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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밤이 삼킨 경계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18 11:16:35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

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

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

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

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기 호위무사.”

도진은 고개를 돌렸다.

“예, 마마.”

“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

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

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온몸이 아주 작게 굳어졌다가 다시 풀리는 느낌.

도진은 시선을 바닥에 내리깔고 말했다.

“…어울림은 사람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잠시 멈춘 뒤, 그가 덧붙였다.

“인연이 판단하는 것이지요.”

이수의 심장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 말은 너무 단순했고, 너무 담담했으나

마치 오래전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문장 같은 기묘한 익숙함이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도진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카메라로 찍힌 것처럼 두 사람의 그림자가 햇빛 아래 길게 나란히 이어졌다.

그 순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아주 작은 ‘기울어짐’이 시작되었다.

현에게서, 이수에게서, 그리고 무엇보다 도진에게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비극의 첫 균열이 바람 속에서 조용히 생겨나고 있었다.

햇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은 잔잔한 붉음을 남기고 기와 너머로 천천히 사라졌고, 궁 전체가 서늘한 회색빛으로 덮였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기 전의 그 짧은 틈 아침과 밤이 서로의 숨을 들이마시는 시간.

바람은 낮보다 얇아졌고, 소리는 밤을 향해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이수의 처소는 넓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각 공간마다 정갈하게 놓인 장식들이 기품을 품고 있었다.

촛불이 방안을 비추기 시작하자 섬세한 그림자들이 벽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이수는 혼자였다.

궁인들은 모두 물러나고 오직 바람과 촛불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창호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상 위에 놓인 찻잔을 천천히 집었다.

잔은 따뜻했지만, 그 온기가 손끝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이곳이… 내 새로운 삶의 자리인가.’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의 장면들이 숨 고를 틈도 없이 떠올랐다.

궁에 들어섰던 순간, 세자의 담담하면서도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시선, 궁인의 조심스러운 손길,

그리고, 도진.

그의 뒷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기름 묻은 칼집, 단정한 어깨,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걸음.

그 모든 것이 익숙한 듯 낯설고,

낯선 듯 따뜻한 느낌을 남겼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마음 한쪽이 움직이는 걸까.

이수는 스스로를 꾸짖듯 숨을 조금 세게 내쉬었다.

혼례를 앞둔 몸으로 다른 남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 일이라는 걸,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감정은 허락을 받지 않고 찾아오는 것이었다.

이수는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처소의 한쪽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창호 바깥에는 밤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이 기와를 훑고, 나무 사이를 지나며 작은 들숨 같은 기척을 남기고 있었다.

바람이 가볍게 불어 창호를 스쳤다.

그 순간, 그녀의 등줄기에 아주 미세한 떨림이 흘렀다.

오늘 느낀 모든 낯섦과 떨림은 두 사람 사이에서만 머무를 것이라…

현의 말이 떠올랐다.

세자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가오려 했지만,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많은 감정을 지우고 있었다.

이수는 그의 마음을 모두 헤아릴 수 없었지만

자기 자리에서 그를 버티려는 외로움이 바람결처럼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런 감정조차 도진의 눈을  마주쳤던 순간의 떨림만큼은 아니었다.

그 순간, 문 밖에서 작은 기척이 들렸다.

발소리는 가볍고 짧았다.

문을 열려는 사람의 숨을 죽인 움직임.

궁인들이라면 단정한 규칙성이 있었을 터인데

문 앞의 움직임은 어딘가 머뭇거리는 결이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마마.”

낮고 깊은 음성. 어둠 속에서도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도진이 문가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촛불과 바람 사이에서 

반쯤 그림자로 가려져 있었고, 눈빛만 또렷하게 밝았다.

이수의 가슴이 조용히 뛰었다.

“어찌하여 이곳에 오셨사옵니까…?”

그녀는 뜻하지 않게 목소리가 가늘어지는 걸 느꼈다.

도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궁인들이 마마의 처소로 향하기 전까지 기다리라는 저하의 분부가 있었사옵니다.”

그의 표정에는 전달해야 할 명령을 지키려는 무사다운 엄정함과,

말하지 못한 무언가가 얇게 겹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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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94. 밤이 깊을수록 드러나는 그림자의 결

    행렬이 지나가고, 궁의 그림자가 길어지고,저녁 바람이 시들어가는 시간이었지만그의 가슴속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석윤이 뒤에서 다가왔다.“경… 저하께서 환궁하신 뒤의 분위기가심상치 않사옵니다.”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대답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심상치 않은 이유는 궁의 정세 때문만이 아니었다.석윤은 잠시 머뭇거렸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빈마마의 처소로상궁들이 여러 차례 들락거렸다 하옵니다.대비전에서도 계속 사람을 붙였다 하오니…”도진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그러나 그는 그 굳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검집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오늘 하루는 모두의 시선이… 너무 많이 움직였구나.”그 말은 누구에게 한 말인지조차 불명확했다.석윤에게 한 말이면서도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고, 또한 꽤 먼 곳을 향해 날아가는 말 같았다.가야 할 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석윤이 다시 말했다.“경. 오늘… 표정을 숨기신 것, 정말… 어려우셨지요.”도진은 잠시 멈췄다.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숨기지요. 숨길 수 없는 것들이 드러나기 전에.”그는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그 걸음은 군영에서의 단단함을 지키려 했지만그 안쪽에서는 오늘 하루 누적된 파문이 마침내 형태를 가지려는 듯한 묵직한 울림을 품고 있었다.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궁의 등불이 하나둘 켜질 때궁 전체에는 서로 다른 세 사람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결을 만들며 흘러가고 있었다.이수의 흔들림,세자의 이상함,도진의 가라앉지 않는 파문.그 결들은 아직 서로 닿지 않았지만 이미 같은 방향으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그리고, 그 흐름은 머지않아 궁의 밤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저녁 무렵의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궁은 전혀 다른 얼굴로 변했다.낮에는 규율과 예법으로 움직이던 공간이 밤이 되자 숨겨진 속내와 균열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전각 사이사이에 켜진 등불은 어둠을 밀어내기 위해 밝아진 것이 아니라오히려 어둠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

  • 천년의 기억   93. 충분히 보았다는 서늘한 한 마디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궁의 기운은 낮과는 전혀 다른 결을 띠기 시작했다.햇빛이 사라지면 늘 찾아오던 고요였지만오늘의 고요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이 곳곳에서 조용히 당겨지고 있는 듯한 긴장으로 촉수가 세워져 있었다.대비전으로 향하는 길에서 이수는 걸음 한 번마다 심장에 작은 돌이 얹히는 것 같은 묵직함을 느꼈다.발걸음은 단정했고, 호흡은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이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더 자극하고 있는 듯했다.궁녀가 뒤에서 속삭였다.“마마… 대비마마의 기분이 오늘… 사뭇 다르다 하옵니다.”그 말에 이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그러나 속으로는 파문 하나가 천천히 깊어져 갔다.‘오늘… 나의 작은 떨림 하나조차 그분들에게는 시험이 될 것이다.’그녀는 손끝에 힘을 담아 소매 속으로 조용히 손을 모았다.이 검은 심지가 꺼지지 않도록 마음의 불꽃을 붙잡기 위한 몸짓이었다.대비전 안은 낮과 달리 더 깊고, 탁한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향 냄새도, 불빛도, 전각의 숨결도 오늘만큼은 모두 이수를 향해 색을 바꾸고 있는 듯했다.대비는 천천히 차를 내려놓았다.“빈이 왔구나. 자리로 들라.”이수는 예를 갖추고 앉았다.대비의 눈빛은 어떠한 온기도 담지 않은 채 이수의 얼굴을 곧게 바라보았다.“오늘 저하를 배향할 때 그 얼굴이… 대단히 평온해 보이더구나.”말은 칭찬처럼 들렸지만, 그 속뜻은 너무도 뚜렷했다.평온을 유지한 자에게 던지는 말은 그 평온을 의심한다는 뜻이었으니까.“빈. 오늘 궁의 모든 시선이 그대의 걸음과 표정을 살핀다는 것을 몰라서 그리 태연했겠느냐.”이수는 짧은 호흡을 삼켰다.“…태연한 것이 아니라 해야 할 도리를 잊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을 뿐이옵니다.”대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매서운 선이었다.“마음이란… 겉으로 다 잡을 수 있을 때는 속이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그 말은 이수의 가슴 가장 깊은 곳을 찔렀다.그러나 그녀는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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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91. 그 낮고 고른 음성 아래에는

    궁문 밖에서 울리던 북은 점점 더 묵직한 울림으로 바뀌어궁의 바람과 기척을 모두 끌어당기고 있었다.기척이 모여들수록 공기는 더 얇아졌고, 누구도 깊게 숨을 들이쉬지 못했다.마치 숨을 크게 쉬는 것조차 궁의 예를 흐리는 일이 되는 듯이.전각을 향해 걷던 이수도 자신의 걸음이 묘하게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발걸음이 가벼운 건 설렘 때문이 아니라 몸이 ‘준비’라는 긴장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었다.궁에서의 긴장은 언제나 심장을 바닥으로 끌어당기며 시작되었다.궁녀들이 양쪽에 늘어서 있었다.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경계가 섞여 있었지만이수의 얼굴은 마치 안개 위에 얹힌 새벽의 그림자처럼 단정하고 흔들림이 없었다.그러나 그 단정함 아래에는 아무도 모르는 파문이 아주 가늘게 일렁이고 있었다.‘오늘… 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겠지.’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녀는 입 밖에 낼 수 없었다.아니, 낼 필요도 없었다.말이라는 형태가 붙는 순간 그 마음은 더 위험해지니까.궁은 숨조차도 기록되는 곳이기에 ‘마음의 방향’조차 드러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궁문 너머에서는 무사들의 발걸음이 큰 물결처럼 몰려오고 있었다.정제된 발소리는 어지럽게 뛰는 심장의 박동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모두가 숨을 삼킨 채 그 소리를 들었다.군영에서는 그 소리를 누구보다 또렷하게 듣는 사람이 있었다.도진.그는 검집을 고쳐 쥔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세자의 행렬이 들어오는 길을 향해 촉을 세운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지만가슴 한가운데에서는 말할 수 없는 무게가 차올랐다.석윤이 그의 곁에 멈춰 섰다.“경. 곧 행렬이 도착한다 하옵니다. 대비전에서도 방금 마지막 전갈이 내려왔다 하오니경께서는 오늘… 그 어떤 표정도 드러내시면 아니 된다 하였습니다.”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이 필요 없었다.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오늘은 검을 드는 일보다 가슴을 다스리는 일이 더 어려운 날이라는 것을.석윤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궁이… 빈마마의 일거수

  • 천년의 기억   90. 환궁의 북이 마음을 가를 때

    정오의 북이 세 번 울리고, 궁의 공기는 한순간에 형태를 달리했다.바람도, 햇빛도, 사람들의 숨결도 모두 같은 방향으로 쏠려 들어갔다.오늘 세자가 돌아온다.그 사실 하나만으로 궁의 수많은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이수는 전각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그녀의 시선은 담장 너머를 향하고 있었으나 그 너머의 사람을 볼 수는 없었다.그러나 마음은 이미 그곳을 향해 가 있었고, 그 마음을 억누르는 힘만 더욱 깊어져 갔다.궁녀가 다가와 속삭였다.“마마… 오늘은 빈마마의 표정까지 궁에서 기록한다 하옵니다.상궁들이 곳곳에서… 마마의 숨소리까지 듣고 있사옵니다.”이수는 그 말에 아무런 놀람도, 두려움도 드러내지 않았다.그러나 그녀의 속은 차가운 물결이 한 번 크게 흔들린 듯 미묘하게 떨렸다.“숨을 쉬는 것도 이제는 허락이 필요하다는 말이겠지.”궁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수는 걸음을 내딛었다.그 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그러나 오직 오늘 하루만큼은 그 걸음의 리듬마저도 궁의 눈들이 헤아리고 있었다.군영에서는 세자 환궁을 위한 준비가 이미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정렬된 무사들의 발끝은 바람 한 줄기에도 흔들리지 않았다.도진은 그들보다 더 단단하게 서 있었다.그의 앞에는 공문이 놓여 있었고,그 공문에는 오늘 그가 맡아야 할 자리와 그 자리에서의 모든 행동이 적혀 있었다.그 행동 하나하나가 궁의 질서와 체면을 지키는 일이자그 질서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가두는 일이기도 했다.석윤이 다가왔다.“경… 전각에서 빈마마의 동선을 조금 전 다시 보고했다 하옵니다.”도진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어디로 향하셨느냐.”“대비전과 후원 사이… 하지만 오래 머물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대비마마의 명 때문이라 합니다.”그녀가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왜 이토록 가슴을 묵직하게 만드는지 도진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오늘… 그대의 발걸음은 얼마나 조심스러웠을까.’석윤이 다시 말했다.“경께서도 오늘은 어떤 표정도…

  • 천년의 기억   89. 어느 전각에도 오래 머물지 말라 하심은

    석윤이 다가오며 낮게 말했다.“경. 궁은 누가 움직이는지보다 왜 움직이는지를 먼저 본다 하옵니다.”도진은 눈을 떴다.“알고 있다.”석윤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그러니 오늘… 경께서는 평소보다 더 마음을 다스리셔야 합니다.”그 말은 조심스러웠으나 그 조심 속에 담겨 있는 말의 진심은 분명했다.경의 마음은 이미 움직였으니 오늘 하루만큼은 그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게 하시오.그러나 도진은 외면한 듯 말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그리고, 그 무심한 걸음 하나조차 누군가의 눈에는 이미 어떤 표정으로 보이고 있을지 그는 알고 있었다.이수는 오전 점검을 위해 후원 가까운 전각을 살피고 있었다.햇빛이 이미 담장을 넘어오고 있었고, 정오의 열기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그 예고만으로도 공기가 묵직하게 갈라져 있었다.궁녀가 귀에 바짝 대고 말했다.“마마… 오늘은 각 전각에서 마마를 뵙기를 꺼린다 하옵니다.”“…나를?”“예, 마마. 빈마마를 향한 작은 말도 오늘은 조심해야 한다고… 궁인들끼리 서로 경계하고 있사옵니다.”경계. 그 말은 곧 ‘위험’이었다.궁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을 먼저 경계했고, 가장 조용한 사람이 가장 많은 말을 듣는 법이었다.이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오늘 하루는 누구도 믿지 말라는 뜻이겠지.”궁녀는 대답하지 못했다.그러나 그 침묵이 이미 대답이었다.그 순간, 멀리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군영이었다.정확히는 도진이 있을 자리였다.이수의 발끝이 아주 조금 멈췄다.그 멈춤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가슴 깊은 곳이 찢어질 듯 흔들렸다.‘경… 오늘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이 하루를 버티고 있을까.’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오늘 하루는 감정을 누르는 날이었다.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단 한 번이라도 흔들리면 그 흔들림이 곧 궁의 칼이 될 수 있었다.정오가 가까워질수록 궁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졌다.마치 바람도, 햇빛도, 사람도 모두 한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 천년의 기억   5. 열리지 않는 상자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 천년의 기억   4. 운명의 첫 그림자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 천년의 기억   8. 어둠이 새긴 흔적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 천년의 기억   6. 시선의 감옥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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