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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지방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01 16:20:22

두 사람은 오래 마주 보았다.

운백천이 딸의 앞으로 반걸음 나섰다. 큰 동작은 없었다. 그저 딸과 검객 사이에 제 몸을 세웠을 뿐인데, 그 반걸음에 방 안의 공기가 자리를 바꾸었다. 화로의 불꽃이 두 사내의 그림자를 벽 위로 길게 끌어올려, 좁은 약방이 문득 어느 전각의 대청처럼 깊고 아득해졌다.

"그 노인은 죄인이오." 젊은 사내의 음성은 낮았고, 낮은 만큼 멀리 갔다. "무림맹이 십수 년을 쫓았소. 그가 품었던 것은 맹의 것이오. 죽은 자의 것도, 이 댁의 것도 아니오."

"내 문 앞에서 숨을 거둔 사람이네." 운백천의 목소리에는 세월이 얹혀 있었다. 굳이 높이지 않아도 방을 가득 메우는, 오래 호령해 온 자의 울림이었다. "죄인의 주검이라 한들, 거두어 눕히는 것이 이 성읍의 법일세. 그리고 이 아이는 내 딸이야. 의원이지. 그 손에 무엇이 쥐여 있든, 자네가 밤을 틈타 검을 겨눌 사람이 아닐세."

젊은 사내의 눈길이 운백천을 넘어 운설에게 닿았다. 서늘하되 차갑지는 않은, 깊은 우물을 굽어볼 때처럼 그 안에 무엇이 잠겨 있는지 가늠할 수 없어 자꾸만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눈이었다. 그 시선이 제게 머무는 동안, 등 뒤로 화로의 열이 닿는데도 운설은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그 서늘함에는 두려움에 없는 무엇이 섞여 있어, 그녀는 이름을 붙이지 못한 채 눈이 살갗에 스며드는 감각이라 여기고 말았다.

찰나였다. 그 짧은 사이에 방 안의 모든 것이 — 죽은 노인도, 아버지의 곧은 등도, 문밖에 도열한 횃불도 — 뒤로 물러나 흐릿해지고, 오직 그 한 쌍의 눈만이 또렷하게 남았다. 운설은 제가 그 얼굴을 언젠가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듯한, 그럴 리 없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처음 보는 사내였다. 그런데도 그 눈을 마주하는 일은, 오래 잊고 지낸 무언가를 기어이 떠올리려 애쓰는 일과 닮아 있었다. 그를 적으로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 순간만은 까닭 없이 서러워, 운설은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한 번 스며든 것은 눈처럼 쉬이 녹지 않았다.

검은 뽑히지 않았다. 뽑히지 않은 검이 뽑힌 검보다 무겁게 방을 짓눌렀다. 문틈으로 흰 가루가 스며들고, 화로의 불이 낮게 사위었다. 제 심장 소리가 방 안에서 가장 요란하다는 것을 깨닫고, 운설은 숨을 눌렀다.

이윽고 젊은 사내가 검자루에서 손을 거두었다. 처음부터 그 위에 손을 얹은 적 없던 사람처럼 무연한 동작이었다. 그 물러섬에는 패배의 그늘이 비치지 않았다. 이길 수 있는 자리를 스스로 접는 자의 여유가, 도리어 서릿발처럼 곧게 서 있었다.

"오늘 밤은 여기까지 하지요."

돌아서는 그의 어깨 위로 눈이 다시 내려앉았다. 문지방을 넘던 걸음이 문득 멎었다. 돌아보지는 않았다.

"가주." 등을 보인 채였다. "저 아이가 무엇을 물려받았는지… 정녕 모르십니까."

운백천은 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어떤 대답보다 길고 무거웠다.

"모르신다면, 그편이 낫겠지요." 젊은 사내의 음성이 눈발 속으로 낮게 잠겼다. "허나 아신다면 — 언젠가 저 아이가 가주의 눈을 마주하고 물어올 겁니다. 그날, 무어라 답하시렵니까."

말을 마친 그가 흰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횃불이 하나씩 눈에 삼켜지고, 마지막 불빛마저 스러지자 마당은 다시 소리 없는 백야(白夜)로 가라앉았다.

방 안에는 화로의 숨소리만 남았다.

운설은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았다. 늘 산맥처럼 꼿꼿하던 등이, 젊은 검객이 던지고 간 물음 아래 아주 조금 기울어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무언가 말해 주기를, 그 물음을 웃어넘겨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운백천은 죽은 노인만 오래 굽어볼 뿐, 끝내 딸을 돌아보지 않았다.

궁금증이 눈처럼 소리 없이 그녀 안에 쌓여 갔다. 나는 무엇을 물려받았는가. 아버지는 무엇을 알고서 침묵하는가. 그리고 저 사내는 — 어찌하여 나를 벨 수 있었으면서도 베지 않았는가. 물음마다 답은 없고, 다만 손바닥 한가운데의 온기와 목덜미에 남은 낯선 서늘함만이 그녀 곁에 머물렀다.

밖에서는 눈이 내렸다. 세 사람이 남긴 발자국을 천천히 지우며, 소리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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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152화 — 곳간의 자수

    한겸의 파발을 받은 밤, 곳간에서 손님이 왔다. 새 당주의 소식이 산을 넘어 곳간까지 닿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했던 것이다.휘월이었다. 죄인은 궁 안에 발을 들이지 않는 제 법을 처음으로 어기고, 대전 곁방의 문밖에 서서 청했다."들일 것이 있다. — 자수(自首)다."방 안의 눈들이 굳었다. 자백할 죄는 얼음여울에서 이미 다 자백한 줄 알았던 것이다.노인은 방에 들어 앉지 않았다. 문지방 밖에 선 채로, 문 안의 사람들에게 말했다."궁려에서의 여덟 해 — 내가 얼음만 벼린 것이 아니다."늙은 목소리는 며칠 전 담을 쌓던 목소리와 같은데, 그 밑이 달랐다."심법을 거꾸로 파는 연구를 했다. 물소리를 듣는 법이 있으면 — 물소리를 끊는 법도 있어야 셈이 맞지. 듣는 귀를 막고, 흘리는 손을 묶고, 임자와 강을 갈라놓는 법. 나를 지운 형에게 언젠가 그 법을 쓸 작정이었다. 형의 심법을 — 형수에게 간 그 심법을 — 끊어 놓을 작정으로."방 안이 얼음이 되었다. 등잔 불빛만 아무것도 모르는 채 흔들렸다."약이다. 침향에 몇 가지를 섞으면 — 향으로도, 물에 타서도 듣는다. 임자는 반 시진 안에 제 강의 소리를 잃는다. 소리를 잃은 강이 어찌 되는지는—" 노인이 거기서 운설을 보았다. 어린 눈이 처음으로 늙게 흐려져 있었다. "너희가 짐작하는 그대로다. 고삐 없이 날뛴다. 임자가 아무리 애를 써도 — 들리지 않는 것은 달랠 수 없으니."물소리를 끊는 독. 폭주를 만드는 약.운설은 제 안의 강에 손을 얹어 보았다. 낮게 흐르는 소리. 태어나 한 번도 끊긴 적 없는 소리였다. 물마당에서도 급류에서도 얼음 둑에서도 — 사나웠을지언정 들리기는 했다. 들리지 않는 강이라는 것을 그녀는 상상할 수 없었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제일 무서운 법이었다.곁의 선우현이 물었다. "해독은. 끊긴 소리를 잇는 법도 벽에 새겼소?""새겼다." 휘월이 답했다. "법에는 늘 반대 법을 같이 적는 것이 내 버릇이라. 한데 해독은 — 다른 물이 곁에서 임자의 강에 제 소리를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151화 — 덤의 날들

    혼례 이튿날 아침, 신방의 문이 늦도록 안 열렸다.궁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발소리를 죽였고, 발소리를 죽이는 저희끼리 눈짓으로 웃었다. 해가 중천에야 문이 열렸을 때, 나온 두 사람은 서로 딴 데를 보며 걸었고, 그것이 온 궁의 그날 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덤의 날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말대로 셈이 없는 날들이라 — 셈 없는 날들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도 아무도 세지 않았다. 여름이 산기슭의 초록을 짙게 밀어 올리고 있었다.셈이 없는 날들이었다. 아침이면 약방에 환자가 들고, 낮이면 그가 기수들에게 검을 봐 주고, 저녁이면 한 상에서 밥을 먹고, 밤이면 — 등잔이 꺼졌다. 큰일이라고는 타간의 국 간과 여리의 땋음머리 순서 다툼뿐인 날들. 열여덟 해 치 소란을 치른 사람들에게 세상이 처음으로 내주는, 이자 없는 날들.어머니는 그 날들을 아껴 살았다.아침마다 묵할멈과 후원을 반 바퀴 걸었다. 반 바퀴가 힘에 부치는 날은 반의 반 바퀴를 걸었고, 걷지 못하는 날은 마루에 앉아 볕을 걸었다. 딸들이 번갈아 그 곁에 앉았다. 언니는 궁의 일을 어머니에게 물어 가며 했다. 물을 것이 없어도 물었다. 물음이 곧 곁이었다.운설은 어머니의 맥을 아침저녁으로 짚었다.실낱은 실낱인 채였다. 다만 실낱이 이상하게 — 편안했다. 낡아 가는 맥이 아니라, 다 낡은 것이 제 낡음과 화해한 맥. 의녀의 손은 그 차이를 알았고, 아는 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내기를 하나 하자." 어느 볕 좋은 마루에서 어머니가 말했다. "어미가 첫눈을 보는지 못 보는지.""어머니.""너는 어느 쪽에 걸겠느냐.""보는 쪽에요." 운설은 맥을 짚던 손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제 침이 아직 안 졌습니다. 진눈의 내기도 이기고 있고요.""그럼 어미는 못 보는 쪽에 걸마." 어머니가 웃었다. "그래야 네가 이기면 어미가 첫눈을 보지. 지는 게 이기는 내기가 세상엔 있는 법이다."지는 게 이기는 내기. 운설은 그 말을 웃으며 받았고, 받고 나서 혼자 오래 곱씹었다.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150화 — 보름의 혼례

    혼례는 눈마당에서 치러졌다. 지난겨울 운설이 처음 궁에 들던 날 눈을 쓸던 그 마당이었다.눈은 없는 계절이었다. 한데 아침부터 온 궁이 마당에 흰 천을 깔았다. 삭월 신부는 눈 위를 걸어 시집가는 법이라고, 눈이 없으면 눈을 지어서라도 깐다고 — 흑요가 법도를 밝혔고,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신부는 흰 천의 길을 걸었다.수 놓인 족두리가 머리에 있었다. 어머니가 심지를 아껴 태워 완성한, 눈밭에서도 얼지 않는다는 족두리. 활옷 소매에는 세가의 격이 놓은 매화가 피어 있었다. 신부의 손을 잡고 길을 이끈 것은 운백천이었다. 열여덟 해 전 강보를 안고 눈길을 걸었던 사람이, 다 자란 딸의 손을 잡고 흰 길을 걸었다.흰 길의 양쪽에 온 궁이 도열해 있었다. 유민들, 기수들, 만군에서 눌러앉은 병졸 몇, 사냥막의 자매, 그리고 상석의 어머니와 언니. 신부가 지나갈 때 사람들은 삭월의 축원을 낮게 웅얼거렸다. 눈처럼 오래, 눈처럼 고요히. 축원의 뜻을 운설은 걸으면서 처음 배웠다.신랑은 길의 끝에 서 있었다.검은 예복에, 빈 허리에. 검신은 혼례에 검을 차지 않았다. 오늘 지킬 것은 검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듯이.초례상 앞에서 두 사람은 마주 섰다.맞절이 오갔다. 표주박의 술이 오갔다. 반쪽씩 나눈 것이 도로 하나가 되는 잔이었다. 그리고 삭월의 법식 하나가 더 있었다. 신랑과 신부가 서로의 이름을 — 온전한 이름을 — 마당의 모두가 듣도록 부르는 것."설야."그가 불렀다. 위급이 고르던 이름이, 혼례상 앞에서 처음으로 위급 없이 불렸다."현."그녀가 불렀다. 김 서린 온천의 밤에 처음 넘었던 이름이, 백일하에 불렸다.마당이 뒤집어졌다. 우르가 제일 크게 울었고, 울면서 제일 크게 웃었다.잔치는 해가 지도록 갔다. 열여덟 해 치 잔치를 하루에 몰아 하는 사람들이라, 흥이 바닥나지 않았다. 타간의 국은 그날따라 간이 맞았다 — 고 다들 우겼다. 더운돌 영감은 무릎을 두드리며 젊은것들의 춤을 훈수했고, 여리와 연지는 신부의 족두리를 번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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