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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2-26 17:51:26

“지퍼 좀 올려줄래요?”

피팅룸의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나왔다.

“네, 손님.”

해인은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빠르게 다가갔다. 그녀가 걸친 원피스는 해인의 석 달 치 월급을 합쳐도 살 수 없는 고가의 신상이었다. 여자가 해인을 등지고 거울 앞에 섰다.

순간, 해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거울 속 여자의 실루엣이, 그리고 살짝 돌아본 옆얼굴이 어쩐지 자신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는 화려한 조명 아래서 빛나는 보석 같았고, 해인은 그 보석을 닦는 초라한 수건 같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예쁘다…….’

그 찰나의 멍함이 독이 되었다.

“아얏!”

돌연 여자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해인의 팔을 거칠게 밀쳤다.

“미쳤어요? 지금 뭐 하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당황한 해인은 급히 지퍼를 살폈다. 가늘고 긴 머리카락 몇 올이 지퍼 이빨 사이에 단단히 씹혀 있었다.

“머리카락이 지퍼에 걸려서…….”

“아, 진짜 짜증 나. 이거 오늘 관리받고 온 머리인데! 당신 눈 어디다 두고 일해?”

“정말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제가 금방 해결해 드릴게요.”

다급히 카운터에서 쪽가위를 가져왔다. 조심스럽게 엉킨 머리카락을 끊어내려던 찰나, 여자의 눈이 가자미처럼 찢어졌다.

“지금 내 머리카락을 자르겠다고? 이 상황에서 가위질이야? 당신 미쳤어?”

“하지만 고객님, 지퍼가 완전히 끼어서 이 방법밖에는…….”

“관리자 불러, 당장! 내가, 네 머리카락도 모조리 잘라줄게.”

매장 안이 채영의 고함으로 소란스러워진 그때, 묵직한 구두 소리와 함께 매장 입구의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야.”

낮고 위압적인 음성. 여자는 반색하며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기 점원이 내 머리카락을 뜯어놓고는 이제 자르겠대. 말도 안 되지?”

남자의 시선이 채영을 지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해인에게 멎었다. 얼음처럼 차갑던 남자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균열을 일으키며 흔들렸다.

“……윤해인?”

익숙하면서도 낯선 무게감에 해인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맞닿는 순간, 해인의 손에 든 가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빠?”

여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오빠? 자기, 여동생이 있었어? 남동생만 있는 거 아니었어?”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 매장 안에 울려 퍼졌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떨어진 쪽가위와, 겁에 질린 채 빨개진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해인의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너 여기서 지금 뭐 하고 있어.”

해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사이로 여자가 해인의 앞을 막아섰다.

“아까 못 들었어? 얘가 내 머리카락 다 뜯어놨다고.”

“아니, 너 말고.”

“어?”

남자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다시 해인을 살폈다.

“윤해인. 너 여기서 지금 뭐하고 있냐고.”

달싹거리던 해인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 보면 몰라. 일하고 있잖아.”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그는 그 목소리가 울기 직전에 나오던 떨림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고객님, 무슨 일입니까.”

어느 새 매니저와 보안직원 한명 달려왔다.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가보세요.”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다시금 얼굴을 찡그리는 여자의 팔을 그가 낚아챘다.

“내 여동생이야.”

**

백화점 최상층, 두꺼운 방음 문 너머의 VIP 라운지는 아래층의 소란함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고요했다. 발소리를 집어삼키는 푹신한 카펫, 공기를 은은하게 채운 고가의 디퓨저 향기, 그리고 통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번잡한 서울의 전경.

이곳에서 해인은 자신이 우아한 수조 속에 잘못 들어온 이물질 같다고 느껴졌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해인이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꽉 맞잡으며 먼저 정적을 깼다.

“됐어요. 그런데 여동생이라니 무슨 말이야?”

여자는 해인의 가슴에 달려있는 명찰을 노골적으로 훑어내린 뒤 도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성도 다르잖아. 윤해인, 권도윤.”

채영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도윤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저 서늘한 눈빛으로 해인의 붉게 달아오른 손등을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한참 뒤에야 그의 낮은 음성이 공간을 울렸다.

“내 아버지가 결혼을 좀 많이 하셨거든. 두 번째 결혼 때, 만난 여동생.”

채영이 이해했다는 듯 짧은 탄성을 내뱉더니, 곧바로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를 띄웠다.

“아…, 그럼 뭐 남인 거 아냐?”

남. 그 단어에 해인은 저도 모르게 급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10년이나 한 가족으로 살았어요. 남은……, 아니죠.”

해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채영은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해인을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은 동등한 인격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가여운 유기견을 보는 듯한 동정어린 조롱이었다.

“그렇네요.”

여자는 도윤의 팔에 자연스럽게 손을 얹으며 덧붙였다.

“강채영이라고 해요. 도윤 씨 약혼녀. 뭐, 정식 약혼식은 곧 치를 예정이지만.”

도윤의 시선은 채영이 아니라, 여전히 그녀가 입은 빳빳하고 저렴한 유니폼 재질에 머물렀다. 그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 해인은 마치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대학은. 안 갔어?”

“어?……응. 안 갔어.”

“왜?”

단답형의 질문. 하지만 그 안에는 따져 묻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해인은 손가락을 꿈지락거리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뭘 왜야. 딱히 공부에 흥미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거든. 집안 형편 뻔히 아는데 괜히 비싼 학비 내면서 시간 낭비할 필요 있나 싶어서.”

도윤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아저씨는 잘 계시지?”

“응. 아주머니는?”

찰나의 순간, 해인의 얼굴이 굳었다가 미소로 물들었다.

“여전하지, 뭐.”

“여전한 게 뭔데?”

“응? 그냥 뭐……, 별 다를 거 없이 산다고.”

해인은 더 이상 이 숨 막히는 공간에 견딜 재간이 없었다. 그녀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근무 중이라 이만 가봐야겠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매니저님한테 혼나거든.”

짐짓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으며 채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늘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쇼핑 즐겁게 하세요, 고객님.”

등 뒤에 박히는 시선을 느끼며 해인은 도망치듯 라운지를 빠져나왔다.

도윤은 그녀가 사라진 문 쪽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마치 끊어내듯 시선을 돌려 채영을 보았다.

“채영아. 오늘 쇼핑은 혼자 해야겠다.”

“뭐? 오빠, 우리 한 달 만에 만난 건 알아? 이제 겨우 차 한 잔 마셨는데!”

채영이 어이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도윤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뒤였다. 그는 감정 없는 손길로 지갑에서 검은색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로 미끄러뜨렸다.

“약속이 있었는데 깜빡했어. 급한 일이야.”

“무슨 약속인데 그래?”

“아까 그 옷, 계산해. 예쁘더라.”

도윤의 시선은 채영을 향해 있었으나, 그의 머릿속에 맺힌 잔상은 지퍼를 올리며 거울 속 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초라한 해인의 실루엣이었다.

“……진짜? 알았어, 그럼 이건 기분 좋게 받을게.”

채영이 카드를 집어 들며 방긋 웃는 것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도윤은 긴 다리로 라운지를 가로질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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