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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기억의 공백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7 11:12:42

그날 밤, 이우는 홀로 집으로 돌아와 서재에 들어가 오래된 USB 하나를 찾았다.

거기엔 과거의 일정 캘린더, 지인 명단, 지워진 사진 폴더가 있었다.

그는 ‘조유진’이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그리고 하나의 사진.북카페, 창가. 앉아 있는 유진.

그 옆에 앉아 있던 남자. 얼굴은 흐릿했지만,

그가 입은 셔츠는 분명 자신의 옷이었다.

“…내가 거기 있었나?”

그는 숨을 멈췄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서움에, USB를 서랍에 던져 넣었다.

다음날, 유리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묶으며 말했다.

“기억은, 없다고 말해도 몸은 기억하거든요.”

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북카페 사진을 하나 열었다.

거기엔 유진의 뒷모습. 그 옆에서 고개를 약간 숙인 남자.

그리고, 그림자처럼 비친 이우의 시계.

‘그 사람, 이제 자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가고 있어.’

이우는 사무실 안에서 USB를 재생하며 모니터에 띄워진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잠실 롯데백화점 북카페. 10층.

창가 쪽, 조유진.

그 옆에 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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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 위험한 여자   48. 숨기면 안 되는 감정, 외면하면 안 되는 진실

    차 안은 조용했다. 이우는 운전대 위에 손을 얹은 채,가로등을 따라 번지는 불빛을 천천히 지나쳤다.조수석에 앉은 유리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하지만 그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의 감정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조유리 씨.”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괜찮으십니까?”“…괜찮아질 거예요.”그 말에 이우는 핸들을 조심스레 돌리며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지금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하지만, 그 일이 당신을 혼자 있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는 것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조용한 맹세 같았다.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차 안의 어둠 속에서, 이우의 눈동자는 또렷했다.거기에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신념이 있었다.“나중에 말할게요. 그 사람이 시훈 씨가…뭘 말했는지, 내가 뭘 들었는지.”“기다리겠습니다.”그는 그렇게 대답했다.그 짧은 말이, 유리의 마음을 더 무너뜨렸다.‘기다리겠다’는 말은 모든 감정을 존중하는 자세였다.유리는 창밖을 바라봤다.어둠 속 도시 풍경은 자신의 마음 같았다.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사라져버릴 것 같은 감정.하지만 말하는 순간 무너질까 두려운 감정.그 틈에서 그녀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이우 씨.”“네.”“혹시 내가 지금 이 순간 당신한테 기댄다면, 당신은 나를 받아주실 수 있으세요?”이우는 답하지 않았다.대신 차를 멈추었다.그리고, 유리를 바라보았다.그 시선엔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무엇보다 지금부터의 모든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있다는 유리는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그리고 말했다.“그 사람이… 조유진 언니가 죽던 날, 그 순간의 얼굴을 보여줬대요. 언니한테, 일부러.”이우의 눈빛이 바뀌었다. 숨이 얕아졌다.“그 단추… 부검 당시 입에서 나온 걸 그가 갖고 있었어요.”“…….”“그걸, 내 앞에 꺼냈어요.”이우는 핸드폰을 꺼냈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입력하며 조용히 말했다.“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지금부터는 그를 직

  • 너무 위험한 여자   47. 다시 시작되는 밤

    유리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기억 저편에서 떠오르던 불안한 조각들이 모두 하나로 이어지는 느낌이었다.“왜요… 왜 그런 짓을 했어요…”시훈은 한참 침묵하다,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당신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전 당신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모든 걸 계획했어요.”유리는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순간 균형을 잃고 주저앉았다.“조유진 씨가 당신의 언니가 아니라면 제가 여길 이렇게까지 망치지 않았을 겁니다.”“…….”“하지만, 당신의 슬픔을 통해 당신의 마음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난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그게 사랑이라고 말하려는 거예요?”시훈은 웃지 않았다.“사랑이란, 그 사람 안에서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결정짓는 거라고 생각합니다.”“미쳤군요.”“네. 그게 제가 가진 유일한 진심입니다.”유리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한때 따뜻한 후원자였고,지금은 비틀린 감정을 포장한 잔혹한 설계자였다.그녀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언니가…당신 얼굴을 보고 죽었다고요?”“네.”“그걸…당신은 일부러 그 순간을 만들어놓고, 그녀가 기억하게 만든 거군요.”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움직임은 섬뜩할 정도로 매끄러웠다.“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 나라는 것, 그게 내 존재를 가장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방법이었어요.”유리는 핸드폰을 다시 들어 녹음을 멈췄다.그리고 손에 쥔 그것을 그대로 테이블 위에 던졌다.“이걸로 당신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안 될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보여드린 건 단지 서곡일 뿐이니까요.”“당신…지금 이 모든 걸 왜 말하는 거죠?”“당신이 날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요.”순간 유리는 그 자리에 서서 탁자 너머의 시훈을 향해 외쳤다.“나는 당신을 단 한 번도 선택한 적 없어요. 지금 이 순간도 나는 당신이 혐오스러워요!”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가에는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하지만 시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괜찮습니다. 사랑은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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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계 초침 소리가 병원 대기실보다 더 건조하게 울렸다.호텔 9층. 조용한 미팅룸. 탁자 위엔 차가 식었고, 햇살도 들지 않았다.유리는 앉아 있었고, 시훈은 문 앞에 서 있었다.이 장면은 너무 정갈해서 마치 준비된 연극 같았다.그녀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시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저를 여기로 부르신 이유가 뭔가요?”목소리는 단단했지만, 긴장이 묻어나는 결.하지만 유리답게 그 결조차 조용하게 곧았다.시훈은 웃지 않았다.“차 한 잔 하시죠. 커피보단… 오늘은 진저티로 준비했습니다.”“마시지 않겠습니다.”“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 이야기는 들어주시겠죠?”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손끝으로 테이블을 아주 천천히 톡톡 두드렸다.세 번. 규칙적인 리듬.그건 유리가 깊은 생각을 시작할 때 보이는 신호였다.시훈은 그것까지 읽는 듯 천천히 맞은편에 앉았다.“조유리 씨는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제 성격 분석하려고 부르신 건 아니겠죠.”“분석요? 아뇨, 전 이미 오래전에 끝냈습니다.”“…무슨 말씀이시죠?”시훈은 테이블 아래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그 안엔 유리의 대학 시절 출석 기록,가족관계, 졸업 논문 주제,심지어 대학교 앞에서 마지막으로 주문했던 커피 취향까지 있었다.라떼에 시나몬 가루를 싫어했던 조유리.미세하게 써놓은 이력은 마치 누군가의 일기처럼 섬세했다.“이걸 왜…”“제가 조유리 씨를 처음 본 건, 서울법대 1학년 2학기, 교양 철학 수업이었습니다.”“…….”“그때부터였습니다. 이상하게 눈에 밟히더군요.”“스토킹입니까?”“스토킹은 관심의 저급한 방식이고, 저는 항상 ‘관찰’에 가까운 거리에서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천천히 들여다봤죠.”유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마음속에선 정체 모를 찬물이 머리 위로 끼얹어지는 듯한 불쾌감이 밀려왔다.그 불쾌감은 곧 ‘알고 있었다는 공포’로 뒤바뀌었다.“유진 씨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놀라지 않으셨죠.”

  • 너무 위험한 여자   45. 흔들리는 새벽녘

    이우는 새벽 2시가 넘도록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핸드폰에 뜬 한 줄 메시지.'센터 앞에 누가 있었어요. 방금 도망쳤어요.'보낸 사람은 은서였다. 그리고, 유리였다.그는 바로 차를 몰았다. 강남의 불 꺼진 센터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경찰차 한 대가 도착해 있었다.문은 일부 파손됐고, 안에는 아무것도 도난당한 게 없었다.하지만 더 무서운 건, 그 모든 흔적이 마치 ‘누군가의 경고’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유리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이우가 다가가도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무섭지는 않으셨습니까?”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 눈엔 피로보다 깊은 감정이 들어 있었다.“…무서웠어요.”그리고 이어지는 한 마디.“근데 더 무서운 건… 이제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이우는 말없이 그녀 옆에 앉았다.긴 침묵이 흐른 뒤, 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제가 이러려고 센터 연 게 아닌데요…”“…조유리 씨가 만든 곳입니다. 어떤 흔들림이 와도 유리 씨가 있는 한, 이곳은 무너지지 않습니다.”“그 말, 진심이세요?”“물론입니다.”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그 말 하신 김에 제 마음도 받아주시면 안 돼요?”이우의 눈빛이 흔들렸다.“…그건, 제가 감당할 수 있을 때…”“이젠 그런 말 듣기 싫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다.“계속 밀어내면서 계속 옆에 있는 거, 저한텐 더 잔인해요.”잠시 정적이 흘렀다.그리고 유리는 천천히 이우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올렸다.“저, 이우 씨가 있어서 살아남았어요. 근데 이젠, 이우 씨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요.”그녀의 눈동자는 맑았다. 슬픔이 아닌, 확신이 담겨 있었다.이우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말로는 붙잡을 수 없는 감정이 지금 이 순간, 손끝에 전해지고 있었다.그 시각. 시훈은 어두운 회의실 안에서 CCTV 영상을 재생하고 있었다.영상엔 누군가 센터 앞에서 잠시

  • 너무 위험한 여자   44. 침묵이 흐르고, 의심이 스며든다

    카페 유리문에 붙은 ‘심리상담 예약 가능’ 안내문이 오늘따라 자꾸 눈에 밟혔다.예약은 한 건도 없었고, 전화도 울리지 않았다.센터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고, 그 침묵은 유리의 생각을 더 소란스럽게 만들었다.책상 위 종이컵은 비어 있었고, 그 옆에는 시훈이 두고 간 명함이 아직 그대로였다.하얀 바탕에 정갈한 활자. 윤시훈.그 이름만으로 이 며칠 사이, 유리는 너무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유리 씨, 오늘도 센터에 혼자 계세요?”이우의 음성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응. 아직 사람도 없고… 그냥 혼자 정리 중이에요.”“혼자 있기엔, 지금 상황이 조금…”“괜찮아요. 나, 혼자 있는 데 익숙하잖아요.”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유리에게는 그 말, 너 자신도 믿지 않잖아라는 속삭임처럼 들렸다.잠시 후, 이우는 예고 없이 센터 문을 열고 들어왔다.유리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또 왔네요.”“오늘은 이유가 있어요.”이우는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윤시훈. 그 사람이 최근에 접근한 기관들 리스트예요.”유리는 봉투를 받아들고, 천천히 서류를 넘겼다.그리고 어느 순간 손이 멈췄다.‘한국심리복지재단. 2023년 하반기 인턴 심사 조작 건.’“…이거 진짜예요?”“공식으론 무혐의 처리됐지만, 내부적으로 여러 증거들이 있었어요.”유리는 말없이 서류를 내려다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왜 나한테 이런 짓을… 왜 굳이 나를…”이우는 조용히 말했다.“유리씨가 그 사람의 목표라는 증거는 없어요.하지만, 그 사람은 예전부터 유리씨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이우 씨.”그가 고개를 들었다.“사람이 무너지는 건 바깥에서 누가 밀어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누가 흔들기 시작할 때예요.”“…그래서요?”“그래서 무서워요. 나, 지금 흔들리고 있다는 걸 너무 잘 아니까.”이우는 그녀의 말에 한 걸음 다가섰다.“흔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게 당신 잘못은 아니고.”그 말에 유리는 눈을

  • 너무 위험한 여자   43. 마음의 서툰 고백

    센터 입구 유리문에 익숙한 로고 스티커가 어긋나 있었다.그 사소한 틈이 유리는 이상하리만큼 신경 쓰였다.문을 열자, 실장 은서가 조심스레 다가왔다.“상담 예약 3건, 오늘 다 취소됐어요.”“이유는?”“하나는 아이가 갑자기 아프다고…두 개는 그냥 사정 변경이라며…”유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묘하게 굳어 있었다.“혹시 다 같은 날, 예약된 사람들?”“…네. 일주일 전에 동시에 들어왔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유리의 뒷목이 싸늘해졌다.그날 저녁, 이우가 센터를 찾았다.그는 말없이 앉아있었고, 유리는 조용히 차를 건넸다.“이우 씨.”“응.”“혹시 우리 센터 운영…누군가 방해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이우는 곧바로 되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말했다.“생각하고 있었어요. 처음 예약이 들어왔을 때부터.”“…왜 말 안 했어요?”“당신이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유리는 잠시 침묵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였다.“이미 흔들렸어요.”그녀는 이우 옆에 조용히 앉았다.“당신이 옆에 있으면 내가 강해질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왜요.”“당신이 옆에 있으면 약해져요. 기대고 싶어져요. 참고 싶지 않아져요.”이우는 눈을 감았다.그 말은 그의 모든 인내를 조용히 긁어내는 문장이었다.유리는 이우의 어깨에 조심스레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이런 날은요… 당신이 입술 한 번만 기울이면 나는 무너질 것 같아요.”이우는 숨을 참았다. 그 말이 너무 가까웠다.감정의 문턱을 너무 무방비하게 열었다.“그래도, 무너지지 마요.”“…왜요.”“지금 당신이 무너지면, 나도 같이 무너져요.나는 당신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하지 않아요.”그날 밤, 시훈은 자신의 사무실 안에서익명의 계정으로 센터 홈페이지를 열었다.예약 취소 버튼이 붉게 깜빡였다.“처음은 항상 사소해야 해요. 무너짐은 작은 실금에서 시작하니까.”그는 단추를 꺼내, 작은 금속 상자에 올려놓았다.그 단추 위에 유리의 이름을 적은 메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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