이 그녀에게 닿았고, 아주 짧게 흔들렸다가 이내 돌아섰다. 그 짧은 흔들림이, 마당의 어떤 창칼보다 오래 운설의 가슴에 남았다.집법을 맡은 노인이 운백천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인사도 예도 없었다."청하의 가주. 간밤 이 댁에서 죄인 하나가 숨을 거두었다 들었소. 북막의 잔당, 십팔 년을 숨어 다닌 자였지." 목소리는 얇고 또렷했다. "그자가 품었던 신패를 이 댁에서 거두었다는 말도 들었소."운백천은 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노인은 긍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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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흰 길
집법당주의 손가락은 오래 운설을 겨누고 있었다."신패를 내놓고, 저 여인을 맹의 법 앞에 세우시오." 노인이 말했다. "청하 운씨가 재앙의 씨를 열여덟 해나 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무거운 일이오. 허나 지금 순순히 내어놓는다면, 가주의 죄는 묻지 않으리다."마당의 흰 무복들이 반걸음씩 좁혀 들었다. 운씨의 무사들도 검자루에 손을 얹었으나, 그 손들은 예전만큼 굳세지 못했다. 재앙의 씨. 그 한마디가 이미 그들의 팔에서 힘을 빼 놓은 뒤였다. 사람들은 지킬 것과 버릴 것을 저울질하기 시작했고, 운설은 그 저울추가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제 등으로 느꼈다.운씨의 한 어른이 앞으로 나섰다. 가주의 아우뻘 되는 이였다. "가주. 청하 삼백 식솔의 목숨이 지금 이 마당에 함께 서 있소." 목소리가 낮아서 더 무서웠다. "하나를 지키자고 삼백을 눈밭에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오." 운설은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옳아서 더 시렸다. 어제까지 그녀를 조카라 부르던 입이었다.운백천이 앞으로 나섰다.그가 집법당주와 운설 사이에 섰다. 넓지 않은 등이었으되, 그 순간 마당의 모든 무게가 그 등 하나에 실렸다. 노인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운백천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아주 낮게 말했다. 딸에게만 가 닿을 목소리였다."가라."운설은 그 한마디를 알아듣지 못한 사람처럼 서 있었다."나는 너를 눈밭에서 데려왔다." 운백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니… 다시 눈밭으로 돌려보내지는 않겠다. 가라, 설아. 뒤돌아보지 말고."무언가가 운설의 등을 떠밀었다. 발이 머리보다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몸을 돌려 저택의 뒷담을 향해 달렸다. 흰 무복 하나가 소리치며 앞을 막아섰고 — 그 순간 운백천의 검이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그 뒤의 일을 운설은 보지 못했다. 보지 말라 하였으므로.그러나 담을 넘기 직전, 그녀는 끝내 한 번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눈발 너머, 아버지의 등이 흰 무복들의 바다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산맥처럼. 그 산맥이 얼마나 오래 버텨 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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