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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Author: 윤옥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6 20:49:19

런던 범죄심리 연구소의 아침은 기계적인 소음으로 시작된다. 고성능 커피 머신이 웅웅거리며 원두를 갈아대는 소리,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긁는 구두 굽 소리,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최신 판례를 읊조리는 분석관들의 대화가 복도마다 층층이 쌓여 있었다. 진은 자료 뭉치를 옆구리에 끼운 채 브리핑실로 향했다. 어제 현장에서 보았던 사채의 잔상이 망막 안쪽에 눌어붙어 가시지 않은 탓에,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눈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복도 끝, 브리핑실의 육중한 문 옆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데프 에도우즈. 그는 지나가는 다른 분석관들에게는 단 한 줌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마치 그 자리에 박제된 정물처럼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진이 가까워질수록 데프의 시선은 느릿하게 아래로 내려가, 진의 손끝에 고정되었다. 어제의 그 서늘한 감각이 다시금 피부를 타고 번졌다. 진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을 굳이 꺼내지 않았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의 떨림을 그에게 다시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안 떠시네요.”

데프가 먼저 정적을 깼다. 인사가 아닌 관찰 결과였다. 무채색의 목소리가 복도의 소음 사이를 칼날처럼 비집고 들어왔다. 진은 그의 옆을 지나치려다 멈춰 서서 옆얼굴을 보았다. 데프의 눈동자는 감정이 휘발퇸 것처럼 건조했으나, 그 안에는 상대를 꿰뚫어 보는 집요함이 서려 있었다.

“어제는 조금 추웠어요.”

“봄이 다가오고 있는데 추우셨다고요.”

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가치가 없는 사실을 굳이 설명하는 것은 분석관으로서의 직무유기였고, 인간 진 크로스로서의 수치였다. 데프 역시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진이 브리핑실 문고리를 잡고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시선이 등 뒤에 남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기분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임을, 진은 척추를 타고 흐르는 긴장감을 통해 인지하고 있었다.

브리핑실 내부. 대형 스크린에는 두 번째 희생자의 사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새벽 4시, 템스강 하류 선착장에서 발견됐습니다. 피해자는 30대 남성, 신원은 아직 확인 중입니다.”

팀장이 레이저 포인터로 시신의 손목을 가리켰다. 진은 숨을 멈추고 화면을 응시했다. 사진 속의 상처는 어제와 완벽히 일치했다. 47도. 소수점 단위까지 정교하게 계산된 것 같은 그 절개각은 인간의 손이 아닌, 기계나 신의 섭리가 개입된 것처럼 자비가 없었다. 혈관과 신경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뒤,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그어내린 솜씨였다.

진은 의자에서 일어나, 화면 앞으로 다가갔다. 시신의 단면을 파고드는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각도를 보는 순간, 심장 안쪽에서 기괴한 동질감이 고개를 들었다. 가문의 문서에서 보았던 1888년 화이트 채플의 어둠. 그 속에서 피어났던 그 참혹한 예술의 재림이었다.

“전문적인 해부학 지식이 있는 자입니다. 의료계 종사자거나, 최소 외과 수련 과정을 거친 이력이 있겠네요. 도구는 메스일 확률이 높습니다.”

“용의자 범위, 더 좁힐 수 있습니까? 크로스 박사님.”

팀장의 질문에 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는 이미 한 명의 형상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시신 앞에서 단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던 남자,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하는 보고서를 읽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데프 에도우즈. 그의 냉정한 침착함과 정교한 움직임은 이 살인마의 성격과 꽤 흡사해 보였으므로.

“증거 부족입니다. 아직은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허나 진은 한 명을 지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급한 발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를 지금 당장 수사 선상에 공식적으로 올리는 순간, 자신 또한 그 각도를 어떻게 그토록 단번에 알아보았는지 설명해야만 했다. 그것은 자신의 피를, 가문의 수치를 스스로 폭로하는 일이었다. 진은 침을 삼켰다.

그날 밤, 진은 연구식 숙직실의 딱딱한 침대 대신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화이트채플의 낡은 정취가 남아 있는 거실 한복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수납장 밑바닥에 숨겨둔 가문의 편지함을 꺼냈다. 낡은 가죽 냄새와 수백 년 묵은 종이 향이 좁은 방 안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장 깊숙한 곳, 빛바랜 벨벳 천에 싸인 1888년의 마지막 편지를 꺼냈다. 낡은 종이의 질감을 손끝으로 느꼈다. 종이는 부드러웠으나 그 위에 새겨진 글자들은 여전히 날카롭게 살아 있었다.

[ 나는 가해자를 지웠을 뿐이다. 그들이 침묵으로 만든 괴물이 나다. ]

필체는 우아했다. 내용은 더 우아했다. 130여 년 전, 런던의 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살인마가 남긴 문장은 현대의 살인 현장에서 발견된 절개각과 지독하게 닮아 있었다. ‘지웠을 뿐이다’라는 표현에서 느껴지는 그 오만한 확신. 그것은 오늘 복도에서 마주친 데프 에도우즈의 눈빛과 결을 같이 하고 있었다.

진은 창밖을 보았다. 런던의 야경은 여전히 화려했다. 이 화려한 도시의 밑바닥에서, 누군가 자신의 피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주 정교한 각도로 제 목을 겨눈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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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같은 피를 가지고 있다   10화

    런던 시티의 외곽, 유리와 강철로 점직된 고층 빌딩 숲 사이에 데프 에도우즈의 보안 회사가 위치해 있었다. 건ㅁ눌 외벽은 주변의 충경을 차갑게 반사하고 있었고, 입구에서부터 삼엄한 보안 검색이 이어졌다. 진은 수사 협조라는 명목의 공문을 가슴 주머니에 넣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사실 이 방문은 충동에 가까웠다. 연구소 안에서의 관잘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데프 에도우즈라는 인물의 공백을, 그의 사적인 공간에서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가 진을 움직였다.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달하는 동안, 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피곤이 가시지 않은 눈매가 날카로웠다. 문이 열리자마자 느껴지는 공기는 연구소의 그것보다 훨씬 건조하고 정제되어 있었다. 복도를 지나가는 보안 요원들의 움직임은 절도 있었고, 그들의 시선은 침입자를 걸러내는 기계처럼 정확했다. 데프 에도우즈의 성정이 이 거대한 빌딩 전체를 규격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최상층의 대표 사무실은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넓은 공간에는 불필요한 장식품 하나 없었고, 오직 무채색의 가구들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었다. 진은 비서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섰다. 데프는 커다란 통창을 등지고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런던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져 있었으나, 그는 그 풍경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종이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박사님이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네요.” 데프가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낮고 일정한 톤을 유지했다. 진은 대답 대신 사무실 내부를 천천히 훑었다. 그의 시선은 데프의 넓은 책상 위에서 멈췄다. 전화기, 태플릿, 정갈하게 놓인 펜 한 자루. 그게 전부였다. 수백 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사의 대표라면 으레 있을 법한 가족사진이나 흔한 퓽경 액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책상은 마치 오늘 아침에 갓 배달된 가구처럼 매끄럽고 비어 있었다. 그 결벽증적인 공백이 오히려 비명처럼 들렸다. “여기, 사진 한 장도 없네요.”

  • 우리는 같은 피를 가지고 있다   9화

    자정의 런던 범죄심리 연구소는 거대한 콘크리트 사체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건물 전체를 감싼 보안등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박거리며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야근을 마친 진이 무거운 회전문을 밀고 광장으로 나섰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런던 특유의 낮은 안개가 고여 있었다. 진은 정문 앞 계단에 멈춰 서서 습관적으로 장갑을 고쳐 꼈다. 건너편, 낡은 가스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골목 입구에 검은색 코트를 입은 실루엣이 있었다. 진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아니,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시선을 대로변으로 고정했다. 멀리서 다가

  • 우리는 같은 피를 가지고 있다   8화

    런던 경시청(Met) 소속 감식반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현장은 평소보다 훨씬 고요했다. 네 번째 희생자. 사우스파크 브릿지 인근의 폐창고에서 발견된 시신은 이제 ‘참혹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진은 노란색 폴리스라인 너머에서 시신의 손목을 응시했다. 47도. 범인은 진화하고 있었다.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는 주저함이 없었고, 이번 피해자의 손목 단면은 해부학 교본보다 명확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듯, 절개각은 갈수록 선명하고 정교해졌다. 진은 현장 감식 보고서 양식을 띄운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 우리는 같은 피를 가지고 있다   7화

    런던의 새벽 1시 12분은 모든 소음이 차갑게 식어 가라앉는 시간이다. 화이트채플의 낡은 아파트 단지는 안개에 젖어 비현실적인 고요에 잠겨 있었다. 진은 침실의 노란 스탠드 불빛 아래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가슴 주머니에서 꺼낸 흰 봉투가 시트 위에 던져져 있었다. [ 피는 거짓말을 안 해. ] 정갈한 필체로 쓰인 그 여덟 글자가 시선이 닿을 때마다 신경을 예리하게 긁어내렸다.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다니엘 헤이즈의 찢긴 손목과, 130년 전 가문의 기록 속에 남겨진 47도의 절개각이 망막 위로 교차되어 나타났다.

  • 우리는 같은 피를 가지고 있다   6화

    런던 범죄심리 연구소의 사진 분석실은 외부의 빛이 완전히 차단된 암시과 같았다. 대형 모니터 네 대가 뿜어내는 푸르스르한 광원만이 벽면의 타일 위로 차갑게 반사되고 있었다. 진은 어제 현장에서 채집된 47장의 고해상도 사진을 한 장씩 넘겼다. 화면이 바뀔 때마다 피해자의 찢긴 살점과 선혈이 확대되어 나타났으나, 진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스페이스 바를 누르는 검지 끝이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19번, 20번, 21번. 사진 23번에서 진의 손가락이 멈췄다. 폴리스라인 너머, 구경꾼들로 가득 찬 골목의 풍경을 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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