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입으로 차 시중을 들어. 하루에 세 번씩. 아침, 점심 그리고 잠자기 전.” “……예?” 이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잘못 들은 건가? 내 입으로 차를 어떻게…? 세레인의 눈동자가 커지고 표정이 무너졌다.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숨이 순간 멎은 듯. 당혹감, 굴욕감, 분노까지 뒤섞여 목구멍에서 말이 막혀버렸다. “…폐하, 지금 그게 무슨-” 황제 카르안은 여전히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말을 잘랐다. “손을 다쳤으니 입으로 차를 따르라고.” 카르안은 아주 느릿하게 시선을 옮겼다. 붉은 눈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닿았다. 표정은 똑같았지만 그 눈빛만은 한없이 흥미로웠다. “…아직 이해가 안되면 내가 직접 시범을 보여줄까?”
もっと見る“황제 폐하께서 시녀님을 호출하셨습니다.”
눈을 뜬 세레인은 그 말에 피가 서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입술이 말라붙고 메모장에 적어놓은 욕지거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나 좀 부르지 말라고……
황제의 시선은 여전히 찻잔 위에 머물러 있었다. 은빛 테두리에 붉게 비친 찻물이 이상하게도 피를 연상케 했다. 세레인은 눈 앞의 잔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손으로 시중드는 건 그만두라 했었지.”
그 짧은 문장에 세레인의 손이 움찔했다. 그녀는 얼른 두 손을 뒤로 감췄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지만 황제는 그저 담담히 잔을 들었다.
“입으로 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예? 뭐라고요?”
얼떨결에 튀어나온 반문.
황제는 찻잔을 든 채 그녀를 바라봤다. 붉은 눈동자가 마치 짐승처럼, 먹잇감을 고르듯 느리게 그녀를 훑었다.
“차 말이다.”
세레인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지금… 무슨, 장난을…”
“장난처럼 들리나?”
그는 찻잔을 천천히 기울여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삼키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세레인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몸이 굳어 멈칫했다.
그는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혔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옷 너머로 전해졌다. 그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
너, 직접 받아 마셔. 내 입에서.
그의 숨결이 그녀의 피부를 스치며 가볍게 떨리게 했다. 몸이 제멋대로 굳어버렸고 두 눈은 허둥지둥 흔들렸다.
이걸 진짜 하라고? 사람이 진짜 아침부터 제대로 미쳤구나.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이건…진짜…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몇 달 전. 베르나 마을.
“아야! 또 가시야!”
세레인은 손가락을 쥐며 제자리에서 통통 튀었다. 초록빛 풀숲에서 온갖 약초를 찾아 헤매던 오후. 작고 하얀 손가락 끝에 붉은 점이 맺혔다.
“이건 뭔데 이렇게 지독해. 약효가 센 게 아니라 성질이 더러운 거 아니야?”
그녀는 투덜투덜 말하며 풀을 바구니에 넣었다. 그녀의 바구니엔 엉성하게 모은 약초가 반쯤 담겨 있었다. 라페 꽃, 노란 뿌리풀, 흉터 잎까지. 정리는 조금 서툴었지만 약초 캐는 건 전문가급이었다. 세레인—지금은 ‘리나’라 불리는 그녀는 허리를 펴고 숨을 몰아쉬었다.
“산 속에서 역시 내가 제일 최고지!”
혼잣말이지만 그 말이 스스로를 다잡는 힘이 되기도 했다. 베르나의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약초꾼이라고 불렀고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그녀를 슬쩍 훔쳐봤다.
“리나 누나! 거기 있지?”
초록색 털모자를 눌러쓴 토비가 두 손을 휘저으며 달려왔다.
“또 왔어, 토비?”
“응! 근데 오늘은 진짜 용건 있어!”
소년은 품에서 쪽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엄마가 장날 전에 이 약초 꼭 좀 부탁한대! 향 좋은 걸로!”
세레인은 쪽지를 받아 접으며 말했다.
“알았어. 근데 또 혼자 온 거야?”
“응! 걱정 마! 나 길 다 외웠다니까.”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럼 약초 퀴즈! 이 잎은 뭐게?”
“음… 풀?”
“하하하하하!”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누나는 왜 혼자 살아?”
“…그냥 조용한 게 좋아서.”
“심심하지 않아?”
“네가 자꾸 오잖아.”
“풀요정 리나 누나~!!”
토비는 풀잎을 그녀 머리에 얹고는 도망치듯 달려 내려갔다. 그 뒤를 바라보며 세레인은 조용히 약초 바구니를 들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다음 날,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제법 미끄러웠다. 세레인은 바구니를 두 손으로 꼭 안고 입김을 호호 뿜으며 성큼성큼 걸었다.
“어우 추워… 옷을 더 두꺼운 걸로 입을걸.”
혼잣말이 습관처럼 나왔다.
베르나 마을은 칼데론 왕국의 끝자락. 세레인이 혼자 사는 깊은 산 속과는 다르게 활기가 있었다. 벽돌로 쌓은 낮은 담벼락과 창문에 걸린 수세미 덩굴.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골목 사이로 흘렀다. 길모퉁이에서 돌을 고르던 남자아이가 그녀를 보곤 손을 흔들었다.
“리나 누나다!”
세레인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겨울이었지만 거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세레인은 흐느적거리는 바구니를 고쳐잡으며 익숙한 간판을 향해 갔다. 나무 간판에는 '식료품점'이라 적혀 있었다. 출입문 위에는 마른 허브다발이 묶여 흔들리고 있었다. 문을 열자 따뜻한 난로 열기와 함께 녹진한 과일 냄새가 풍겼다.
“마델렌 아주머니, 저 왔어요!”
선반 위에는 건과일, 말린 치즈, 과일잼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 마델렌은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채 양손으로 찻잔을 닦다가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날이 많이 추워졌어요. 오늘은 뭐 도와드릴 일 없어요?”
“있고 말고. 안 그래도 어제 혼자서 밀 옮기다 허리 나갈 뻔했어. 너 같은 아이가 있어서 내가 살지.”
세레인은 가게 뒷편에서 물건을 옮기고 바닥을 쓸었다. 상징인 진열대도 깨끗이 닦고 정리했다. 작은 노동이 끝나고 마델렌이 채소 몇 가지, 통밀빵 그리고 잼을 싸서 건네주었다.
“약초는 저기 선반 옆에 두고. 내가 약초상에게 전해줄게.”
마델렌은 돈주머니를 꺼내며 말했다.
“자, 이건 약초 값. 리나 이것도 좀 마셔.”
“고맙습니다.”
세레인은 건네받은 따뜻한 차를 호호 불며 마셨다. 마델렌은 찻잔을 닦던 손을 멈추고 세레인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요 며칠 마을 분위기가 이상하더라. 마을 기록도 새로 정리하고 있대. 그냥 조용히 넘기면 좋을 텐데… 이번엔 좀 오래 갈 것 같아. 너도 늦게 다니지 말고, 리나.”
세레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네, 알겠어요."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 가게를 나설 무렵 조금씩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는 담벼락 너머에서 들려오는 남자들 목소리에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췄다.
“그래도 이번엔 진짜 심각하대. 서쪽 지방에서도 반발 움직임이 슬슬—”
“쉿! 그런 소리는 입에 올리는 거 아니야.”
장작을 쌓으며 이야기 중인 중년 남자 둘이 보였다. 그들은 허름한 외투를 여미며 손을 비벼대고 있었고 둘 사이의 말소리는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요즘엔 마을에도 이상한 낯선 사람들이 기웃거린다더라. 어쩌려고 그리 입이 가볍냐.”
“알았어 알았어, 이젠 말 안 해.”
한 사람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던 그때—갑자기 얘기의 방향이 바뀌었다.
“아 참, 내 친척이 제국 변방에서 일하잖아. 그 양반 말로는 거기 황제가 머리는 새까맣고 눈이… 붉다던데.”
“그래, 피 눈알에 숨도 못 쉰다더라고.”
“그리고 손 짓에 땅이 날아간다네. 괴물이지 괴물!”
두 사람의 웃음소리에 세레인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작은 마을에서 나오는 얘기들이란 늘 이런 식이었다. 예전에도 그랬다.
칼데론 왕은 식사 시간에 평민 머리통을 올려서 먹는다. 공작가 영애는 밤마다 사람 비명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든다. 그럴싸하면서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진짜처럼 돌았다. 못된 귀족들이나 왕은 사람 하나 쯤은 휘파람 불다 휙 날려버리는 게 일상이고. 그 사람들은 와인 대신 피를 마시는 게 틀림없다느니…
“그야 제국 황제니까 뭐 여기보다 좀 더 무서울 수도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피 눈알에 숨도 못 쉰다고?”
세레인은 콧김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참나,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 있냐?
허무맹랑했다. 칼데론 왕국의 백작가 영애로 자란 그녀로선 그런 말은 순수한 시골 사람들의 괴담처럼 들릴 뿐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예전 기억이 슬며시 떠올랐다.
어릴 적 아버지 집무실에 문서를 가져다주던 어느 날, 귀족들의 대화.
"발테리움 새 황제 소문이 심상찮다더군.""나이가 어린데 잔인하다고 하더군요."
가볍게 넘겼던 말들. 어딘가 기시감 같은 이질적인 느낌. 단순한 허풍이라 넘기기엔 묘한 무게감이 있었다. 하지만 세레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산이 날아가기는 뭘 날아가, 감자 한 자루도 못 드는 사람들이…”
예전 그녀가 속했던 귀족 세계의 사람들은 흙먼지 안 묻히고 세상을 다 가진 듯 군림했었다. 심지어 손톱 하나 상하지 않게 사는 게 미덕인 사람들도 꽤 많았다. 지금의 세레인은 산길을 오가며 장작도 패고, 무거운 밀 자루도 거뜬히 나르는 몸이 됐다. 진짜 산에 살아본 사람은 산을 날린다느니 그런 말 못 해.
그녀는 코웃음을 흘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카르안이 다가올수록, 길게 뻗은 복도에는 누구 하나 입을 열기 힘든 압박감이 서리기 시작했다.그는 그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의 모욕적인 언사에 세레인은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폐하아...! 잠시 얘기를 나눈 것 뿐인데 벌레라니요. 말이 너무 지나치십니다......"제 생각보다 대담하게 맞서는 세레인의 모습에 다비안이 그녀를 숨기려는 듯 자신의 몸을 틀어 그녀를 가렸다.그리고 그 행동은 같은 남자가 보기에 명백히 보호 행위로 느껴졌다.카르안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다비안을 내려다봤다."다비안 경, 세레인과 무슨 관계지?"다비안은 잠시 침묵했다. 황제가 세레인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별다른 명분 없이 남작가의 하녀를 갑작스럽게 이관시켰을테고. 머릿속에 여러 계산이 스쳐 지나갔지만, 작고 여린 여자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모든 생각을 잠재워버렸다."저희 가문에 있던 아이입니다."그 한마디는 카르안의 인내심을 조용히 바닥냈다. 과거형임에도 다비안이 여전히 그녀를 놓지 못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마치 카르안 자신과 리베르츠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것처럼."그 이상으로 보고 있는게 아닌가?"다비안은 다시 한번 침묵했다. 그리고 그는 세레인에게 시선을 던졌다.자신을 위해 울먹이는 맑은 눈동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리나.접경지에서도, 훈련장에서도 몇 번이고 떠올랐던 해사한 얼굴.그래, 나는 어쩌면 너를 처음부터 가문의 아이로 보고 있던게 아닐거다. 그리고 그걸 이 이상 숨기는 게 의미가 있을까?"제가 좋아했습니다."그 한마디에 세레인의 눈이 벙찐 듯이 커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비안의 연한 푸른색 눈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다비안은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그리고, 지금도 그 마음은 같습니다.”“......네?”세레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공자님.”예상했던 상대의 마음이었지만, 그로 인해 둘 사이에서 애틋한 연인의 기류가
겉으로 보면 고요해보이는 호숫가. 다비안은 청력에 집중했다.긴 수풀이 옷에 스치는 소리 그리고 간헐적으로 들리는 발자국 소리는 점점 자신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다비안은 바위 뒤에 몸을 밀착한 채, 거친 숨을 억지로 삼켰다.대략 열명 안팍.통신도 끊긴 채 고립된 곳에서 그의 결정은 명확했다. 살아 돌아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 묻힌 것의 정체를 제국에 전달하는 것.다비안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틀었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든 검이 그의 뺨을 스쳤다. 카앙!마찰음이 울리자마자 다비안은 상대의 팔을 세게 가격했다. 중심이 무너진 적의 급소에 단검을 박아넣었다.시체가 바닥에 닿기도 전, 등 뒤에서 창이 찔러 들어왔다. 다비안은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그리고 장검을 뽑아 등을 베었다.두 번째."놈이다!"숨어있던 나머지 적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화살 두 발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다비안은 바닥을 구르며 피했지만, 한 발이 그의 오른쪽 팔뚝에 깊게 꽂혔다.푹!선명한 핏줄기가 옷을 적셨다. 다비안은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아냈다.나무가 많은 숲에서는 숫자가 오히려 독이었다. 그는 아군과 뒤엉키게 만들어 적들의 시야를 가리는 전략을 택했다.하지만 팔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팔이 저릿해지며 시야가 조금씩 흔들렸다.아직 둘 남았다.다비안은 비틀거리며 검을 쳐내고, 몸을 회전시키며 적의 옆구리를 베었다. 콱!거대한 대검이 적의 상체를 동강 냈다. 부단장 칼릭스였다. 그를 뒤이어 기사단이 몰려왔다.칼릭스는 피투성이가 된 다비안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다비안! 괜찮냐?"다비안은 이미 자신의 옷을 찢어 팔을 단단히 묶고 있었다. 지혈을 마친 그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했다."괜찮습니다. 부단장님, 땅 속을 보십시오."다비안은 땅 속을 가리켰다. "넌 아프지도 않냐? 일단 한 명 와서 부축해라."칼릭스는 흙을 파헤치고 파편을 집어 들었다."스읍...... 이건 에레브노스의 흔적인데."젊은 축에
커튼 사이로 새벽빛이 스며들어 침실 안은 희뿌연 빛이 감돌고 있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세레인은 카르안의 몸에 기댄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카르안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채, 세레인의 허리를 감싸 쥐고, 제 안쪽으로 더 바짝 끌어당겼다. "폐하아...! 너무 버겁다니까요......!" 부피감 때문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세레인이 그의 아랫배를 꾹 밀어냈지만, 카르안은 오히려 엉덩이를 더 단단하게 붙잡았다. "하아, 이제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어?" 세레인은 그의 탄탄한 배를 찰싹찰싹 때리며 투정을 부렸다. "도무지 적응이 안되는데 뭘 어떻게 적응해요?! 폐하, 이러다 우리 밤 새겠어요. 이제 그만 쉬어요......!" 카르안은 그 대답이 귀엽다는 듯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세레인은 어깨에 이마를 가볍게 기댄 채, 카르안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제국의 고귀한 공녀도 아닌 타국 출신인 자신을 향한 이상할 정도로 과한 집착. 그의 의중을 읽어보려 눈을 맞추던 세레인이 잠시 고민하다 카르안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카르안은 화답이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동그란 뺨을 혀로 훑어내렸다. 세레인이 간지러워서 '꺄악'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 카르안의 입가도 호선을 그렸지만, 이내 레이나가 그녀의 뺨을 때렸던 일이 떠오르며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별난 귀족 영애들 틈에서 얕보이지 않으려면 무엇부터 가르쳐 줘야 할까? 카르안은 품 안에 얌전히 안긴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햇살이 좀 더 길게 드리워지고, 먼저 눈을 뜬 카르안은 한동안 말없이 세레인을 내려다보았다. 금빛 속눈썹 아래 고른 숨결과 베개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함께 잠든 어젯밤 내내 이상하리만치 불안했다. 그녀를 안고 있고, 온기를 느끼고 있어도 그랬다. 더 가까이 곁에 두고 싶다는 마음은 이미 자신이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정말 이것뿐인가? 사람 하나에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다비안 경이, 다비안 경이 아직 복귀하지 않았습니다!"히아트가 땀에 젖은 채 내달려 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부단장 칼릭스는 지휘봉을 책상에 툭툭 치며, 시계를 확인했다. 해가 저물어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지 오래였다."시간이 몇 신데 아직 복귀를 안 해? 마지막으로 같이 있었던 곳이 어디야?"히아트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었다. "북쪽 자레니 호숫가입니다. 다비안 포함 여섯 명이서 인근을 순찰하고 저희는 돌아왔는데, 그는 지형을 더 살피겠다며 자리를 옮겼습니다. 분명 해 지기 전에는 돌아오겠다고 했는데……."칼릭스가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호숫가는 고요했다. 다비안은 짧은 단검을 꽉 쥐고 숨을 죽였다.며칠 전부터 새벽에 간혹 보이던 작은 인영. 지난 번의 선제 도발은 물론이고, 접경지의 분위기로는 호의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호수 근처, 흙이 뒤집힌 자리에 다가서자 주머니 안에 늘 넣고 다니던, 전령구가 지직 소리를 내며 연결이 끊겼다."함정인가?"다비안의 연한 푸른 눈이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는 아카데미 시절 익혔던 마력 반응을 떠올리며 지면 쪽에 코를 가까이 댔다. 흙냄새. 폭발물 특유의 화학적인 향이 아주 희미하게 감돌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단검으로 땅을 파헤쳤다. 한참을 파내니 깊은 구덩이에서 그을린 금속 파편이 드러났다. 다비안이 반듯한 미간을 구기며, 천천히 파편을 살펴봤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형체. 그 찰나였다. 슉-!등 뒤에서 날아든 화살이 그의 옆을 스쳤다. 다비안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큰 바위 뒤로 숨었다. 긍지 높은 기사로서, 적의 기습에 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적의 동태를 살폈다. 설령 기습으로 제 몸이 이번에 죽는다 해도, 어떻게 해서든 이 침략의 증거는 제국에 알려야만 했다.*** 세레인의 숙소.세레인은 카르안의 눈치를 보며 빨래감 속에 제 속옷과 옷가지들을 재빨리 숨겨버렸다."폐하, 왜 자꾸 이곳으로……. 폐하의 궁
“괜찮아?”“피, 피는 안 나?”하녀장 펠타가 헐레벌떡 달려와 상황을 수습했다.세레인은 얼굴이 새하얘진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다리에선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아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나… 어떡해…?”작게 중얼거렸다.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 폐하 입장 중이었는데… 이런 실수를…황제의 입장 도중 일어난 소란에 숨을 죽이고 있던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반 쯤 열린 장막 사이로 느껴지는 날 선 기류.황제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잠시 장막
세레인은 입을 쩍 벌린 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방금 전까지 야생동물이 나올까 봐 쫄깃했던 마음은 어디 가고, 이제는 눈앞에 펼쳐질 기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자, 정신 차려! 일단 배부터 채우고… 그다음엔 일자리를 알아봐야지.”그녀는 바구니 속 마델렌이 싸준 빵 덩어리를 꺼내들었다.“음, 제국은 부유하니까 하녀 월급도 훨씬 셀 거야. 운 좋으면 귀족가 대저택에 취직할 수도 있고!”세레인은 머릿속으로 장밋빛 미래를 그렸다. 큰 저택의 하녀가 되어 따뜻한 방에서 잠들고 남는 시간에는 맛있는 제국 음식
얼었던 땅이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한 계절이었다. 봄이 가까워지자 작은 마을 베르나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사람들도 이전보다 분주해지고 있었다.“성문 근처에서 검문이 시작됐다더라.” “진작부터 불안했지. 국경지대에 병사 늘린 것도 그렇고…” "제러드, 당신도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아요. 저번에 필리도 가게에서 불시검문 당해서 그 다음날에야 겨우 집에 왔다고 했잖아요." "아니, 내가 또 뭘 언제 늦게 돌아다녔다고 그래!?" "우리 동네는 조용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참…"사람들 틈을 지나며 물건을 사던 세레인은 귀를
“황제 폐하께서 시녀님을 호출하셨습니다.”눈을 뜬 세레인은 그 말에 피가 서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입술이 말라붙고 메모장에 적어놓은 욕지거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나 좀 부르지 말라고……황제의 시선은 여전히 찻잔 위에 머물러 있었다. 은빛 테두리에 붉게 비친 찻물이 이상하게도 피를 연상케 했다. 세레인은 눈 앞의 잔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어제, 손으로 시중드는 건 그만두라 했었지.”그 짧은 문장에 세레인의 손이 움찔했다. 그녀는 얼른 두 손을 뒤로 감췄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지만 황제는 그저 담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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