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 순간, 약기운에 온기를 찾던 유라가 몸을 뒤척이며 도진의 품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차가운 도진의 가슴팍에 그녀의 뜨겁고 가녀린 숨결이 닿았다. 도진은 밀어내는 대신, 가만히 눈을 감으며 자신의 심장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빠르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폭풍이 쓸고 간 방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도진은 침대 위에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유라를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녀가 못내 신경 쓰여, 옷가지를 정리해 주려 침대 머리맡에 묵직하게 얹어 앉았다.
그 작은 기척에도 유라는 본능적으로 몸을 밀어내며 웅크렸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 기제였다. 하지만 그녀가 몸을 비틀수록, 김건의 거친 악력에 짓눌려 가느다란 손목에 새겨진 피멍은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도진의 시야를 찔러왔다.
자신의 영역 안에서 다른 흔적을 남기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못마땅하면서도,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뜨거운 입김을 뱉어내며 신음하는 유라를 보던 도진이, 이윽고 홀린 듯 조심스럽게 그녀의 멍든 손목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얼음장 같던 도진의 손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온기에 유라가 힘겹게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이성을 잃은 몽롱한 의식 속에서 신음하듯 가녀린 음성을 내뱉었다.
“도와…… 주세요…….”
지금 제 곁에서 손목을 쥐고 있는 사람이 자신을 계약서로 옭아맨 잔인한 포식자 김도진인 줄도 모른 채, 유라는 그저 당장 눈앞에 닥친 어둠에서 자신을 건져줄 유일한 구원자라 믿는 듯했다.
유라는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여 도진의 커다란 손을 꽉 맞잡았다. 눈도 채 뜨지 못한 채, 마치 생명줄이라도 잡은 것처럼 애원하듯 매달리는 손귀에 간절함이 가득했다. 제 손을 다 덮고도 남는 도진의 단단하고 넓은 손가락을 쥐자마자 거짓말처럼 안도감이 찾아왔는지, 유라는 이내 긴장을 풀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도진은 제 손을 악착같이 놓지 않는 그 작은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뭐야, 도대체 너…….”
낮게 읊조리는 도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가슴 안쪽에서부터 정체 모를 감정의 거대한 파동이 일렁였다. 지금까지 여자들을 보며 느꼈던 단순한 흥미나 짜증, 혹은 이도현을 향한 승부욕 따위가 아니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묘하고 위험한 동요였다.
제 손을 쥔 채 놔주지 않는 그녀 때문에, 도진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침대 위 그녀의 옆자리에 몸을 눕혔다.
그 순간, 잠결에 본능적으로 따뜻한 온기를 찾던 유라가 몸을 뒤척이더니 도진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작은 몸이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깊숙이 안겼고, 이내 그녀의 뜨겁고 가녀린 숨결이 도진의 살결에 고스란히 닿았다.
평소 같았으면 결벽증처럼 밀어내고도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도진은 밀어내는 대신, 가만히 눈을 감으며 유라를 제 팔 안으로 받아들였다.
암흑이 내려앉은 침실, 정적을 깨고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유라의 숨소리 사이로 또 다른 소리가 겹쳐 들렸다. 도진은 자신의 왼쪽 가슴팍에서 울리는 심장 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빠르고 거칠게 뛰고 있다는 사실을,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유라를 안고 있던 김도진은 순간 뺨에 닿는 그녀의 뜨거운 체온에 깜짝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손등에 스치는 살결이 마치 불덩이 같았다.
“왜 이렇게 뜨거워…….”
낮게 읊조리는 도진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섞여들었다. 혹독한 감기 기운에 김건이 먹인 기묘한 약기운까지 겹쳐 올라온 모양이었다. 도진은 서둘러 두꺼운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려 했으나, 이내 침대 위에 무방비하게 누워있는 유라의 모습을 보고 잠시 짓눌린 듯 멈칫했다.
어둠 속에서도 유라의 새하얀 피부는 붉은 열꽃이 피어올라 터질 듯이 달아올라 있었다. 늘어진 도진의 검은 셔츠 사이로 위태롭게 드러난 가냘픈 어깨선과 가슴팍의 굴곡은, 처연하면서도 가학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묘하게 매혹적인 아우라를 풍겼다.
김도진의 주위에는 언제나 화려하고 내로라하는 여자들이 차고 넘쳤지만, 이토록 심장을 거칠게 쥐고 흔들며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처연한 자극은 처음이었다.
넋을 잃고 유라의 입술을 바라보던 도진은 이내 머리를 털며 정신을 차렸다. 거칠게 숨을 내쉬며 거실 비상약 상자에서 해열제를 찾아 침대로 돌아왔다.
“이유라, 정신 좀 차려봐. 이거 먹어야 해.”
그가 조심스럽게 유라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받쳐 들고 고개를 들어 올린 뒤, 알약을 입안에 밀어 넣어주었다. 하지만 이미 의식이 몽롱해진 유라는 혀끝에 닿는 쓴맛에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약을 삼키지 못하고 뱉어버렸다. 몇 번을 달래고 밀어 넣어봐도 막무가내였다. 인사불성이 된 여자의 입을 억지로 벌려 삼키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라의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채울수록, 그녀를 내려다보는 도진의 눈빛이 무겁고 깊게 가라앉았다. 질척한 소유욕이 이성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결국 도진은 망설임 없이 알약을 자신의 입안에 집어넣고는, 테이블 위의 물을 한 모금 묵직하게 머금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유라의 자그만 턱을 단단히 쥐어 고정하고, 그대로 그녀의 붉은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거칠게 겹쳐 내렸다.
“웁……! 읍……!”
순간적으로 입안을 꽉 막아선 낯선 남자의 감촉과 육중한 무게감에, 유라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며 두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냈다. 하지만 도진의 몸은 거대한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한 유라는 제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쓴 액체가 김건이 먹인 독한 술이라도 되는 양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저항했다. 유라가 바르작거릴수록 도진은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침대 시트에 찍어 누르며, 설면을 얽어매듯 깊숙이 파고들어 끝내 약을 삼키게 만들었다.
꿀꺽-.
뜨거운 약물이 유라의 여린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고 나서야, 도진은 끈적하게 얽혔던 입술을 천천히 떼어냈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유라의 입술이 가련하게 떨렸다.
“하아, 하…… 윽…….”
유라는 갑작스럽게 밀려든 공기에 가슴을 들먹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뜨거운 열기로 붉어진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도진은 붉게 달아오른 유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입술 끝에 묻어난 유라의 타액과 약 기운을 엄지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문질러 닦아냈다. 그리고는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를 숨긴 채, 그녀의 귓가에 잔인할 정도로 낮고 자극적인 음성을 흘려보냈다.
“그러게, 좋게 받아먹었으면 좋았잖아.”
그의 목소리는 밤안개처럼 낮았고, 잠든 유라의 온몸을 구속할 만큼 위험하게 일렁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유라는 마치 깊은 수렁에서 겨우 빠져나오듯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짙은 어둠이 무겁게 깔린 방 안, 코끝을 은밀하게 스치는 낯선 향기와 살결에 닿는 서늘한 시트의 감촉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깨질 듯이 울려왔다. 하지만 이곳이 다름 아닌 김도진의 침실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순간, 거대한 당혹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어떻게 된 거지?…… 음료를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부서진 기억의 실타래를 붙잡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이 위험한 공간에서, 특히 그의 침대 위에서 당장 벗어나야 한다는 본능적인 공포가 척추를 타고 흘렀다. 유라는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헐렁한 티셔츠 자락을 다급하게 움켜쥔 채, 도망치듯 방을 뛰쳐나왔다.
전면 유리창 너머로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텅 빈 거실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유라는 거친 숨을 죽인 채, 발걸음 소리를 지워가며 현관을 향해 직진했다. 다급하게 구두에 발을 밀어 넣으며 도어록으로 손을 뻗던 바로 그때, 등 뒤의 짙은 어둠 속에서 얼음장처럼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날아와 박혔다.
“어딜 가게.”
“앗……!”
심장이 바닥으로 덜컥 내려앉았다. 유라가 제어되지 않는 몸을 뻣뻣하게 돌리자, 거실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댄 채 와인 잔을 느릿하게 돌리고 있는 도진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번뜩이는 그의 매서운 눈빛이 유라의 무방비한 전신을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
“아, 안녕하세요…… 그게, 제가 지금 정신이 좀 없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
수치심에 횡설수설하며 고개를 숙이는 유라를 보며, 도진이 어이없다는 듯 픽, 메마른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라를 향해 걸어왔다. 거리가 한 걸음씩 좁혀질수록 그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유라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내 집에 들어와서 청소하라고 했지, 내 침대에서 소란 피우라고 한 적은 없는데.”
“죄송합니다…… 정말 드릴 말씀이 없어요.”
“그리고, 그 꼴을 하고 지금 집에 가겠다는 거야?”
도진의 시선이 차갑게 멈춘 곳을 따라 유라 역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유라의 얼굴이 다시 한번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허벅지 중간까지 헐렁하게 내려오는 그의 검은 셔츠 아래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매끄러운 맨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아, 옷은…… 제가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물이 사방으로 튀어서 젖었는데…… 도대체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저도 잘…….”
수치심에 말끝을 흐리며 차가운 대리석 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유라를 보며, 도진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띠어졌다. 약을 먹이기 위해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던 직전의 뜨겁고 자극적이었던 순간을 유라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묘하게 뒤틀린 독점욕을 느끼고 있었다.
“됐어. 구구절절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으니까.”
도진이 어느새 유라의 코앞까지 다가와 우뚝 멈춰 섰다. 그가 가진 서늘하고 지독한 체향이 유라의 호흡을 마비시킬 듯 파고들었다.
“난 누군가 허락 없이 내 구역에 들어오는 거 질색이야. 특히 내 물건 건드리는 건 더 싫어하고.”
도진이 유라의 어깨 위로 흘러내린 어설프게 젖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튕겨내며, 잔인할 정도로 차갑게 덧붙였다.
“가기 전에 네가 어지럽힌 내 침대 시트 싹 갈아치워. 그리고 내가 시킨 청소, 하나도 빠짐없이 다 끝내고 가.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말고.”
심장을 얼려버릴 듯한 냉혹한 명령이었다. 조금 전까지 약 기운에 취한 그녀를 품에 안고 입술을 맞대며 해열제를 먹이던 남자의 온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유라는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과 당혹감에 아랫입술을 짓깨물었지만, 그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그저 고개를 깊숙이 숙인 채 다시 어두운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다시 늪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유라의 가냘픈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진은 굵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가만히 매만졌다. 아직도 그곳에는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갔을 때 묻어난 달큰한 숨결과, 쓴 약의 잔향이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그래, 어디 한번 질러봐. 누가 널 구하러 올 거 같아? 김도진도 지금 해외에 있잖아”도현이 고개를 조금 더 숙여 유라의 귓가에 입술이 닿을 듯이 낮게 속삭였다. 뜨거운 숨결이 유라의 목덜미를 간지럽히자 유라는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츠렸다.“말해봐, 유라야. 김도진 말고 너한테 또 올 놈이 있어?”유라는 도현의 단단한 가슴을 두 손으로 밀어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지만, 단단한 도현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엉켜드는 서로의 허벅지와 밀착된 체온이 숨 막히는 긴장감을 고조시킬 뿐이었다.“내가 말했잖아, 이유라. 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은 나뿐이라고.”도현의 손가락이 유라의 허리춤을 느릿하게 쓸어 올리며 자극적으로 말을 이어갔다.“김도진은 널 그냥 가지고 노는 것뿐이야. 침대 위에서 적당히 즐기다가, 싫증 나면 가차 없이 버릴 장난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넌.”도진을 향한, 그리고 자신을 향한 도현의 더럽고 모욕적인 언사에 유라는 순간 도현의 뺨에 손을 올렸다.짝─────!거실의 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렸다,순간적으로 고개가 돌아간 도현은 미동도 없이 멈춰 섰다. 도현의 뺨이 붉게 피어올랐다. 유라는 제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의 충격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현을 내려다 보았다.순간 서늘한 침묵이 흘렀다.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라와 시선을 맞췄다.맞은 뺨이 아프지도 않은지, 오히려 유라의 반항이 짜릿한 자극이라도 된 듯 했다.“하…….”도현의 입술 사이로 낮고 뜨거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 차갑고 싸늘한 미소에 유라가 도망치려 몸을 뒤튼 바로 그 찰나였다.도현의 커다란 손이 순식간에 유라의 얇은 손목을 한 손에 거칠게 잡아챘다. 손목이 으스러질 듯한 강한 힘에 유라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앗…… 아……!”도현은 도망치려 발버둥 치는 유라의 가녀린 허리를 다른 한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단숨에 유라의 몸을 뒤흔들어 그대로 넓은 가죽 소파 위로 거칠게 눕혀버렸다.
유라는 결국 눈물을 쏟아내며 흐느꼈다.“제발…… 제발 내려주세요…….”유라가 울며 사정하는 사이, 차는 거대한 철문을 지나 한적한 곳에 위치한 고급 별장의 지하 주차장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육중한 주차장 셔터가 닫히며 외부와 완벽히 차단되자 기사가 시동을 껐다. 유라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살폈지만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유라는 이 장소가 유라에게 결코 낯설지 않다는 기시감을 안겼다.하지만, 생각에 잠길 틈도 없었다. 먼저 차에서 내린 남자가 뒷좌석 문을 거칠게 열더니 유라의 가녀린 팔을 냅다 밖으로 끄집어냈다.“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오지마세요!”유라가 온 힘을 다해 거세게 반항하자, 남자는 귀찮다는 듯 혀를 쯧 차며 유라를 자신의 어깨에 들처멨다.두려움에 유라가 남자의 등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비명을 질렀다.“이거 놔줘요! 아악! 살려주세요!”남자는 가소롭다는 듯 쿵쾅거리며 계단을 올랐고, 별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유라를 넓은 거실의 가죽 소파 위로 거칠게 내팽개쳤다.“아유, 쪼그만 게 악바리같이 반항은. 아가씨 덕분에 요즘 우리 수당이 아주 짭짤해. 고마워, 아주?”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땀을 닦아낸 남자는 그대로 유라를 집안에 홀로 둔채 밖으로 나가 버렸다.쾅─숨 막히는 정적 속에 홀로 남겨진 유라는 웅크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어두운 조명과 넓고 물건 하나 없는 휑한 거실은 유라에게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온몸의 감각이 공포로 곤두선 그때, 조용한 복도 끝 저 멀리서 규칙적인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유라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두려움에 작은 몸을 더 한껏 움츠렸다.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딛고 걸어 나오는 어딘가 낯익은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점점 자신을 향해 좁혀오는 그 실루엣을 향해, 유라는 거칠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초점을 맞췄다. 이윽고 희미한 불빛이 남자의 얼굴을 온전히 비추는 순간, 유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도…… 도현 오
택시에 올라탄 유라는 창밖의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도진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마냥 설레었다. 휴대폰에 가만히 저장된 도진의 마지막 문자를 만지작거리는 유라의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머물렀다.하지만 그 달콤한 설렘도 잠시였다. 고속도로로 진입해야 할 차가 점점 인적이 드문 낮선 길로 들어서자, 유라는 의아한 마음에 주위를 살폈다. 사방이 낡은 건물과 컴컴한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난생처음 와보는 가파른 골목길이었다.비행기 시간이 늦어질까 덜컥 걱정이 된 유라가 조심스럽게 기사에게 말을 건넸다.“기사님, 혹시 공항까지 도착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길이 좀 이상한 것 같아서요…….”그러자 백미러로 유라를 훔쳐보던 기사가 갑자기 혀를 쯧 차며 핸들을 거칠게 꺾었다.“아휴, 어떡하지? 손님, 지금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들어왔네. 차가 울컥거리는 게 이대로 고속도로 올렸다간 큰일 나겠어.”“네? 고장이요……?”“미안해요, 손님. 나도 미치겠네. 일단 여기 골목에 내려서 기다리시면, 내가 바로 근처에 있는 동료 차량 이쪽으로 보내줄게요. 미안해요, 진짜!”기사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으슥한 골목 한구석에 차를 거칠게 세웠다. 그러고는 유라가 당황해할 틈도 없이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내 바닥에 팽개치듯 내려놓고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핑계 대듯 황급히 차를 몰아 골목을 빠져나가 버렸다.순식간에 낯선 골목길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유라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못했다. 그저 친절하게 다른 차량을 보내주겠다는 기사의 말만 믿고, 초조하게 휴대폰 시계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비행기 출발 시각은 점점 다가오는데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는 골목에서 유라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바로 그때, 골목 저편에서 육중한 엔진음을 내며 검은색 SUV 차량 한 대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유라의 앞에 멈춰 섰다.스르륵, 짙게 썬팅 된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며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유라를 향해 아는 체를 했다.“혹시 공항 가시는 분 맞죠? 동료 기사가 차 고장 났다고, 마침 근처에서 퇴근하던
살결이 닿을 때마다 전해지는 온기는 소름 끼치도록 다정했다. 유라 역시 밀려드는 애틋한 열기에 취한 듯 도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그의 단단한 목덜미를 두 팔로 꼭 껴안았다.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약하고 소중한 유리잔을 대하듯 조심스럽고도 밀도 높은 움직임이었다. 도진은 유라의 몸속 깊은 곳을 부드럽게 채우며 그녀를 만족시켰고, 유라는 그의 어깨에 뺨을 묻은 채 아찔한 감각 속에서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다음 날 새벽녘, 어스름한 푸른빛이 방 안으로 밀려들 때쯤 도진은 먼저 눈을 떴다. 제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곤히 잠들어 있는 유라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엔 깊은 아쉬움이 교차했다.샤워를 마치고 축축한 물기를 머금은 채 욕실을 나온 도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침대로 향했다. 그사이 잠에서 깬 유라가 이불을 몸에 감은 채 부스스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밤새 치러진 격렬하고도 다정한 정사의 흔적 탓에 유라의 하얀 어깨에는 붉은 자국들이 선명했다.도진은 침대맡으로 다가가 유라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 넘겨주며,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잘잤어?.”유라는 어젯밤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을 꼭 쥐었다.가방을 챙겨 거실로 나오자, 완벽한 정장 차림의 경호실장이 묵직한 가방과 대형 캐리어를 양손에 든 채 도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진이 현관문으로 향하자, 유라가 그의 뒤를 따랐다.도진은 문을 나서다 말고 돌아서서 유라를 제 품에 꽉 안았다.“딴생각하지 말고, 딱 기다려. 내일모레 공항에서 보자.”“네”유라의 배웅을 받으며 마침내 도진과 경호실장이 문을 나섰고, 현관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굳건하게 닫혔다.고요해진 펜트하우스에 홀로 남은 유라는 내일 있을 생애 첫 해외여행을 준비하며 캐리어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옷가지를 접어 넣을 때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뜨겁게 안아주던 도진의 은은한 체취가 몸에 배어 유라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다음날 늦은 새벽 도진에게서 파리에
어둠의 세계에서 잔뼈가 굵은 도현의 고교 동창에게 유라의 행방과 일정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일이었다.독이 바짝 오른 도현의 휴대폰에 띠링─ 하고 날카로운 문자음이 울렸다. 도현은 낚아채듯 휴대폰을 확인했다. 동창이 보낸 문자는 생각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정보들을 담고 있었다.[이유라 현재 김도진 펜트하우스 상주 중. 정문 상시 경호 인력 배치로 내부 접근 불가.2주 뒤 프랑스 항공편 예약 내역 확인 완료.]프랑스? 도현이 내용을 곱씹으며 이를 악물던 찰나, 타이밍 좋게 휴대폰 화면이 전환되며 동창의 이름이 떴다. 도현은 지체 없이 전화를 받아 귀에 가져다 댔다.“어, 말해.”[문자 봤냐? 뒷조사 좀 더 해보니까 아주 재미있는 틈이 있더라고.]수화기 너머 동창의 목소리에 삐딱한 흥분조가 섞여 있었다.[김도진이 2주 뒤에 프랑스 촬영 스케줄이 잡혔거든? 근데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못 가고, 그전날 김도진이 먼저 프랑스로 출발해. 그리고 다음 날에 이유라가 혼자 공항으로 출발하는 일정이야.]도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크게 확장되었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지금은 경찰 조사 때문에 최대한 몸 좀 사려야 하니까, 2주 뒤에 이유라가 혼자 공항으로 이동할 때 길목에서 바로 작업 칠 거야. 그때 낚아채는 게 가장 깔끔해.]“……공항으로 갈 때.”도현이 나직하게 동창의 말을 읊조렸다. 목소리가 잔인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도현은 터져 나오는 광기 어린 웃음을 짓씹으며 동창에게 명령했다.“좋아. 네 말대로 해. 대신 실수 없이 진행해 .”[돈만 제대로 입금해 주면, 공항 땅 밟기도 전에 네 방 침대에 눕혀줄 테니까 걱정 마라.]도현은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툭 끊긴 휴대폰 액정 위로 비친 제 얼굴이 지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허공을 노려보던 도현이 잔인하게 읊조렸다.‘이유라 다신 널 놓치는 일 없어..‘그렇게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도진이 프랑스로 출국하는 날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다
[아…… 네, 우선 좌석 상황이랑 예약 내역 확인해 보고 바로 연락드릴게요.]도진의 난데없는 명령에 실장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한 뒤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의 휴대폰이 다시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총괄실장의 이름을 확인한 도진이 바로 전화를 낚아챘다.“어떻게 됐어.”[도진 씨, 방금 확인해 봤는데요. 상황이 좀 난감하게 됐어요. 우선 이유라씨 현재 여권 자체가 없어서 신규 발급부터 해야 하는 상황이고요. 가장 큰 문제는 그날 도진 씨가 타시는 비행기 좌석이 퍼스트부터 이코노미까지 전석 매진이에요. 정 같이 가시려면 유라 씨는 다음 날 비행기로 따로 보내야 할 것 같아요.]“다음 날 비행기라고……?”도진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 총괄실장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네, 도진 씨. 일정이 워낙 촉박해서 이것도 정말 겨우 구한 거예요. 우선 다음 날 비행기표라도 예약을 걸어둘까요?]“하아…….”도진의 붉은 입술 사이로 깊고 무거운 한숨이 거칠게 새어 나왔다.“……우선 알겠어. 그렇게라도 예약 걸고 빨리 진행해.”[네, 알겠어요! 바로 진행하고 다시 보고드릴게요.]전화가 끊기고 도진은 폰을 소파 위로 툭 던져버린 뒤,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소파 헤드 위로 고개를 툭 젖혀 기댔다.한참을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도진은 마침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오늘 예정된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완벽하게 핏이 떨어지는 수트를 챙겨입은 도진은 집을 나서기 전, 유라의 침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방 안에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와 함께 유라가 침대 묻혀 부드러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도진은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가 상체를 숙이고는, 유라의 이마 위에 자신의 입술을 지긋이 꾹 눌러 맞췄다. 샤워 후의 시원한 스킨 향과 낮선 감촉에 유라가 속눈썹을 가늘게 떨며 서서히 눈을 떴다.“스케줄 있어서 난 지금 나가봐야 하니까, 집에서 쉬고 있어. 연락할게.”“……네, 다녀오세요.”유라가 고개를 끄
“신세 많았어요, 오빠. 연락드릴게요.”유라가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적막한 집안에 무겁게 울렸다. 혼자 남은 도현은 유라가 누워 있던 온기가 남은 침대를 바라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금방 다시 오게 될 거야, 유라야. 내 품 말고는 네가 숨 쉴 곳 따윈 없을 테니까.”택시 안에서 유라는 떨리는 손으로 김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툭, 하고 전화가 연결됐다. 수화기 너머로 소름 끼치도록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도진 씨? 죄송합니다! 제가 첫날부터 술을
도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라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도현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낚아채듯 품에 안아 올렸다. 바로 그때, 룸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이도현? 이런 데서 볼 줄은 몰랐네.”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이는 김도진이었다. 고교 시절부터 지독한 라이벌이자 숙적이었던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혔다. 도진의 시선이 도현의 품에 무력하게 안겨 있는 유라에게로 향했다.“내 신입 매니저가 왜 거기 안겨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도진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여유로웠지만, 눈빛만큼은 사납게 빛나고
[다시 현재 도현의 방]자책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유라를 내려다보던 도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날 밤 김도진이 제게 뱉었던 소유욕 어린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다. 유라를 그 지옥 같은 놈의 곁에 둘 수는 없었다.도현은 침대 옆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앉으며 낮게 읊조렸다.“거기 그만두고 우리 병원으로 와. 너 일할 자리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니까.”순간 유라의 마음이 세차게 흔들렸다. 시급 두 배의 꿈의 직장이라 생각했지만, 첫날부터 이런 꼴이 되었으니 겁이 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보육원
평소의 도현은 냉정해 보여도 유라에게만큼은 눈빛에 다정한 온기가 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내려다보는 도현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을 만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랬구나…… 죄송해요, 오빠.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근데, 제 가방이랑 핸드폰은 어디 있어요? 회사에 연락도 못했는데....유라가 침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초조하게 묻자, 도현이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거대한 실루엣이 유라의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도현은 양복 주머니에서 익숙한 스마트폰 하나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