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왕의 아들을 낳은 시녀 마리안. 왕비에게 아들은 수장당하고 그녀는 반역자로 몰려 단두대에서 죽는다. 눈을 뜬 순간, 과거로 회귀한 그녀. 이번 생의 목적은 명확하다. 나를 죽인 왕비의 심장을 짓밟고 방관했던 왕을 추락시키는 것. 그리고 半神半人 내 아들을 왕좌에 세우는 것. “울지 말아라, 어미가 너에게 온 세상을 으깨어 바칠 테니.”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 가장 고귀한 복수와 찬탈의 기록.
View More‘...아아!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차가운 바람이 광장을 날카롭게 스쳤다.
겨울의 끝자락 지독하게 시린 한기였다.
단두대 위에 선 내 얇은 치맛자락이 갈기갈기 찢긴 깃발처럼 맥없이 펄럭였다.
이상할 정도로 정돈된 광장.
죽음을 앞둔 죄수의 사형장이라기엔 지나치게 질서정연했고, 군중의 눈빛엔 동정이나 슬픔 따위는 없었다.
그저 광대의 유희를 구경하러 온 관객처럼 생소한 흥분만이 가득했다.
분명 처음 겪는 죽음일진대, 이 장면이 지독하게 낯익은 건 왜일까?
심장을 찌르는 듯한 누군가의 기억이 파편이 되어 뇌리를 스쳤다.
검푸른 빛으로 문드러진 낮달이 걸린 하늘.
사람들은 저 빛을 불길한 징조라며 수군거렸지만, 사형집행인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그저 오래전부터 정해진 절차를 반복하듯 무표정했다.
무거운 사슬에 묶인 채 오르는 단두대 계단.
차가운 돌바닥의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고 살갗을 파고드는 쇠사슬에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죽여라! 저 요망한 마녀를 당장 죽여라!”
“자식을 죽인 악귀다.”
군중의 함성은 독이 묻은 비수였다.
내가 아이를 죽였다고?
내 전부였던 아이, 나를 지탱해 준 소중한 생명을 내가 죽였다니.
저들의 입에서 쏟아지는 포악한 단어들이 내 심장을 갈기갈기 난도질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피비린내 나는 산청(産廳)에 있었다.
갓 태어난 아이의 온기가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죄인이 되어 단두대에 서 있었다.
누구도 내 사연을 묻지 않았다.
누구도 내 진실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목이 어서 빨리 떨어지길 바라는 눈빛.
그래서 이 불길한 징조가 사라지기만을 갈구하며 괴성을 질러댈 뿐이었다.
‘악몽일 거야.’
부모도 성씨도 없이 왕비 발을 닦던 미천한 시녀.
나의 불행이 시작된 그날.
달빛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향하던 중 술에 취한 왕과 마주쳤다.
앙리 7세.
그는 짐승 같은 눈빛으로 내 손목을 낚아챘다.
“이름이 무엇이냐.”
“...마, 마리안이라고 합니다. 폐하.”
그것이 내 나락의 시작.
그날 이후, 나는 왕의 간택 받은 시녀라는 이름으로 별궁에 유폐되었다.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왕의 명은 일개 시녀가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억압이었으며, 왕비는 나를 말려 죽일 듯한 독기를 뿜어댔다.
그가 나를 찾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화려한 감옥 속에 박제되었다.
그곳엔 나 외에도 젊고 예쁘장한 시녀들로 가득했다.
별궁은 기만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마리안, 네가 운이 좋다고 생각하느냐? 아니, 너는 그저 왕의 쓰레기통일 뿐이야.”
수발하는 늙은 시녀들이 질투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우리의 유일한 임무는 왕의 욕정을 받아내는 것.
왕의 아이를 출산한 시녀들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 빈자리는 더 어린 시녀들로 채워졌다.
그 지옥 같은 순환 속에서 나는 그저 시체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사랑?
연민?
그런 고귀한 감정 따위는 내 것이 아니었다.
오직 끈적한 욕망과 서늘한 감시만이 주위를 채우고 있었다.
매일 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차라리 오늘 밤 내 숨이 끊어지게 해달라고.
그러던 어느 날.
내 몸 안에 생명이 찾아왔다.
왕은 변화된 내 모습에 급격히 흥미를 잃었다.
“배가 불러오니 보기 흉하구나.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내 눈에 띄지 마라.”
그게 끝이었다.
궁의의 진찰이 끝난 후, 나는 차가운 독방으로 옮겨졌다.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하고 죽음만을 갈구하던 내 삶.
기이하게도 태동이 느껴지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기쁨을 느꼈다.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흔들었다.
이제 더는 이 차가운 궁궐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아주 작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생명체.
아이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너만은 살릴게. 어미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하지만.
먹는 것, 마시는 것, 심지어 숨 쉬는 순간까지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한 날들의 이어짐.
아이가 자라며 내 몸이 변할수록 기쁨은 거대한 두려움으로 탈바꿈했다.
당시 왕국은 기괴한 예언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
[앙리 재위 7년, 은빛 눈의 반신반인 ‘루미엘’이 태어나 인간의 왕좌를 무너뜨릴 것이다.]
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통치자의 재림.
불안에 미쳐버린 왕비는 그해 태어난 모든 남아를 죽이라 명령했다.
왕은 아무것도 막지 않았다.
왕비 광기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했고, 날마다 아들을 잃은 부모의 통곡이 나라를 뒤덮었다.
별궁에서 태어난 남아는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할 첫 번째 제거 대상이었다.
어느 날 저녁.
식은 수프를 가져온 찬모가 주변을 살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리안, 딸을 낳아야 한다. 무조건 딸이어야 해. 그래야 네가 살아. 만약 아들을 낳으면…. 너와 아이는….”
저 비굴한 관측 천사들이 감히 그를 봉인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그들 힘은 보잘것없었으나 다수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그물망을 짤 때, 대천사조차 묶어둘 수 있는 구속력이 생성되는 모양이었다.구속의 정체는 신성한 질서라는 이름의 족쇄였다.인간계로 돌아가서 이 수수께끼를 풀 것이다.카일 가슴 깊은 곳에 맺혀 있는 치유되지 못한 영역을 찾아낼 것이다.그가 겪고 있을 수많은 삶의 무게를….나는 연인으로서 기꺼이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천사장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보다.내 연인의 눈물을 닦아줄 것이다.천계의 화려한 보좌를 지키는 것보다.인간의 피와 땀이 섞인 땅 위에서 그와 함께 걷는 것이 내 영혼의 안식처였다.그것이 내 삶의 유일한 이유였다.그런데...카일과 아라는 닮아 있었다.아니….똑같았다.그 슬픈 눈동자.그들은 무슨 이유로 천계가 고향이면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카일의 영혼 속에 아라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인지.아니면 두 사람이 하나의 운명을 분점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다만.그 고독한 눈빛이 내 심장을 짓누를 뿐이었다.카일이 무심코 먼 산을 바라볼 때 지었던 그 표정.아라가 감옥의 문을 열고 나올 때 짓고 있던 그 허망한 미소가...내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더는 생각을 분산시키지 않으려 시선을 인간계로 돌렸다.루마레스 숲.카일은 그곳에서 내가 승천하기 전.마지막으로 거닐었던 길을 매일 닦고 있었다.그는 내 기억이 깃든 꽃들을 돌보며 즐겨 앉던 나무 의자를 정성껏 손질했다.시간의 흐름조차 멈춘 듯한 그곳에서 그는.오직 나만을 위한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숲의 정령들도 그가 뿜어내는 깊은 그리움에 동화되어 걷는 길마다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그는 나를 잊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나라는 존재를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봉인하고 있었다.카일 표정에는 이전의 날카로움은 사라졌다.대신.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깊고 묵직한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카일은 내가
아라는 내게 손을 뻗었다.그가 손을 대자, 소멸해 가던 내 입자들이 그의 손안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고통은 사라졌고 거대한 품에 안긴 듯한 안도감이 온 영혼을 감쌌다.“너는 소멸의 길을 택했으나, 그 대가로 내가 갇혀 있던 봉인을 풀었다. 이것은 거래다. 너의 기억이 나를 깨웠으니, 나는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소원…. 이라니요?”“인간계에 다시 내려가고 싶다면 나를 따라라. 천계 기록에는 남지 않고 너는 다시 인간의 호흡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그…. 게 정말인가요? 내가 다시 내 아들과 카일을 만져볼 수 있다는 건가요?”“그렇다.”무슨 일인지 아라가 주춤하는 듯 보였다.마치 아주 먼 기억 속 이름을 기억해 낸 듯했다.“인간 여자야. 너 지금 카일이라고 했냐?”“네. 천사장 카일을 아시나요?”“천사장? 그 얼간이 카일이 인간계로 내려간 게냐?”“네. 당신이 알고 있는 천사장 카일이 그 사람이 맞는다면….”지그시 관측 천사들을 바라본, 아라.그중 한 자를 불러 세웠다.그의 손짓 한 번에 허공에 묶인 관측 천사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인간 여자가 말하는 카일이 내 동생 맞느냐?”“네…. 그것이….”“어서 말하지 못할까?”“네, 네! 맞습니다. 카일 천사장께선 신의 명령으로 인간계에 파송되셨습니다.”갑자기 아라 눈에 눈물이 고였다.그것은 슬픔이 아니었다.수천 년 동안 차가운 감옥 속에서 그리워했던 존재를 향한 애틋함이었다.“네가 내 동생을 어찌 아는 게냐? 아…. 아니다. 내가 직접 보겠다.”날 똑바로 바라보는 아라 대천사.그 눈빛은 날 태워버릴 듯 맹렬했다.“아…!”아라 대천사의 짧은 탄식이 끝난 후.그가 나를 자기 그림자 안에 감췄다.관측 천사들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금기의 영역으로 나를 숨긴 것이었다.그의 그림자는 천계의 차가운 정적과는 달랐다.투쟁의 열기, 동생을 향한 그리움, 그리고 어느 인간을 향한 생동하는 용광로 같았다.내 영혼은 아라의 힘을 빌려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관측
인간 영혼이 이토록 거대 파동을 일으키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들.내 영혼의 기억을 지우려 할수록 내 기억이 가진 강렬한 서사에 압도당했다.인간계에 있는 루미엘이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았다.마치 누군가에게 강한 포옹을 받은 듯.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르는 따스함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황제의 궁.하늘을 올려다보던 루미엘의 눈에 은빛 눈물이 고였다.“어머니…?”인간계와 천계를 잇는 보이지 않는 끈이 다시 강하게 연결됐다.나만의 방법으로 아들의 앞길을 가로막던 관측 천사 사슬을 끊어냈다.나는 보았다.루미엘 얼굴에 피어오르는 결연한 의지를.비록 내가 소멸할지라도.아들만큼은 반신반인(半神半人) 완벽한 통치자 길을 걷게 하겠다는 어미의 마지막 선택이었다.천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내가 쏟아부은 인간 기억의 파편들은 천계의 정교한 논리 속에 파고든 독소였다.그 파편들은 멈추지 않았다.차가운 대리석 기둥 사이로 스며들어 이곳을 지배하던 관측 천사의 무미건조한 질서를 하나둘씩 무너뜨렸다.“감히 인간의 기억이 관측 천사의 기록을 오염시키다니.”관측 천사들은 허둥대며 복구하려 애썼지만.이미 늦었다.흩뿌린 감정의 파도를 막아내지 못했다.내가 쏟아낸 기억들은 미래를 바꿀 힘이 되어 있었다.내 영혼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다.하지만 내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빛났다.“당신들 기록은 죽은 자의 역사일 뿐이다. 하지만 내 기억은 조금 전 살아있던 자의 힘이다.”내 마지막 영혼을 태워 루미엘이 걸어갈 길 앞에 놓인 관측 천사들의 방해를 교란했다.어미의 은반지를 만지작거리던 루미엘.그리운 목소리가 환청처럼 맴돌았다.황궁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갑자기 강렬해졌다.마치 내가 보내는 마지막 안부처럼.황제의 집무실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관측 천사들은 경악했다.나의 희생이 그들이 쌓아온 질서보다 더 강한 기적을 만들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마리안! 너의 존재는 이제 어디에서도 기록되지 않을
이를 악물었다.천계에서 내 아들을 향한 잔혹한 압박이 시작되는 걸 볼 수 없었다.영혼이 되어서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다시금 타오르게 했다.성스러운 천계 입구일지라도.나는 결코 무릎 꿇지 않을 것이다.기억이 지워진다면….이 호수를 통해서라도 루미엘 곁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겠다.그것이 나를 선택한 신.그분이 주신 삶을 향한 온전한 경배이자 사랑의 방식이었다.루미엘을 지키기 위한 영혼의 전쟁이 의식을 타고 흘렀다.관측 천사들 차가운 시선이 나를 압박했지만.물러서지 않았다.나의 기억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신께서 내게 부여하신 삶의 증거이기 때문이다.나는 그 증거를 지키기 위해.끝까지 저들과 맞설 준비를 마쳤다.고요했던 도서관에 내 의지가 파동을 일으켰다.기계적인 질서에 갇힌 이곳.뜨거운 인간의 사랑이 거센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나는 이곳에서도 루미엘을 향한 기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며, 내 기억의 한 조각도 저들에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천계의 문은 이제 투쟁의 장이 되었다.신의 뜻을 왜곡하여 오만한 원칙을 강요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한 인간의 저항이었다.나는 믿는다.진정한 신의 영역은 이처럼 차갑고 공허한 곳이 아니라.사랑하는 이들이 기억을 품고 서로를 그리워할 수 있는 따뜻한 빛의 공간일 것이라고.그렇기에 나는 이곳을 나갈 때까지.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내 영혼의 불꽃이 차가운 천계 문을 녹이고 루미엘 곁으로 돌아갈 길을 열 때까지….루미엘, 나의 아들.너를 향한 기억이 내게 있는 한.나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신께서 주신 강인한 생명력은 천계의 질서로도 지울 수 없는 성스러운 불꽃이었다.오늘도 기억한다.함께했던 그 모든 눈부신 순간들을.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관측 천사 따위에게 무릎 꿇지 않을 것이다.루미엘을 지키기 위한 영혼의 전쟁이 의지를 타고 흘렀다.천계 기록의 호수는 더욱 선명하게 인간계를 보여주었다.처참했다.루미엘이 신성을 이용해 대륙 가뭄을 해결하려 할 때
제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시간의 흐름을 알려 주었다.인간과 신의 영역.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착각이 든 것도 그 음성으로 인함이었다.신전 가장 밑바닥, 지혜의 샘이 있어 멀리까지 물을 길으러 갈 필요도 없는 곳.세상에서 가장 안전지대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숲 밖을 자유로이 왕래하는 소금쟁이 요정이 궁의 소식을 가끔 전해 주었다.앙리 왕은 지병인 우울증과 불면증이 심해졌고 더 이상 여자를 찾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별궁이 불타 폐쇄됐고 왕비는 계속 나와 아들을 찾으려 혈안이 돼 있다고 했다.바깥 세계와 차단된 생활에
뜨거운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렀다.“그건 그분만이 아실 테지요. 당신을 믿고 루미엘님을 맡기셨으니 이 신물은 당신이 잘 간직하십시오.”엘레나 목소리엔 오랜 유산을 건네는 무게가 담겨 있었다.루마레스 사제들에게 전해 내려오던 붉은 돌은 루미엘 어머니를 위한 보호석.어느 순간에도 루미엘을 지키라는 일종의 명령과도 같은 표징이었다.돌을 손에 쥐는 순간.삶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했다.‘그래. 어떤 어려움이라도 반드시 이겨낼 거야. 주어진 운명이라면….’가장 밑바닥 삶이었던 나..한낱 궁의 시녀였던 내가
제단 주위 돌에 새겨진 고대 문양이 하나둘 빛을 잃었다.“왕의 피를 이어받은 남아와 그 어미를 내어주면 조용히 가겠다.”“당장 나가거라. 그들은 신께 보호받는 자들이다.”모르가나는 커다란 검은 천을 펼쳐 나를 향해 돌진했다.뛰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아이 눈을 가리고 전속력으로 뛰었다.그가 불타는 나무를 내게 던졌다.불길이 내 앞에 떨어졌지만, 그 불을 밟고 미친 듯이 달렸다.발밑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옷자락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겨우 도망친 게 여기더냐? 더 멀리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갔어야지.”
누군가의 손이 아이 목덜미를 슬쩍 훑고 지나갔다.인간의 형체가 아닌 괴물.차원 회랑에서 본 그자였다.희귀한 물체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웅크려 앉았다.“저리 가거라. 신의 법에 따라 루미엘님과 어머니를 이제부터 보호할 것이다.”그자는 숲의 경계를 맡은 소금쟁이 요정이라 했다.엘레나의 손짓 하나로 그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채찍 맞은 상처에서 흐른 피가 옷을 적시며 아이의 강보까지 흥건했다.“루미엘님을 제게 주시지요.”“네?”“안심하십시오. 이분은 의원이십니다.”깊은 숲에 들어서며 더욱 짙어진 약초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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