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제92화. 첫 춤은 더 이상 춤이 아니었다 (3)뀨가 내 어깨 위에서 작게 울었다.“뀨우.”나는 뀨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쓰다듬었다.“그래. 나도 알아.”뀨는 내 손목의 문양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앞발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문양 주변의 별무리가 희미하게 반짝였다.벨리안의 눈이 커졌다.“잠깐.”“왜?”“저 작은 생물, 아니, 정령입니까? 마수입니까? 대체 정체가 뭡니까?”뀨가 벨리안을 노려봤다.“뀨.”“아니 보십시오!! 방금 문양이 반응했습니다!”대현자 K 숙부님도 눈을 가늘게 떴다.“그렇군.”나는 뀨를 품에 안았다.“뀨한테 이상한 짓 하시면 안 돼요.”“아무 짓도 안 한다.”숙부님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뀨를 유심히 보았다.“다만 저 아이도 열쇠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을 듯하군.”“뀨가요?”뀨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가슴을 폈다.“뀨.”카시안 오빠가 중얼거렸다.“쟤도 이제 평범한 털뭉치가 아니었군.”“원래 평범한 털뭉치 아니었어.”“그래. 우리 집안에 평범한 게 있겠냐.”그 말에 나도 모르게 조금 웃음이 나왔다.정말 이상했다.조금 전까지 신의 파편이 사라지고, 검은 가시가 솟고, 내 손목에 문양이 새겨졌는데, 지금 이 순간 여기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아주 잠깐은 숨을 쉴 수 있었다.대현자 K 숙부님이 지팡이를 짚었다.“일단 황후궁으로 돌아가자. 이 정원은 봉쇄해야 한다.”카엘루스가 바로 명령했다.“엘릭.”“예, 폐하.”“북쪽 정원은 즉시 폐쇄한다. 공식 사유는 마력 오염으로 하지. 황실 마법사단과 기사단 외에는 접근 금지다.”“받들겠습니다.”“벨리안.”“예.”“정원에 남은 잔향을 빠르게 분석해라. 자하크가 어느 틈으로 손을 뻗었는지 찾아.”벨리안이 고개를 숙였다.“명령 받들겠습니다.”카시안 오빠도 짧게 손짓했다.“이클립스는 귀족가 움직임을 감시해. 특히 데뷔탕트 초대장을 받은 집안들. 최근 수상한 접촉이 있는 자들을 전부 추려.”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누가 자하크의 입이 되어 들어올지 모른다.”그 말을
Última actualización: 2026-07-28
Chapter: 제91화. 첫 춤은 더 이상 춤이 아니었다 (2)내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리고 숙부님은 고개를 끄덕였다.“기억의 기록은 상징을 따라 움직인다. 데뷔탕트란 단순한 행사가 아니다. 한 사람의 이름이 세상에 처음 공표되는 의식이지. 루세티아가 남긴 기록은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거다.”“그럼 제가 사람들 앞에 서는 순간,”“첫 번째 문이 열릴 가능성이 크다.”벨리안이 조용히 덧붙였다.“그리고 자하크도 그걸 알고 있을 겁니다.”정원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조금 전까지 흩어졌던 백금빛 조각들은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수의 물은 아직도 검게 일렁이고 있었다.자하크의 잔향과 루세티아의 파편을 찢어버린 그 어둠에 짓눌린 나는 손목을 움켜쥐었다.그때 카엘루스가 낮게 말했다.“데뷔탕트는 예정대로 진행한다.”“폐하!”카시안 오빠가 바로 반발했다.“지금 제정신이십니까?”“그래.”“막내를 미끼로 쓰겠다는 말로 들립니다만.”그 말에 황실 기사들의 얼굴이 굳었다. 엘릭 경이 아주 작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하지만 카엘루스는 흔들리지 않았다.“미끼가 아니다.”“그럼 뭡니까?”“전장이다.”카시안 오빠의 눈빛이 싸늘해졌다.“그게 더 나쁩니다.”카엘루스는 천천히 나를 보았다.“자하크는 어차피 움직일 거다. 우리가 도망치면, 그는 우리가 준비하지 못한 순간을 고를 것이다.”“…”“하지만 데뷔탕트라면 다르지. 장소와 시간, 참석자 모두 우리가 정할 수 있어.”그의 붉은 눈동자가 깊어졌다.“그날 밤을 함정으로 만든다.”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숨이 트였다.무서운 건 똑같았다.하지만 조금 전까지는 내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는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아주 희미하게나마 발밑에 길이 생긴 것 같았다.카시안 오빠는 나를 보았다.“막내야.”“응.”“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나는 손목의 문양을 내려다보았다.아직도 루세티아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울리는 것만 같았다.— 첫 번째 문이 열린다.사실 지금 당장 방으로 돌
Última actualización: 2026-07-28
Chapter: 제90화. 첫 춤은 더 이상 춤이 아니었다 (1)손목 안쪽의 문양은 아주 작은 눈물방울 하나였다.그리고 그 주변을 감싼 별무리가 희미한 백금빛을 내며 내 피부 아래에서 숨 쉬듯 깜빡이고 있었다.나는 한동안 그 문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분명 처음 보는 문양인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것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만 같았다고 하면 내가 미친 건가.“아직도 아프지 않나.”카엘루스가 내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낮게 물었다.당장이라도 내가 어딘가로 사라질까 봐 확인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프진 않아요.”“그 말은 다른 이상은 있다는 뜻이군.”“폐하께서는 왜 항상 그렇게 정확하게 들으세요?”“네가 항상 그렇게 허술하게 숨기기 때문이다.”“지금처럼 말이지.”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아프진 않았지만 손목 안쪽에서 아주 가는 실 하나가 심장까지 이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실 끝에서 누군가 아주 조용히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열어 달라는
Última actualización: 2026-07-26
Chapter: 제89화. 첫 번째 문 (3)정원 어딘가에서 움직이는 검은 기운인 자하크의 잔향을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루세티아의 파편은 카엘루스를 보았다.정확히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루세티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선명하게 떨렸다.— 검은,카엘루스의 표정이 굳었다.나도 숨을 멈췄다.검은.그 뒤에 이어질 말은 무엇일까.검은 기록?검은 조각?검은 운명?하지만 루세티아의 파편은 끝내 말을 완성하지 못했다.빛이 거칠게 흔들렸다.대현자 K 숙부님이 낮게 말했다.“아직 아니야.”“뭐가요?”“저 기록은 아직 열리면 안 된다.”카시안 오빠가 이를 갈았다.
Última actualización: 2026-07-25
Chapter: 제88화. 첫 번째 문 (2)그렇게 우리는 황후궁을 나섰다.밤의 황궁은 낮과 전혀 달랐다.화려한 대리석 복도와 금빛 기둥은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고, 곳곳에 켜진 마력등은 흔들리는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황실 기사들은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일제히 고개를 숙였지만, 누구도 감히 말을 걸지 못했다.멀리 북쪽 정원으로 향할수록 공기가 달라지며,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희미한 백합 향이 섞여 들었다. 다만, 그 향이 곧 쇠 비린내 같은 마력의 잔향과 뒤엉켰다.나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느껴지나.”카엘루스가 낮게 물었다.“네.”“무리하지 마라.”“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네 표정이 이미 무리하고 있다.”“폐하께서는 제 표정을 너무 잘 보시는 것 같습니다.”“네가 너무 많이 드러낸다.”“제가요?”“귀부터.”“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시면 안 될까요?”그가 아주 희미하게
Última actualización: 2026-07-24
Chapter: 제87화. 첫 번째 문 (1)“루세티아…”대현자 K 숙부님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나는 그 이름이 황후궁 응접실 안에 떨어지는 순간, 숨을 멈췄다.빛의 여신 루세티아.루체른의 피에 기억의 권능을 남겼다고 전해지는 존재.어릴 적 신전에서 수없이 들었던 이름인데, 이상하게 지금은 너무 낯설었다.아니, 낯설다기보다는 너무 가까웠다.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내 피 안쪽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이름이, 이제야 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잊지 말아 줘.창밖, 황궁 북쪽 정원 위로 떠오른 백금빛 실루엣이 희미하게 흔들렸다.긴 머리카락에 빛으로 짠 듯한 드레스를 입은 채 눈물처럼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를 가진 그녀가 너무나도 흐릿해서 당장이라도 밤바람에 흩어질 것만 같았다.그런데도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아가씨…”릴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뀨는 내 품 안에서 조용히
Última actualización: 2026-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