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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도도캔
나민경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도경의 시신과 함께 밤새 용성으로 가서 시신 부검을 의뢰했다.

한진후가 항성에서 실세를 쥐고 있었기에 거기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나도경을 위해 정의를 찾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한진후의 힘이 닿지 않는 용성으로 왔다.

“나민경 씨, 저희 대표님과 거래하시려면 꽤 큰 걸 내놓으셔야 합니다.”

“얼마면 돼요? 필요한 액수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나민경의 얼굴은 여전히 숨이 멎을 듯 아름다웠지만 퉁퉁 부은 눈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꼈다.

“돈이 아닙니다. 저희 대표님은 바로 나민경 씨를 원합니다.”

상대방이 한 통의 혼인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그 순간 나민경은 등에 식은땀이 났다. 손가락 마디마저 새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용성의 모든 권력을 쥐고 흔드는 재벌 집 아들이 음흉하고 포학한 사람이라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몸이 불편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액땜을 해줄 신부를 찾고 있다는 소문도 자자했다.

한참 고민한 나민경은 매우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할게요.”

처음부터 가진 거라고는 하나도 없었기에 이 몸뚱어리쯤은 충분히 내놓을 수 있었다. 지금은 그저 나도경이 편히 잠들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시집가서 남편 있는 과부 노릇 하면 되는 거잖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준비하는 데 사흘 정도 필요합니다. 대표님께서 직접 항성으로 가서 이 일을 처리하시고 나민경 씨를 용성으로 모셔 올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민경은 목멘 소리로 말했다.

“알겠어요. 이혼 협의서에 최대한 빨리 한진후의 서명을 받아올게요.”

‘사흘이라...’

한진후가 나민경과 결혼식을 다시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그날도 사흘 후였다.

나민경은 재빨리 혼인 계약서에 서명했다. 검은 긴 생머리가 아래로 내려와 그녀의 입가에 스치듯 지나가는 슬픔을 가렸다.

한진후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한진후는 품에 서승희를 안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수술을 막 마친 여자는 창백한 얼굴로 남자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한진후를 바라보는 눈빛에 애틋함이 가득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시동생과 형수 사이라고 하기보다는 신혼부부에 더 가까웠다.

페르시안 고양이 미미를 안고 있는 나민경은 맨발로 차가운 바닥에 서서 한진후가 집사에게 하나하나 꼼꼼히 지시하는 것을 묵묵히 들었다.

“집 전체를 승희 취향에 맞게 다시 꾸며. 내가 직접 형수를 보살필 거야.”

“알겠습니다. 선생님.”

“승희는 하얀색 카펫을 좋아하니까, 깔려 있는 웜톤의 카펫은 바꿔.”

“승희에게 장미 알레르기가 있으니 집안에 장미 꽃잎 같은 것도 절대 있어서는 안 돼!”

“이제 막 수술을 끝냈으니 가장 따뜻하고 햇볕이 잘 드는 방에 머물도록 해.”

말이 끝나자 저택 전체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모든 사람들이 나민경을 바라보았다.

나민경이 장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집에서 햇볕이 잘 드는 방은 사실 나민경이 가장 좋아하는 방이기도 했다. 웜톤의 카펫 위에서 미미와 노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그녀였는데...

나민경은 시선을 내린 채 품에 안은 고양이의 귀를 쓰다듬으며 한진후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한진후도 무언가 깨달은 듯 눈썹을 찌푸리며 나민경을 바라보았다.

“민경아, 승희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 몸이 안 좋으니 네가 이해해.”

그제야 고개를 든 나민경은 비꼬듯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안 된다고 하면 내 방 안 줄 거야?”

코웃음을 치며 한마디 덧붙였다.

“내게서 뺏어서 나승희에게 준 게 한두 개도 아니잖아?”

말투는 냉담했지만 양옆으로 내린 손은 멈추지 않고 떨렸다.

눈앞의 남자는 그녀의 신장, 나도경의 신장, 모두 가져다 서승희에게 갖다 바쳤다.

이 모든 것들 중에 그녀가 거절하면 통했던 게 하나라도 있었을까?

얼굴이 창백해진 서승희는 입술을 깨물며 한진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진후야, 동서가 나를 반기지 않는 것 같으니 나 그냥 갈게.”

“나민경!”

한진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경고가 담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인색하게 굴어.”

가벼운 한마디였지만 나민경은 가냘픈 어깨가 살짝 떨렸다.

‘사람의 마음이 정말 이렇게까지 한 사람에게만 치우칠 수가 있구나...’

새삼 깨달았다. 한진후는 그녀의 건강, 그녀가 아이를 낳고 기를 권리, 그리고 그의 사랑까지 모두 서승희에게 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부족하다 여겼다.

“그래, 한진후, 다 서승희에게 줘.”

눈물이 흘러내리기 바로 직전, 나민경은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얻을 수 없는 사랑 따위 더 이상 갈구하지 않기로 했다.

나민경은 미미와 함께 반려동물 방에 머물렀다.

드넓은 저택에서 이곳이 그녀가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서승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진후야, 동서가 섭섭해하는 것 같지 않아? 가서 달래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남자가 냉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경 쓰지 마. 민경이가 원래 버릇이 좀 고약해. 이참에 그 버릇 좀 고쳐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나민경은 입술을 꽉 깨물며 앞에 있는 작은 상자를 꼭 움켜쥐었다.

그 안에는 나도경의 유골이 담겨 있었다.

“언니 울지 마, 도경이가 크면 언니를 지켜 줄게!”

기억 속의 어린 소녀는 환자복을 입은 채 마법 봉을 휘두르며 말하고 있었다.

“그래, 언니가 우리 도경이 클 때까지 기다릴게. 의사 선생님이 도경이 병이 곧 나을 거라고 하셨어. 다 낳으면 우리 도경이 데리고 테마파크 갈까?”

“좋아!”

나도경의 방울 같은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며 당장이라도 언니에게 뛰어올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녀의 동생은 이 작은 유골함에 조용히 누워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방구석에 웅크린 나민경은 무릎을 껴안고 목 놓아 울었다.

방 밖에서는 한진후가 서승희를 위해 이것저것 물건을 정리해 주며 그녀의 퇴원을 축하하고 있었다.

바깥의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고막을 찌르며 들려왔다. 암울한 방 안과 바깥 거실은 서로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밤이 깊어지자 한진후가 마침내 침실로 돌아왔다.

나민경은 침대 옆에 기대어 있었다. 손 옆에 놓여 있는 식어버린 찻잔에서는 씁쓸한 향이 희미하게 풍겼다.

나민경을 바라본 한진후는 그제야 그녀가 전보다 많이 야위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원래도 가냘프던 손목이 이제는 뼈만 남은 듯했다.

마치 언제든지 사라질 것처럼...

“민경아, 왜 아직 안 자?”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민경을 부르며 품에 꼭 끌어안았다.

“오늘 일은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큰형이 일찍 돌아가셔서 형수님이 혼자잖아. 몸도 약하고... 내일 형수님을 위해 생일 파티를 열려고 하는데 네가 나 좀 도와서 선물 좀 골라줘. 여자들이 좋아하는 게 어떤 건지 네가 더 잘 알잖아.”

한진후가 나민경을 바라보며 기쁨과 설렘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에 나민경은 고구마 백 개를 삼킨 듯 목이 꽉 메었다.

나민경이 낮은 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한진후, 내일이 무슨 날인지 기억은 해?”

한진후가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날인데?”

얼굴이 점점 창백해진 나민경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니야.”

사실 내일은 나민경 부모님의 기일이었다.

결혼한 이후로 한진후는 매년 이날마다 그녀와 함께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 제사를 지냈다.

나민경의 감정을 배려하기 위해 이날 어떤 축하 행사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그녀와 함께 이날을 보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이제는 그날마저도 잊어버렸다.

한때 나민경을 그토록 사랑하고 지켜 주던 남자였지만 지금은 마음과 눈길이 오직 서승희에게만 향해 있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나민경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이혼 협의서를 꺼냈다.

윗부분을 가리고 서명란만 남긴 채, 한진후 앞으로 내밀었다.

남자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하지만 나민경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문밖에서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큰일 났어요! 서승희 씨가 중독되어 쓰러진 것 같아요!”

얼굴이 창백해진 한진후는 빠른 속도로 침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승희야, 괜찮아?”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민경은 살짝 놀랐지만 바로 뒤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한진후가 갑자기 되돌아왔다. 문을 세차게 밀어 열고는 나민경을 향해 추궁하기 시작했다.

“나민경, 네가 만든 케이크! 안에 대체 뭘 넣었어? 승희가 네가 만든 케이크를 먹고 쓰러졌잖아!”

나민경의 베개 옆에 있는 상자를 보더니 갑자기 비웃음을 터뜨렸다.

“나민경,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어떻게 케이크에 독을 넣을 수 있어!”

깜짝 놀란 나민경은 경악한 얼굴로 말했다.

“나 아니야! 나를 그렇게나 못 믿어?”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한진후는 새파랗게 질린 서승희의 얼굴과 그녀의 입가에 흘러내린 거품을 가리키며 거칠게 화를 내뱉었다.

“널 어떻게 믿어? 승희를 한 번 해친 걸로는 부족했어?”

말이 끝나자마자 나민경이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손에서 상자를 낚아채 창밖으로 힘껏 던져 버렸다.

“더러워...”

“안 돼!”

비명을 지른 나민경은 바로 가서 잡으려 했지만 유골함이 거꾸로 쏟아지며 잿빛의 유골이 눈꽃처럼 공중에 흩날렸다. 동생의 유골이 바람에 휩쓸려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나민경은 자신의 심장도 산산조각 나 수만 개의 파편으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두 번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는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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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처럼 흩어진 우리의 봄   제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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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처럼 흩어진 우리의 봄   제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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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처럼 흩어진 우리의 봄   제12화

    한편, 서승희는 나이트클럽에서 여러 명문가의 딸들과 밤새도록 흥청거리며 놀았다.그들 앞에는 남자 모델 여러 명이 각자 노출이 심한 옷차림으로 몸을 서승희에게 밀착한 채 서 있었다.항성에서 명망 있는 여자들 사이에서도 항상 자기 컨트롤을 잘하기로 알려졌던 서승희였지만 벌거벗은 남자들 앞에서도 전혀 피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이런 장면에 익숙한 듯했다.손가락으로 한 남자 모델의 복근을 살짝 스치며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한 여자가 그 모습을 보며 농담조로 말했다.“승희야, 너 이렇게 놀다가 네 시동생이 잡으러 오는 거 아니야?”서승희가 입꼬리를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그 바보가 뭘 알겠어? 지난번에 실수로 우리 대화를 듣게 됐을 때도 간단히 둘러대니까 바로 넘어갔잖아.”문밖의 한진후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어찌나 어두운지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웠다.이내 손을 흔들자 여러 명의 경호원이 줄지어 안으로 들어가 룸 전체를 에워쌌다.이 상황을 본 서승희는 깜짝 놀라 외쳤다.“한진후, 이게 무슨 짓이야?”한진후는 더 이상 예전처럼 부드럽게 서승희를 대하며 배려하지 않았다.그의 눈 속의 냉기에 서승희는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한진후의 이런 눈빛을 서승희도 처음 봤기 때문이다.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진 채 중얼거렸다.“너 미쳤어? 사람을 이렇게 많이 데려와서 대체 뭐 하려는 거야?”얼굴이 점점 더 차가워진 남자는 흉포한 광기를 드러냈다.서승희의 턱을 세게 움켜쥐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응, 미쳤어. 민경이가 떠난 그 순간부터 미치기 시작했어. 그리고 지난 일들의 진실을 알게 된 후로는 완전히 미쳐 버렸어.”서승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뭘 알게 됐는데?”한진후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내가 뭘 알게 됐을 것 같아? 형수님?”눈동자에 깃든 광기를 알아본 서승희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도망치려 했지만 경호원들에게 꽉 붙잡혀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한진후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 눈처럼 흩어진 우리의 봄   제11화

    항성.헬리콥터에 새겨진 ‘용성’ 두 글자를 본 한진후는 모든 사람의 만류를 뿌리치고 용성으로 가겠다고 고집했다.여든이 다 된 그의 할아버지 한태수까지 깜짝 놀랐다.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쳤다.“한진후! 감히 용성에 가기만 해봐!”“할아버지, 민경이 찾으러 가야 합니다. 제 아내가 거기에 있는데 어떻게 아내를 혼자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한태수가 지팡이로 땅을 힘껏 내리쳤다.“용성이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해? 나 한태수가 아무리 하늘을 찌를 만한 능력이 있다고 해도 항성을 벗어나면 너를 지킬 수 없다.”“할아버지 손자, 더 이상 할아버지 보호는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민경이를 찾으러 갈 겁니다. 할아버지께서 허락하시든 안 하시든.”거친 숨을 몇 번 내쉬던 한태수는 집사를 불러 서류 몇 부를 가져오라고 했다.“진후야, 우선 이것부터 좀 보고 나서 생각해. 어쩌면 너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구나.”그것을 받아 든 한진후는 서류 봉투에 적힌 ‘CCTV 영상’이라는 글자를 보자 바로 깨달은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할아버지, 이 영상들은 제가 벌써 몇 번이고 다시 봤습니다. 유용한 장면이라고는 저 헬리콥터 하나뿐이에요.”“다시 한번 보아라. 이건 우리 병원의 CCTV 영상이다.”한진후는 눈썹을 찌푸렸지만 할아버지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봉투를 열었다. 안에 있는 디스크를 꺼내 컴퓨터에 넣자 CCTV 영상이 순식간에 재생됐다.그것은 병실 안의 영상이었다.병상에 누워 극도로 허약해 보이던 서승희가 한진후가 떠나자마자 아무 일 없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영상을 본 한진후는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설마... 승희가 그동안 아프다고 했던 것들이 전부 연기였다고?’계속해서 영상을 보던 한진후는 얼굴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병원 측은 의료진과 환자 간의 분쟁을 예방하기 위해 모든 병실에 고화질 CCTV 카메라를 설치해 두었다. 심지어 목소리도 선명하게 녹음됐다. 다만

  • 눈처럼 흩어진 우리의 봄   제10화

    용성.박시형이 나민경의 손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있었다.나민경의 새하얀 열 개의 손가락 끝은 거친 모래알에 모두 닳아 있었다. 저택의 그 장면을 목격한 후, 화가 나 손톱으로 벽돌 위의 돌을 긁다가 생긴 상처였다.열 손가락이 다쳐 살갗이 찢겨 피가 나도 마음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지만 뭔가 악몽을 꾸는 듯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그러다가 깜짝 놀라 눈을 뜨더니 박시형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안 돼!”그 모습에 너무 가슴이 아파 미간을 찌푸린 박시형은 다급히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겁낼 거 없어. 민경아. 이제 괜찮아.”나민경은 그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어 주변의 다소 낯선 환경을 둘러보았다.“여기는... 어디야?”“용성이야. 우리 집이니까 안전해. 걱정 마.”박시형이 나민경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여기서는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거야. 약속할게, 민경아.”그 말을 들은 나민경은 마침내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입술을 깨물며 다소 의아한 듯 물었다.“오빠, 항성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야? 어떻게 나를 용성까지 데려온 거야?”박시형은 나민경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이웃 오빠로 어릴 적부터 나민경에게 매우 잘해주었다. 다만 나민경이 열일곱, 열여덟 살 무렵에 박시형의 집에 변고가 생겨 용성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그 후 나민경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한진후와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 박시형과의 연락이 많이 뜸해졌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렇게 만나자 나민경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바보 같은 녀석.”박시형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우리 약속했잖아, 내가 데리러 간다고.”나민경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오빠, 오빠가 바로 용성을 쥐락펴락한다는... 재벌가 도, 도련님이야?”나민경은 너무 놀라 말까지 더듬었다.“그 살날이 얼마 안 남아서...”여기까지 말한 뒤 갑자기 입을 꾹 닫더니 귀밑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아이고! 내가 지금 무슨 소

  • 눈처럼 흩어진 우리의 봄   제9화

    서승희가 울부짖으며 애원했지만 한진후는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한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왔다.“진후야, 이거 놔! 너무 꽉 잡아서 아프잖아!”정교하게 화장한 서승희의 얼굴도 화장이 조금 번져 있었다. 팔은 한진후가 너무 세게 잡은 탓에 눈에 띄는 붉은 멍이 생겼다.이 광경을 본 한진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에야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서승희, 조금 전 한 말들, 설명해 봐. 대체 어떻게 된 거야?”남자의 냉담한 추궁에 서승희는 즉시 눈시울을 붉히며 나약하고 여린 모습으로 돌아갔다.“무슨 뜻이겠어? 그냥 언니들 앞에서 체면 세우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야!”한진후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그렇다 해도 민경이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민경이는 내 아내야.”이 말에 서승희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그래, 너희 둘은 그나마 마음을 의지할 배우자라도 있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네 큰형이 일찍 죽으면서 죽기 직전까지 너를 잘 부탁한다고 했어. 너희한테 이렇게 미움받을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때 벽에 머리를 박고 네 큰형과 함께 죽을 걸 그랬어!”입술을 깨물며 오랫동안 침묵하던 한진후는 마침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승희야.”서승희에게 막 대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녀는 한진후의 큰형이 가장 사랑했던 여자였기 때문이다.한진후의 큰형은 사고 폭발 현장에서 한진후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잃었다.큰형에게 영원히 목숨을 빚지고 있었기에 큰형 대신 서승희를 반드시 잘 돌봐야 했다. 그리고 이 또한 의무라고 생각했다.한진후의 사과를 들은 서승희는 눈에 한 줄기 빛이 스치더니 그제야 흑흑거리며 울음을 멈췄다.한진후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승희야, CCTV 영상은 왜 지운 거야?”서승희가 한숨을 내쉬었다.“네 큰형이 꿈에 나타나서 내가 인간 세상에서 고생하며 항상 병에 시달리는 걸 봤다고 하더라고...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네 집 CCTV 영상을 봤다고 했어.”한숨 돌린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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