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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숨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9 07:35:50

회랑을 벗어나는 순간, 이수는 마치 오래 달린 뒤

갑작스레 멈춰 선 사람처럼 한 걸음조차 제대로 떼기 어려웠다.

바람도 불지 않는 낮인데 옷깃이 스스로 흔들릴 만큼 가슴 깊은 곳에서 떨림이 올라왔다.

그녀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들이마신 공기가 폐끝에 닿기도 전에

다시 밖으로 쏟아지는 것처럼 호흡이 자꾸 끊겼다.

'왜 이리… 숨이 막히는가.'

세자와의 대면. 그 속에서 감춰야 했던 감정들.

대비전에서 들은 무거운 말들. 궁인들의 시선.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와 가슴이 조여들었다.

회랑 모퉁이에 도착했을 때 이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기둥에 손을 붙들었다.

흰 손끝이 단단한 목재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궁녀들이 뒤에서 그녀를 부르려다 이수의 어깨 떨림을 보고 입술을 다문 채 그대로 물러났다.

이수는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감으면 방금 전 세자의 눈빛이 그대로 떠올랐다.

살갑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러나 절대 가벼워지지 않는 감정의 무게.

그가 물었다.

“그대가…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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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110. 어찌 빈의 잘못뿐이겠습니까

    도진의 목소리가 낮게 잘렸다.무관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죄송하옵니다, 경.”“더 말하면, 그 말이 진짜가 될 수도 있다.”도진의 말은 날카로웠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에 가까운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무관은 입술을 깨물며 물러났다.남겨진 자리에서, 도진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이미… 이렇게 되었구나.'그는 처음부터 이 길의 위험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만큼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이 모양을 갖출 줄은 몰랐다.소문은 언제나 처음에는 모양이 없다.그러다 어느 날, 누가 한 번 더 선을 그어주면 갑자기 얼굴을 갖게 된다.그리고 그 얼굴은, 대개 한 사람을 향해 있다.'그 얼굴이… 마마를 향하고 있다.'점심을 조금 지난 시각,이수의 처소에 상궁이 다급한 얼굴로 돌아왔다.“마마. 대비전에서 빈마마를 뵙고 싶어 하신다 하옵니다.”이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며, 바닥에 놓인 치맛자락을 정리했다.“지금 당장인가.”“예, 마마. 전갈이 많지 않아, 오히려 더 무서운 때이옵니다.”이수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옷매무새는 괜찮느냐.”“아주 단정하시옵니다.”“그렇다면… 갈 준비는 이미 된 것이겠지.”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수는 창을 한 번 돌아보았다.햇빛은 이미 높이 떠 있었다.그러나 방 안 공기는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대비전이라.대비에게 불려가는 길은 반갑기도, 안온하기도 어려운 길이었다.궁에서 누구든 대비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발걸음을 떼며, 이수는 상궁에게 조용히 물었다.“궁 안의 소문이… 대비마마의 귀에까지 들어갔느냐.”상궁은 대답 없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그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대비전 앞 마당의 공기는 다른 곳보다 한층 무거웠다.바람이 지나가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듯한 곳.세월과 권력이 한데 엉켜 딱딱하게 굳은 공기의 자리였다.이수는 규정된 자리까지 걸어가 정해진 예를 갖췄다.“빈, 뵙고 싶었다.”대비의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다.이수는 머리를 조아린 채 답했다.“분부하

  • 천년의 기억   109. 형체 없이 퍼지는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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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자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움직이는 순간,더 많은 의심과 위험이 그녀에게 향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는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단 말인가.'도진의 속마음에 처음으로 ‘무력함’이라는 것이 스며들었다.그 서늘한 감정은, 다가오는 비극의 첫 진동처럼 그의 폐부 깊이 파고들었다.현은 침상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머리를 감싸 쥔 손끝이 창백했다.그는 방 안의 고요를 이기지 못한 듯 천천히 눈을 떴다.“…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그 말은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도진일까, 이수일까. 아니면 그 자신일까.'그는 문득 도진을 보러 갔던 이상한 충동을 떠올렸다.'경에게 다친 이유를 확인하려고 간 것인가?'아니었다.그보다 더 깊고 어두운 이유가 있었다.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빈은… 지금 나를 피하고 있다.'그 생각이 들자 심장이 서늘하게 조여들었다.그리고 또 다른 생각이 스쳤다.'그녀는… 누구를 걱정하며 밤을 지새웠을까.'문득, 현의 시선이 방문 쪽으로 향했다.그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내가 직접 확인해야 한다.새벽의 끝, 무너지는 평온빈의 처소, 군영의 훈련장, 세자의 침전세 곳에서 동시에 숨이 멎은 듯한 기척이 흘렀다.잠들지 못한 사람들.멀리서 서로를 느끼는 그림자들.그림자 아래 감춰진 말들.궁은 아직 조용했다.그러나 그 고요는 태풍의 눈처럼 위험했으며,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질 듯한 얇은 막이었다.그리고, 새벽의 끝이 서서히 밝아오는 순간, 궁의 공기는 명확하게 달라져 있었다.무언가가 곧 변하기 시작할 것처럼.아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찾아왔다.그러나 아무 일도 없던 것은 아니었다.동틀 무렵의 햇빛이 처마 끝을 적실 때, 궁은 이미 여러 겹의 말들로 덮여 있었다.한밤중에도 깨어 있던 사람들의 입이 새벽 공기와 함께 천천히 열린 것이다.이수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길은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지만,그녀의 시선은 자꾸 거울 뒤를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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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는 손을 검으로 가져가지 않았다.지금은 무기를 허리에 두른 상황이 아니기도 했지만,무엇보다 지금 이 의심에서 먼저 칼을 꺼내는 순간,궁 전체가 더욱 어수선해질 것을 알았다.그저 고개를 돌려 천천히 주위를 훑었다.그러나 그림자는 이미 사라진 듯,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도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이 궁은… 지금, 너무 많은 이가 서로를 훔쳐보고 있구나.'그는 스스로도 모르게 한 사람을 떠올렸다.'마마… 그곳은 괜찮은겁니까.'그녀의 처소에 발길을 옮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마음은 자꾸 그곳으로 향했다.그때 저 멀리서 군영의 북소리가 짧게 울렸다.새벽 훈련을 준비하는 소리.그러나 도진은 그 울림 속에 다른 의미를 읽었다.'궁이… 움직인다.'이수는 새벽녘이 되어도 잠들지 못했다.방 안은 진득한 침묵에 잠겨 있었고,이수는 등불이 꺼질 때까지 그 앞에 앉아 있었다.어둠과 시선이 만나면 무언가가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나는 지금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가문도, 명예도, 심지어 세자의 은총조차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지킬 수 있는 것이라곤 마음 뿐.그러나 바로 그 마음조차 지금 가장 숨겨야 할 것이었다.문득, 이수는 자신이 어젯밤 상궁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나는…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그러나 그녀의 속마음은 지금도 흔들리고 있었다.'경이… 다치지 않았다면.'그 생각이 찌르듯 올라왔다.이수는 바로 눈을 감았다.마음이 더 이상 흔들려서는 안 되었다.그때 밖에서 짧은 발걸음이 들렸다.“마마. 저하께서 아침 조회 전에 빈마마의 안부를 묻고 계시옵니다.”그 순간, 이수의 손끝이 떨렸다.“저하께서…?”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혹은, 차마 예상하고 싶지 않았던 말.상궁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예, 마마. 저하께서… 빈마마의 ‘어젯밤 안위’를 물으셨사옵니다.”그 말 속에 담긴 의미는 너무도 선명했다.세자는 이미 움직

  • 천년의 기억   106. 뒤흔들린 새벽의 숨결

    새벽은 아직 열리지 않은 문처럼 조용히 닫혀 있었다.궁의 기척은 밤과 낮 사이 어디쯤, 숨을 죽인 듯 미세하게 흔들렸다.도진은 조금도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으면 검은 어둠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되살아났고,눈을 뜨면 세자의 음성이 귓가에서 멤돌았다.“경은… 빈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조심하라.”그 말 한 줄이 칼끝보다 더 깊게 가슴을 파고들었다.현이 자신을 의심하는 기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도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아직 왼쪽 어깨 통증이 남아 있었지만, 더 누워 있을 이유가 없었다.방을 지키던 무사가 놀란 얼굴로 일어났다.“경께서는 아직 안정을 취하셔야”“괜찮다. 들라 하였느냐.”도진의 목소리는 평정했으나, 그 숨결에 스치는 냉기는 어둠 속에서 더 또렷했다.무사는 더 말하지 못하고 머리를 숙였다.도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상처의 통증이 걷는 동작마다 묻어났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방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새벽 공기가 그를 맞았다.날선 공기 속에서 불길한 기척이 가는 실처럼 피어올랐다.궁이… 달라졌다.그는 즉시 알아차렸다.진흙 속 물결처럼, 보이지 않는 파문이 궁 전체에 퍼져 있었다.움직이지 않는 듯 보이는 새벽,그 안에서 더 많은 것들이 움직이고 있었다.이수는 밤새 거의 눕지 못했다.창호지 너머로 스며드는 어둠이 마치 자신을 조여 오는 듯했다.상궁이 준비한 쑥차는 식어 있었고,방 안의 등잔불은 끝까지 타들어 가며 빛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마마… 잠시라도 누우셨으면 하옵니다.”“괜찮다. 아직은…”하지만 이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입술에 붙은 바람처럼 말끝이 사라졌다.낙마했다는 소식 하나로 궁이 이토록 흔들릴 줄은 몰랐다.그녀는 손을 목덜미로 가져갔다.서늘한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그때 문 밖에서 아주 은밀한 발걸음이 들렸다.상궁은 즉시 문 앞을 향해 돌아섰다.“누구냐.”“상궁마마, 소녀입니다.”어제 밤 그 궁녀였다.문이 열리자, 궁녀는 바짝 웅크린 자세로, 숨을 들이키며

  • 천년의 기억   105.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상궁의 목소리는 떨렸다.“마마께서 궁에 들어오신 것은 가문의 영예이옵고, 또한 나라의 복이옵니다.헛소문이 난다고 하여, 그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사옵니다.”이수는 잠시 상궁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그러니 더더욱 조심해야겠지. 한 사람의 실수로, 몇 사람의 목숨이 날아가는 곳이 궁이니까요.”그 말에 상궁의 눈동자가 움찔였다.“마마…”“내 걱정은 하지 말라. 나는…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이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창호지를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리며, 바깥 어둠을 살폈다.정원에는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다.그러나 묘하게도, 나무 그림자는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오늘 밤, 문단속을 더 단단히 하라. 불필요한 출입은 모두 막고,밤중에 처소 근처로 오는 자가 있다면 이름을 반드시 알아두라.”상궁은 즉시 머리를 깊게 숙였다.“명심하겠사옵니다.”이수가 창가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덧붙였다.“그리고… 저하께서 혹 이곳으로 오시거나, 누군가 저하의 발길을 이곳으로 인도하려 한다면, 미리 내게 알리도록 하여라.”“예, 마마.”말은 그뿐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이제는… 누가 이곳으로 오는지만으로도 화근이 될 수 있다.상궁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이수는 창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다.달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그녀의 옆얼굴을 비췄다.그녀는 손을 뻗어 빗살무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천천히 이마를 창틀에 기댔다.'경은… 지금쯤 어떠한가.'마음속에 떠오른 이름을 그녀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이곳에서는 그조차도 죄가 될 것 같아서.다만, 낙마했다는 말 한마디가이토록 큰 파문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숨이 막힐 만큼 선명했다.그때, 문 쪽에서 아주 작은 기척이 났다.이수는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누구냐.”“마마, 소녀이옵니다.”문이 살짝 열리고, 아까 꾸중을 들었던 어린 궁녀가 조심스레 얼굴을 들이밀었다.“허락도 없이 문턱을 넘는 자는 혼을 나야겠구나.”이

  • 천년의 기억   6. 시선의 감옥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 천년의 기억   5. 열리지 않는 상자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 천년의 기억   4. 운명의 첫 그림자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 천년의 기억   3. 천 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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