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신시아의 전남편은 얼음처럼 차갑고 매정한 사람이다. 낮에는 비서로, 밤에는 아내로 그를 보필하며 보낸 결혼 생활 2년 동안 신시아는 이 남자에게서 따뜻한 진심 한 조각 건네받지 못했다. 전남편의 첫사랑이 귀국하던 날, 신시아는 남편과 함께 아주 차분하게 이혼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이혼한 지 반년 뒤, 그녀에게 예상치 못한 새 생명이 찾아왔다.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전남편 따위 이제 미련 없다. 그녀는 배 속의 아이와 함께 단호하게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전남편이 첫사랑과 공개연애를 한다고? 알 게 뭐야. 전남편이 첫사랑에게 프러포즈했다고? 신시아는 쿨하게 축하 인사를 보냈다. 부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조만간 2세 소식도 기대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대체 왜? 차갑기만 했던 전남편이 그녀가 출산하던 날, 분만실 앞을 지키고 서 있는 걸까? “우리 다시 시작해!” 신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차갑게 내뱉었다. “정 대표님, 뭔가 오해하시나 본데 이 아이, 당신 애 아니거든요?” 정우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내 애가 아니면 어때. 내 아이로 키우면 되지!”
View More“잠깐만요, 엄마!”그때 은유라가 손을 뻗어 휴대폰을 확 낚아챘다.“전화 걸지 마세요!”손연경은 그녀의 손을 밀어내고 다시 휴대폰을 뺏었다.“왜 못 걸어? 너 시집가서 억울한 꼴 당하는 걸 나더러 보고만 있으란 거야?”은유라는 휴대폰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엄마와 거리를 두었다.“정씨 가문에서 임신 사실을 알든 모르든 지금 이 일을 터뜨리면 집안이 발칵 뒤집힐 거예요. 할아버님 상태도 저런데 진짜 무슨 일 생기면 난 오빠랑 결혼 못 할 수도 있다고요!”이미 긴 세월을 기다려왔는데 결혼을 코앞에 두고 또 기다릴 순 없지.손연경은 망설임 없이 차갑게 내뱉었다.“신시아 그 계집애 임신 여부부터 확실히 밝혀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 결혼 자체가 다 무슨 소용이야!”은유라를 정씨 가문의 며느리로 만들기 위해 공들여 키워온 손연경이었지만 자기 딸이 정씨 집안 사람들에게 얕보이거나 이용당하는 꼴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그년 배 속의 아이가 누구 건지 확실히 알아낼 방법을 생각해 뒀어요. 이 일은 제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엄마는 나서지 마세요.”은유라의 태도는 여느 때보다 결연했다. 절대 순순히 당하고만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그녀가 정우진을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해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손연경이었다.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닫고 결국 손연경이 한발 물러섰다.“알았어. 방법이 있다면 네가 한번 해봐. 다만 이것만 기억해둬, 유라야. 만약 혼자 해결하기 힘들어지거든 꼭 엄마한테 말해야 한다. 무슨 일이든 엄마가 뒤를 봐줄 테니까!”그녀는 은유라에게 더할 나위 없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은유라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돌려주었다.“알았어요, 엄마! 역시 우리 엄마밖에 없다니까요.”그녀는 손연경 옆에 앉아 팔짱을 끼며 한참 동안 애교를 부렸다.잠시 후, 은유라는 위층 방으로 올라가 휴대폰을 열어 주하영과의 대화창을 확인했다.[유라 씨, 저번에 유라 씨가 봤던 여자분은 보육원 원장이에요. 신시아를 키워준 사람이라
정우진이 가족들을 배웅하러 내려가는 길, 은유라가 두어 걸음 뒤에서 바짝 따라붙었다.“오빠도 몸 잘 챙겨. 내일 다시 병문안 올게.”“아니야, 됐어. 할아버지는 안정이 최우선이라 귀찮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정우진은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너도 아직 다리가 채 안 나았잖아.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은유라는 겨우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는 상태였고 의사도 적당히 돌아다니라고 신신당부했던 터였다.“괜찮아, 기사가 데려다줄 거야. 오면 아무 말 안 하고 점심만 전해드리고 바로 갈게.”그녀의 고집에도 정우진은 허락해주지 않았다.“말 좀 들자, 유라야.”짧은 이 한 마디에 담긴 거부할 수 없는 단호함, 그 뒤에 희미하게 배어 나오는 귀찮음까지 은유라는 고스란히 느꼈다.결국, 더는 고집부리지 못하고 순순히 대답했다.“알겠어.”주차장에서 떠날 채비를 하던 신시아는 그들이 내려와 각자의 차를 타고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차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에야 그녀는 시동을 걸고 천천히 움직였다.하지만 주차 구역을 막 벗어나려는 찰나, 훤칠한 남자의 실루엣이 불쑥 눈에 들어왔다.상대는 바로 정우진이었다.탄탄한 체구로 그곳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이 남자, 얇은 입술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자욱했고 깊은 눈동자는 어스름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정확히 눈이 마주친 건 아니지만 신시아는 그가 지금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고 정우진의 바로 앞에 차를 세우고는 마지못해 안전벨트를 풀고 내렸다.“대표님.”어느덧 화려한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옷단에 레이스가 장식된 연두색 롱 원피스로 갈아입은 그녀였다.쇄골 라인이 워낙 예쁜지라 어떤 옷을 걸쳐도 태가 났다.길게 드러난 목선은 우아한 백조처럼 가늘고 여리여리해서 은근한 청초함과 도도한 기품이 동시에 묻어났다.“당분간 휴가 내지 마. 나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까 임 비서랑 함께 업무 분담해.”정우진의 목소리는 서늘했고 주변 공기까지 무겁게 가라앉았다.“네,
이 시간이라면 정태석의 생신 연회가 끝나지도 않았을 텐데 정우진이 왜 여기에 나타난 걸까?“방금 정 대표님 아니야?”장건우도 정우진을 발견하곤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아까까지만 해도 인터뷰하면서 은유라 씨랑 결혼한다고 발표하지 않았나?”정우진은 스쳐 지나가는 순간, 신시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장건우의 손을 힐끗 쳐다봤다.남자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신시아도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서둘러 장건우를 밀쳐냈다.“미안!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장건우의 손은 허공에 머문 채 몇 초간 굳어 있었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어들였다.그때 신시아가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고마워. 그럼 이만.”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그녀는 자리를 떠났다.차에 탄 후, 정다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만 이어질 뿐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신시아의 가슴이 조금씩 조여들었다.자동 종료되기 직전, 정다슬이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다슬 씨, 무슨 일 있었어요?”정다슬의 목소리 너머로 분주한 소음이 들려왔다. 그녀는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고 대답했다.“할아버지가 갑자기 편찮으셔서 혈압이 급격하게 오르는 바람에 지금 막 병원으로 모시고 왔어요. 근데 언니는 어떻게 알았어요?”아까 응급 의료진이 워낙 급하게 움직여 신시아는 응급 카트 위의 환자가 누구인지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저도 지금 병원이거든요.”그녀가 차분하게 답했다.“주차장에서 일단 대기할게요. 할아버지 상태를 지켜보다가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 줘요.”정다슬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걱정 마세요. 큰 문제는 아니래요. 의사 선생님 말로는 그냥 과로라시네요. 연세도 있으신데 무리하게 해드려서 그렇대요. 다 우리 엄마 때문이죠 뭐. 굳이 사람들 불러 놓고 오빠랑 은유라 결혼 발표나 하고...”정다슬은 속상한 듯 투덜거렸다.통화가 끝나고 신시아는 차 안에서 자리를 뜨지 못했다.30분쯤 지났을까, 정다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할아버지의 혈압이 안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담당 의사가 회진을 나가는 바람에 당분간 돌아오기 어렵게 되었다.그때, 같은 과의 다른 의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무슨 일이시죠?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라면 말씀해주세요.”신시아는 임보나의 주치의가 아닌 다른 의사에게 세세한 병증을 묻는 건 접어두기로 했다. 대신 현실적인 문제를 꺼냈다.“앞으로 매달 들어갈 치료비가 대략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서요.”“지금은 유도 완화 치료 단계라 초기 비용은 천만 원 정도 될 겁니다. 그 이후에 유지 및 강화 치료 단계로 넘어가면 매달 4백만 정도면 충분하고요.”의사가 차분하게 설명했다.다 듣고 난 신시아는 미간을 확 구겼다.“저희 이번 달에 이미 4천만 원이나 냈는데 다 쓴 건가요?”“네?”의사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그럴 리가요... 물론 환자마다 치료 방식이 다를 순 있지만요.”의사는 책상 위에 놓인 차트를 챙겨 들었다.“자세한 건 주치의 선생님 돌아오시면 직접 물어보세요.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네, 감사합니다.”신시아는 사무실에서 의사를 기다렸지만 30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장건우가 병원에 도착했다는 말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주치의 상담을 뒤로하고 윤경선의 병실로 향했다.입원동 엘리베이터 앞, 장건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신시아의 손에 들린 과일 바구니를 보더니 남자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뭘 이런 걸 다... 내가 다 준비했는데.”신시아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병실 문 앞에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어른 뵙는 자리인데 빈손으로 올 순 없잖아.”장건우는 과일 바구니 두 개를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신시아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윤경선은 미리 몸을 추스르고 매무새를 정돈해 둔 상태였다.며칠 만에 마주한 윤경선은 살이 부쩍 빠지고 안색이 초췌했다.하지만 좋은 일이 생겼으니 억지로라도 기운을 내려는 듯 표정만큼은 꽤 밝아 보였다.“아주머니.”신시아가 다가가자마자 장건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시아는 그저 비서일 뿐이에요. 일개 비서 때문에 다들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워야겠어요? 대체 누가 수작을 부리는 건지 모르겠네요.”정우진의 눈동자가 한없이 짙어졌지만 그 속에는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회사도 엉망이고 집안 전체도 바람 잘 날 없네요.”순간 정다슬은 입을 다물고 권미희 곁으로 조용히 다가갔다.역공을 당한 기현주는 말문이 막혀 멍하니 서 있었다.“당분간 집에 돌아오지 않을게요. 주말에 있을 가족 모임도 취소해요.”정우진은 아침 식사를 할 기분을 완전히 망쳤다. 그는 현관으로 걸어가 코트를
다음 날 새벽까지 정우진의 서재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서재 문을 두드리자 그가 약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들어와.”정다슬이 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짙은 담배 연기에 기침을 해댔다.“아침부터 웬 담배야?”정우진이 담배를 비벼 끄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정다슬은 서재 창문을 열고 연기를 밖으로 내보냈다.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를 보더니 숨을 들이켰다.“밤새 한숨도 안 잤어?”“용건만 말해.”정우진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눈가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정다슬은 그가 이렇게 초조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신시아는 호흡이 흐트러졌다. 손이 떨려 면봉이 하선재의 입안을 찌르고 말았다.“읍, 퉤퉤!”하선재는 약상자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그대로 몸을 숙여 쓰레기통에 몇 번이고 뱉어냈다.신시아는 재빨리 감기약을 주워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따뜻한 물을 한 잔 떠왔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입 좀 헹구세요.”하선재는 미지근한 물을 받아 입을 헹궜다. 다시 감기약을 찾으려 했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친구가 며칠 전에 두고 간 거예요.”신시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자리에 앉았다. 행여나 그가
“정우진 씨.”신시아의 입술에서 나온 이 호칭은 마치 작은 돌멩이가 정우진의 마음에 굴러 들어간 듯했다.그는 담배를 피우던 동작을 멈췄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파르르 떨리고 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우리는 단순히 상하 관계를 넘어 전 부부잖아요. 아니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엄연한 이성 관계에요.”신시아는 어젯밤 내내 고민했다. 문제의 근원은 은유라와 기현주가 아니라 정우진 본인에게 있었다.“은유라 씨가 당신 약혼녀로서 곁에 딴 여자가 있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에요. 또한, 여사님이 전 며느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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