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신랑,신부가 테이블마다 인사를 하러 일어 나자 세나는 혼자 남았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 못 해 우렁차게 우는 배를 채우려 할 때 술을 권하는 남자들이 한 두명씩 다가 왔다.
세나의 테이블과 붙은 옆 테이블로 남자들이 앉았다 돌아 갔다.
민석의 회사 사람들이란 말에 웃으며 거절했지만 점점 곤란해졌다.
이 남자가 돌아 가고 나면 저 남자가 오고, 저 남자를 보내고 나면 또 다른 남자가 왔기 때문이었다.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저음의 남자 목소리.
세나가 남자를 올려다 봤다.
큰 키, 짙은 눈썹, 반듯하게 다문 입술.
한 마리의 늑대가 저를 내려다 보는 것 같아 온 몸에 솜털이 바짝 섰다.
“네? 아,네.”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세나의 옆에 앉았다.
마주 앉아 있다가 옆자리로 옮겨 왔다.
이 남자도 술을 권하는 걸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자와 한 테이블에 있자 술을 권하며 접근하는 남자들의 걸음이 뚝 끊겼다.
단지 키카 크고 어깨가 넓다기보다 풍기는 분위기가 서늘했다.
어차피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 불편할 것도 없는데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꼭 헤어지고 세월이 흘러 만난 과거의 연인처럼 어색했다.
“우리도 이제 뭐 좀 먹자.”
인사를 끝낸 신랑,신부가 돌아 오자 세나와 남자 사이의 어색함은 사라졌다.
남자는 신랑 민석의 오랜 친구라고 했다.
민석이 몸 담고 있는 회사의 회장.
민석이 남자를 도혁이라고 불렀다.
외모만큼이나 이름도 차갑네.
잘 웃지도 않은 서늘한 얼굴이 이름과 찰떡으로 어울렸다.
하루 종일 들고 다녔던 나윤의 클러치를 넘겨 주고서야 피로연이 모두 끝났다.
신랑, 신부의 지인들과 함께 하는 피로연이 끝날 때까지 세나는 자리를 지켰다.
신부인 나윤은 혼자 돌아가야 하는 세나가 걱정되었다.
“고생했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지. 가만 있어 봐. 차를 준비해 줄 수 있는 지 물어 볼게.”
나윤이 신랑인 민석과 의논을 했다.
“도혁씨가 데려다 주기로 했어. 도혁씨랑 같이 가면 돼.”
“아니에요, 언니. 지하철 타고 가면 돼요."
“오늘 고생했잖아. 편하게 가.”
신혼 여행을 떠나는 신랑, 신부와는 로비에서 헤어졌다.
끝까지 세나를 잘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민석과 나윤이 도혁에게 하고서야 진짜 두 사람만 남았다.
“집이 어디라고 했죠?”
집을 알려 주고 도혁을 따라 그의 차에 올랐다.
기사가 운전하는 차의 뒷 좌석에 나란히 앉은 것 부터가 불편했다.
거기다 숨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침묵은 더더욱 그랬다.
빨리 집에 도착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어?
눈을 뜨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동생과 함께 사는 작은 아파트.
다행이다. 눈 깜짝할 새 도착했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혁만큼이나 큰 차가 아파트를 빠져 나가자 그제서야 깊은 숨이 가슴 저 아래쪽에서 부터 나왔다.
하. 숨 막히는 줄 알았네.
존재만으로도 괜히 두려운 남자였다.
세나는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집에 가자마자 씻고 잘 것을 다짐했다.
*****
신혼 여행을 다녀 온 나윤의 집들이에 초대받은 건 한 달이 지나서였다.
“음식은 케이터링 불렀어. 할 건 없는데 그래도 누가 있어야 내가 덜 불안할 거 같아서.”
나윤이 세나를 부른 이유였다.
민석의 지인들 집들이라고 했다. 집안일이라고는 해 보지 않은 나윤에게 집들이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아직 집안 살림을 봐 줄 사람을 구하지 못 해서 더 그랬다.
“갈게요. 가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와야지.”
세나는 실없는 농담으로 나윤이 덜 미안하도록 했다.
집들이 시간보다 일찍 나윤의 집에 도착한 세나는 우선 집구경부터 했다.
고급 주택 단지 중 하나인 나윤과 민석의 집은 바베큐장과 넓은 잔디 마당,수영장까지 갖춘, 주택 단지중 최상위 집이었다.
이런 집에 살면 어떤 기분일까.
세나는 부러움보다 신기한 기분으로 집구경을 끝내고 나윤과 함께 손님을 기다렸다.
집들이는 저녁 식사 시간을 맞춰서 시작되었다.
겨울의 끝을 향해 가는 계절이지만 마당에 설치한 대형 텐트에는 온풍기를 틀어 훈훈한 공기가 순환이 되도록 했다.
케이터링 서비스가 세팅해 놓고 간 음식들과 집주인이 준비한 와인으로 집들이는 시작되었다.
음식이외에 필요한 것들이 생기면 세나가 챙겨 주기로 하고 주방에서 대기했다.
아일랜드 식탁에 앉으니 널찍한 거실통창을 통해 마당이 보였다.
투명한 텐트의 창으로 즐거운 얼굴을 한 사람들의 모습도.
완벽하다시피 준비된 집들이라 세나가 할 일은 없었다. 다만 나윤의 안정감을 위해 불려 온게 맞았다.
아일랜드 식탁 안 쪽에 앉아 연주 영상을 보려고 휴대 전화를 꺼내자 전화벨이 울렸다.
나윤이었다.
“너도 저녁 먹어야 되잖아. 이리로 와서 같이 먹자.”
민석의 친구들이 저렇게나 많은데서?
“아니에요,언니. 저는 나중에 손님들 가시고 나면.”
“이 사람들 언제 갈지 몰라. 빨리 와.”
나윤이 전화를 들고 거실창을 가볍게 노크했다.
“갈게요.”
세나가 텐트의 한쪽을 걷고 얼굴일 내밀자 안에 있던 남자들이 함성을 질렀다.
“아니, 형님. 진작에 말씀을 해 주시지 아쉽습니다. 더 신경써서 왔을 건데.”
누군가의 농담에 다같이 와하하 웃자 세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맞은 편 남자와 눈이 마주 쳤다.
결혼식때 집에 데려다 준 그 남자.
도혁이었다.
도혁의 차가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주택 단지의 오르막을 서서히 올랐다.하나 같이 고급스러운 주택들의 가장 안쪽, 가장 높은 곳이 도혁의 본가였다.대문마저도 웅장해 세나는 절로 기가 죽었다.여기서 반대를 하시면 어떻게 설득하나 걱정과 긴장으로 입 안이 바싹 말랐다.“어머니는 별 말씀 안 하실겁니다. 그러니까 긴장은 안 해도 돼요.”차에서 내린 도혁이 세나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하지만 큰 위로는 되지 않았다.“어서 와요.”“안녕하세요.”도혁의 어머니, 서애리.나이 치고 큰 키에 잘 관리한 몸.젊었을 때는 굉장한 미인이었을 얼굴이었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젋은 사람의 기를 죽일만한 미모였다.도혁은 어머니의 외모를 그대로 물려 받은 듯 했다.다만 남자이다 보니 선이 더 굵다고 해야 하나.짙은 눈썹과 오똑한 코의 유전자가 제일 강해 보였다.“뭘 좋아하시는 지 몰라서 꽃을 준비해 봤어요.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세나가 건네는 풍성한 꽃다발마저 초라해 보였다.“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으로 사 왔네. 고마워요.”그 꽃다발은 어머니 서애리의 취향을 알고 있는 도혁이 주문해서 픽업해 온 것이었다.“이리로 앉아요.”거실의 응접 세트에 세 사람이 앉았다.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사용인이 김이 올라 오는 차와 다기세트를 테이블에 조심스레 올렸다.“곧 식사를 할 거니까.”다관에 넣어 우려 나길 기다린 차는 녹차였다. 거실에는 차를 따르는 쪼르륵 소리만이 있었다.잘 우러난 차의 싱그러운 초록색에 마음이 조금 가라 앉았다.“내 평생 소원이 우리 차회장 장가 가는 거였는데 이제 그 소원이 이루어 지려나 보네.”차를 한 모금 마신 서애리가 세나를 물끄러미 보았다.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짝을 찾아 주려 일찍부터 노력했지만 아들인 도혁은 시큰둥했다.언제나 핑계는 있었다.아직 어려서. 아버지의 후광없이 인정받을 때까지.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에는 조직의 안정화를 위해.조직의 규모가 커졌을 때는 사
세나가 도혁을 찾아가 결혼을 약속한 다음 날.대명푸드는 발칵 뒤집혔다.회사마당으로 매끄럽게 들어 오는 고급 세단.직원들이 목을 빼고 구경하는 데 키가 훤칠하고 누가 봐도 잘 생긴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지난 주에 왔던 태원 사람이다 아니다라며 웅성이는 직원들의 입을 한 번에 닫게 한 건 남자 다음에 내린 사람이었다.세나였다.세나를 주면 자금난을 해결해 주겠다며 도혁이 왔다 간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다시 대명푸드를 찾아 왔다.그것도 세나와 함께. 결혼을 허락받겠다고.사실 허락보다는 통보에 더 가까웠다.“세나 너! 차회장이 여기 왔다 간 거 알고 왔을 때 아무 말도 없었잖아. 그런데 갑자기 결혼이라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자식들을 키우면서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은 오승환이 처음으로 화를 냈다.딸을 걸고 거래를 하자는 도혁의 제안은 대꾸할 가치도 없었으니까.그런데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두 사람이 함께 찾아 와 결혼을 하겠다니.나이가 많은 도혁이 순진한 세나를 꼬드겼다고 생각했다.“미리 말씀 못 드려서 미안해요,아빠. 엄마도.”나윤의 남편과 친구 사이라 알게 됐다.호감을 가지고 몇 번 만났다.도혁이 나이가 있어 결혼을 서두르게 됐다.지난 주, 도혁이 찾아 온 것은 나도 전혀 몰랐다. 알고 나서 허락을 받으려고 온 것이다.세나가 생각해 낸 시나리오였다.오승환이 말도 안 된다며 언성을 높이고 세나가 쩔쩔 매는 동안 도혁은 침묵했다.“세나 너! 이 사람한테 가스 라이팅 당한 거야. 뭐라고 너를 구워 삶았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야.”오승환에 이어 엄마 장영서까지 두 발 벗고 반대를 했다.“저희 딸은 이제 학교를 막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에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애 데리고 장난한 거라면 여기서 그만 하세요.”“…제가 첫 눈에 반했습니다.”줄곧 입을 닫고 있던 도혁의 첫 마디였다.“나이때문에 물러 나려고 애썼는데 도저히 안 되서 포기를 못 했습니다. 그래서 찾아 왔던 겁니다. 오세나씨가 부모님 걱정을 많이 하길래 그
"식사는 입에 맞았습니까?"도혁이 냅킨을 내려 놓으며 물었다.태원 호텔의 최상층 스위트룸.이 룸에 발을 들이자마자 세나가 질문을 시작했다.- 식사부터 하고 얘기합시다.일단 숨을 돌리도록 식사를 권했다.세나의 전화를 끊고나서 스위트룸에서 식사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아무리 레스토랑의 프라이빗 룸에서 만난다고 해도 보는 눈은 있기 마련이니까.식사 내내 두 사람은 말이 없었고, 세나는 음식을 뒤적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먹지 않았다."이제 오세나씨가 찾아 온 이유를 들어 볼까요?"결혼을 청하러 간 것은 도혁이었는데 꼭 세나가 도움을 청하러 온 것 같은 물음이었다.도움을 줄지, 말지는 얘기를 들어 보고 결정하겠다라는 오만한 물음."전에 저희 부모님 회사에 다녀 가셨다고 들었어요.""맞습니다.""그 때 왜 찾아 오셨는지, 부모님과 어떤 얘기가 오고 갔는지 궁금해서요."도혁은 온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 섰다.거실창 앞의 소파위에 올려 놓은 봉투를 가져와 세나의 앞에 놓았다.세나가 허겁지겁 봉투를 열어 묵직한 서류 뭉치를 꺼내 보았다. 보고서라는 이름을 단 종이에는 각종 그래프와 글자들이 빼곡했다. 봐도 무엇을 나타내는지 세나는 쉽게 이해하지 못 했다."솔직히 뭔지 잘 모르겠어요. 이 서류가 뭘 나타내는지."세나의 한숨에 도혁이 의자를 끌어와 그 옆에 앉았다."아버님의 회사는 지금 끝의 끝에 몰려 있다고 보면 됩니다. 자금난이 심각해서 내일 당장 어떻게 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네? 그렇게나요?""대기업의 자본에는 당해낼 수가 없어요. 그게 잘못이라면 잘못일까."끝의 끝,당장 망한다는 말에 세나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한데 도혁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도혁과는 관계없는 남의 일이니까."그래서 찾아갔던 겁니다. 자금난을 해결하고 새로운 유통망의 개척, 더 나아가면 신제품 개발도 염두해 뒀고.""그렇게 해 주는 조건은요? 회장님이 제시했다던 조건이요."수창에게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수창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어야 했고 그래 왔다.그런 도혁에게 세상은 어렵지 않았다.다만, 여자는 예외였다.태원 그룹의 최고 자리에 앉기까지는 앞만 보고 달려야 해서.가장 높은 곳에 올랐을 때는 여자 문제로 추락하고 싶지 않아서.단순한 이유였다.돈과 지위가 있는 곳에는 항상 여자가 붙기 마련인데 순간을 절제하지 못 하면 책임질 일이 생긴다는 가정을 늘 되새겼다.난잡한 여자 관계로 최고가 되기 위해 쌓은 과정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도혁은 본능마저 누르며 살아 왔다.“회장님.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말입니다.”라운지에서 불려 온 직원이 붙인 도혁의 지금 감정은 사랑이었다.사랑이라…처음으로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한 이 어이없는 마음이 사랑이라…오세나를 가지고 싶어 안달난 마음이 제 마음같지 않아 도혁은 실없는 웃음만 흘렸다.사랑이 뭐 이래.*****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세나는 나윤의 결혼식날 도혁이 준 명함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아빠의 회사가 어려운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나윤을 통해 만나고 싶다는 것을 거절한 것에 대한 뒤끝있는 행동일까.어려운 아빠 회사에 정말 도움을 주려고 온 것일까.어떤 의중을 가지고 아빠를 찾아 갔을까.궁금했다.만나서 물어 보고 싶지만 무서웠다. 몇 번을 전화기만 만지작 거리다 그만 뒀다.그 압도되는 분위기에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기나 할까 싶었다.다음 날.세나는 다시 아빠의 회사를 찾았다.한 때는 공장앞에 제품을 실어 가려는 물류차가 쉬지 않고 들어올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조용하기만 했다.공장이 돌아 가기는 할까.명절이면 주문이 밀려 들어 세나와 동생까지 일을 도우러 가던 적도 많았는데 진짜 망하는 걸까.사무실에서 두어명의 직원들이 나오는 걸 보니 저 사람들도 그만 두는가 보다 싶었다."아빠!"오승환과 장영서가 지키는 사무실은 너무 조용해서 정말 끝나가는 분위기가 느껴 졌다."왜 또 왔어. 집에 있지. 오늘은 수업이 없어?"경리 직원
태오가 올려준 보고서는 여전히 도혁의 책상 위에 있었다.대명푸드.미리 약속된 스케줄을 변경해 가며 방문했다.내일 당장 부도처리 되도 당연하다 여길 자금난을 해결해 주겠다고 찾아간 것이었다.그 해결책의 조건에 오세나를 붙였다.오세나와 결혼을 하는 조건.어린 애도 아니고 대학까지 졸업한 성인인데 결혼, 그 까짓게 못 시킬 일도 없지 않나 예상했다.하지만 윤승환의 분노는 상상이상이었다.-말이 좋아 자금난 해결이지 내 딸을 팔라는 말이지 않습니까.윤승환의 첫 마디였다.도움을 주는 사람은 도혁이었고 받아야 하는 사람은 윤승환이었다.하지만 윤승환은 꼿꼿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비굴하게 매달리지 않을 사람인 것을 도혁은 한 눈에 알아 봤다.더불어 말도 안 되는 도혁의 제안에 경멸의 눈빛마저 보냈다.- 내가 내일 당장 파산하는 일이 있더라고 절대! 안 되는 일이니까 사람 잘못 찾아 왔습니다.당신 딸이 마음에 들어서.거절당한 자존심같은 것도 버리고 찾아 왔는데.그럴 일은 없을 거라니.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 하는 사람인가.원형 테이블에 태오의 명함을 올려 놓기 무섭게 출입문을 열고 나가라는 소리를 들었다.도혁은 서류를 의미없이 넘겼다 덮었다.30년 가까이 올곧게 운영해 오던 회사가 대기업의 휴게소 사업 진출에 맥을 못 추리고 쓰러지기 직전인 상황이었다.아무리 제품이 좋다 해도 대기업의 유통망과 자본앞에서는 고꾸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점점 줄어 드는 매출과 유통 판로에 직원들을 권고사직하고 있는데 단순히 월급을 받는 사람이 하나 줄어 드는 문제가 아니었다.한 달치 월급을 주는 것보다 월급보다 많은 퇴직금을 주고 내 보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건 자금줄이 거의 막다른 골목이라는 뜻이기도 했다.이쯤 되면 대표의 개인 자산까지 끌어 와야 하는 상황이라는 말이었다.이 패는 버려졌으니 다른 패를 찾아야 하나.플랜비를 준비하지 않은 채 먼저 저지른 일이니 이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하지만, 그 전에 도혁은 제 마음
세나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대명푸드는 직원이 150명정도 되는 중견 회사였다.업력이 30년인 것으로 봤을 때 꽤 성실하게 회사를 운영해 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자금난에 허덕이며 직원을 줄여 가고 있는 상황에 도혁의 제안은 동아줄 중에서도 최상의 동아줄이었다.하지만 세나의 아버지 오승환과 어머니 장영서는 그 동아줄을 찍어 낼 기세로 사무실 밖으로 도혁을 내몰았다.“아무래도 부모님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제안이긴 합니다.”태오가 세나의 부모님을 이해한다는 듯 그들의 편을 들었다.“강태오. 너 어디 숨겨 놓은 자식이 있냐? 여자도 없는 놈이 부모 마음을 어떻게 알아?”“네?…”삐딱하게 말을 하는 것은 화가 났다는 신호였다.그러게. 왜 그런 말을 했을까.“네에. 죄송합니다.”태오의 귀에 도혁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회사로.”원래 있던 오전 스케줄을 조정해서 온 것이니 회사로 돌아가 미뤄 둔 일을 처리해야 한다.도혁은 회사로 가는 동안 제가 제시한 조건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봤다.한 번, 두 번 생각하고 생각해도 무리한 조건은 아니었다.거래처가 줄줄이 끊기고 직원들 월급을 못 맞춰 퇴사를 시켜야 하는 상황인데 내 보내는 직원들 퇴직금마저 줄 수 없는 최악의 상황.그 모든 것을 해결할 동아줄을 내려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하지만 거절을 당하고 돌아 가는 도혁의 기분은 그야 말로 엉망 진창이었다.도혁의 운전 기사가 분위기를 눈치 채고 입을 다물었다.이럴 때 괜히 괜찮으시냐고 말을 얹었다가는 뒷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태오마저 입을 닫은 채 차에 올랐다.*****세나는 일어나자마자 부모님의 회사로 향했다.오케스트라 수업이 없는 날이면 부모님의 회사로 가 일을 도왔다.어릴 때도 그랬다.손이 많이 가는 업무에 일손이라도 하나 더 보태 왔다.“반장니임!”아주 아주 어릴 때부터 일을 해 온 반장 수창이 사무실에서 나오다 세나를 만났다.“일 도우러 왔어?”이제 세나가 도울 일은 없다고 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