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괜찮아.”이수가 말했다.습관처럼 나오는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하빈은 이수를 잠시 보다가 더 묻지 않았다.괜찮다는 말을 믿어서라기보다는,믿어주는 편이 더 나은 순간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미용실 문 밖으로 햇빛이 길게 들어왔다.비가 오지 않는 아침이었다.이수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햇빛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조금 숨이 편해졌다.가위와 빗을 꺼내 놓으며 이수는 문득, 아버지 병실의 형광등을 떠올렸다.그곳의 빛은 늘 똑같았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그래서 더 잔인했다.여기처럼 아침과 낮이 나뉘지 않았고, 비가 오든 말든 상관없는 빛이었다.이수는 그 기억을 오래 붙잡지 않았다.붙잡지 않는 법을 이미 충분히 배웠기 때문이다.“오늘 일정은?”하빈이 물었다.“예약 두 명.”이수가 말했다.“그리고… 오후에 한 사람 더 올 수도 있어.”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의 뒷부분을 이해했다.‘머리를 하러 오는 손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라는 걸.“무리하지 마.”그가 말했다.이수는 웃었다.짧게, 아주 작게.“그 말,”이수가 말했다.“너한테 들은 지 벌써 몇 년 된 것 같아.”“그래도 해야 할 말은 해야지.”“알아.”이수는 가위를 들었다.손끝에 익숙한 무게가 느껴졌다.이 손은 한때 산소마스크의 끈을 잡았고,문을 밀고 나왔고, 비를 맞으며 떨었고,이제는 사람의 머리를 다듬고 있었다.같은 손이었다.그 사실이 이수를 조금 이상하게 만들었다.사람은 이렇게 다른 일을 하면서도 같은 손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게.하빈은 창가 쪽 의자에 앉아 서류를 정리했다.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그 소리는 이상하게 안정적이었다.누군가 옆에서 자기 몫의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수는 그 감각을 아주 오래 붙잡아 왔다.하빈은 묻지 않았다.그 밤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이수가 왜 이 일을 선택했는지,왜 남의 결혼 안으로 들어가는지,왜 위험한 방
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하는 순간, 자신이 무너질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도망치지도 않았다.그날, 이수는 처음으로 도망치지 않고 누군가 곁에 서 있었다.그 곁은 따뜻한 곁이 아니라, 그저 비를 덜 맞는 곁이었는데도.이수는 그 곁이 낯설어서, 더 움직이지 못했다.남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는데..""갈 곳은 있어요?"'갈 곳'이라는 단어가 이수를 찔렀다.이수에게 집은 이미 집이 아니었다.민준이 있는 곳이 집이었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건 자살 같은 일이었다.이수는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그리고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없어요.”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주소는 있을지 몰라도,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남자는 더 묻지 않았다.대신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마치 “그럴 수도 있죠”라고 말하는 것처럼.“그럼,”그가 말했다.“일단… 비 좀 피하죠.”“여기서 이러다 정말 쓰러져요.”이수는 그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거절할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말이 통제나 목적이 아니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민준의 말은 언제나 목적이 있었다.‘너를 내 안에 묶어두겠다’는 목적.그런데 지금 이 남자의 말에는 목적이 없었다.그게 이수를 방심하게 만들었다.이수는 우산 아래에서 한 발 옮겼다.그리고 또 한 발. 발걸음이 움직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수는 이상하게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그 남자는 이수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이수도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이 밤에는 이름 같은 게 필요 없었다.이 밤은 그저, 살아남는 밤이었고, 숨을 이어붙이는 밤이었다.그렇지만… 이수는 몰랐다.이 낯선 남자와의 이 한 걸음이 앞으로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옆에서 버티게 해줄 “동행”의 시작이 될 거라는 걸.그 남자가 강하빈이라는 것도,그가 나중에 변호사가 되어 이수의 일을 돕게 될 거라는 것도,그 모든 건 아직 알지 못했다.다만 이수는, 비가 그치지 않는 밤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다.혼자 도망치
산소마스크는 생각보다 가벼웠다.투명한 플라스틱과 얇은 고무줄.이게 사람의 생을 붙잡고 있다니, 그 사실이 이상하게 비현실적이었다.이수는 아버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그 얼굴은 놀랍도록 평온했다.눈꺼풀은 닫혀 있었고, 주름은 펴져 있었으며, 입가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이수는 속으로 물었다.아빠는 지금, 나를 원망할까.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잠들어 있을까.그 질문에 답은 없었다.답이 없다는 건,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이수의 손끝이 마스크 끈을 건드렸다.순간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떨림은 망설임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마지막 반응에 가까웠다.그 반응을 넘어서야만, 이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어차피…”이수는 거의 소리 없이 말했다.“어차피 죽을 거라면…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서, 지금 가셔도 서운하지는 않죠?”그 말은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자신에게 하는 주문이었다.이수는 스스로를 설득하지 않으면, 다음 순간을 넘길 수 없었다.마스크를 벗기는 과정은 생각보다 빨랐다.끈이 풀리고, 플라스틱이 들리고,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이수는 그 얼굴을 끝까지 봤다.어떤 순간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돌리면, 그건 도망이 될 것 같아서였다.기계음이 달라졌다.삐.., 삐...의 간격이 흔들렸다가, 어느 순간 길게 늘어졌다.이수는 그 소리를 끝까지 듣지 않았다.소리를 듣는 건 확인이었고, 확인은 마음을 붙잡는다.이수는 마음을 붙잡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병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복도의 공기가 달랐다.소독약 냄새는 여전했지만, 방금 전까지 ‘살아 있는 척’하던 공기는 병실 안에만 남겨졌다.이수는 걷기 시작했다.도망치듯이, 그러나 무작정은 아니었다.‘이제 나는 도망칠 수 있다.’그 한 문장이 머릿속에서 똑바로 섰다.아버지가 사라져야만 가능한 도망.그게 너무 잔인하다는 걸 이수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민준에게서 도망치는 방법이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면, 이수는 그걸 선택했을까.
병실의 공기는 차갑고도 무기력했다.소독약 냄새가 벽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형광등 빛은 사람의 피부를 조금씩 말려버리는 색이었다.바닥은 늘 반듯하게 닦여 있었지만, 그 반듯함이 오히려 더 잔인했다. 여기서는 누구도 흐트러질 수 없다는 듯이.이수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그녀의 자세는 단정했지만, 단정함이라는 건 가끔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형식”이 되기도 한다.손등 위로 손을 포개고, 숨을 고르면서도, 눈은 침대 위의 남자를 놓치지 않았다.서종민. 아버지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엔 너무 오래, 너무 여러 번 버텨온 이름이었다.아버지의 얼굴에는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투명한 플라스틱 너머로 김이 얇게 맺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그 반복이 마치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하지만 이수는 알고 있었다. 그건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게 아니라, 기계가 “살려 두고 있는” 방식이라는 걸.기계는 성실했다.삐..., 삐....간격을 어기지 않고, 감정을 섞지 않고, 단지 기능으로만 존재했다.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사람도 어느 순간 기계처럼 생각하게 된다.이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 이건 유지하냐, 끊느냐.의사는 오늘도 같은 말을 했다.회복 가능성이 낮다고, 의식이 돌아올 확률이 거의 없다고, 수치는 더 이상 좋아지지 않는다고. 말의 끝에는 늘 조심스러운 침묵이 따라붙었다.“결정은 가족이 하셔야 합니다.”그 말은 직접적으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공기 속에는 언제나 그 문장이 떠 있었다.가족. 이수는 속으로 그 단어를 한번 굴렸다.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 하나였고, 그 하나 때문에 이수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그리고 그 하나는, 누군가에게는 너무 좋은 ‘줄’이었다.당기면 이수가 움직이는 줄.민준은 그 줄을 잡고 있었다.이수가 처음 민준을 만난 것도 병원이었다.그때의 이수는 계산을 잘하지 못했고, 스스로가 얼마나 벼랑 끝에 서 있는지조차 정확히 몰랐다.대출, 사채, 수
삼겹살집 안은 늘 그렇듯 시끄러웠다.환풍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 소리와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며 튀는 소리,옆 테이블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서로를 밀어내듯 뒤섞여 있었다.사람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생활의 소음이었다.이수는 그 소음 한가운데 앉아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조용해졌다.장미 미용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의뢰인과 대화를 나누고,머릿속으로 계산을 반복하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정적이었다.“여기,”하빈이 집게로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네가 전에 자주 오던 집이잖아.”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한동안은 거의 매주 왔지.”‘한동안’이라는 말이 생각보다 쉽게 입 밖으로 나왔다.언제부터 자주 오지 않게 됐는지는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그걸 정확히 말하는 순간, 지금의 자리가 설명해야 하는 공간이 될 것 같았다.하빈은 그 이상 묻지 않았다.언제부터, 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는 선택이 이수에게는 고마웠다.이런 자리는 괜히 정리하려 들지 않을수록 편해진다.삼겹살이 익자 하빈은 고기를 잘라 이수 앞 접시에 올려줬다.늘 하던 동작이었다.“먹어.”“이러다 다 타.”“응.”이수는 쌈을 싸서 입에 넣었다.씹는 동안 생각이 잠시 멈췄다.고기 맛이 어떤지, 쌈장이 짠지 그런 것들이 오랜만에 중요한 감각처럼 느껴졌다.“요즘,”하빈이 불쑥 말을 꺼냈다.“너 많이 달라졌어.”이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하빈을 봤다.“어떻게.”“말수가 줄었어.”“예전엔 말 안 해도 뭔가 남아 있었거든.”“지금은?”이수가 물었다.하빈은 잠시 생각했다.“지금은… 아예 안 보여주려고 하는 느낌.”이수는 웃었다.짧고, 무심한 웃음이었다.“그게 더 편할 때도 있어.”“너만 편한 거지.”하빈이 낮게 말했다.“보는 사람은 불편해.”이수는 그 말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대신 잔을 들어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유난히 느리게 느껴졌다.그때, 유리창 너머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처음
아침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시작됐다.지연은 눈을 뜨고도 한동안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잠을 설친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피곤한 것도 아니었는데움직여야 할 이유가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전에는 아침마다 오늘을 어떻게 버틸지를 먼저 생각했었다.지금은 그 질문이 필요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컵에 따르며 지연은 어제의 일을 머릿속에서 다시 꺼내 보았다.로비, 보안 요원의 목소리,사람들의 시선,그리고 자기 이름이 공간에 퍼지던 순간.그 모든 장면이 이미 조금 먼 일처럼 느껴졌다.감정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회사에 도착하자 관리팀에서 지연을 불렀다.회의실에는 법무팀 직원이 함께 있었고,탁자 위에는 이미 정리된 서류들이 놓여 있었다.“지연 씨,”담당자가 말했다.“어제 상황은 공식적으로 기록됐습니다.”“접근금지 조치와 업무 방해 관련해서 절차가 진행될 예정입니다.”지연은 서류를 하나씩 넘겨보았다.날짜, 시간, 행동 요약.어디에도 감정이라는 단어는 없었다.“확인만 해주시면 됩니다.”“추가로 하실 말씀은 없으시죠?”지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없습니다.”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게 스스로도 놀라웠다.점심 무렵, 이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 오후에 한 번만 들르세요.-마무리 확인만 하면 됩니다.지연은 ‘네’라고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그 짧은 대화가 이제는 이 관계의 전부였다.장미 미용실은 한산했다.지연은 안쪽 의자에 앉았고, 이수는 서류를 한 장 더 꺼내 놓았다.“이걸로,”이수가 말했다.“법적인 정리는 완료 단계에 들어갑니다.”“이후에는 연락이 오더라도 대응하실 필요 없어요.”지연은 그 말을 들으며 서류를 바라봤다.“끝이네요.”그녀가 말했다.“네.”이수는 짧게 답했다.“확실하게요.”지연은 웃지 않았다.울지도 않았다.다만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생각보다,”지연이 말했다.“아무 느낌이 없어요.”“그게 정상이에요.”이수는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닿았다.커피가 아니라, 커피가 오래 머문 자리의 냄새였다.하루 이틀 사이에 바뀔 수 없는 공기였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끈을 묶는 손길이 잠시 느려졌다가 다시 속도를 찾았는데, 매듭을 완전히 당긴 뒤에도 손이 한 번 더 머물렀다.단단히 묶어두는 습관은, 이미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진상은 카운터 뒤에서 잔을 닦고 있었다.닦을 필요가 없는 잔이었다.투명했고, 얼룩도 없었다.그럼에도 그는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문질렀다.“오늘은 조
잔의 수위는 더 이상 눈에 띄게 줄지 않았다.마시지 않아도, 시간은 잔을 비워 갔다.술집 안의 시간은 사람의 선택과 상관없이 흘렀다.진상은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물이 반쯤 남아 있었다.그는 그 반을 오래 바라봤다.채우지 않은 선택과, 비우지 않은 선택 사이에서 사람은 자주 멈춘다.“이상하죠.”그가 말했다.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충동은 아니었다.“뭐가요.”이수는 잔을 내려놓은 채로 물었다.목소리는 낮았고, 끝이 흐리지 않았다.“이런 날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말을 삼킨다기보다, 말을 고르는 얼굴이
잔의 수위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수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테이블에 닿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 공간에서는 충분히 또렷했다.진상은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마시지도, 내려놓지도 않은 채로. 손가락이 유리 표면을 따라 미끄러졌다.의미 없는 동작처럼 보였지만, 의미 없는 동작은 대개 마음을 숨길 때 나온다.“원래…”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이번엔 서두가 길었다.“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는 거, 잘 안 해요.”설명 같았고, 변명 같았고, 고백 같았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
문 앞에 불이 켜져 있었다.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불빛이었다.간판은 작았고, 글자는 오래돼서 몇 글자가 흐릿했다.진상은 문을 바로 열지 않았다.손이 손잡이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왔다.“여기… 시끄럽진 않아요.”그가 말했다.설명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변명이었다.이수는 간판을 한 번 봤다.술집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어떤 술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지금 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괜찮아요.”그녀는 그렇게 말했다.들어가겠다는 뜻도, 거절하겠다는 뜻도 아닌 말.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다.안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