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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잊히지 않는 처형대

Author: 그림자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3-23 11:07:21

세레인은 입을 쩍 벌린 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야생동물이 나올까 봐 쫄깃했던 마음은 어디 가고, 이제는 눈앞에 펼쳐질 기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자, 정신 차려! 일단 배부터 채우고… 그다음엔 일자리를 알아봐야지.”

그녀는 바구니 속 마델렌이 싸준 빵 덩어리를 꺼내들었다.

“음, 제국은 부유하니까 하녀 월급도 훨씬 셀 거야. 운 좋으면 귀족가 대저택에 취직할 수도 있고!”

세레인은 머릿속으로 장밋빛 미래를 그렸다. 큰 저택의 하녀가 되어 따뜻한 방에서 잠들고 남는 시간에는 맛있는 제국 음식을 사 먹는 상상.

“그래! 거기다 제국은 넓으니까 칼데론의 그 지긋지긋한 얼굴들을 마주칠 일도 없을 거고. 나만 잘하면 여긴 정말 낙원일지도 몰라!”

그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세레인은 강가의 항구 마을에서 배를 탔다. 유려한 곡선의 발테리움 제국의 여객선은 마치 귀족의 마차처럼 우아했다.

눈앞에 펼쳐진 경치에 마음을 뺏긴 세레인은 알지 못했다. 방금 전 누군가의 삶을 가볍게 짓이겨버리고 온 남자가 바로 그녀가 살아야 할 이 제국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도착한 곳은 루메데스, 발테리움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황궁의 외부 연회가 열리는 지역이었다.

정교한 첨탑과 순백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대성당들과 화려한 풍경. 넓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

여관의 안주인은 그녀에게 제국 연회 하녀 모집 공고를 알려주었고 세레인은 기대를 안고 그곳으로 향했다.

듣기로는 무려 숙식에 옷까지 제공해준다고. 타국에서 하는 일이라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살벌한 귀족가에서도 살아남았는데... 거기다 베르나에서는 온갖 허드렛일을 해왔다.

입구엔 많은 여성들이 줄을 서 있었고 모두 긴장한 얼굴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레인은 자신을 아는 이들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놓이는 것을 느꼈다.

“이름이 뭐죠?”

“리나입니다.”

“나이는요?”

“스물둘입니다.”

“출신은 어디인가요?”

“칼데론 왕국 베르나입니다.”

면접관들의 시선이 낯선 그녀를 낱낱이 훑어내리는 듯했다.

낡은 옷차림에 발테리움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억양, 하지만 눈빛은 맑아보였다.

“하루 10실바르, 연회 삼일 이후 나흘 근무로 70실바르 지급됩니다.”

세상에 10실바르? 잘 못 들은건가?

세레인은 떡 벌어지는 입을 간신히 다물며 속으로 계산했다.

저 정도면 따뜻한 여관에서 넉넉히 머물 수 있다! 새 옷도 몇 벌 살 수 있고!

“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사히 면접을 마쳤다.

***

어떻게 또 붙었다? 후, 진짜 다행이다! 바로 외부 연회장 준비라니 벌써부터 다리가 아플 것 같은 기분인데.

“안녕. 난 마사야.”

“난 리나야. 스물둘이고 잘 부탁해.”

"하녀로 일 해본 적 있어?"

“하녀 일은 처음인데 난 시골에서 왔거든. 시골에선 별의별 일 다 했지.”

마사는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왔다.

그녀는 남작가에서 하녀로 오래 일했다고 했다. 그녀는 곱슬한 갈색 머리에 재치 있는 입담의 소유자였고 손놀림도 빨라 하녀장의 예쁨을 받았다.

며칠 후 북소리와 함께 연회가 시작되었다.

연회장으로 이어지는 문 앞은 서늘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갑옷을 갖춰 입은 근위병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그 정적의 중심에는 발테리움의 황제 카르안이 서 있었다.

그는 무심한 눈길로 자신의 소매 끝에 달린 커프스 버튼을 한 번 만지작거렸다. 천장까지 높게 솟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연회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폐하,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차분한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르안은 대답 대신 가볍게 턱을 까딱였다. 그의 등 뒤로 길게 늘어진 검은 망토가 바닥을 스치며 곡선을 그렸다.

"가자."

그는 창가에서 몸을 돌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

발테리움 제국 귀족들이 입장했다. 귀족 여성들은 각자의 호위자나 동반한 귀족 남성과 나란히 걸어 들어왔다.

알릭스 듀란트 후작이 단정한 걸음으로 들어섰고 이어서 로델 무르젠 후작과 내무대신 시릴 베르탄 공작이 차례로 뒤따랐다. 그들의 발걸음이 붉은 융단을 차례로 채웠지만 어쩐지 정적은 더욱 깊어졌다.

누구도 먼저 자리에 앉지 않았다.

모두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텅.

긴 장검의 날이 바닥을 울리는 신호음.

의식용 입장 신호였다.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십니다!”

그 한 마디에 공기 자체가 바뀌었다.

모든 이들이 일제히 멈췄고 미세한 긴장감이 공간 전체를 휘감았다.

연회장의 장막 안.

하녀들은 입장 직전의 귀족 손님을 위한 잔이나 접시, 간단한 음식을 담은 트레이를 들고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세레인 역시 가느다란 유리잔 몇 개가 놓인 트레이를 조심스레 들고 서 있었다.

누구도 크게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안에서도 그 긴장감이 전해졌다.

장막 안쪽의 하녀들 사이에서도 흠칫 놀라며 작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세레인은 본능처럼 고개를 들어 장막 너머 붉은 융단 위를 걷는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단 한 사람이었지만 그 존재감은 방금 전 입장한 귀족들을 단숨에 잊게 만들 만큼 압도적이었다. 그 순간 마치 세상이 정지한 것 같았다.

크고 곧은 체격 위로 황금 자수가 놓인 검은 망토가 어깨 위로 유려하게 흐르고 있었다. 밤처럼 짙은 제복은 날렵하고 절제된 장식으로 빛나고 있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 그 어둠 안에서 불길처럼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얼굴. 높고 반듯한 콧날,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매끄럽고 차가운 듯한 피부.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조각상, 아니 그보다 더 이질적인 무언가 같았다.

세레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헉하고 삼켰다.

…미쳤다. 저게 진짜 사람이야?

잠시, 눈과 마주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뭐지? 나 보고 있는 거 아니지?

그의 시선은 짧았지만 분명 장막 안에 서있는 자신을 향해 닿아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입을 다물 수도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툭.

세레인의 손에서 작은 진동이 전해졌고 트레이가 살짝 기우뚱하며 유리잔 하나가 기울어졌다.

쨍그랑!

잔이 부서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장막 안을 가르며 퍼졌다. 조각 일부는 근처 장식 천을 건드렸고 뒤에 있던 하녀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모두의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황제의 걸음이 딱 멈췄다.

세레인의 눈동자가 공포로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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