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내가 먹기 전에 이 샐러드 잎사귀 수부터 세어 와라. 난 짝수 아니면 안 먹는다.” 미친 황제의 시종으로 구르던 한 달, 원래 모습인 루체른 공녀로 돌아오면 다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황제는 내 백금발 한 올까지 기억하고 있었고, 나를 ‘특별 보좌관’이라는 인질로 삼아 다시 옆에 두었다. “내 것에 대한 소유욕이 강하거든. 엘리노아, 네가 다른 놈 이름을 외우는 건 불쾌해.” 질투에 눈먼 황제와, 조카 바보가 된 마탑주 숙부님, 그리고 엘리노아만 바라보는 사고뭉치 오빠들 사이에서 나의 평화로운 백수 라이프는 영원히 멀어져만 간다!
View More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황제의 침실에서 살며시 열린 커튼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침대 위에 누운 사내의 얼굴을 비추었다.
단정하게 감긴 긴 속눈썹과 날카로운 콧날.
굳게 다물어진 붉은 입술까지.
헝클어진 흑발마저 완벽한 조각상 같은 이 남자는 신의 사랑을 듬뿍받은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저 어여쁘게 붉으스름한 입술이 열리는 순간! 내 인생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리라는걸 말이다.
‘...입만 다물면 참 완벽한데.’
나는 침대 머리맡에 서서 잠든 카엘루스 황제를 내려다보며 짧게 혀를 찼다.
하지만 속지 말자!
저 남자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오밤중에 갑자기 샐러드 잎사귀 수를 세어오라고 시킬 인간이니까.
‘홀수면 기분 나쁘다. 다시 세어와.’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진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낡은 신발을 집어 들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숨을 참으며 한 발짝씩 문을 향해 뒷걸음질을 쳤다.
“잘 있어라, 블랙 황궁. 그리고 미친 황제님. 다시는 보지 말자고.”
마침내 문고리를 잡은 순간,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빠져나온 내 발걸음은 절박함과 희열로 가득 찼다.
지금 뿐이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유일한 기회는.
달빛조차 먹구름 뒤로 몸을 숨긴 채 도망치기 완벽한 밤이었다. 나는 황궁의 거대한 대리석 기둥 뒤로 몸을 바짝 붙인 채 숨을 죽였다.
철컥, 철컥.
규칙적인 금속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며 복도를 울렸다. 철갑을 두른 기사들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나는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을 억눌러야만 했다.
당장 냅다 달려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목 끝까지 치밀었으나, 안타깝게도 내게는 저들에게 맞설 힘도, 운도 없었다. 소리 없이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것만이 내 유일한 도피 전략이었다.
“하아, 내 팔자야.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겨우 전언 하나 전하겠다고 발을 들인 황궁이었다.
분명 반나절만이면 끝날 일이었는데··· 어쩌다 한 달씩이나 이곳에 발이 묶여 나는 이 고생을 하고 있었던 건가 싶었다.
***
사건의 발단은 정확히 한 달 전이었다.
우리 가문 최고의 골칫덩어리이자 동시에 제국 최고 정보 길드의 수장인 둘째 오빠 카시안이 내민 구겨진 쪽지 한 장이, 내 평온했던 일상을 지옥으로 처박는 초대장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견고한 장벽에 불순물이 섞였다.]
"이게 뭔데?"
"황권을 수호하는 근위대, 혹은 폐하의 최측근 중에 쥐새끼가 숨어들었다는 뜻이야. 반란을 도모하는 불순물 말이지."
"... 그래서? 그걸 왜 나한테 주는데?"
오빠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세상에서 가장 비열하고도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하는 내 동생, 엘리노아야. 네가 주기적으로 내 방에 몰래 숨어들어 변장 아티팩트를 가져가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니?"
나는 순식간에 얼굴이 백지장이 되었다.
분명 쥐도 새도 모르게 가져왔다고 생각했는데, 저 인간은 대체 정체가 뭐지?
창고에 처박힌 아티팩트가 발에 치일 정도로 넘쳐나는데, 그중 딱 한 두 개 정도 없어졌을 뿐이거늘,
그걸 칼 같이 알아채다니··· 누가 보면 아티팩트에 이름표 라도 붙여 놓은 줄 알겠다.
평소엔 입만 열면 ‘오빠가 우리 막둥이 사랑하는 거 알지?’를 연발하던 둘째 오라버니가 지금은 이리 내 약점을 꽉 쥐고는 세상 흐뭇하고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서 기사 단장님한테 이 말만 전해주면 돼. 참 쉽지?”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미션은 전. 혀. 쉽지 않았다.
홀로 궁에 잠입해서 기사 단장씩이나 되는 사람을 만나 시답지 않은 말까지 전하라니,
저 인간은 내가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본인의 피붙이라는 의식은 있기나 한 건가?
하아,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호랑이 코털을 뽑아오라는 소리잖아.
하지만… 지은 죄가 많은 몸이다 보니, 결국 한마디 반항도 해보지 못한 채 다시 한번 나는 아티팩트의 힘을 빌려 전혀 다른 모습의 시종으로 변장했다.
거울을 보니 웬 엑스트라 1처럼 생긴 소년이 서 있었다.
평범한 갈색 머리에 평범한 에메랄드빛 눈동자. 그래, 이래야 도망도 치고 잠입도 하지.
내 진짜 얼굴은 그 자체로 너무 로판의 여주인공 느낌이거든.
내 입 밖으로 말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미모는 거의 국보급 수준이다.
찬란한 백금발과 서늘한 청색 눈동자의 조합은 지나가던 개도 멈춰 서서 감상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내 외모가 곧 서사이자 개연성인데 이런 얼굴로 숨어 다니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기에, 나는 그렇게 순박한 소년의 모습으로 황궁에 발을 들였다.
일단 계획은 완벽했다.
기사 단장실을 청소하는 척하며, 혼잣말처럼 암호를 중얼거리고 빠져나오면 끝일 터였다.
듣든가 말든가,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시킨 일만 다 하고 가면 되는 거니깐.
그런데, 세상일이 언제나 계획 대로만 흘러가던가.
"견고한 장벽에··· 불순물이 섞였다고···."
먼지떨이를 휘두르며 마지막 대사를 읊조린 순간,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벼락처럼 드리워졌다.
"그 앙증맞은 입에서 기사단장도 모르는 기밀이 술술 나오는 군?"
낮게 깔린 목소리에 심장이 발끝까지 추락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곳에는, 집무실 깊숙한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와인 잔을 돌리고 있는 카엘루스 황제가 있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나를 집어삼킬 듯 형형하게 빛났다.
"히, 히익! 폐하를 뵙···!"
놀라 엎드리려던 내 멱살을 그가 사뿐히 낚아챘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숨이 막힐 듯 완벽한 외모에 압도당하려던 찰나, 바람을 타고 밀려온 것은 머릿속을 환하게 깨우는 싱그러운 숲의 향기였다.
그 기분 좋은 상쾌함에 긴장으로 뻣뻣해졌던 어깨가 저도 모르게 느슨해졌다.
"쥐새끼 치고 눈이 지나치게 고결하군. 그 에메랄드빛 뒤에 뭘 숨기고 있지?"
그의 긴 손가락이 내 목덜미의 아티팩트 목걸이를 스치듯 지나갔다. 소름이 전신을 훑었다.
미친 황제의 직감은 이미 내 조잡한 변장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옆에 두고 확인해 봐야겠어. 네가 조금 전 말한 그 불순물인지, 아니면 단순한 심부름꾼인지 말이다."
소문으로만 듣던 미친 황제가 하필 그날, 그 시각에 기사 단장실에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을 줄이야!
손목 안쪽의 문양은 아주 작은 눈물방울 하나였다.그리고 그 주변을 감싼 별무리가 희미한 백금빛을 내며 내 피부 아래에서 숨 쉬듯 깜빡이고 있었다.나는 한동안 그 문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분명 처음 보는 문양인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것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만 같았다고 하면 내가 미친 건가.“아직도 아프지 않나.”카엘루스가 내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낮게 물었다.당장이라도 내가 어딘가로 사라질까 봐 확인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프진 않아요.”“그 말은 다른 이상은 있다는 뜻이군.”“폐하께서는 왜 항상 그렇게 정확하게 들으세요?”“네가 항상 그렇게 허술하게 숨기기 때문이다.”“지금처럼 말이지.”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아프진 않았지만 손목 안쪽에서 아주 가는 실 하나가 심장까지 이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실 끝에서 누군가 아주 조용히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열어 달라는
정원 어딘가에서 움직이는 검은 기운인 자하크의 잔향을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루세티아의 파편은 카엘루스를 보았다.정확히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루세티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선명하게 떨렸다.— 검은,카엘루스의 표정이 굳었다.나도 숨을 멈췄다.검은.그 뒤에 이어질 말은 무엇일까.검은 기록?검은 조각?검은 운명?하지만 루세티아의 파편은 끝내 말을 완성하지 못했다.빛이 거칠게 흔들렸다.대현자 K 숙부님이 낮게 말했다.“아직 아니야.”“뭐가요?”“저 기록은 아직 열리면 안 된다.”카시안 오빠가 이를 갈았다.
그렇게 우리는 황후궁을 나섰다.밤의 황궁은 낮과 전혀 달랐다.화려한 대리석 복도와 금빛 기둥은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고, 곳곳에 켜진 마력등은 흔들리는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황실 기사들은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일제히 고개를 숙였지만, 누구도 감히 말을 걸지 못했다.멀리 북쪽 정원으로 향할수록 공기가 달라지며,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희미한 백합 향이 섞여 들었다. 다만, 그 향이 곧 쇠 비린내 같은 마력의 잔향과 뒤엉켰다.나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느껴지나.”카엘루스가 낮게 물었다.“네.”“무리하지 마라.”“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네 표정이 이미 무리하고 있다.”“폐하께서는 제 표정을 너무 잘 보시는 것 같습니다.”“네가 너무 많이 드러낸다.”“제가요?”“귀부터.”“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시면 안 될까요?”그가 아주 희미하게
“루세티아…”대현자 K 숙부님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나는 그 이름이 황후궁 응접실 안에 떨어지는 순간, 숨을 멈췄다.빛의 여신 루세티아.루체른의 피에 기억의 권능을 남겼다고 전해지는 존재.어릴 적 신전에서 수없이 들었던 이름인데, 이상하게 지금은 너무 낯설었다.아니, 낯설다기보다는 너무 가까웠다.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내 피 안쪽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이름이, 이제야 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잊지 말아 줘.창밖, 황궁 북쪽 정원 위로 떠오른 백금빛 실루엣이 희미하게 흔들렸다.긴 머리카락에 빛으로 짠 듯한 드레스를 입은 채 눈물처럼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를 가진 그녀가 너무나도 흐릿해서 당장이라도 밤바람에 흩어질 것만 같았다.그런데도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아가씨…”릴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뀨는 내 품 안에서 조용히
“공녀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내 방 문 앞에 서 있던 기사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번듯한 제복을 입은 황실 기사단의 모습이었으나, 내 눈은 속일 수 없었다.기사단장 엘릭이 달고 있었던 비슷한 모양의 검은 그림자가 슬금슬금 촉수처럼 뻗어 나오기 시작하던지 점점 내 방 안쪽 내 침대를 향해 탐욕스럽게 일렁이고 있었으니 말이다.‘아, 진짜 오늘 일진 왜 이래?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냐고!’루세티아 여신님께 좀 더 열심히 기도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뒷걸음질 치는 대신 턱을
“오라버니, 일단 진정해요. 저도 지금 엄청 황당하긴 한데, 어찌 되었든 황제는 제 정체를 알고도 돌려보냈잖아요. 그리고… 사실 카시안 오빠 문제보다 더 급한 건이 있어요.”나는 아까 응접실에서 보았던 검은 실타래가 정화되었음에도 끈질기게 다시 살아나던 모습을 떠올렸다.“황궁이 아무래도 썩어가고 있는 것 같아. 작은 오빠가 말한 그 ‘불순물’이… 사실은 내 빛으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두 오빠에게 오늘 황궁 응접실에서 목격한 그 기괴한 검은 거미줄에 대해 털어놓아야
“카시안 루체른, 당장 나와라!”그가 집무실 문을 향해 거칠게 손을 뻗자 육중한 문은 단숨에 얼음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음, 황실 청구서 걱정을 할 게 아니라 우리 집 수리비 걱정을 해야 할지도…’나는 속으로 수리비를 계산하며 조용히 큰오빠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히익! 형님, 형님! 진정하세요, 제발! 이건 다 거시적 관점에서 가문의 미래를 위한……!”집무실 안에서는 카시안 오빠가 소파 뒤에 처박힌 채 덜덜 떨고 있었다.그는 이미 칼라일이 돌아올 것을 예상했는지 온갖 방어 아티팩
큰오빠 칼라일의 등장은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였다.문을 통째로 날려버린 그 무식한 파괴력조차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성스러운 구원의 빛처럼 느껴졌다.칼라일은 제국의 태양이라는 카엘루스를 향해 고개만 까딱이며 최소한의 예의만 보인 뒤 빙하보다 차가운 시선으로 황제를 꿰뚫어 볼 뿐이었다.“황궁의 보안이 이토록 허술해서야. 감히 출처를 모르는 검은 벌레들 따위가 내 동생의 옷자락을 넘보게 한단 말인가.”칼라일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옆에 서 있던 기사단장 엘릭마저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 살기의 과녁인 카엘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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