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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مؤلف: 인가연
신시아는 보육원 출신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케이스였다. 우수한 성적 덕분에 국내 최고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고 그곳에서 정우진을 만났다.

수많은 부잣집 도련님들 사이에서 그는 단연 눈에 띄었다.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그녀의 시선을 단번에 장악한 사람이 바로 정우진이었다.

신시아는 지난 2년간의 결혼 생활과 밤마다 나누었던 그 뜨겁던 순간들만으로 평생을 버틸 추억이라 치부하려 했다.

그런데 하필 배 속에 아이가 생겨버렸다.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혈육을 차마 지울 수는 없었다.

정우진이 아이를 빼앗아갈까 봐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론 그가 혹시 은유라의 눈치를 보느라 아이의 존재조차 부정하지 않을까 하는 요행을 바라기도 했다.

그런데 결국...

신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평평한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정우진이 그날 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만반의 준비를 다 해야 한다.

그가 모르는 곳에서 몰래 아이를 낳으면 괜찮지 않을까?

설령 들킨다 해도 이번 일을 겪었으니 다음부턴 진짜 아이가 생겼다 해도 찾아오지 않겠지...

연말, 백영 그룹의 연간 보고회 날.

본사로 향하는 신시아의 손에는 연간 업무 보고서와 함께 사직서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경원에서, 그리고 정우진 곁에서 가능한 가장 먼 곳으로!

회의 시간은 9시 10분, 하지만 9시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우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까 들어올 때 봤는데 은유라 씨가 대표님 사무실에 있더라고요.”

다른 지사 책임자가 나직이 말했다.

“대표님 왜 늦으시나 했더니 은유라 씨 챙기느라 바쁜 모양이네요.”

정우진은 늘 일 중심이었고 시간 약속에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은유라의 등장이 그의 그 철저했던 원칙마저 깨뜨려버렸다.

신시아는 그제야 진정한 편애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회의실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살짝 걷어내고 틈새로 맞은편의 대표이사실을 훔쳐보았다.

대표이사실의 커튼은 반쯤 닫혀 있었다. 온통 짙은 회색으로 정돈된 실내, 그 사이로 은은하게 비치는 선명한 보랏빛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때 정우진의 비서였던 신시아에게 그 공간은 누구보다 익숙한 곳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그림 하나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의자에 앉은 정우진과 책상에 기댄 은유라,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나직이 웃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은밀하고 친밀한 광경을 이루고 있을지도...

신시아가 백영 그룹에 들어온 건 오직 정우진 때문이었다.

그저 그의 곁을 맴도는 작은 존재로 남으려 했건만 어느새 이렇게 깊숙이 얽혀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그 깊은 늪에 빠진 건 오직 그녀뿐인지도 모른다. 정우진에게 그녀는 그저 스쳐 가는 인연에 불과할 테니까.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신시아는 편애는커녕 어떠한 특별한 대우도 받지 못했다.

목숨 걸고 정우진의 곁에 머물려 했던 지난 시간은 과연 옳았던 걸까?

그와 몸을 섞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다행이다 싶다가도 곧이어 밀려오는 건 지독한 후회뿐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먹먹하게 차올랐다.

“각자 보고를 시작하시죠. 회의는 전체 녹화되며 대표님께서 나중에 다시 보실 겁니다.”

임정현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에 신시아도 황급히 커튼을 내리고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각 지사의 이사들이 보고를 이어갔다. 정우진이 빠지자 보고는 놀랍도록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원래 세 시간 예정이었던 회의가 두 시간 만에 끝났다

“이제 연회장으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대표님도 곧 합류하실 예정입니다.”

임정현은 각 지사에서 올라온 연간 보고서들을 하나씩 챙겼다.

신시아의 보고서까지 건네받던 순간, 그녀가 임정현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임 비서님, 이것 좀 대표님께 전해주실래요?”

그녀는 사직서를 봉투에 담았다. 본래 직접 전해줄 생각이었지만 은유라가 대표이사실에 있었기에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직접 주시지 그러세요.”

임정현은 정우진의 수행비서이고 신시아는 한때 정우진의 비서였다. 두 사람은 전부터 자주 손발을 맞춰온 사이였으며 무엇보다 임정현은 회사 안에서 유일하게 두 사람의 결혼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정우진의 사무실 쪽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노크하고 들어가 봐요. 어차피 업무 관련이잖아요.”

회의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틈으로 대표이사실 안의 광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은유라는 정우진의 의자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밀착한 거리에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각진 정우진의 얼굴에는 어느덧 부드러움이 깃들었다. 금테 안경 너머 평소 냉철하기만 했던 눈동자에도 오롯이 애정만이 흘러넘쳤다.

임정현은 이미 반년 넘게 이런 광경을 봐왔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신시아는 처음 보는 장면인지라 숨이 턱 막혔다.

이혼하고 인사발령을 받아서 정우진에게서 멀어지면 그를 향한 마음도 조금씩 옅어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다른 여자와 이토록 밀착해 있는 그를 직접 목격하자 심장에 바늘이 촘촘히 박힌 듯 찌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아니요, 괜히 방해만 될 것 같네요. 임 비서님이 대신 전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임정현은 봉투를 건네받으며 덤덤히 대꾸했다.

“별말씀을요.”

그는 신시아가 아마 정우진과의 관계를 의식해 일부러 거리를 두는 거라고 여겼다. 이혼 후 스스로 전근을 신청한 데 이어 이제는 사적인 만남조차 피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또 봬요, 임 비서님.”

신시아는 서류 가방을 챙겨 들고 임정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연회는 참석하지 않을게요.”

연회장에 가서 정우진과 은유라가 다정하게 붙어 있는 꼴을 지켜볼 바에야 일찍 집에 가서 인수인계 서류를 정리하는 편이 나았다.

정우진은 보통 갑작스러운 사직 신청이라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면 승인해 주는 편이었다.

연말 휴가까지 남은 2주면 그가 후임자를 구해 인수인계까지 마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신시아는 떠날 곳을 다시 구상해야 했다. 경원을 벗어나 어디로 가야 할까?

백영 그룹의 지사가 없는 곳, 정우진이 절대 발을 들일 일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한다.

임정현은 보고서들과 신시아의 사직서를 정우진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대표님, 회의록은 정리되는 대로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신 비서님, 아니 신 이사님이 대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정우진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서류 더미를 훑었다.

맨 위에 놓인 [신시아] 이름 석 자가 단출하게 적힌 봉투가 시야에 들어오자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얘 지금 어디야?”

임정현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이미 떠나셨습니다.”

정우진이 손을 뻗어 봉투를 집어 들고 막 뜯으려던 찰나, 은유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나 화장실 좀.”

다만 그녀는 화장실이 아닌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년 전, 정우진이 갑작스레 결혼했을 때 대외적으로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지만 은유라의 어머니와 정우진의 어머니가 워낙 막역한 사이였기에 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은유라는 귀국하고 나서야 어머니를 통해 정우진의 결혼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작 알았더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해외에 머물지도 않았을 텐데...

다행히 그녀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정씨 가문으로부터 정우진과 신시아가 이혼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였다.

비록 이혼했다지만 은유라는 전설처럼 떠도는 ‘전처’라는 여자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비서 출신으로 정우진의 아내 자리에 올랐다니 예쁘고 똑똑하고 유능하긴 하겠지.

하지만 근본 없는 출신이라 결말이 정해져 있던 관계였다.

그 여자가 제법 눈치 있게 이혼 후 전근을 신청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방금 임정현에게 건넨 봉투를 보니 신시아가 결코 순순히 물러날 인물은 아닐 듯싶었다.

은유라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지만 이미 엘리베이터가 내려간 뒤였다.

그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대체 그 봉투 안엔 뭐가 들었을까?

연애편지? 선물? 고백 카드? 아니면 손편지?

생각할수록 그녀의 발걸음만 더욱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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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210화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는 오직 신시아와 은유라 두 사람뿐이었다.“시아 씨, 왜 임신한 사실을 사람들한테 숨기는 거예요?”최근 결혼식 준비를 구체화하면서 불안했던 은유라의 마음도 어느 정도 가라앉은 터였다.하지만 은유라는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 신시아와 담판을 짓고 싶었다.신시아의 뱃속에 자리 잡은 그 아이의 존재에 대해 숨김없이 털어놓고 말이다. 신시아는 은유라가 대체 무슨 꿍꿍이로 정우진에게 아직 이 사실을 함구하고 있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다만 한 가지, 은유라가 이미 모든 내막을 쥐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적당한 기회를 찾지 못해서요.”은유라는 엘리베이터 거울 벽면에 비친 신시아의 얼굴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정말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아니면 일부러 숨기는 거예요? 내가 알기로 시아 씨는 지금 만나는 사람 없는데 그렇다면 그 아이... 아빠가 누군지 물어도 돼요?”신시아는 몇 초간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담담한 눈빛으로 은유라를 바라보았다.“유라 씨, 걱정하지 마세요. 이 아이, 정 대표님이랑은 아무 상관없으니까요.”신시아가 이토록 확신에 찬 어조로 쐐기를 박자, 은유라는 내내 조마조마하게 조여왔던 마음을 그제야 통째로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경계를 완전히 늦출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신시아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그래서 몰래 정우진의 아이를 낳아 뒤통수를 칠 속셈이라면 어쩌란 말인가.딩동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문밖에 서 있던 직원 몇 명이 보였다.“어, 은유라 씨. 신 비서님도 같이 계셨네요.”“안녕하세요, 은유라 씨!”은유라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거리며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은유라가 자신을 손톱만큼도 믿지 않는다는 걸 신시아 역시 모를 리 없었다.신시아의 입가에 씁쓸함이 담긴 허탈한 미소가 스치듯 머물렀다.커피를 사서 돌아온 후, 은유라는 정우진의 곁을 지키기 위해 곧장 대표실로 들어갔고 신시아는 직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209화

    신시아는 장건우에게 불필요한 감정의 빚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담백한 해명 속 글귀들은 저마다 선명한 경계선을 긋고 있었다.장건우 역시 더는 파고들지 않고 감사의 마음을 표한 뒤 몸조리 잘하라는 무던한 당부로 대화를 매듭지었다.그렇게 대화가 끝나고 신시아는 폰을 내려놓은 뒤 잠을 청했다.일주일 후, 정우진은 은씨 가문 사람들과 만나 결혼식 세부 일정을 조율했다.비록 신시아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언론 기사를 통해 최종 결정된 소식을 고스란히 접할 수 있었다.식장은 경원 호텔로 정해졌고 해외 명품 디자이너가 맞춤 제작했다는 웨딩드레스의 가격은 무려 수십억 원대에 달했다.“정우진이 저렇게 펑펑 쓰는 놈인 줄 알았으면 너도 결혼할 때 뭐 하나라도 뜯어냈어야 하는 건데.”뉴스를 본 김지원이 곧바로 전화를 걸어와 호들갑을 떨었다.“수십억짜리 드레스에 보석 같은 걸 좀 챙겨 두지 그랬어. 이혼하고 대충 중고로 처분했어도 평생 떵떵거리며 살았을 텐데 말이야.”신시아는 따뜻한 배즙을 호호 불어가며 한 모금 마셨다. 그날 비를 흠뻑 맞은 탓에 시작된 감기가 여태 떨어지지 않고 몸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노란 조명 불빛 아래, 그녀의 눈동자가 아스라이 흔들렸다.온기 하나 닿지 않는 어둑한 거실은 적막하기 그지없어, 그녀의 외로운 그림자를 더욱 도드라지게 비출 뿐이었다.“그러게, 조금은 받아둘 걸 그랬나 봐.”그랬다면 임보나의 치료비 걱정쯤은 단숨에 날려 버렸을 테고, 자신 역시 그 기회를 잡아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날 수 있었을 터였다.“그런데 예단은 얼마쯤 줬을까?”김지원의 호기심 서린 음성이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아무리 못해도 수백억은 족히 줬겠지? 명색이 정우진이 목숨보다 아끼는 여자잖아.”신시아는 배즙을 홀짝이며 나직하게 답했다.“글쎄.”어차피 정씨 가문 역시 돈이라면 아쉬울 게 없는 집안이었으니, 금액이 얼마든 그저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구색 맞추기용 요식 행위에 불과할 것이었다.정우진이든 기현주든, 은유라에게만큼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208화

    오늘 밤 정우진의 술자리에는 임정현이 동석하고 있었다.한편, 장건우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향하던 신시아의 길목에는 빗줄기가 걷잡을 수 없이 굵어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도로 위에서는 연쇄 추돌 사고까지 발생했다. 더는 운전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그녀는 빗길이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차를 갓길에 멈춰 세웠다.정우진의 전화가 울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전화를 받자마자 구급차와 경찰차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차 옆을 쌩하니 스쳐 지나갔다. 거센 소음 탓에 수화기 너머 정우진의 목소리가 완전히 묻혀버렸다.“대표님?”소음이 잦아들 즈음 신시아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어디야?”정우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집에 가는 길입니다.”창밖으로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를 바라보는 정우진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일단 차를 길가에 대.”“앞에 큰 사고가 나서 이미 갓길에 멈춰 서 있어요.”신시아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목소리의 톤으로 보아 공적인 일로 건 전화는 아니었다.“하선재가 진승현에게 연락해서 장건우를 해고하라고 요구했대.”정우진이 군더더기 없이 용건만 툭 던졌다.차창에 비친 신시아의 차분하던 미간이 순식간에 굳어졌다.“하선재가 대체 왜요?”신시아와 하선재 사이에 얽힌 내막을 정우진은 알지 못했다.하지만 둘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신시아, 사적인 일로 업무에 지장 주는 건 이번 한 번으로 족해. 두 번은 없어.”정우진의 어조는 서늘하리만치 무미건조했다.“이번 일은 내가 정리할게.”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전화는 끊어졌다.미처 대답을 뱉기도 전에 신시아의 귓가에는 메마른 신호음만 공허하게 울렸다.‘그가 말한 해결이라는 게, 진승현더러 장건우를 해고하지 못하게 막겠다는 뜻일까. 그것도 나를 위해서?’그녀는 뒤늦게야 정우진이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려 전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의 눈에는 자신과 장건우가 특별한 사이로 보였을 테니까.하지만 정작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정우진은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207화

    “오늘 나랑 저녁 먹을 기분이 아닌가 보네. 괜찮아, 그럼 다음에 먹지 뭐. 그래도 꽃은 이미 산 거니까 받아줘. 그냥 두면 아깝잖아.”그는 신사적이면서도 적당히 선을 지킬 줄 알았다.신시아는 꽃다발을 그편으로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안 받을래. 조심해서 들어가.”아깝다는 이유로 이번 한 번 받아주기 시작하면, 다음번에도 똑같이 흔들리게 될 터였다.“그럼, 집까지 데려다줄까?”거듭되는 거절을 예상치 못했는지, 장건우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씩 부서졌다.신시아는 팔에 걸치고 있던 가방을 어깨로 추스르며 담담하게 말했다.“장건우. 네가 이 사적인 마음만 접는다면, 우린 아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어.”사실 그녀는 장건우라는 사람을 꽤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그에게서, 자신과 같은 지독한 끈기와 노력을 보았기 때문이다.어차피 같은 업계 안에서 일하는 처지였으니 배경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끌어준다면 양쪽 모두에게 이득이었다.장건우는 만약 친구로 남기 싫다면 어떻게 되는지 묻고 싶었다.하지만 신시아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마주하자 이내 입을 다물었다.여기서 더 고집을 부렸다간 정말 친구조차 될 수 없음을 직감한 탓이다.“미안해, 널 곤란하게 만들어서. 그럼 이 꽃은 받아줘. 우리... 앞으로 친구인 거다.”다시 건네진 꽃다발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신시아는 그제야 기꺼이 그 꽃을 받아 들었다.하지만 장건우의 말에 미처 대답을 얹기도 전에, 등 뒤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번져왔다.퇴근길에 마주친 회사 여직원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저희끼리 속닥거리는 소리였다.“가자.”신시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순식간에 굵어진 빗줄기는 단 몇 초 만에 옷깃을 축축하게 적셔왔다.신시아는 황급히 발길을 돌려 회사 로비 처마 밑으로 몸을 피했고 장건우도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휴대폰을 꺼내 날씨를 확인해 보니 오늘 밤 폭우가 예보되어 있어 앞으로 두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206화

    신시아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침착하게 설명했다.“대표님과 은유라 씨의 혼사가 더 중대하다고 판단했습니다.”정우진의 비서인 그녀에게는 상황에 맞게 스케줄을 조율할 수 있는 정당한 권한이 있었다.평소의 정우진이라면 굳이 캐묻지 않고 넘어갔을 일이었다.하지만 이번엔 달랐다.“스케줄 원상복구하고 원래 정해진 대로 진행해.”정우진의 태도는 한 치의 타협도 허락하지 않았다.그의 불편한 기색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며 무언의 압박으로 짓눌러왔다.“알겠습니다.”신시아는 그가 보는 앞에서 즉시 휴대폰으로 일정을 수정했다.은 씨 가문과의 식사 자리는 일주일 뒤 저녁으로 다시 잡혔다.이후 비서실로 돌아간 그녀는 서면 스케줄표까지 완벽히 수정해 정우진에게 다시 보고했다.일정이 변경된 것을 안 기현주가 전화를 걸어와 다짜고짜 호된 욕설을 퍼부었다.신시아는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그녀의 분풀이가 끝날 때쯤 대답했다.“일정 변경은 정 대표님의 뜻이었습니다. 제가 힘없는 직원이니 여사님께서 제게 화를 내시는 건 감수하겠습니다만, 이것만은 정정하고 싶네요. 여사님이 억측하시는 것처럼 제가 정 대표님을 상대로 불순한 의도를 품고 있다는 건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논리 정연한 해명에 기현주는 더욱 분통이 터졌지만, 도무지 반박할 논리를 찾지 못했다.“지금은 이혼한 사이지만, 부부였을 때조차 저는 정 대표님께 딴마음을 품은 적이 없으니 여사님께서도 앞으로 자중해 주십시오.”신시아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휴대폰을 옆으로 던져두고 막 업무에 몰두하려던 찰나, 문득 사무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정우진이 문틀에 비스듬히 기대선 채,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꿰뚫어 볼 듯 응시하고 있었다.그 시선을 마주하는 신시아의 눈망울은 흔들림 없이 깊고 투명했다.방금 던진 단호한 말들은 작은 돌멩이가 되어 정우진의 가슴에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통증이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형언할 수 없이 체한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신시아는 그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205화

    “네가 감정 표현이 잘 되면 네가 대신 하든가.”권미희는 더 이상 기현주를 설득하지 못하자 몸을 돌려 정태석에게 말했다.“여보, 올라가서 이만 쉬죠.”정태석은 바둑알을 다 정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권미희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정부 프로젝트의 업무가 정상 궤도에 오르자 신시아는 다시 17층에서 꼭대기 층으로 자리를 옮겨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출근 준비를 막 마쳤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하선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이었다.“여보세요? 대표님.”“신 비서, 아직도 나를 피해?”며칠 동안 구창 그룹 사람들과 여러 번 만남이 있었지만 신시아는 모두 불참했다.하선재를 만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무슨 일이세요? 지금 출근 중인데요.”신시아가 되묻자 하선재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말했다.“신 비서한테 알려주려고 전화했어. 그 박도영이라는 사람, 정우진, 은유라랑 다 아는 사이야. 박도영이 담당 의사가 되면 임신 사실이 발각될 수 있으니 조심해.”하선재는 최근 너무 바빠 병원 쪽 동향을 소홀히 했다.오늘에서야 원래 신시아를 담당하고 있던 산부인과 의사가 퇴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새롭게 발령받은 박도영이 신시아를 인계받게 되었다.“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래서 다른 의사 선생님을 선택했어요.”신시아는 정중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그날 병원에서 정우진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담당 의사가 박도영이 되었을 것이다.하선재가 칭찬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생각보다 선견지명이 있네? 며칠 안 봤지만 배는 좀 더 나왔을 것 같은데? 아직도 들키지 않았어?”심드렁하게 말한 하선재는 구경꾼으로서의 즐거운 듯한 목소리도 섞여 있었지만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듯한 태도도 섞여 있었다.“대표님 기대에 못 미쳐서 유감이네요. 아직까지는 대표님이 바라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요.”신시아도 사실은 언제 들킬지 궁금했다.은유라 쪽도 조용해졌지만 회사에서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48화

    하선재가 몰락하며 위약금을 더 이상 물어줄 수 없게 됐고 이로써 신시아도 백영을 못 떠나게 됐다.그녀의 앳된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숨길 수 없었다.정우진은 날카로운 턱선을 드러내고 혀로 뺨 안쪽을 굴리면서 무척 태연한 척했지만, 눈빛만큼은 폭풍전야처럼 험악했다.“신 비서도 하 대표가 몹시 걱정되는 모양인데 그럼 백영 그룹을 대표해서 병문안 다녀와. 11시 회의 전까지는 돌아와야 해.”신시아는 순간 깨달았다. 하선재와 정우진이 만났고 방금 들었던 녹음 파일도 그들의 대화였다.그렇다면 어젯밤에 일어난 일일까?“왜?”정우진은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9화

    술자리에서 마주칠 때마다 하선재는 어떻게든 정우진에게 시비를 걸려고 들었다.하지만 그의 상대가 될 리 만무하다는 걸 잘 알기에 비겁하게도 정우진의 주변 사람들을 건드리는 차선책을 택했다.예를 들자면 신시아처럼...신시아는 방향을 틀어 후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이를 눈치챈 하선재가 응대하던 사람들을 밀쳐내고 쏜살같이 그녀를 따라왔다.신시아가 연회장을 막 빠져나왔을 때, 그는 좁은 구석에서 그녀를 가로막았다.“어머 이게 누구야? 신시아 씨? 난 또 잘못 봤나 했네.”정우진은 말수가 적고 냉철한 편이다. 잘생긴 외모에 훤칠한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8화

    연회장.정우진이 발길을 옮기는 곳마다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그는 몇몇 상계 원로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틈틈이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정중히 응대했다.“우진 오빠.”은유라가 그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정우진의 팔이 아주 잠깐 뻣뻣하게 굳었다가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드럽게 풀렸다.“마침 잘 왔어. 인사해, 이분은 전 회장님이야.”은유라는 정우진의 팔에 살며시 몸을 기댄 채 그가 소개하는 상대에게 우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전 회장님, 안녕하세요. 아버님께 익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뵙게 되어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49화

    11시에 맞춰 신시아가 회사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을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정우진은 신시아를 데리고 은호 그룹과의 협력 관련 인터뷰에 임했다.백영 그룹과 은호 그룹의 협력 건은 신시아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챙겨왔던 일이었다.그녀는 인터뷰에 필요한 서류들을 빠짐없이 챙겨 정우진이 필요로 할 때마다 정확하게 자료를 건넸다.혹여 빠뜨리는 내용이 있을 때면 즉시 낮은 목소리로 정우진에게 알려주었다.“정 대표님, 은씨 가문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신 걸 보니 은유라 씨와의 관계가 아주 안정적이신가 봅니다. 얼마 전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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