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검은 고양이 기네스가 전해주는 로코 이야기. 운동에 미친 영국신사 의사와 음악에 미친 자유분방한 프랑스 여자 음악감독. 호주 멜버른 테라스 하우스에서 사사건건 부딪히는 두 사람의 시끄러운 전쟁 속, 평화를 간절히 바라던 그들의 고양이 흑묘 기네스와 백묘 블랑의 깜찍한 계략으로 피어나는 좌충우돌 코믹 로맨스 이야기.
View More인간들은 자신들이 지구의 지배자라고 착각하지만,
내 관점에서 그들은 그저 덩치만 크고 대책 없는 무모한 털 없는 원숭이일 뿐이다.
특히 내가 임시로 얹혀살아 주고 있는 내 집사,
캘런 포스터는 그중에서도 상태가 아주 심각한 편에 속했다.
위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새벽 5시 정각.
멜버른의 고풍스러운 피츠로이 골목을 뒤흔드는 지옥의 모터 소리에
내 왼쪽 귀가 거칠게 파르르 떨렸다.
소파 밑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틈바구니에 머리를 처박고 앞발로 양 귀를 단단히 틀어막았지만,
빅토리아풍 테라스하우스의 낡은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묵직한 진동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저 미친 인간이 또 시작이군.’
나는 먼지를 핥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소파 밑에서 기어 나왔다.
거실 한복판에는 키가 192cm 거구의 사내가 터질 듯한 이두박근을 자랑하며
믹서기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캘런 포스터.
낮에는 호주 St.빈센츠 호스피탈에서 날카로운 메스로 환자들의 뼈를 맞추는
촉망받는 정형외과 의사지만,
이른 새벽의 그는 그저 ‘단백질과 쇳덩이에 영혼을 판 야수’일 뿐이었다.
그는 지금 믹서기에 생닭가슴살과 정체불명의 인공 초콜릿 향 프로틴 파우더,
그리고 바나나를 넣고 사정없이 갈아재끼는 중이었다.
그 괴상망측한 냄새가 거실에 퍼지자 내 예민한 코가 마비될 것 같았다.
“기네스! 일어났어? 사나이는 새벽을 지배해야 하는 법이다.”
캘런이 내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잘생긴 영국 신사 같은 얼굴 뒤로 광기가 넘실거렸다.
나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내 윤기 흐르는 브리티시봄베이의 검은 꼬리를 바닥에 탁탁 쳤다.
사나이고 나발이고, 고양이는 하루에 16시간을 자야 하는 법이다. 이 무식한 인간아.
그가 걸어 다닐 때마다 쿵, 쿵, 소리가 났다.
발바닥 전체로 체중을 실어 걷는 저 무신경함이라니.
하지만 진짜 지옥은 캘런이 믹서기 전원을 끄고 단백질 쉐이크를 단숨에 들이켜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벽 너머에서 시작되었다.
쾅쾅쾅-!!! 콰과과광----!!!!
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벼락이 치는 듯한 격렬한 피아노 타악 소리였다.
하필이면 우리가 사는 이 테라스하우스는 옆집과 벽 한 칸을 공유하는 쌍둥이 구조였다.
그리고 그 옆집에는 음악에 미쳐 사는 프랑스 여자, 아델 뒤퐁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멜버른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이라고 했다.
내 집사가 새벽 운동으로 소음을 내면,
그녀는 복수라도 하듯 심야나 이른 새벽에 건반을 부술 기세로 격정적인 클래식 불협화음을 연주해 댔다.
“아, 정말 짜증 나게 만드는군!”
캘런이 쉐이크 컵을 내려놓으며 이마의 힘줄을 찌푸렸다.
바로 그때, 옆집의 창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멜버른의 서늘한 새벽 공기를 뚫고 앙칼진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포스터 씨!!! 새벽 5시부터 믹서기로 가축을 도살하는 소리 좀 안 나게 할 수 없나요?!
당신 그 무식한 기계 소리 때문에 내 영감이 다 조각나 버렸잖아요!”
캘런 역시 참지 않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창틀을 붙잡은 그의 어깨가 분노로 들썩였다.
“뒤퐁 씨! 그쪽이야말로 매일 밤낮없이 건반을 짓밟는 그 소음 공해 좀 멈추시죠!
베토벤이 무덤에서 울고 갈 연주입니다!
당신의 그 신경질적인 음악 때문에 내 심박수가 불규칙해져서 근손실이 올 지경이란 말입니다!”
“뭐라고요?! 근손실?! 내 위대한 음악을 감히 그깟 닭가슴살 덩어리랑 비교해?
이 무식한 영국 헬스광 같으니라고!”
인간들의 유치 찬란한 데시벨 싸움이 피츠로이 골목을 가득 채웠다.
아, 정말이지 두통이 밀려왔다.
인간들은 왜 저렇게 피곤하게 사는 걸까? 그냥 사료 먹고 볕 좋은 곳에서 잠이나 자면 될 것을.
더 이상 이 지옥 같은 소음 구덩이에 있을 수 없었던 나는 거실 열린 창문을 통해 뒷마당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두 집의 경계를 나누는 높다란 붉은 벽돌 담벼락 위로 단숨에 날렵하게 착지했다.
그곳에는 이미 먼저 대피해 온 이웃집의 하얀 솜뭉치가 앉아 있었다.
새하얀 털에, 한쪽은 푸른 바다색, 다른 한쪽은 노란 호박색을 띤 신비로운 오드아이의 터키시앙고라.
아델의 고양이, ‘블랑’이었다.
블랑은 매혹적인 외모와 달리 잔뜩 찌푸린 얼굴로 긴 하얀 꼬리를 신경질적으로 담벽에 탁, 탁 치고 있었다.
“어이, 검은 고양이.”
블랑이 나를 힐끗 보며 낮게 야옹거렸다.
“네 주인 놈 입에 그 초콜릿 맛 나는 가루를 포대째 쑤셔 넣든가 해야지,
나 진짜 스트레스로 탈모 올 것 같아.
안 그래도 난 청력이 약해서 진동에 예민한데, 저 믹서기 진동은 내 척추를 타고 흐른다고.”
“하, 솜뭉치 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나는 앞발을 핥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내 집사가 믹서기를 돌린 건........
네 집사가 어젯밤 새벽 2시까지 건반을 부수며 지휘봉을 휘둘러댔기 때문이야.
덕분에 내 꿀맛 같은 그루밍 시간이 다 날아갔다고. 피차일반 아닌가?”
우리는 담벼락 위에서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검은 봄베이와 하얀 앙고라의 시선이 공중에서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벽 너머 집 안에서는
“영국 쇠질꾼!”, “프랑스 예민보스!” 하는 인간들의 고함과 함께,
덤벨이 바닥에 쿵 떨어지는 소리와 피아노 뚜껑이 쾅 닫히는 소리가 서라운드로 울려 퍼졌다.
참담했다.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던 눈빛을 거두고,
동시에 고개를 돌려 인간들의 한심한 꼬락서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진짜 적은 눈앞의 고양이가 아니라, 방구석에서 날뛰고 있는 저 대책 없는 집사들이라는 것을.
블랑이 오드아이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내게 슥 다가왔다.
차가운 새벽 공기 사이로 녀석의 하얀 수염이 내 검은 뺨을 살짝 스쳤다.
“아하... 영국 고양이, 안 되겠어. 우리 이 인간들 그냥 엮어버리자.”
“엮다니? 뭘 어떻게?”
“연애 말이야, 연애.”
블랑이 짐짓 아는 척을 하며 꼬리를 품위 있게 말아 올렸다.
“내가 인간들을 좀 아는데, 저 동물들은 연애를 시작하면
밤새도록 서로 껴안고 입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어지거든.
속삭이느라 목소리도 작아지고, 믹서기나 피아노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진단 말씀이지.
한 마디로, 물리적으로 조용해져.”
나는 턱을 긁적이며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근육에 미친 정형외과 의사와 히스테릭한 음악감독의 로맨스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 혼종이었고 앞날이 캄캄해지는 발상이었다.
하지만 매일 새벽 내 단잠을 깨우는 저 빌어먹을 믹서기 소리와 덤벨 소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나는 지옥에서 온 똥개와도 손을 잡을 용기가 있었다.
내 평화로운 묘생을 위해서라면.
“...좋아. 동맹 체결이다, 하얀 솜뭉치.”
나는 천천히 오른발을 내밀었다.
블랑 역시 피하지 않고 도도하게 자신의 하얀 앞발을 뻗었다.
탁.
멜버른의 붉은 담벼락 위에서,
흑백 고양이들의 위대한 비밀 평화 협정이 맺어지는 순간이었다.
인간들아, 어디 한번 우리 각본대로 움직여 보시지.
인간들이 병원과 악단에서 치열한 하루를 보내는 동안,피츠로이의 붉은 벽돌 담벼락 위에서는 또 다른 첩보전이 펼쳐지고 있었다.옆집의 페르시안 고양이 아서가 킹스턴 과장의 스트레스 서린 냄새를 잔뜩 묻힌 채다시 담벼락 위로 고개를 내민 것이다."이봐, 기네스. 너희 집 안간이 우린 집사 인간의 혈압을 매일 최고치로 올리고 있다며? 우리 집사는 요즘 밤마다 양주를 마시며 너네 집사 욕을 해대느라 내 수면을 방해하고 있단 말이댜."아서가 헝클어진 털을 핥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담벼락 그늘 아래서 블랑에게 줄 신선한 풀잎을 고르다 말고 콧방귀를 뀌었다."그건 너희 집사 인간이 꼰대라서 그런 거고. 우리 집사는 지금 배 속의 다섯 꼬물이들을 지키느라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다. 그러니까 너희 집사한테 전해라. 우리 캘런 건드리면 가만 안 둔다고..."그때, 거실에서 캣닙 기운에 취해 기분이 좀 좋아진 블랑이 담벼락 위로 살금살금 올라왔다.아서는 블랑의 부푼 배를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기 자리에 주저 앉았다."헉.....! 아름다운 블랑 숙녀분, 그 배는.......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새 저 검은 녀석에게 완전히 넘어가 식탐이 생긴 겁니까?""샤아아아악 - !"블랑이 아서를 보더니 가차없이 하악질을 날렸다.임신 호르몬으로 가뜩이나 까칠해진 여왕님에게 아서의 능글맞은 말투는 그저 공격의 신호일 뿐이었다.아서는 블랑의 무시무시한 살기에 기겁하며 담벼락 밑으로 굴러떨어졌다."으아아악! 파리지앵 숙녀분이 왜 이리 난폭해진 거야?!?"
월요일 아침.캘런이 근무하는 멜버른 성빈센트 병원의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웠다.킹스턴 과장은 지난번 응급실 사건으로 캘런에게 완패한 이후, 어덯게든 그를 꼬투리 잡으려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포스터 선생, 자네 요즘 퇴근 시간이 지나치게 정확하더군. 펠로우가 벌써부터 워라벨을 챙겨서야 큰 의사가 되겠는가?"중환자실 앞 복도에서 킹스턴 과장이 캘런을 가로막으며 차갑게 쏘아붙였다.주위의 간호사들이 긴장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살폈다. 하지만 요즘 집에서 예민한 임신묘의 하악질과 솜방망이를 견뎌내며멘탈이 한층 더 강력해진 캘런에게, 과장의 독설 따위는 간지러운 수준이었다."과장님, 의사의 자질은 병원에 머무는 시간의 양이 아니라, 환자를 대하는 집중도의 질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근무 시간 동안 단 한 순간도 소흘히 한 적이 없습니다."캘런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킹스턴 과장의 미간이 흉하게 일그러졌다."말대꾸를 아주 잘하는군, 포스터. 자네가 지켜야 할 그 대단한 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의사로서 본분을 잊지는 말게.""저의 본분은 생명을 살리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든 말입니다."캘런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킹스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집에서 블랑과 아기 고양이들을 지키기 위해 쌓은 이, 병원에서도 그를 그 어떤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바위처럼 만들어주고 있었다.
블랑의 까칠함은 비단 스킨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임신 7주 차에 접어들자 역대급 이 시작된 것이다.아델이 최고급 프랑스산 연어 캔을 따서 대령하자, 블랑은 냄새를 들이켜자마자"웩!" 하는 시늉을 하며 앞발로 바닥을 긁어 묻는 시늉을 했다.천박한 냄새가 난다는 뜻이었다."어머, 블랑! 이거 네가 제일 좋아하던 브랜드잖아. 이것도 싫어?"아델이 울상을 짓자, 이번에는 캘런이 직접 나섰다.캘런은 호주산 청정 소고기 안심을 얇게 썰어 물에 살짝 데친 웰빙 특식을 대령했다.하지만 블랑은 고개를 홱 돌려버린 채 캘런의 가운 자락을 향해 하악질을 날렸다."하.... 정형외과 수술보다 고양이 입맛을 맞추는 것이 백배는 더 어렵군요."캘런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두 인간이 절망하고 있을 때, 나는 냉장고 옆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상황을 분석했다.블랑이 원하는 것은 저런 기름지고 거창한 요리가 아니었다.녀석은 지금 상큼하고 깔끔한 맛을 원하고 있었다.나는 캘런의 바짓가랑이를 물어당기며 부엌 베란다 쪽으로 녀석을 인도했다.그곳에는 아델이 취미로 키우는 작은 허브 화분들이 있었다.나는 그중에서도 싱싱하게 자란캣닙(고양이 박하) 잎사귀 하나를 앞발로 툭 건드렸다."포스터, 기네스가 캣닙 화분을 보고 있어요!"아델의 외침에 캘런이 얼른 캣닙 잎을 몇 장 따서 깨끗이 씻은 후,잘게 다져 사료 위에 살짝 뿌려주었다.그러자 신기하게도 블랑이 킁킁거리며 다가오더니,언제 까칠했냐는 듯 사료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워내기 시작했다."와! 먹는다! 먹어요, 포스터!!"아델이 기뻐하며 캘런의 목을 끌어안았고,캘런은 갑작스러운 포옹에 귀 끝까지 빨개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블랑... 나야, 기네스."내가 부드럽게 골골송을 울리며 다가가자,조금 전까지 인간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던 블랑의 눈빛이순식간에 촉촉하게 풀렸다.블랑은 내 검은 가슴털에 자신의 하얀 코를 묻으며아주 작고 가녀린 소리로 야옹거렸다."기네스 오빠........ 나 너무 무서워. 배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안에서 자꾸 뭔가가 꿈틀거리며 날 밀어내. 내가 이상해진 것 같아. 아델이랑 캘런이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나고 숨이 막혀......"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블랑에게 임신으로 인한 신체 변화는그야말로 미지의 공포였을 것이다.도도한 척 하악질을 해댔지만, 속으로는 덜컥 겁을 먹고 있었던 녀석의 마음이고스란히 전해져 가슴이 아려왔다.나는 묘생의 짬에서 나오는 능숙함으로블랑의 쫑긋한 귀 사이를 정성스럽게 그루밍해 주었다."걱정 마, 블랑. 그건 네 배 속의 우리 아기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신호야. 네가 이상해진 것이 아니란다. 첫 임신은 누구나 두렵고 까칠해질 수 있어. 저 인간들은 널 아프게 하려는게 아니라,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저러는 거니까 너무 날 세우진 마렴."내 따뜻한 체온과 안정적인 진동이 전해지자,블랑의 거친 호흡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녀석은 내 검은 앞발을 자기 하얀 발로 꼭 쥐고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소파 밖에서 이 모습을 숨을 죽인 채 지켜보던 캘런과 아델은허탈하면서도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포스터... 우리 완전히 찬밥 신세네요. 기네스 저 녀석, 남편 노릇을 아주 제대로 하는데요?"아델의 질투 섞인 서운함에 캘런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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