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천 년 전 이루지 못한 사랑. 왕세자의 호위무사였던 도진과 세자빈 이수는 서로를 사랑했지만, 권력과 운명 앞에서 끝내 함께할 수 없었다. 그들의 비극은 한 왕조의 몰락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지만, 천 년의 시간이 흐른 현대에서 다시 시작된다. 불멸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남자 도진. 그리고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그를 기다려온 소설가 이수. 우연처럼 시작된 재회는 잊혀졌던 기억을 깨우고, 두 사람은 천 년 전 자신들이 남긴 사랑과 비극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과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천 년 전 모든 비극의 중심에 있었던 왕세자 현의 그림자 역시 현재를 향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عرض المزيد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
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
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
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
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
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
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
어떤 비는 섬의 해풍처럼 가벼웠고,
어떤 비는 전쟁터의 피비린내를 머금기도 했고,
어떤 비는 이런 오후처럼 조용하고 무표정했다.
평소였다면, 그는 단 한 번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무엇인가가 그의 움직임을 붙들고 있었다.
그건 빛도, 소리도 아닌 한 장의 홍보지였다.
백화점 유리벽에 큼직하게 붙어 있는 홍보물.
누군가의 얼굴이 크게 담긴 사진.
그리고 선명한 글씨.
‘천년의 기억’
이수 작가 단독 사인회
도진의 시선이 단단히 그 자리에 박혔다.
처음에는 우연이었다.
다음 순간,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렸다.
사진 속 여자의 얼굴. 잔잔한 웃음.
단정한 자세. 그런데, 미묘하게 외롭고,
어딘가 간절한 느낌이 엮여 있었다.
도진은 이유도 모른 채 숨을 깊게 들이켰다.
폐 안으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는데,
마치 오래된 상처를 건드린 것처럼 가슴 한쪽이 날카롭게 조였다.
잠시 후, 그의 눈이 뜨겁게 흔들렸다.
그리고, 아무런 경고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천천히, 한 방울. 그 다음, 연달아.
그는 눈을 깜빡이며 황급히 얼굴을 닦았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왜 이러지.”
중얼거림은 숨처럼 새어나왔다.
울어본 기억이 없었다.
물론 인간이었을 때는 울었겠지만,
그는 이미 오랫동안 인간적인 감정을 잃고 살았다.
기쁨은 오래 머물지 않았고,
슬픔은 닿기도 전에 사라졌고,
사랑은 기억조차 희미했다.
그런데 지금, 한 장의 홍보지를 보고 이토록 감정이 무너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 속 여자를 보는 순간마다 가슴 안쪽이 요동쳤다.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의 삶 전체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순간이었다.
도진은 숨을 몰아쉬며 홍보물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또 한 걸음.
마치 손끝을 잡아 끌리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부르는 것처럼
그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저 안에 있는 것처럼.
백화점 내부는 사람들로 붐볐다.
행사 공간으로 안내하는 사인들이 여러 곳에 걸려 있었다.
도진은 그 모든 것을 보지 않았다.
그저 소리, 조명, 사람들의 움직임 사이로 정확한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그걸 향한 그의 발걸음은 망설임도 없이 일직선이었다.
사인회장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 그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테이블 앞 책 더미 위에 손을 올리고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수.
그녀는 고개를 들다가, 도진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처음으로 마주쳤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죽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종업원의 안내도,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실내조명의 미세한 진동도
모두 희미해졌다.
오직 둘 사이의 시선만이 조용하게, 깊게, 오래 이어졌다.
도진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너무 익숙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너무나 오래 기다렸던 얼굴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녀 앞까지 다가갔다.
직원을 통과하는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꿈 속을 걷듯이 현실의 무게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앞에 섰을 때, 그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흔들리며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 이렇게 슬픔이 복받쳐 오르는 이유가… 혹시… 당신 때문인가요?”
그의 말은 절박하지도, 격하지도 않았다.
그저, 너무 오래된 무언가를 처음으로 입 밖에 내보는 사람의 말이었다.
이수는 그를 바라보았다.
곤란해하지도 않았고, 놀라지도 않았다.
마치 드디어 왔군요. 그런 얼굴.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도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안았다.
조용한 포옹이었다.
하지만 내려앉는 감정은 너무 컸다.
오래된 상처가 기척을 드러내듯,
잃어버렸던 시간이 한꺼번에 밀려오듯.
“그동안… 잘 지냈어요? 도진씨…”
회랑을 벗어나는 순간, 이수는 마치 오래 달린 뒤 갑작스레 멈춰 선 사람처럼 한 걸음조차 제대로 떼기 어려웠다.바람도 불지 않는 낮인데 옷깃이 스스로 흔들릴 만큼 가슴 깊은 곳에서 떨림이 올라왔다.그녀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그러나 들이마신 공기가 폐끝에 닿기도 전에다시 밖으로 쏟아지는 것처럼 호흡이 자꾸 끊겼다.'왜 이리… 숨이 막히는가.'세자와의 대면. 그 속에서 감춰야 했던 감정들.대비전에서 들은 무거운 말들. 궁인들의 시선.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와 가슴이 조여들었다.회랑 모퉁이에 도착했을 때 이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기둥에 손을 붙들었다.흰 손끝이 단단한 목재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궁녀들이 뒤에서 그녀를 부르려다 이수의 어깨 떨림을 보고 입술을 다문 채 그대로 물러났다.이수는 고개를 숙였다.눈을 감으면 방금 전 세자의 눈빛이 그대로 떠올랐다.살갑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러나 절대 가벼워지지 않는 감정의 무게.그가 물었다.“그대가… 나를 피한 것이오?”그 말이, 지금도 가슴에서 날카롭게 비어 있었다.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에 닿으려 했던 순간그 손이 닿지 않았음에도 이수의 심장은 그대로 얼어붙었다.'저하께서…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시는가.'그것은 군주의 눈빛이 아니었다.마음이 요동치는 한 사람이 감정을 억누르며 내비치는 눈빛이었다.그 눈빛은 이수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전했다.지켜주고 싶다.그리고, 놓치고 싶지 않다.그 두 문장이 이수의 마음을 더 무너뜨렸다.그녀는 가슴을 움켜쥐었다.“…왜 이리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옵니까…”속삭임은 바람처럼 작았다.하지만 그 작음 속에 오랜 압박과 불안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이수는 기둥에 기댄 채 잠시 숨을 정리하려 했다.그러나 숨은 정리가 아니라 오히려 더 뒤섞여 갔다.머릿속에 장면들이 흩어진 실잣기처럼 풀렸다.대비전의 차가운 공간. 눈빛 하나로 사람을 꿰뚫는 대비마마.“궁의 예를 어지럽히지 말라.”그 말의 무게가 손끝까지 내려
회랑 모퉁이에 멈춰 선 도진은 발끝에서부터 이상한 떨림이 차올라 몸속을 조용히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그 떨림은 공포도 아니고 피로도 아니고 전쟁터에서 수없이 맞닥뜨린 긴장조차 아니었다.이 감정은 그 어느 것과도 닮지 않은 그러나 몸이 가장 먼저 알아채는 감정“불길함과 분노가 섞인 뜨거운 통증”이었다.도진은 회랑과 뜰 사이의 그림자 속에서 숨을 죽이며 두 사람을 마주 보았다.이수와 세자 현. 둘 사이의 공기는 어떤 바람도 흔들지 못할 만큼 짙고, 무겁고, 서늘했다.멀리서 보아도 느껴졌다.이수의 어깨에 내려앉은 고요한 떨림,그리고 현의 눈빛에서 번지는 불길한 감정의 흔적.도진은 자신의 손이 검도 없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무엇 때문에… 이토록 마음이 흔들리는 것인가.'처음에는 마음이었다.그 다음은 통증이었다.그리고 지금은 분노.이유도 모르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불붙듯 치솟았다.이수는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현이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순간도진의 심장이 마치 단단한 방패를 뒤에서 맞은 듯 쿵 하고 내려앉았다.그 한 걸음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걸음인데도 도진의 눈에는 위협 그 자체로 보였다.이수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지고,현의 시선이 그녀를 깊이 압박하는 모습은 도진에게는 누군가를 억누르는 폭력처럼 느껴졌다.현은 이수의 눈을 오래 바라보았다.말하지 않은 질문들이 공기 속에 침처럼 가라앉았다.잠시 뒤, 현이 손을 들어 이수의 뺨에 닿을 듯 말 듯 멈추는 순간 도진의 숨이 아예 멎어버렸다.'그 손을… 왜 들었지.'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그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무엇인지,이수가 느끼는 두려움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현의 눈빛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하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그 손이 이수에게 닿으면…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시작될 것 같았다.도진은 처음으로 회랑에서 발을 한 걸음 떼었다.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그러나 그 작은 움직임 하나가 그의
회랑을 가르던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저하께서 나오신다! 길을 비켜라!”궁녀들이 서둘러 몸을 낮추고 양옆으로 갈라지며 조심스레 뒤로 물러섰다.그 순간 회랑의 공기는 누군가의 발걸음이 세상 전체를 장악하는 듯한 묵직하고 서늘한 분위기로 가득 찼다.이수의 옷자락이 바람도 없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녀의 손끝에서는 체온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저하가… 이리 빠르게 나오시다니.'그녀는 대비전에서 받은 무거운 말들이 아직 어깨에 남아 있었다.그리고 그 무게는 지금 세자의 등장으로 인해 다시 한 번 더 짓눌렸다.회랑 끝에서 현의 모습이 드러났다.단정한 의복, 나직하게 흩어진 머리장식,표정은 온화한 듯했으나 그 안에 감춰진 감정은 결코 온화하지 않았다.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이수를 향해 곧장 걸어왔다.그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던 조용한 공기들이 서서히 갈라져 나갔다.이수는 들숨을 한 번 억지로 목에 걸어 올렸다.그러나 그것마저 깊게 들어오지 않았다.현은 마침내 그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바람 한 줄기도 없이 둘 사이에는 말하지 않은 수천 마디가 고요하게 떠 있었다.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빈.”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얼핏 부드러워 보였지만그 안에는 분명한 긴장이 깃들어 있었다.이수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저하.”현은 그녀의 모습을 잠시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따뜻하지 않았다.그러나 차갑지도 않았다.오히려 온도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곳에서 천천히 심연을 드러내는 듯한 눈이었다.“대비전에서… 무슨 말씀이 오갔소?”직설적이지 않다. 그러나 회피도 아니다.궁에서 이렇게 단도직입적인 질문은 보통 감정이 개입되었음을 뜻했다.이수는 짧게 눈을 내리깔았다.“…대비마마께서는… 궁 안의 예를 어지럽히지 말라 하셨사옵니다.”현의 눈빛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예를… 어지럽히지 말라.”그는 그 말의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 말은 세자 자신을 겨냥한 것이다.그리고 동시에 이수를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
수련장에서는 아직도 대비전으로 향하던 소식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장 무사가 말을 이은 뒤에도 도진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마치 몸에서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균열이 나는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는 사람처럼.“빈마마가… 나오셨다오.”그 말을 전하는 궁인의 숨결이 흐트러진 바람처럼 스쳤다.도진은 손끝을 굳게 다물었다.“…어디로 가셨는가.”“대비전 뜰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셨다 하옵니다. 지금은 회랑 쪽으로 향하고 계신다고…”그 말이 끝나자마자 도진의 몸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걸음은 빠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그러나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속도였다.대비전으로 이어지는 회랑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지만 오늘은 그 침묵이 지나치게 깊었다.바람 한 줄기도 멈춘 듯했고 궁녀들의 발소리는 한층 더 조심스러워져 있었다.도진이 회랑 모퉁이를 돌기 직전, 멀리서 작은 군집의 움직임이 보였다.궁녀들이 서너 명, 서둘러 길을 비켜 서고 있었다.그들 사이로 하얀 비단 옷자락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이수였다.멀리서 보아도 그녀의 걸음은 흔들리고 있었다.평소 그녀가 가진 단정한 걸음과 다르게오늘은 마치 숨을 고르는 매 순간마다 가슴 어딘가가 조여드는 듯한 움직임.도진은 무의식적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심장이 갑자기 쿵 하고 떨어졌다.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했다.'왜… 왜 저 얼굴을 보는데 이렇게 아프지.'이수는 가까이 오고 있었다.도진은 미동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시선이 닿은 곳 이수의 얼굴은 숨을 죽이며 견뎌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눈가에는 피로와 긴장의 자국. 입술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걸음은 흐트러지기 직전에서 간신히 균형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눈은 조용히, 아주 깊은 곳에서 무너진 뒤 아직 다시 서지 못한 빛을 띠고 있었다.도진의 가슴이 쓰렸다.근거도 없이, 이유도 없이.그저 그녀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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