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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처럼 흩어진 우리의 봄

눈처럼 흩어진 우리의 봄

By:  도도캔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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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후와 결혼한 지 3년째, 나민경은 여전히 항성의 모든 여자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었다. “한 선생님이 사모님한테 너무 잘하시잖아요! 지난번에 사모님께서 기침 한 번 하셨다고 바로 정밀 건강검진 예약해 주셨대요.” “‘신의 손’이라 불리는 이유가 다 있다니까요. 전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의대 유명 인사와 결혼하다니... 저도 다음 생에는 이렇게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나민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간호사들의 이런 수다에는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녀가 평소처럼 한진후의 진료실을 찾아갔다. 하지만 들어가기 직전, 들려오는 다툼 소리에 손잡이를 잡으려던 손이 멈췄다.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사모님 배 속의 아이를 또 지우는 게 맞을까요? 벌써 세 번째인데...” “내가 말했지, 나민경이 임신하면 무조건 지우라고. 몇 번이든 상관없어.” 남자의 냉담한 목소리가 나민경의 고막을 날카롭게 찔렀다.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린 나민경은 도저히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사모님은 계속 선생님의 아이를 갖고 싶어 하시는데.” 한진후의 수술 어시스턴트이자 비서 전선용이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참이나 침묵하던 한진후는 뼛속까지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3년 전 그 수술에서 민경이의 신장 하나를 승희에게 떼어 줬으니까. 그래서 민경이는 평생 아이를 낳으면 안 돼. 낳으면 산모와 아이 모두 죽게 돼.” 나민경은 순간 머릿속이 윙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귓가에는 날카로운 이명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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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쨍그랑.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던 나민경은 문가에 놓인 화분에 부딪히는 바람에 화분이 깨졌다.

한진후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밖을 향해 외쳤다.

“누구야?”

전선용이 바로 나가서 살폈지만 사람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한 선생님, 밖에 아무도 없어요. 개구쟁이 꼬마가 놀다가 부딪혀나 봐요.”

나민경은 자신이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지며 걸음걸이조차 온전치 못했다. 속이 계속 울렁거려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한진후, 결국 네가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서승희였어...”

힘없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처음 한진후를 만난 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4년 전,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나민경은 항성의 모든 사랑을 받던 천재 여신에서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고아가 되었다. 여동생 나도경과 서로 의지하며 하루하루 겨우 살아갔다.

밤낮없이 술을 퍼마신 탓에 며칠에 한 번씩은 병원에 실려 갔다.

세 번째로 실려 갔을 때 냉철한 주치의가 마스크를 벗고 그녀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민경 씨, 기분이 좋지 않으면 즐길 취미라도 알아봐요. 이 세상에 즐길 거리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굳이 이렇게 자기 몸을 혹사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날 나민경은 한진후의 얼굴을 처음 봤다. 남자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잘생겼다.

한진후는 나민경을 번지 점프, 스키, 스트리트 레이싱, 암벽 등반 등 그녀가 감히 상상조차 못 했던 갖가지 익스트림 스포츠로 데려갔다.

언제부턴가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나민경은 자신의 메말랐던 마음에 다시 생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나민경은 이 남자를 완전히 사랑하게 되었다. 미친 듯이,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그 후 끊임없이 이 남자에게 대시하기 시작했다. 열정적이면서도 당당하게.

어릴 적부터 이성에게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를 자랑하던 나민경은 항성 남자들의 드림 걸로 불렸지만 한진후에게는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빨간 원피스를 입고 마이바흐에 기대어 요염하게 머리를 휘날려도 한진후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쳐 갔다.

위장염을 가장하고 한진후의 집 앞에서 기다렸지만 그는 그냥 운전기사에게 전화해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들고 병원에 찾아갔지만 남자는 그녀의 손에 밴 화상 자국을 흘끗 보며 말했다.

“서랍에 연고가 있으니까 알아서 발라. 나 바빠, 그러니 다시 오지 마.”

나민경은 완전히 기가 꺾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연회에서 독극물에 중독된 한진후를 만나게 되었다.

금욕적이고 냉담하던 그 남자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나민경에게 거침없이 입을 맞추었다.

그날 밤, 나민경은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그의 해독제가 되어 주었다.

나민경은 한진후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서승희가 당황한 얼굴로 그들의 방으로 뛰어 들어와 이 혼란스러운 장면을 목격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밖으로 뛰쳐나간 서승희는 납치범들에게 붙잡혀 몸이 더럽혀졌고 그러면서 신장병까지 걸리게 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후, 한진후는 눈이 충혈된 채 술과 담배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모습에 나민경은 당황했다. 이 남자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읽을 수 없었고 서승희가 왜 그렇게 격렬하게 반응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한진후는 아무 말 없이 나민경을 데리고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

결혼식 날, 나민경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천장에 위태롭게 걸려있던 샹들리에가 정확히 나민경 위로 떨어졌다. 그 바람에 결혼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병원에 실려 가게 되었다.

수술 전, 한진후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약속했다.

“민경아, 나 믿지? 꼭 괜찮아질 거야.”

한진후가 직접 집도한 수술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후로 한진후는 나민경에게 점점 더 잘해주었다. 하나하나 직접 나서서 세심하게 모든 걸 챙겨줬다.

하지만 나민경의 건강 상태는 예전 같지 않았다. 감기, 기침, 두드러기가 끊이지 않았다.

한때 항성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당당했던 붉은 장미는 오랜 병상 생활 끝에 가졌던 아이마저 연달아 유산하고 말았다.

“미안해, 진후야. 정말 미안해.”

나민경은 한진후의 품에서 몇 번이고 같은 말만 되뇌며 참회했다. 남자도 충혈된 눈으로 계속해서 그녀를 위로했다.

그 후 나민경은 자신의 몸이 허약한 이유가 그 사고의 후유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남편이 직접 그녀의 신장 하나를 떼어 서승희에게 이식했기 때문이었다.

한진후의 충혈된 눈동자는 죄책감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어떤 감정이 더 컸을까?

나민경은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현재로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 한진후의 마음속 가장 중요한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면 이 남자도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

변호사에게 연락해 이혼 합의서를 작성했다.

나민경은 이혼 합의서 마지막 문장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봤다.

[쌍방은 감정적인 이유로 혼인 관계가 파탄되었음을 인정하며 협의이혼에 합의한다.]

이내 자기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힘차게 써 내려갔다.

“한진후.”

나민경은 혼자 가볍게 중얼거렸다.

“이 편지는 영원한 이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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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쨍그랑.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던 나민경은 문가에 놓인 화분에 부딪히는 바람에 화분이 깨졌다.한진후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밖을 향해 외쳤다.“누구야?”전선용이 바로 나가서 살폈지만 사람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한 선생님, 밖에 아무도 없어요. 개구쟁이 꼬마가 놀다가 부딪혀나 봐요.”나민경은 자신이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지며 걸음걸이조차 온전치 못했다. 속이 계속 울렁거려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한진후, 결국 네가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서승희였어...”힘없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처음 한진후를 만난 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4년 전,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나민경은 항성의 모든 사랑을 받던 천재 여신에서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고아가 되었다. 여동생 나도경과 서로 의지하며 하루하루 겨우 살아갔다.밤낮없이 술을 퍼마신 탓에 며칠에 한 번씩은 병원에 실려 갔다.세 번째로 실려 갔을 때 냉철한 주치의가 마스크를 벗고 그녀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나민경 씨, 기분이 좋지 않으면 즐길 취미라도 알아봐요. 이 세상에 즐길 거리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굳이 이렇게 자기 몸을 혹사할 필요는 없잖아요.”그날 나민경은 한진후의 얼굴을 처음 봤다. 남자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잘생겼다.한진후는 나민경을 번지 점프, 스키, 스트리트 레이싱, 암벽 등반 등 그녀가 감히 상상조차 못 했던 갖가지 익스트림 스포츠로 데려갔다.언제부턴가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나민경은 자신의 메말랐던 마음에 다시 생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나민경은 이 남자를 완전히 사랑하게 되었다. 미친 듯이,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그 후 끊임없이 이 남자에게 대시하기 시작했다. 열정적이면서도 당당하게.어릴 적부터 이성에게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를 자랑하던 나민경은 항성 남자들의 드림 걸로 불렸지만 한진후에게는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빨간 원피스를 입고 마이바흐에 기대어 요염하게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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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한진후에게 서명을 받기 위해 나가려던 나민경은 문밖에 구급차 한 대가 멈춰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정부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사모님, 큰일 났어요! 승희 사모님의 신장병이 무슨 이유인지 또 심각해지셨대요.”서승희는 얼굴이 창백한 채 들것 위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바로 그때, 한진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민경은 잠시 침묵하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다.수화기 너머로 한진후가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러분, 혹시 모르니 신장 이식 수술 준비를 하세요!”한진후가 전화기를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민경아, 너랑 같은 특이 혈액형인 환자가 한 명 있는데 위독한 상황이야. 당장 병원으로 와!”한진후가 말한 환자가 바로 서승희였다.나민경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길 듯 아팠다. 거절하려는 찰나, 전화기 너머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선생님, 새로운 신장 기증자를 찾았어요! 아이인데 혈액형도 같아요!”전화기 너머가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한진후는 휴대폰을 옆으로 내팽개친 후 빠른 속도로 걸어 나갔다.“남자아이야, 여자아이야? 몇 살이지?”“여자아이예요. 아홉 살, 이름은 나도경이에요!”통화는 여기서 끊겼다.뚜뚜!나민경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나도경은 그녀의 친동생이자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족이었다.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기를 향해 목청껏 외쳤다.“한진후! 멈춰! 내 동생은 신장을 기증할 수 없어, 혈액 응고 장애가 있단 말이야! 한진후! 그만해!”그러나 수화기 너머에는 전화가 끊긴 것을 증명하는 기계음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이내 귀를 찢는 벨 소리가 울렸다.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이었다.“나민경 씨 맞으시죠? 누군가 나민경 씨 동생을 강제로 끌고 갔어요! 조금만 더 있으면 혈액 응고 장애 치료가 끝날 예정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의사의 다급한 목소리에 나민경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았다. 귓가에는 윙윙거리는 이명만 들렸다.떨리는 손으로 한진후의 전화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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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나민경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도경의 시신과 함께 밤새 용성으로 가서 시신 부검을 의뢰했다.한진후가 항성에서 실세를 쥐고 있었기에 거기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나도경을 위해 정의를 찾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한진후의 힘이 닿지 않는 용성으로 왔다.“나민경 씨, 저희 대표님과 거래하시려면 꽤 큰 걸 내놓으셔야 합니다.”“얼마면 돼요? 필요한 액수 얼마든지 말씀하세요.”나민경의 얼굴은 여전히 숨이 멎을 듯 아름다웠지만 퉁퉁 부은 눈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꼈다.“돈이 아닙니다. 저희 대표님은 바로 나민경 씨를 원합니다.”상대방이 한 통의 혼인 계약서를 건네주었다.그 순간 나민경은 등에 식은땀이 났다. 손가락 마디마저 새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용성의 모든 권력을 쥐고 흔드는 재벌 집 아들이 음흉하고 포학한 사람이라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몸이 불편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액땜을 해줄 신부를 찾고 있다는 소문도 자자했다.한참 고민한 나민경은 매우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알겠어요. 할게요.”처음부터 가진 거라고는 하나도 없었기에 이 몸뚱어리쯤은 충분히 내놓을 수 있었다. 지금은 그저 나도경이 편히 잠들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시집가서 남편 있는 과부 노릇 하면 되는 거잖아?’전혀 두렵지 않았다.“준비하는 데 사흘 정도 필요합니다. 대표님께서 직접 항성으로 가서 이 일을 처리하시고 나민경 씨를 용성으로 모셔 올 겁니다.”고개를 끄덕인 나민경은 목멘 소리로 말했다.“알겠어요. 이혼 협의서에 최대한 빨리 한진후의 서명을 받아올게요.”‘사흘이라...’한진후가 나민경과 결혼식을 다시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그날도 사흘 후였다.나민경은 재빨리 혼인 계약서에 서명했다. 검은 긴 생머리가 아래로 내려와 그녀의 입가에 스치듯 지나가는 슬픔을 가렸다.한진후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다음 날, 한진후는 품에 서승희를 안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수술을 막 마친 여자는 창백한 얼굴로 남자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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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병원, 3층 병실.“승희야, 다행히 그냥 심장 두근거림 증상일 뿐이야. 큰 문제는 없어.”한진후가 서승희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주고는 이불까지 덮어주었다.나민경은 텅 빈 유골함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병실 침대 옆에 멍하니 꼭두각시처럼 서 있었다.고개를 돌린 한진후는 나민경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목구멍이 시큰거렸다.입술을 깨물며 나민경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예쁘고 밝았던 나민경의 눈빛은 완전히 빛을 잃어 칙칙하고 어두워 보였다.“미안해, 민경아. 내가 널 오해했어. 케이크에는 이상이 없었어.”턱을 나민경의 정수리에 대고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하지만 나민경은 유골함을 꼭 움켜쥔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한진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민경아, 왜 그래? 이 상자 안에는 뭐가 들어 있었던 거야?”나민경과 시선을 마주치기 위해 허리를 굽힌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핏줄이 가득한 채 충혈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마침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한진후는 그제야 당황하기 시작했다.“어디 아파? 바로 청진기 가져올게.”급히 자리를 떠나자 병실에는 나민경과 서승희 단둘만 남았다.문소리가 들리자마자 서승희가 눈을 번쩍 뜨더니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얼굴에 아픈 기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나민경, 너 정말 왜 이렇게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거야? 정말 모르겠어? 내가 조금만 손을 쓰면 너는 개처럼 두들겨 맞아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걸?”천천히 다가와 나민경의 귓가에 대고 비아냥거리며 속삭였다.“마치 그때 그 무고한 납치 사건처럼.”득의양양한 서승희의 모습에 나민경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그때 납치 사건도 네 자작극이었어?”“맞아, 그리고 네 결혼식의 그 사고도 내가 한 거야.”서승희가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진후는 내 거야. 네가 내 남자를 빼앗으려 했으니 이 정도 벌은 너와 네 동생이 달게 받아야 하지, 안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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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눈 밑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한진후는 눈동자도 핏줄이 가득 보일 정도로 충혈된 상태였다. 마치 나민경의 침대 곁을 오랫동안 지켜온 듯했다.“민경아, 드디어 깨어났구나!”나민경의 손을 잡으며 기쁜 듯 말했다.하지만 나민경은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손을 확 빼냈다. 그러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한진후를 바라보았다.나민경의 행동에 얼굴의 미소가 굳어진 한진후는 큰 돌덩이가 마음 한쪽을 짓누르고 있는 듯 답답했다.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물었다.“민경아, 그 상황에서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만 구할 수밖에 없었어. 게다가 네가 밀어서 승희가 떨어진 거잖아...”나민경은 창백한 입술을 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진후를 바라보았다.“서승희를 민 적 없어! 서승희가 나를 붙잡고 같이 떨어진 거야.”나민경을 바라보는 한진후의 눈에 실망이 가득했다.“나민경, 늘 너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이렇게 뻔한 거짓말을 하니 정말 너한테 실망스럽구나!”나민경은 입을 벌렸지만 너무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눈가에 잔뜩 고였지만 어떻게든 흘리지 않으려 참고 버텼다.“억울한 척할 필요 없어. 승희 얼굴에 네 손바닥 자국 다 났어. 증거가 이렇게 명백한데 왜 자꾸 발뺌하려고 해.”나민경은 눈을 감고 얼굴을 돌렸다. 눈물이 끊어진 구슬처럼 흘러나와 베개를 적셨다.목소리마저 덜덜 떨렸다.“한진후, 만약 그때 서승희의 납치 사건이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고 하면 믿을 거야?”방 안에 짧은 침묵이 흐른 후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그만해, 나민경.”주먹을 꽉 쥐고 있던 나민경은 손의 힘마저 완전히 풀렸다.너무 어이가 없을 때면 오히려 웃음이 난다고 했던가, 온몸이 떨릴 정도로 웃은 뒤 가볍게 한마디 물었다.“한진후, 날 한 번이라도 사랑한 적은 있었어?”그 말에 한진후는 잘생긴 얼굴을 살짝 찡그렸지만 이내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민경아, 사랑해. 널 당연히 사랑하지. 그만 울어, 응? 모레면 우리 결혼 3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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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나민경이 깨어났을 때 텅 빈 병실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밖은 어느새 환하게 밝아 있었다. 햇살이 방 안에 쏟아져 내렸지만 나민경은 온몸이 뼛속까지 시리도록 차가웠다.어젯밤 수술대 위에서 들은 그 말이 마법의 주문처럼 나민경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사모님, 깨어나셨군요. 한 선생님께서 저더러 잘 모시라고 하셨어요.”간호사의 손을 확 밀쳐버린 나민경은 그들의 만류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틀거리며 병원 정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걸을 때마다 계속 기침이 나왔다. 입술은 찬 바람을 맞아 갈라지며 피까지 났다.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한씨 가문의 저택에 도착했다.발에 신고 있던 신발은 언제 한 짝이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황급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이내 눈앞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햇볕이 잘 드는 따뜻한 방 안, 서승희는 한진후의 품에 기대어 그가 떠다 주는 약을 한 숟가락씩 마시고 있었다.그러더니 혀를 내밀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진후야, 너무 써.”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한진후는 그릇을 내려놓더니 설탕이 묻은 과일 하나를 포크에 꽂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한 모금만 더 마실래?”서승희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막 적출한 태반을 약에 넣으면 수술 후유증을 가장 빨리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 건 너야. 그래 놓고 안 마실 거야? 얼른 마셔야지.”서승희가 입꼬리를 올렸다.“진후야, 내가 뭐라고 하든 넌 다 들어줄 거지?”남자가 무엇이라고 대답하는지 모르지만 나민경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푸...”밖으로 나온 나민경은 영혼이 빠진 풍선 인형처럼 몸을 휘청거리다 꽃밭에 피를 토했다.태반, 그녀 배 속에 있던 아이의 태반이 서승희의 약에 쓰였다니...이 생각이 머릿속에 파고들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의지마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태반은 한진후가 직접 적출한 것이었다.그녀의 왼쪽 신장처럼, 나도경의 그 신장처럼...‘한진후, 나에게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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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쨍그랑!한진후의 손에 들고 있던 약 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멍한 얼굴로 전선용이 든 종이를 바라보던 한진우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전선용, 너 그게 무슨 헛소리야? 민경이 왜 나랑 이혼하겠어? 민경이가 그런 장난을 친다고 선용이 너마저도 같이 따라 하는 거야?”가볍게 중얼거리더니 이혼 확정 회신서도 보지 않은 채 차 키를 들고 이미 준비된 결혼식장으로 급히 달려갔다.방해 대교 위, 한진후의 차량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급브레이크를 밟자 고급 세단의 바퀴가 아스팔트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민경이는 분명 결혼식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분명 나에게 장난치는 거야, 분명 그럴 거야...”다시 있는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차량 속도는 이내 240까지 치솟았다.창밖의 풍경은 필름 빨리 감기보다 더 빨리 스쳐 지나갔다. 경찰이 한진후의 뒤를 따라오며 미친 듯이 경적을 울렸다.“과속 차량, 즉시 갓길로 정차하십시오!”“경고! 즉시 정차하십시오!”하지만 한진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시울이 붉게 충혈된 채 머릿속에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나민경을 만나러 가야 해. 지금 당장 나민경을 만나야 해.’얼마나 달렸을까, 한진후는 드디어 자신이 정성껏 준비한 결혼식장에 도착했다.노을이 지는 해안가, 하늘 끝까지 닿은 붉은 노을에 푸른 바다까지 물들어 하늘과 바다는 하나로 이어진 듯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과 달리 현장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준비한 샴페인 타워는 산산조각 나 유리 조각이 바닥에 깔려 있었고 술과 디저트는 바닥에 흩뿌려져 갈매기 떼들이 날아와 쪼아 먹고 있었다.준비한 드론 프러포즈 퍼포먼스도 수포로 돌아갔다. 드론들은 무언가의 공격을 받은 듯 여기저기 해변가에 추락해 있었다.저 멀리, 한진후와 나민경의 거대한 웨딩사진도 정중앙이 찢긴 상태였다. 나민경이 있는 반쪽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한진후가 있는 반쪽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왜 이렇게 된 거야?”무릎을 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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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멍한 얼굴로 저택으로 돌아온 한진후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그 종이를 주웠다.위에 적힌 ‘이혼 확정 회신서’라는 글자가 얼음송곳처럼 그의 눈동자를 찌르는 것 같았다.“민경이가 정말 나와 이혼하다니...”이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그 종이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이혼 사유란에 나민경이 적은 것은 ‘감정 파탄’이었다.이 네 글자에 자극받은 한진후는 종이를 꽉 움켜쥐더니 갈가리 찢어 버렸다.“아니야! 나와 민경의 감정이 어떻게 파탄 날 수 있어!”갈가리 조각난 종이는 눈꽃처럼 바닥에 가득 흩날렸다.주위의 종이조각을 본 순간 나민경이 그날 품에 꼭 안고 있던 그 상자가 떠올랐다.그때는 그것이 가루 형태의 독약이라고 생각했다. 나민경이 서승희를 해친 것에 화가 나면서도 독약이 나민경에게 해가 될까 걱정되어 그 상자를 보지도 않고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나중에 나민경이 미친 듯이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 그 빈 상자를 안고 오열했지만 한진후는 그녀를 억지로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를 받게 했다.나승희가 중독되지 않았다는 검사 결과가 나오자 이 일을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워 버렸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더 깊이 알아보지도 않았다.“하얀색... 가루 형태...”짧게 되뇌던 한진후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나민경의 충혈된 눈시울이 머릿속에 몇 번이고 떠올랐다.‘설마... 그게 나도경의 유골이라고?’여기까지 생각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한진후는 전선용을 불러 꽃밭 아래의 흙을 채취해 조사하게 했다.“최대한 빨리 결과를 알려 줘!”“알겠습니다. 선생님.”전선용이 떠난 후, 한진후는 일분일초가 한 세기처럼 느껴졌다.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초조하게 거실을 서성였다. 시계의 소리가 마치 그의 뇌막을 한 번씩 두드리는 듯했다.마침내 휴대폰이 진동하며 전선용의 메시지가 도착했다.[선생님, 흙에 확실히 유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방금 화장한 지 얼마 안 된 유골입니다.]한진후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귓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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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서승희가 울부짖으며 애원했지만 한진후는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한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왔다.“진후야, 이거 놔! 너무 꽉 잡아서 아프잖아!”정교하게 화장한 서승희의 얼굴도 화장이 조금 번져 있었다. 팔은 한진후가 너무 세게 잡은 탓에 눈에 띄는 붉은 멍이 생겼다.이 광경을 본 한진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에야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서승희, 조금 전 한 말들, 설명해 봐. 대체 어떻게 된 거야?”남자의 냉담한 추궁에 서승희는 즉시 눈시울을 붉히며 나약하고 여린 모습으로 돌아갔다.“무슨 뜻이겠어? 그냥 언니들 앞에서 체면 세우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야!”한진후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그렇다 해도 민경이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민경이는 내 아내야.”이 말에 서승희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그래, 너희 둘은 그나마 마음을 의지할 배우자라도 있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네 큰형이 일찍 죽으면서 죽기 직전까지 너를 잘 부탁한다고 했어. 너희한테 이렇게 미움받을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때 벽에 머리를 박고 네 큰형과 함께 죽을 걸 그랬어!”입술을 깨물며 오랫동안 침묵하던 한진후는 마침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승희야.”서승희에게 막 대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녀는 한진후의 큰형이 가장 사랑했던 여자였기 때문이다.한진후의 큰형은 사고 폭발 현장에서 한진후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잃었다.큰형에게 영원히 목숨을 빚지고 있었기에 큰형 대신 서승희를 반드시 잘 돌봐야 했다. 그리고 이 또한 의무라고 생각했다.한진후의 사과를 들은 서승희는 눈에 한 줄기 빛이 스치더니 그제야 흑흑거리며 울음을 멈췄다.한진후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승희야, CCTV 영상은 왜 지운 거야?”서승희가 한숨을 내쉬었다.“네 큰형이 꿈에 나타나서 내가 인간 세상에서 고생하며 항상 병에 시달리는 걸 봤다고 하더라고...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네 집 CCTV 영상을 봤다고 했어.”한숨 돌린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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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용성.박시형이 나민경의 손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있었다.나민경의 새하얀 열 개의 손가락 끝은 거친 모래알에 모두 닳아 있었다. 저택의 그 장면을 목격한 후, 화가 나 손톱으로 벽돌 위의 돌을 긁다가 생긴 상처였다.열 손가락이 다쳐 살갗이 찢겨 피가 나도 마음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지만 뭔가 악몽을 꾸는 듯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그러다가 깜짝 놀라 눈을 뜨더니 박시형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안 돼!”그 모습에 너무 가슴이 아파 미간을 찌푸린 박시형은 다급히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겁낼 거 없어. 민경아. 이제 괜찮아.”나민경은 그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어 주변의 다소 낯선 환경을 둘러보았다.“여기는... 어디야?”“용성이야. 우리 집이니까 안전해. 걱정 마.”박시형이 나민경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여기서는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거야. 약속할게, 민경아.”그 말을 들은 나민경은 마침내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입술을 깨물며 다소 의아한 듯 물었다.“오빠, 항성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야? 어떻게 나를 용성까지 데려온 거야?”박시형은 나민경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이웃 오빠로 어릴 적부터 나민경에게 매우 잘해주었다. 다만 나민경이 열일곱, 열여덟 살 무렵에 박시형의 집에 변고가 생겨 용성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그 후 나민경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한진후와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 박시형과의 연락이 많이 뜸해졌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렇게 만나자 나민경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바보 같은 녀석.”박시형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우리 약속했잖아, 내가 데리러 간다고.”나민경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오빠, 오빠가 바로 용성을 쥐락펴락한다는... 재벌가 도, 도련님이야?”나민경은 너무 놀라 말까지 더듬었다.“그 살날이 얼마 안 남아서...”여기까지 말한 뒤 갑자기 입을 꾹 닫더니 귀밑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아이고! 내가 지금 무슨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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