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유서 깊은 플로렌스 백작가에 드리운 갑작스러운 비극. 하나뿐인 아버지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던 날, 라리엘의 세계는 무너졌다. 가문의 몰락과 막대한 채무 앞에 나타난 구원자는 공교롭게도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자, ‘아르덴 폰 알브릭’ 공작이었다. 하지만 잔인한 조롱을 내뱉으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신중하고 따뜻하게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그의 손길. 가시 돋친 독설 뒤에 숨겨진 지독한 고독과,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가는 애틋한 눈동자. 증오해야 마땅한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이 기묘한 보호 본능은 연기일까, 아니면 속죄일까.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공작이 철저히 숨기려는 진실. 차디찬 겨울의 끝, 두 사람이 마주할 진실은 구원일까, 아니면 또 다른 파멸일까.
查看更多성당의 천장에 매달린 수십 개의 샹들리에는 단순한 조명 기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의 폭포였고, 그 아래 서 있는 라리엘에게는 날카로운 바늘의 군집이었다. 화려하게 세공된 수백 개의 수정 조각들이 빛을 굴절시킬 때마다 성당 내부의 공기는 비현실적으로 일렁였다. 거울처럼 매끄럽게 닦인 대리석 바닥 위로 부딪혀 산산이 조각나는 빛줄기들은 라리엘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제단으로 향하는 길은 핏빛 이었다. 수천 송이의 장미 꽃잎들이 양탄자처럼 두껍게 깔려 막 꺾어낸 꽃 특유의 짙고 달큰한 향기가 진동했다. 사람들은 그 향기를 ‘사랑의 향기’라 칭송했지만, 라리엘에게 그것은 갓 흘린 피의 비릿함과 다를 바 없었다. 바스락. 꽃잎을 밟을 때마다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라리엘의 자존감이, 그녀의 미래가, 그리고 플로렌스 가문의 명예가 되돌릴 수 없이 짓밟히는 파열음처럼 들렸다. 라리엘 플로렌스. 아니, 이제는 라리엘 폰 알브릭. 새하얀 실크 위에 은사로 정교한 문양이 수놓아진 웨딩드레스는 소매 끝마다 달린 진주들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광채를 내뿜었다. 그러나 라리엘에게 이 옷은 옷이 아니라 족쇄였다. 베일 아래 가려진 그녀의 얼굴은 대리석 조각처럼 고요했다. 설렘도, 기대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거세된 눈이었다. 오직 이 치욕스러운 시간을 견뎌내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만이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다.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가 멈추고, 성당을 가득 메웠던 소음이 일순간 잦아들었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주례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랑 아르덴 폰 알브릭 공작은, 신부 라리엘 플로렌스 영애를 아내로 맞아 평생을 사랑하고 아끼겠습니까?” 그 질문이 던져지는 순간, 성당 안의 공기가 급격히 냉각되는 기분이었다. 하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신랑에게로 쏠렸다. 라리엘은 숨을 죽인 채 곁에 선 남자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아르덴 폰 알브릭. 태양빛을 녹여 만든 듯 찬란한 금발은 단 한 가닥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돈되어 있었다. 그가 걸친 검은색 예복은 그의 창백한 피부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그를 더욱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보이게 했다. 무엇보다 라리엘을 전율케 한 것은 그의 푸른 눈동자였다. 그것은 겨울의 한복판에서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그 깊은 수면 아래 어떤 괴물이 잠들어 있는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 짧고 낮은 대답이었다. 거기엔 한 방울의 애정도, 일말의 떨림도 없었다. 사랑의 맹세라기보다 거액의 채무 관계를 청산하는 계약서 위에 인장을 찍는 사무적인 음성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성당의 높은 천장에 부딪혀 되돌아올 때마다 라리엘은 몸을 떨었다. 무의식중에 주먹을 꽉 쥐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손톱이 연약한 손바닥 살을 파고들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 감각에 매달렸다. 고통만이 유일하게 그녀가 살아있음을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보다 더한 고통을 이미 겪어본 그녀에게 신체적인 자극은 사소한 소음에 불과했다. 3개월 전, 가문의 파산 직전 그녀를 찾아와 이 미친 제안을 건넸던 남자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라리엘, 네 아버지가 남긴 도박 같은 빚은 이제 네 동생들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있지. 방법은 하나뿐이야. 내 성으로 들어와. 알브릭의 성을 쓰게 해주는 대신, 너는 평생 나의 그림자로 살면 돼.’ 먼저 거래를 제안한 것은 아르덴이었다. 그는 도망갈 길을 모두 차단하고, 굶주린 늑대처럼 그녀가 제 발로 덫에 걸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의문의 마차 사고로 죽은 아버지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녀는 그 덫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르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때는, 정말 아주 먼 옛날 같은 한때는 이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게 느껴졌던 시절이 있었다. 공작저 정원의 따스한 햇살 아래서, 어린 아르덴은 그녀와 함께 책을 읽어주던 소년이었다. 몰래 부엌에서 과자를 훔쳐 먹다 들켜 함께 손을 잡고 도망치던, 웃을 때면 푸른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지던 소년. 하지만 지금 그녀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그 소년의 껍데기를 쓴 악마였다. 아버지를 의문의 죽음으로 몰아넣고, 플로렌스 가문이 몰락하자 결국 막대한 빚을 빌미로 그녀의 인생을 통째로 집어삼킨 냉혹한 포식자였다. 하객석에서는 귀족들의 은밀한 속삭임이 끊이지 않았다. 부채 뒤에 숨겨진 입술들은 독을 머금은 화살이 되어 날아왔다. “보라고, 제국 최고의 부자가 몰락한 가문의 딸을 거둬주는 꼴을.” “자선사업가라도 된 모양이지? 아니면 소문대로 그 인장이 찍힌 단추 때문에 입막음이라도 하려는 건가?” “빚 대신 딸을 넘긴 거겠지. 백작이 죽으면서 남긴 유일한 자산이 저 얼굴뿐이었으니.” 그 말들은 차가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정확히 라리엘의 심장에 박혀 흉터를 남겼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버텼다. 주례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신부 라리엘 플로렌스 영애는, 신랑을 남편으로 맞아…” 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라리엘의 눈앞에 6개월 전의 참혹한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차갑게 식어 돌아온 아버지의 시신. 마차 사고라는 공허한 수사 결과. 그리고 시신의 손안에 꽉 쥐여 있던 알브릭 공작가의 인장이 선명히 새겨진 단추 하나. 사고 전날 밤, 아버지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 보였다. ‘아르덴을 만나고 오마. 그 아이는 내 오랜 친구의 아들이자,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니까. 걱정 마라, 라리엘.’ 그 ‘믿음’의 결과가 이것이었다. 가문의 파멸과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살해 용의자와의 결혼. 라리엘은 떨리는 숨을 들이켜며 대답했다. “네, 맹세합니다.” 그것은 신에게 바치는 맹세가 아니었다. 반드시 살아남아 진실을 파헤치겠다는, 그리고 아르덴 폰 알브릭의 목에 칼을 꽂겠다는 피의 서약이었다.의자에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안셀리온이 무거운 걸음으로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스테인드글라스 너머의 시커먼 겨울 어둠을 응시하며, 그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플로렌스 백작 영애, 라리엘은 내가 어릴 적부터 보아 와서 잘 알지. 그녀는 심성이 순진하고 영악하지 못해서,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하거나 꿍꿍이가 있으면 곧잘 티가 나거든. 분명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네. 의심보다는 두려움이 느껴지는 눈빛이었지.”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사제를 돌아보며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지금은 조용히 감시만 하게나. 내일 내가 직접 부인을 슬쩍 떠보겠네.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조용히 기도만 하고 곧 수도로 떠날 걸세.”“알겠습니다. 원장님의 뜻대로 대기하겠습니다.”사제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올린 뒤, 어둠이 짙게 깔린 문 너머로 소리 없이 물러났다.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도 안셀리온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그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밖, 라리엘이 머물고 있는 저 멀리 어두운 별채 방향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이튿날 아침, 초겨울의 창백한 햇살이 수도원의 오래된 회랑 기둥 사이로 길게 조각나 들이쳤다.얼음장 같은 공기 속에서 오랜 세월이 묻어난 퀴퀴한 먼지 냄새와, 성당 특유의 성수 향취가 기묘하게 섞여 사방으로 희미하게 떠돌았다.라리엘은 어제의 긴장을 간신히 지워낸 채, 안셀리온 수도원장과 나란히 서서 푸른 이끼가 두껍게 낀 돌길 화랑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그들의 서너 걸음 뒤편으로 은빛 갑주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알브릭 공작가의 기사 둘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라리엘을 호위하며 뒤따랐다.갑주가 맞부딪히며 내는 규칙적인 금속음이 수도원의 고요함 속에서 유독 또렷하게 울려 퍼
트리샤의 말은 날카로운 가시처럼 거칠었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솔직했다.라리엘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고백에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트리샤가 내뿜는 독기 가득한 기운이 오히려 그녀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를 대변하는 것 가슴이 아렸다.라리엘이 이내 천천히 숨을 고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트리샤 씨는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더 마음이 깊고 사려 깊은 분이네요. 내 걱정은 전혀 하지 말아요. 사실 난… 트리샤 씨가 내 곁에 있는 거, 별로 안 불편하거든요. 정말이에요.”그 말에 트리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좁아진 미간 사이로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났다.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라리엘을 향해 한 걸음 성큼 다가서며 다그치듯 되물었다.“어째서죠? 내 얼굴을 보면 당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수의 딸이라는 저주스러운 생각이 조금도 안 들어요?”라리엘이 입을 떼려 하자, 트리샤는 겁이라도 난 듯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가로막았다.“아니, 됐어요. 묻지 않을래. 부인은 무슨 하늘이 내린 성인군자인지 몰라도, 난 엄청나게 속이 뒤틀리고.. 또 불편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말은… ”라리엘은 매사 당당하던 트리샤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모습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녀는 맑고 투명한 눈으로 트리샤를 응시하며 다정하게 말을 받아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그러니까… 나도 최대한 트리샤 씨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으라고요?”“아아니, 그런게 아니라…!”트리샤는 날카롭게 반박하려다 라리엘의 순수한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치자 그만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렸다. 침묵이 흐르는 사이, 라리엘이 한 걸음 더 다가와 망설임 없이 작고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
마차의 발판이 내려오기도 전, 검은 사제복 위에 두툼하고 고급스러운 털 망토를 덧두른 노인이 황급히 걸어 나왔다.플로렌스 수도원의 최고 권력자이자, 어린 시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수도원장 안셀리온이었다.오랜 세월로 인해 깡마른 체구에 깊게 팬 이마의 주름, 그리고 성근 백발이 그의 노쇠한 나이를 짐작케 했으나, 가끔씩 코끝에 걸린 돋보기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매서운 눈빛만큼은 세속의 그 어떤 노련한 정치꾼 못지않게 대단히 영민하고 날카로워 보였다.“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플로렌스의 보석, 라리엘 영애… 아니, 이제는 알브릭 공작 부인이시군요.”안셀리온이 주름진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라리엘을 향해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그의 왼쪽 눈가 근육이 아주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위 귀족의 방문에, 내심 감추기 힘든 거대한 당혹감과 초조함이 은연중에 묻어나는 듯했다.“아무런 기별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원장님. 날이 차가워지니 이곳 고향 집과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부쩍 나서요. 며칠간 이곳에 머물며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싶어, 염치 불구하고 무작정 찾아왔습니다.”라리엘이 아버지를 언급하며 슬픈 미소를 짓자, 그제야 안셀리온은 경계심을 조금 허문 듯 안쓰러움이 가득한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세월의 풍파가 묻어난 그의 노안에는 종교인 특유의 자애로움이 가득 넘쳐 흘렀다.“오, 가련한 부인… 백작님의 신심이 워낙 깊고 고결하셨으니,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신다면 분명 마음속에 깊은 평안을 얻으실 겁니다.”그는 따뜻한 위로를 건네면서도, 슬쩍 눈길을 돌려 라리엘의 뒤에 선 다섯 명의 호위 기사와 화려한 공작가의 마차를 천천히 훑어내렸다.그의
클로디아의 눈가가 가느다랗게 휘어지며 걱정 어린 빛을 띠었다.그녀는 이내 가식적인 다정함을 담아 테이블 너머로 라리엘의 하얗고 부드러운 손을 따뜻하게 맞잡았다.“부디 오가는 길에 눈길 조심하시고, 몸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부인.”맞잡은 라리엘의 손은 클로디아의 차가운 야욕과 달리 생각보다 너무도 따뜻했다.클로디아는 그 부드러운 온기를 느끼며 잠시 더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놓았다.응접실 안에는 다시 한동안 귀족 영애들의 전형적이고 일상적인 수다가 가볍게 오갔다.변덕스러운 올해 수도의 겨울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최근 황실 사교계에서 화제가 된 백작가의 스캔들, 그리고 요즘 영지에서 유행하는 드레스의 화려한 자수 이야기까지.겉으로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오후의 티타임 풍경이었다.그러나 클로디아의 머릿속은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라리엘이 저택을 비운 시간 동안 홀로 남은 공작의 마음을 흔들고, 공작 부인의 입지에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 놓을 추악한 시나리오들이 클로디아의 머릿속에서 잔인하고 어지럽게 뒤섞이기 시작했다.찻잔이 바닥을 보일 즈음, 클로디아는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녀는 풍성한 주름이 잡힌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소리 나지 않게 털어내며 정돈하며, 라리엘을 향해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련한 척 연기하는 데에는 도가 튼 그녀였다.“오늘은 아쉽지만 이만 가봐야겠어요. 당장 며칠 뒤면 먼 고향으로 출발하셔야 해서 준비할 일들로 한창 바쁘실 텐데, 제 방문이 공연히 방해가 될까 봐 마음이 쓰이네요.”“벌써 가려고요? 오랜만의 만남인데 차만 한 잔 나누고 보내게 되어 내가 더 미안하네요.”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라리엘의 무릎 위에서 책을 거두어 제자리에 꽂았다. 그리고는 부서질 세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잠결에 으응, 하며 그의 품을 파고드는 라리엘의 온기에 아르덴은 숨을 멈췄다. 그녀에게선 여전히 예전 그 온실의 꽃향기가 났다. 그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며, 차가운 서고를 지나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침실에 도착해 침대에 눕히는 순간까지도 아르덴은 팔에 힘을 풀지 못했다. 잠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는 이
숨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라리엘은 옷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눈물에 젖은 편지지를 구겨버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종이를 말렸다. 이 얼룩조차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하듯. 지금 여기서 주저앉으면 정말로 아르덴의 말대로 '입 다물고 인형처럼' 살게 될 뿐이었다. '울고 있을 시간조차 아까워. 내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은 정말 갈 곳이 없어져.' 라리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붉어진 눈가를 화장으로 차분히 가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처량하게 우는 소녀가 없었다.
연회장의 불빛이 하나둘 꺼진 뒤, 라리엘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화려하지만 갑옷처럼 무거웠던 자수정 드레스를 벗어던졌다. 꽉 조여졌던 코르셋이 풀리자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여전했다. 시녀들은 늘 그렇듯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편히 쉬십시오, 부인.”이라는 형식적인 인사만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침실은 완전히 라리엘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 촛불 하나만이 위태롭게 타오르는 방 안에서 라리엘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동안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손은 무릎
라리엘은 짧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소임이라니? 오늘 내 소임은 너의 살아있는 장식품이 되는 것 아니었어? 충분히 완수했다고 생각하는데.” 날 선 대답에 아르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그는 괜히 먼 정원을 바라보며 짐짓 무심한 투로 덧붙였다. “…안색이 좋지 않군. 연회장의 향기가 너무 독했나?” 그것은 아르덴 나름의 절박한 안부였다. 괜찮으냐고, 아까 그들의 말에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진심이 서툰 질문 속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가시 돋친 말들에 온마음이 할퀴어진 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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