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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I

Author: 장순혁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01 14:57:04

“언니이이..”

침대에 푹 파묻힌 채, 인어처럼 이불을 몸에 돌돌 말고 누워있는 하연.

애처롭다 못해 구슬퍼보이는 얼굴로 애달프게 거실에서 달그락거리는 지원을 불렀다.

"언니..! 살려줘요.. 아이고 나 죽네!"

“응? 왜?”

지원은 설거지를 끝내고 시계를 힐끔 올려다봤다.

짧은 시침과 긴 분침이 그 자태도 고고하게,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흠.. 우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입시생 고3 하연이, 제트기 타고 날아가도 지각이겠네."

그러나 여전히 침대 속에 파묻힌 하연의 몸뚱이는 움직일 기미조차 없다.

이미 열려있지만 매너있게 하연의 방문을 똑똑 두들기고 들어가는 지원.

“하연아, 이런 말하기 나도 새삼스럽기는 한데 너 지금 학교 지각인 거 알지?”

“나 아파요.. 온몸이 쑤시고, 열도 나는 것 같고..

으에취!”

이불을 목끝까지 끌어올리는 하연.

하연의 목소리는 작고 힘이 없었지만, 그나마 그 안에 잔뜩 담긴 것은 순수한 억울함.

지원은 웃으며 천천히 하연이 곁으로 다가갔다.

“어쩐지 어제부터 그러더라니..”

"어제가 왜요.."

"너 어제 얼굴 되게 새빨겠어."

지원이 등교하는 하연을 꼬옥 안아주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되어 뜨끔, 하는 하연.

“..사람이 일관되게 행동해야죠.. 후우..

에.. 에취! 이거 봐! 콧물!”

이불 안, 하연의 작은 몸에서 신음 소리가 참 길게도 났다.

"아이고, 나 죽네.. 나 죽어.. 언니.. 나 죽어요.."

지원은 티슈를 뽑아들고,

한 손은 하연의 뒷목에,

티슈를 든 손은 하연의 코에 가져다댔다.

"자, 흥!"

"..언니. 나 정말, 정말로 아프긴한데 진짜.. 내 나이가 이제 그 정도는 아니야.."

"시끄럽고, 흥!"

"흥.."

다량의 설레임과 약간의 자괴감.

이정도 스킨쉽이면 그깟 자괴감쯤이야, 하연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며 코를 내민 채 가만히 지원의 손길을 느끼기로 했다.

"으.."

표정을 한껏 구긴 후, 휴지통에 축축한 티슈를 버리는 지원.

하연은 충격받은 얼굴로

"언니.. 내가 더러워..?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어요..?"

"장난 칠 힘은 남아있나보네?"

"마지막으로 짜낸 힘이었어요. 언니.. 안녕.. 콧물 묻은 티슈야.. 안녕.."

지원은 한숨을 삼키며,

하연의 방에서 나가 체온계와 찬물 한 잔을 들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자, 일단 체온부터 재보자. 열이 얼마나 나는지는 봐야지.”

“싫어요..”

“이거 안 재면 약도 못 먹거든? 그냥 누워서 얌전히 있어.”

체온계를 꺼내어 하연의 겨드랑이로 밀어 넣는 순간, 하연은 오버하며

"으앙!"

괴상한 소리를 냈다.

“오버하지 마. 안 아파.”

“..기분 문제라구요. 그리고 좀 차가움..”

지원은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 채 오랜만에 얌전히 누워있는 하연을 바라봤다.

저 얇고 가느다란 눈썹 사이로 보이는 붉게 상기된 눈꼬리, 그리고 지원의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들이 확실히 말하고 있었다.

단순한 꾀병이 아니라는 걸.

“진짜 감기 맞는 거야?”

“어제.. 아침에 나갈 때 언니가 저 안아줬잖아요..”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너가 안아달라고 하는 거잖아.”

“그걸로.. 전염된 거일 수도..”

“내가 무슨 감기 바이러스 숙주야?”

“언니가 나한테 뽀뽀도 했잖아..”

지원의 눈이 커졌다.

“에? 뽀뽀를 했다고?”

아씨, 말이 헛나왔다.

“..꿈에서요.”

지원의 입에서 툭, 하니 실소가 터졌다.

입을 손등으로 가리고 고개를 저었다.

하연은 이불 속으로 고개를 숨겼고.

귀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 이불을 뚫고도 보일 지경.

잠시 후, 체온계가 ‘삑’ 소리를 내며 깜빡거렸다.

지원이 수치를 확인하곤 두 눈을 크게 떴다.

“38.8도.. 진짜 열이 있긴 있네?”

“믿어주시니 아리가또..”

“진짜 아픈 거였구만. 괜히 미안하네.”

"억울해요.."

지원은 괜스레 머리를 긁적이며 거실로 나가 서랍을 뒤져 약을 꺼냈다.

“이럴 줄 알고 내가 어제 미리 약 사다놨지. 자, 먹자.”

해열제와 감기약을 건네주며 하연의 앞에서 물컵을 든 채 선 지원.

하연의 등을 살짝 일으켜 세워 베개를 받쳐줬다.

“어때? 약국에서 고르고 골랐어. 선생님한테 특별히 부탁해서 제일 쓴 맛나는 걸로. 기가 막히게 쓰지?”

“헥.. 언니 이거 진짜 사람 먹는 거 맞아요..?”

"동물병원에서 산 건 아니니까 아마 그럴걸?"

입술을 바르르 떨며 약을 넘기는 하연.

쓴맛이 징그럽게도 감도는 입 천장.

"우욱.."

“이 약 꽤 비싼 거니까, 남기지 말고. 먹고 낫기나 해. 안 그러면 약값 청구할거야.”

"돈 없어요.. 배째세요.."

지원은 장난스레 웃으면서도, 손끝으론 부드럽게 하연의 머리칼을 정돈해 귀 뒤로 넘겨주었다.

빨간 얼굴로 시선을 아래로 떨구는 하연.

문득 손을 들어올려 지원의 앞치마 끝을 살짝 잡았다.

열이 오른 손끝이 느리게, 조심스럽게 그 얇은 천을 움켜쥐었다.

“..언니.”

“응?”

“..이럴거면 차라리 언니가 진짜 내 언니였으면 좋겠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지원은 순간 굳은 채 그 말을 되새겼다.

..아직도 이 어린 하연이에게 우리라는 말은 어색한 걸까.

그러나 이내 지원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너무 늦었어요, 아가씨. 그래도 새언니잖아. 헌언니보다는 어감이 좋은데? 나름 괜찮지 않아?”

하연은 작게 눈을 감고 속삭였다.

“..그치만 지금은 그냥 언니처럼..”

지원은 문득, 그 말에 가슴이 조여왔다.

..답답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연은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지원은 침대에 걸터앉아 천천히 하연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작은 숨결이 성에처럼 들러붙는 이마는 여전히 뜨거웠고, 땀으로 젖어 있었다.

“좀 더 자. 죽 끓여줄게.”

“와.. 감동.. 눈물 날 것 같아요.. 근데 언니가 끓인 죽 맛없..”

“그럼 너가 일어나서 끓이도록. 감기 걸린 주제에 말이 많구만.”

“그냥 싫다고 투정 부려본 거잖아요..

난 언니가 해주는 건 다 좋은데..”

조용히 이불을 반듯하게 펴던 지원.

그런 그녀의 등 뒤에서, 하연이 작게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뭐가."

"곁에 있어줘서.

아플 때 언니가 곁에 있어주는 게 너무 좋아서..”

지원의 손끝이 순간 멈췄지만,

이내 아무 말 없이 다시 손을 들어 하연의 머리칼을 살며시 쓸어 넘겼다.

천천히, 행여라도 유리처럼 깨질까 아주 조심스럽게.

“그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해. 괜히 혼자 떨지 말고.”

“..떨려요?”

“..자. 이따가 배고프면 부르고. 불 끌게."

"..."

*

밤.

하연의 이마에 손을 짚는 지원.

다행히 열이 한결 가라앉아 고른 숨 내쉬며 잠에 든 하연의 이불을 목끝까지 덮어주고,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지원은 조용히 거실 식탁에 앉았다.

노트북에서는 잔잔한 클래식이 흐르고, 뜨거운 페퍼민트티가 담긴 찻잔 앞에서, 천천히 손끝을 식탁에 두드리던 그녀의 손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창밖엔 허여멀건 달빛이 담을 타고 내려앉았고, 텅 빈 거실 안엔 지원만이 잠잠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때 방 안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지원은 찻잔을 내버려두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연아, 왜? 다시 아파? 열 다시 나? 응급실 갈까?”

문을 열며 와다다다 말을 쏟아내던 지원.

하연이 이불 속에서 반쯤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머지 반은 아직 잠들어있는 중인것 같았다.

눈꼬리는 물기어린 채 발그레했고, 바짝 마른 입술 사이에서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짧은 진심이 새어나왔다.

“언니.. 가지 마요..”

“..내가 가긴 어딜 가.”

지원은 조용히 침대에 다가가 걸터앉았다.

하연은 눈을 감으며 작은 속삭임을 흘렸다.

“나 두고 가지 마요..”

힘겹게 지원을 향해 손을 뻗는 하연.

지원은 그 손을 조심스레 잡고 아무 말 없이 하연을 내려다봤다.

숨은 미세하고 따뜻했으며, 손끝은 미열에 젖어 있었다. 아까보다는 열이 내린 게 다행히 약이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뭔진 몰라도 그거 그냥 꿈이야. 너 꿈 꾼거야. 하연아.”

하연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귀 뒤로 정돈해주는 지원의 손길.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날 두고 가요.. 오빠처럼.."

"..."

"언니는.. 그러지 마요.. 제발.."

지원은 천천히 하연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가만가만 토닥거렸다.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가며,

하연은 다시 잠에 들었다.

그런 하연을 한참이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지원이다.

*

다음날 아침.

“언니이!”

하연은 이불을 확 박차고 일어났다.

콧소리가 섞인 외침.

"감기 완치! 완전 건강! 이제 언니한테 나를 놀아줄 특별한 기회를 줄게, 에..?"

“..너한테 감기 옮았어.”

거실의 지원은 이미 수면 양말에, 두툼한 니트를 껴입고 소파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상황을 파악하는 하연.

"..음.

그럼 이제 제가 죽 끓여드릴게요. 언니.”

“그 전에 사과가 먼저 아니니.. 콜록, 콜록.”

“..엄밀히 말하자면 면역력 약한 언니 탓이긴한데.."

"으으.."

부들거리는 팔을 끌어올리려 애쓰는 지원의 모습이 뭔가 불쌍하면서 동시에 웃겼다.

"일단 죽부터 만들고! 사과는 시간 날 때 하지 뭐. 환자는 가만히 누워 얌전히 기다리셔요~”

지원은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아이고.. 나도 죽겠다.."

다시 죽은 듯 쓰러졌다.

하연은 지원의 앞치마를 둘러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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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김치 냄새와 라면에서 모락모락 뿜어져나오는 김이 퍼지며 집 안의 공기를 채웠지만, 말은 오가지 않았다.지원은 젓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면서도, 결국 한 입도 먹지 못한 채 앞접시에 담긴 라면만 바라봤다. 복잡한 표정.하연은 그런 지원을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언니, 혹시 이직 생각하고 있어요?”그 순간, 공간이 정지된 것처럼 조용해졌다.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추었고, 지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놀라거나 화내는 표정은 없었다.오히려, 들켜버렸다는 체념

  • 시작은 언제나 무언가의 끝으로부터   언니의 고민 I

    요즘의 밤공기는 확실히 이전과는 달리 벚꽃 빛깔의 봄기운을 머금고 있었지만, 그 어떤 것들이라도 품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온기에 비해 홀로 집을 향해 걷는, 무표정한 지원의 마음은 요새 유난히 때이른 늦가을 낙엽처럼 메마르게 버석거리며 동시에 쓸쓸했다.불그스름하게 물든 하늘이 서서히 검은색으로 바뀌고,그 검은 하늘이 더 깊고도 진하게, 흰 구름마저 제 몸의 색으로 검게 물들이는 시간.매일같이 지원이 집에 도착할즈음이면 아파트 복도엔 조명 한 줄만이 덩그러니 켜져 있었다.그 아래로 홀로 놓인 그녀의 그림자가 밤처럼 검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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