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도진은 오랜만에 자신의 신혼집으로 발을 들였다.
일주일 중 3~4일은 한수진의 아파트에서 보내고 있던 터라, 제 집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어색함이 먼저 감돌았다. 하지만 그 어색함도 잠시, 온 집안을 감싸는 시원한 삼나무 향과 그 위를 부드럽게 덮는 달콤한 프리지아 향을 맡자마자 비로소 완벽한 안식처에 온 듯한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뒤이어 코끝을 자극하는 고소한 참기름과 알싸한 마늘 향이, 최근 배달 음식과 거친 외식으로 지쳐 있던 도진의 위장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도진이 구두를 벗을 때, 오랜만에 들리는 문소리에 지수가 식사를 멈추고 거실로 나왔다.
“어? 도진 씨? 어쩐 일이야?”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 못 본 사이 예전의 생기와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되찾은 지수의 모습을 마주하자, 도진은 순간 자신들이 가장 행복했던 3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어쩐 일이라니? 내가 내 집에 온 건데. 그동
작업실 안은 묵직한 정적과 정교한 세공 도구들의 나직한 마찰음만이 흘러가고 있었다.지수는 고급스러운 광택이 흐르는 최고급 실크 드레스 스커트 자락을 넓게 펼쳐놓은 채, 섬세하게 꼬인 차분한 빛깔의 은사(銀絲) 실을 바늘에 걸었다. 오빠 지현과 결혼할 하나뿐인 친구 슬비를 위해 드레스의 하이라이트를 직접 작업하는 순간이었다.드레스는 상체에서부터 유려하게 흘러내려 스커트 아랫단까지 은하수가 쏟아지는 듯 웅장하고 우아한 실루엣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수는 지나친 보석의 남발로 시선이 피로해지지 않도록, 스커트 아랫단에 슬비가 가장 좋아하는 ‘장미’ 문양을 은사로 은은하고 품격 있게 수놓아 나갔다.차분한 은빛 장미 자수가 스커트 자락을 따라 고풍스럽게 피어났다. 그리고 그 자수 사이, 장미 꽃잎 끝에 이슬이 맺힌 듯한 몇몇 포인트 지점에만 0.05캐럿짜리 최상급 멜리 다이아몬드를 과하지 않게 절제하며 살짝 물리듯 박아 넣었다.조명을 받을 때마다 과한 눈부심 대신, 실크와 은사 자수의 고급스러운 결을 타고 은은한 기품이 흘러넘쳤다.“……대표님, 자수 레이스의 결을 따라 은사와 보석의 균형을 잡으신 감각이 정말 대단합니다. 보석만 가득했을 때보다 훨씬 단정하고 우아해요.”엘리제 브랜드의 수석 드레스 디자이너가 탄복하며 바라보자, 지수는 바늘을 멈추지 않은 채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슬비가 입을 세상에 단 하나뿐인 드레스니까요. 디테일이 너무 과하면 사람보다 옷이 먼저 보여요. 슬비가 가장 아름답게 돋보일 수 있도록, 절제된 화려함을 담고 싶었어요.”지수의 손끝이 지날 때마다 실크 드레스는 단순한 옷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으로 거듭나고 있었다.드레스 작업을 끝낸 지수는 곧바로 보석 세공대로 자리를 옮겼다. 눈에 루페(확대경)를 고정한 지수의 손에 들
지수는 정지상 팀장의 연락을 받은 뒤, 처음에는 무대응으로 일관하다 나중에는 아예 비서실 선에서 처리하도록 넘겨 버렸다. 하나뿐인 오빠 지현과 친한 친구 슬비의 결혼식 준비에 하이엔드 브랜드 ‘다크문’의 VVIP 의뢰까지 폭주하던 터라, 도진에게까지 신경을 쓸 시간적·감정적 여력이 전혀 없었던 탓이다.“대표님, 이지수 대표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현재 브랜드 런칭 및 해외 일정으로 스케줄이 빽빽하여 강 대표님을 따로 만날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합니다.”정지상 팀장의 보고에 강도진은 실소했다. 만나주지 않겠다? 감히 이지수가 자신을 거부해?“스케줄을 조정해서라도 시간을 빼라고 해! 내가 검은태양 납품 건 때문에 직접 만나겠다고 하지 않았나!”“이미 제이아우라 법무팀과 비서실을 통해 전달했습니다만, 공적인 서면 인터뷰 외의 개인적 면담은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이 단호합니다.”도진은 짓씹듯 욕설을 내뱉었다. 지수는 이제 도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까마득한 높이에 서 있었다. 분통이 터졌지만 당장 급한 불을 꺼야 했다. 오션블루와의 계약에는 CB 그룹의 향후 사운이 걸린 국내 물류사용권이 담보로 걸려 있었다. 납기 일자는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결국 도진은 CB의 수석 세공사이자 디자이너인 채준영을 급히 호출했다. 도진은 준영에게 지수가 요구한 '검은태양'의 디자인 세공 수정안을 내밀었다.“준영 씨, 이 요구사항대로 세공을 완성해서 기한 내에 물량을 맞출 수 있겠습니까?”서류를 훑어보던 준영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시안 속 디테일은 인간의 손기술이라기보다 예술의 영역에 가까웠다. 한참을 서류만 노려보던 준영이 마침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불가능합니
CB 그룹을 나와 RV로 이직한 태준은 최근 그들이 새로이 둥지를 튼 빌딩, ‘더 문(The Moon)’으로 향했다. 시선을 단숨에 압도하는 거대하고 감각적인 외관만큼이나, 직원 전용 출입구부터가 평범함을 거부하고 있었다.그냥 보기에는 그저 흔하디흔한 평범한 골목길처럼 보이는 곳. 하지만 그곳에 은밀하게 감추어진 직원 전용 출입구를 지나자, 고객용 동선과 완벽하게 분리된 직원 전용 지하 주차장이 나타났다.태준이 차를 세우고 내린 그 순간부터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러 걸어가는 내내, 정수리를 따갑게 찌르는 듯한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대기업 대표이사의 그림자로 살며 날카롭게 다듬어진 태준의 직감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다.띵-.엘리베이터가 더 문의 6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는 그 찰나, 태준은 혓바닥이 바짝 마르는 느낌을 받으며 숨을 들이켰다.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네 명의 남녀가 그를 반포위하듯 촘촘하게 둘러쌌기 때문이었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화려한 아우라를 풍기는 여자였다. 강도진을 보좌하며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인물, 스타게이트의 대표 사라 킴이었다. 태준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스타게이트의 사라 킴 대표님……? 당신이 왜 여기에…….”사라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미묘하게 올리며 정체 모를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그 옆에는 박성재 변호사가 서 있었다. 퇴사 직전, 도진과 지수의 저작권 소송 건으로 대면했던 제이아우라 법무팀의 수장이었다. 지수의 전담 법무팀 소속이니 이곳에 있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태준은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목례를 건넸다.진짜 문제는 남은 두 사람이었다. 냉랭한 기운을 뿜어내는 이현과 철수. 태준이 미처 통성명을 하기도 전에, 덩치가 거구인
최태준이 사직서를 던지고 떠난 지 며칠 동안, CB 그룹 대표이사 집무실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도진은 마치 항해사를 잃고 표류하는 난파선의 선장 같았다. 사소한 일정 조율부터 중요한 계약서 검토까지, 십수 년을 그림자처럼 보좌하던 태준의 빈자리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도진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부분을 태준에게 의존해 왔는지 뼈저리게 실감하며 깊은 무력감에 빠졌다.하지만 완벽주의자였던 태준은 떠나는 순간까지 빈틈이 없었다. 그가 남겨둔 치밀한 인수인계 서류와 매뉴얼 덕분에, 비서실 직원들의 일사불란한 보좌로 마침내 도진의 업무 능률도 제 궤도를 찾기 시작했다.겨우 한숨을 돌리나 했던 찰나, 비서실에 새로운 먹구름이 드리웠다. 원인은 태준의 후임으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한수진의 사촌 오빠, 한수혁 때문이었다.수진은 태준이 완전히 사직했다는 소식을 병실에서 전해 들었다. 그녀는 영악하게도 도진의 심리를 파고들었다. 아이가 예정일보다 훨씬 일찍 조산하게 된 원인이 자신이 총괄디자이너에서 해임당한 충격 때문이라며 눈물로 호소한 것이다. 은근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도진의 마음을 이용해, 수진은 CB의 심장부인 비서실에 자신의 사람을 심어두고자 제 사촌 오빠를 추천했다.도진은 내키지 않았지만, 태준이 가기 전 자신의 후임 팀장으로 내정해 둔 베테랑 비서 ‘정지상’이 있었기에 수혁을 지상의 밑으로 입사시키는 조건으로 타협했다.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수혁은 낙하산 주제에 자신이 비서실 소속이 아닌, CB 대표이사 강도진의 ‘직속 심복’이라 착각하며 비서실 내에서 온갖 갑질을 일삼았다.“정 팀장님, 이건 대표님께 제가 직접 보고 올리겠습니다. 아, 참. 수진이가 기운이 없다고 하더군요. 이거 수진이가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준비해서 병실로 보내세요.”정지상은 한수혁이 툭 내민 종이를 받아 들
진우와 태준의 만남은 은밀하게 이루어 졌다.“도진의 약점이나 CB의 내부 기밀 같은 건 가져올 필요 없습니다.”진우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태준은 들고 있던 찻잔을 멈췄다. 제이아우라의 대표, 진우와의 면접은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태준은 당연히 진우가 경쟁사인 CB의 약점이나 고급 정보를 요구할 것이라 짐작했었다.“의외라는 표정이군요.”“...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대표님께서 저를 영입하시는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라 생각했습니다.”진우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웃었다. 그의 눈빛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여유가 담겨 있었다.“도진이 비밀유지 서약서를 요구하거든 군말 없이 서명하고 나오세요. 난 얄팍한 내부 정보 따위엔 관심 없습니다. 그런 구차한 짓을 하지 않아도, 내가 알고자 하는 건 언제든 내 손으로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진우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짓밟는 도진의 비열함과 대비되는, 압도적인 강자의 품격. 태준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 이 남자에 대한 단단한 신뢰가 싹트는 것을 느꼈다.‘이 사람이라면, 내 전부를 걸고 보좌할 가치가 있다.’하지만 태준의 이직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사직서?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보고서를 검토하던 도진이 사직서를 발견하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태준은 덤덤하게 고개를 숙였다.“그동안 부사장님을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 한계인 것 같습니다.”“한 실장, 요즘 피곤해서 그래? 휴가가 필요하면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줄 테니
도진의 벼랑 끝 전술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CB 그룹이 표절을 공식 인정하고 수진을 해임한 뒤 원작자 지수와 계약을 체결하자, 시장의 반응은 도진의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다.[특종] Z(지수), ‘영원한 사랑’ 이후 CB와 다시 손잡다... 업계 지각변동 예고과거 업계를 뒤흔들었던 지수(Z)의 전설적인 컬렉션 ‘영원한 사랑’을 기억하는 대중과 투자자들은 열광했다.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고 원작자를 예우하는 대기업의 ‘책임 경영’ 프레임은 실추되던 CB의 브랜드를 순식간에 신뢰의 아이콘으로 탈바꿈시켰고, 폭락하던 주가는 기적처럼 반등하며 안정을 찾았다.물론 지수의 제이아우라 측은 즉각 선을 그었다.“이번 협업은 오직 ‘검은태양’ 이번 컬렉션에 한해서만 진행되는 단발성 계약입니다. CB 그룹과의 지속적인 파트너십은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철저하고 냉정한 선긋기였으나, 이미 달아오른 업계의 긴장감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비즈니스 세계에 영원한 적은 없다’는 말처럼, 앞으로 두 세력이 어떻게 얽히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 자체가 CB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 셈이었다.회사에 들이닥친 큰 불을 끄고 나서야, 도진은 비로소 무거운 걸음을 옮겨 수진이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병실 문을 열자마자 도진을 맞이한 것은 차가운 정적이 아닌, 깨진 유리 파편과 찢어진 시트, 그리고 날카로운 비명이었다.“당장 나가! 나를 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내 동정을 살피러 온 거야? 도진 씨,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수진은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침대 위에서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눈 밑은 거멓게 죽어 있었고, 온몸은 분노와 배신감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ldq
아침에 일어난 지수는 싸늘하게 식어있는 옆자리를 보았다. 몇일 집에 잘 들어오던 도진은 어젯밤 들어오지 않았다.생리가 시작하기 전에 느껴지는 익숙한 배의 묵직한 불편감에 불안감이 든 지수는 자신의 아랫배를 살살 만지며 제발 이번에는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과 편하게 강도진을 떠나기 위해 이번에도 실패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양가적인 생각에 웃음이 났다. 잠시 후 오랫만에 슬비를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던 중 가정부의 통화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이번에는 사장님께서 가출하신 것 같아요. 집에 안들어 오시네요. 아마 작은
진우가 근무하는 HN은행 근처의 조용한 카페. 진우는 초조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슬비를 바라보았다. 슬비는 지현의 비서답게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갑작스러운 연락에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박진우씨"진우는 서류를 열어보려다가 멈칫하며 슬비를 응시했다."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그리고 이지현태표님의 비서께서 왜 저를 찾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저희 은행은 GS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슬비는 차갑지만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으며 서류봉투를 눈짓했다. 거기에는 슬비가 미리 준비한
지수는 사무실 문 앞에서도 도진과 수진의 적나라한 대화를 듣고 있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도진의 목에 팔을 감으며 지수를 반히 쳐다봤다. 도진은 그런 수진을 보며 한 번 씩 웃고는, 손으로 수진의 허리를 쓸며 차갑게 지수를 쳐다봤다" 왜 왔어? 여기가 니가 오고 싶으면 오는 놀이터야?"지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진이 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지수는 도진의 물음에 대답대신 들고 온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툭 던져두고 차갑게 돌아서려했다. 그런 지수
A국에 도착한 슬비는 K국과 다른 차갑고 축축한 공기를 마시며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박진우씨 맞으신가요? 저는 GS그룹의 박슬비라고 합니다. 제안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런데 만날수 있을까요?"갑작스러운 전화에 진우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 GS? 내가 아는 그 GS 맞아? 그 큰 회사에서 나를 왜?'라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피싱 아닌가요? 요즘도 이런 사기에 걸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하며 거칠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슬비는 황당한 표정으로 끊어진 전화를 한참 보다가 진우에게 메세지와 자신의 명함을 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