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형에게 안기면

그 남자의 형에게 안기면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7-10
Por:  루니Actualizado ahora
Idioma: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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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망친 남자의 형 침대에서, 나는 처음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전 연인 태겸에게 원고와 이름, 삶까지 빼앗긴 작가 윤하진. 다시 시작된 협박 끝에 그는 태겸이 가장 두려워하는 형, 강서우의 펜트하우스로 숨어든다. 차갑고 위험한 재벌가의 실세 서우는 하진을 숨겨주지만, 결코 대가로 삼지 않는다. 단 하나의 조건은 하진이 원할 때만 다가오는 것. 닫힌 문, 젖은 셔츠, 새벽의 악몽 속에서 피난처는 금지된 욕망으로 변하고, 태겸의 질투와 재벌가 스캔들은 두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 하지만 하진은 더 이상 빼앗긴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하기 때문에, 서우의 품을 선택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은 추문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유일한 계약이 된다. 둘은 세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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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1화. 그 남자의 문 앞에서

"저를 숨겨주세요."

빗물이 코트 자락에서 뚝뚝 떨어져 대리석 바닥에 얼룩을 만들었다.

하진은 그 얼룩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펜트하우스 현관, 안에서만 열리는 두꺼운 문 앞에 강서우가 서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로비를 지나오는 십 분 동안, 하진은 몇 번이나 돌아설까 생각했다.

우산도 없이 걸었다.

신호등 앞에서 두 번 멈춰 섰고, 로비 회전문 앞에서 한 번 더 멈췄다.

그때마다 휴대폰 진동이 손안에서 울렸다.

태겸이었다.

받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삼십 층을 오르는 동안 유리벽에 비친 제 얼굴이 낯설었다.

물에 젖은 머리, 핏기 없는 입술, 벼랑 끝에 선 사람의 눈.

검은 슈트에 넥타이는 이미 풀려 있었고, 셔츠 첫 단추가 열려 있었다.

늦은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그는 하진을 위아래로 훑지 않았다.

대신 젖은 어깨와 떨리는 손끝만 잠깐 보았다.

시선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안심이 됐다.

"강태겸 동생이 아니라, 강태겸 형한테 왔다는 거군."

"맞아요. 태겸 씨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당신이니까요."

서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음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나."

"아니요. 위험한 걸 알아요. 그런데 지금 저한테는, 위험한 게 제일 안전해요."

빗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채웠다.

하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추워서인지, 두려워서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서우가 문을 조금 더 열었다.

안쪽에서 흘러나온 온기가 하진의 뺨에 먼저 닿았다.

"들어와서 말해. 여기서 다 젖은 채로 서 있지 말고."

"동정 안 받으려고 왔어요."

"동정할 시간 없다. 나는 지금 네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궁금할 뿐이야."

"제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면, 저를 안 받아줄 수도 있어요."

"그럼 말하지 마. 지금은."

하진은 잠시 문턱을 내려다보았다.

넘으면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발끝이 대리석 바닥의 냉기를 느꼈다.

그래도 발을 뗐다.

젖은 구두가 대리석에 자국을 남겼다.

거실은 넓고 어두웠다.

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야경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줄기가 도시의 불빛을 잘게 부수고 있었다.

낮은 조명 하나만 켜진 거실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보다 아무도 몰래 숨어드는 은신처처럼 보였다.

서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을 하진 쪽으로 밀었다.

화면에는 태겸에게서 온 메시지가 떠 있었다.

[내가 가진 거 다 돌려받을 때까지 못 도망가.]

"이거, 오늘 받은 거예요."

"몇 번째냐."

"세는 걸 그만뒀어요."

서우가 소파에 걸쳐 있던 담요를 집어 하진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손끝이 어깨에 닿기 직전에 멈췄다.

닿지 않았는데도 하진의 숨이 먼저 흔들렸다.

담요에서 낯선 온기가 전해졌다.

"조건 없이 재워줄 순 없다. 나는 자선사업가가 아니야."

"조건이 뭔데요."

"내일 얘기해. 오늘은 일단, 그 몸부터 말려."

"오늘 하루만 재워주고 내일 내쫓을 생각이면, 지금 말해줘요. 마음의 준비라도 하게."

"내쫓을 거였으면 문도 안 열었다."

하진은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서우를 올려다보았다.

이 남자의 얼굴에서 태겸과 닮은 선이 언뜻 보였다.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이상하게도 숨이 트였다.

두 감각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게 스스로도 낯설었다.

"강서우 씨."

"말해."

"저 오늘 밤만 재워달라는 거 아니에요. 저를, 태겸이 못 건드리는 곳에 두고 싶어요."

서우가 처음으로 하진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거실 공기를 갈랐다.

"그럼 내일부터 너는 내 계약 아래에 있는 거다. 그런데 하나만 미리 말해두지."

"뭔데요."

"네가 대가가 되는 계약은 하지 않는다. 숨겨줄 수는 있어도, 사지는 않아."

하진의 눈이 흔들렸다.

그 말이 위로인지 경고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서우는 몸을 돌려 안쪽 복도로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 섰다.

복도 끝, 어둠 속에서 그의 뒷모습만 선명했다.

"방은 두 개다. 네 방은 안에서만 잠긴다. 내가 원해도 못 연다는 뜻이야."

"그럼 당신 방은요."

서우가 어깨 너머로 하진을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잠깐 다른 것이 스쳤다.

창밖 도시의 불빛이 그의 옆얼굴에 얇게 걸렸다.

"내 방은, 네가 열고 싶을 때만 열린다."

하진은 그 말을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었다.

젖은 옷자락에서 물방울이 발치로 떨어졌다.

이 집의 문이, 태겸의 손아귀보다 무겁고도 안전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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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그 남자의 문 앞에서
"저를 숨겨주세요."빗물이 코트 자락에서 뚝뚝 떨어져 대리석 바닥에 얼룩을 만들었다.하진은 그 얼룩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펜트하우스 현관, 안에서만 열리는 두꺼운 문 앞에 강서우가 서 있었다.택시에서 내려 로비를 지나오는 십 분 동안, 하진은 몇 번이나 돌아설까 생각했다.우산도 없이 걸었다.신호등 앞에서 두 번 멈춰 섰고, 로비 회전문 앞에서 한 번 더 멈췄다.그때마다 휴대폰 진동이 손안에서 울렸다.태겸이었다.받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삼십 층을 오르는 동안 유리벽에 비친 제 얼굴이 낯설었다.물에 젖은 머리, 핏기 없는 입술, 벼랑 끝에 선 사람의 눈.검은 슈트에 넥타이는 이미 풀려 있었고, 셔츠 첫 단추가 열려 있었다.늦은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그는 하진을 위아래로 훑지 않았다.대신 젖은 어깨와 떨리는 손끝만 잠깐 보았다.시선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안심이 됐다."강태겸 동생이 아니라, 강태겸 형한테 왔다는 거군.""맞아요. 태겸 씨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당신이니까요."서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웃음은 아니었다."그래서 내가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나.""아니요. 위험한 걸 알아요. 그런데 지금 저한테는, 위험한 게 제일 안전해요."빗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채웠다.하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추워서인지, 두려워서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서우가 문을 조금 더 열었다.안쪽에서 흘러나온 온기가 하진의 뺨에 먼저 닿았다."들어와서 말해. 여기서 다 젖은 채로 서 있지 말고.""동정 안 받으려고 왔어요.""동정할 시간 없다. 나는 지금 네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궁금할 뿐이야.""제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면, 저를 안 받아줄 수도 있어요.""그럼 말하지 마. 지금은."하진은 잠시 문턱을 내려다보았다.넘으면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발끝이 대리석 바닥의 냉기를 느꼈다.그래도 발을 뗐다.젖은 구두가 대리석에 자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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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조건이라는 이름의 줄
"사인해."서우가 서류 한 장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아침 햇살이 거실 유리창을 채웠지만, 어젯밤 비 냄새는 아직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하진은 커피잔을 쥔 손끝으로 종이 모서리를 눌렀다.활자 사이사이, 낯선 조항들이 눈에 들어왔다.잠은 세 시간도 못 잔 것 같았다.소파에서 웅크리고 자다가 깬 목덜미가 뻐근했다.주방에서는 낯선 커피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서우가 직접 내린 커피였다.하진은 그 사실이 이상하게 낯설어서, 잔을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이 시간에 벌써 일어나 있었어요?""원래 이 시간에 일어난다.""너는 더 자도 됐다.""낯선 집에서 잠이 오나요.""그럼 낯익게 만들어야지.""보호 계약서?""이거 진짜예요?""진짜가 아니면 뭐로 보이나.""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건 줄 알았어요.""드라마는 결말이 정해져 있지.""이건 아니야."하진은 조항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숙식 제공, 신변 보호, 외부 접촉 통제, 언론 대응 위임.문장 하나하나가 낯설고 무거웠다.어느 조항에는 하진의 이름이 정확히 명시되어 있었다.그리고 마지막 줄에서 손끝이 멈췄다."동의 없는 접촉 금지.""이 조항, 당신이 넣은 거예요?""그래.""왜요.""내가 널 재웠다는 이유로, 네가 뭘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려고."하진의 목이 살짝 메었다.이런 식의 배려는 처음이었다.태겸은 늘 반대로 굴었다.준 만큼 받아 갔고, 받은 것보다 더 많이 요구했다.그 기억이 스치자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침대도 계약서에 들어가나요?"말이 먼저 튀어나갔다.스스로도 놀랐지만 거두지 않았다.서우의 눈이 잠깐 가늘어졌다."네가 먼저 묻지 않는 한, 그 조항은 비워둔다.""비워둔 칸이 더 위험하게 보여요.""위험한 건 칸이 아니라, 지금도 내게서 도망가지 않는 네 눈이다."하진은 시선을 피하려다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오기였다.창밖으로 젖은 도시가 서서히 마르고 있었다.서우가 펜을 내밀었다."사인 안 하면?""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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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안에서만 잠기는 방
쾅.하진은 문을 닫고 등을 기댔다.손이 떨렸다.잠금장치를 돌리는데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태겸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그 손이 손목을 쥐던 감각, 그 목소리가 귀에 남긴 잔향까지 전부.방은 넓었다.침대는 필요 이상으로 컸다.창밖으로 보이는 도시 야경이 낯설게 반짝였다.협탁 위에는 낯선 사람을 위해 준비한 듯한 여분의 수건과 실내복이 개켜 있었다.하진은 그 배려가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실로 들어갔다.뜨거운 물줄기 아래서야 겨우 숨이 트였다.물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동안, 하진은 오래도록 벽에 이마를 대고 서 있었다.거울에 서린 김이 조금씩 걷히자, 낯선 얼굴이 마주 보였다.밤은 길었다.잠은 오지 않았다.눈을 감으면 태겸의 손이 손목을 쥐던 감각이 되살아났다.이불을 끌어당겨도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시계를 몇 번이나 확인했는지 셀 수도 없었다.창밖 빗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방 안을 채웠다.결국 하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마시러 방을 나섰다.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서우가 셔츠 소매를 걷은 채 서류를 보고 있었다.그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잠 안 오나.""악몽 꿨어요.""정확히는, 꾸기 직전에 깼어요.""물, 저기."서우가 턱짓으로 주방을 가리켰다.하진은 물을 따르다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들켰다."손 떨리는데.""괜찮아요.""괜찮다는 말, 오늘 몇 번째 하는 건지 세어봤나."하진은 대답하지 못했다.서우가 다가와 컵을 받아 들었다.손끝이 스칠 듯 말 듯 가까워졌다가, 닿지 않고 멈췄다.그 절제된 거리감이 오히려 심장을 더 세게 두드렸다."앉아.""물 마시고 얘기해.""무슨 얘기요.""네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다는 말고, 오늘 말할 수 있는 만큼만."하진은 소파 끝에 앉았다.서우는 반대편 끝에 앉았다.두 사람 사이 거리가 묘하게 신경 쓰였다."태겸 씨가 제 원고를 가져갔어요.""제 이름으로 나가야 할 글이, 지금 그 사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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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젖은 이름
휴대폰 진동이 새벽 공기를 갈랐다.하진은 눈을 뜨자마자 화면을 확인했다.태겸이었다.[형 집에 있다며. 재밌네.너 진짜 거기서 뭐 하려는 거야?]손끝이 차갑게 식었다.어떻게 알았을까.창밖은 아직 어두웠고, 거실 저편에서 서우가 통화를 하고 있었다.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어디서 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다시 연락하면, 그때는 내가 직접 간다."전화를 끊은 서우가 하진 쪽을 돌아보았다.하진은 얼른 휴대폰 화면을 껐지만 이미 늦었다."또 왔군.""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여기 있는 거.""그 자식 정보력 무시하지 마라.""대신, 겁먹지도 마.""겁먹지 말라는 말, 자꾸 들으니까 오히려 더 겁나요.""그럼 그 말은 그만하지.""대신 손을 줘.""손은 왜요.""떨리는 걸 나눠 가지자는 거다.""혼자 감당하지 말고.""안 겁먹었어요.""손이 그렇게 떨리는데."하진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정말 떨리고 있었다.손톱 밑까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서우가 다가와 그 손을 감싸 쥐었다.완전히는 아니고, 손등에 손끝만 겹쳐졌다."싫으면 말해.""치울 테니까."그 말에 담긴 배려가, 태겸에게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종류였다.하진은 말하지 않았다.손을 빼지도 않았다.서우의 체온이 손등을 타고 스며들었다.그 온도가 낯설고, 동시에 절박하게 필요했다."이거, 계약 위반 아니에요?""동의 없는 접촉 금지랬지.""지금 네가 안 뺐잖아.""교묘하네요.""교묘한 게 아니라, 정직한 거다.""네가 원하면 남고, 원하지 않으면 치운다."하진의 목이 메었다.서우의 손끝은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 그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그 절제가 오히려 하진의 숨을 더 흔들었다."태겸 씨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그놈은 원래 자기가 버린 걸 남이 주우면 못 견딘다.""저를 버린 건 그 사람이에요.""알아.""그래서 더 못 견디는 거다.""자기가 놓은 걸 남이 소중히 여기는 꼴을, 그런 인간들은 절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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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편집자의 경고
"너 미쳤어? 강서우 집에 들어갔다고?"백이재의 목소리가 스피커폰 너머로 날카롭게 터져 나왔다.하진은 소파에 앉아 눈을 질끈 감았다."다른 방법이 없었어.""방법을 왜 혼자 정해.""나한테 전화라도 하지.""그때는 전화할 정신도 없었어.""그냥 발이 움직였어.""그 남자 재벌가 실세야.""태겸이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태겸이보다 안전해.""적어도 지금까지는.""지금까지는, 이라는 말이 제일 무섭다."하진은 대답하지 못했다.통화 너머 이재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창밖에서는 아침 햇살이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다."당장 갈게.""문 열어놓고 있어.""만나서 얘기해.""나 지금 근처야.""어디쯤인데.""네가 있는 데서 십 분.""진작 갔어야 했는데, 너무 놀라서 준비하느라 늦었어."삼십 분 뒤, 이재가 펜트하우스 로비에 도착했다.서우가 직접 로비까지 내려가 그를 데리고 올라왔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은 서로를 재는 듯한 눈으로 마주 보았다."강서우입니다.""백이재예요.""하진이 친구고, 편집자입니다."이재는 서우의 얼굴을 몇 초간 유심히 살폈다.재벌가 사람 특유의 거리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눈빛이 지나치게 단단했다.무언가를 지키기로 작정한 사람의 눈이었다."확인할 게 있어서 오시라고 했습니다."거실에 앉은 이재는 하진의 얼굴을 살피더니 안색이 조금 풀렸다.초췌한 낯빛이지만, 눈빛만은 도망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얼굴은 괜찮아 보이네.""괜찮아, 정말.""원고, 그 자식이 진짜 자기 이름으로 낸다는 거 확인했어?""출판사 쪽에서 계약서 위조 정황 있대.""근데 증거를 못 모으고 있어."서우가 태블릿을 하나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화면에는 낯선 계약서 사본이 떠 있었다."이거."이재의 눈이 커졌다."이걸 어떻게 구했어요?""방법은 묻지 마시죠.""결과만 확인하시면 됩니다.""보통 사람은 아니시네요.""보통이었으면, 하진이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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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태겸의 그림자
초인종이 울렸다.서우가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더니 표정이 굳었다."태겸이군."하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도망칠 곳이 없었다.이 집 안에서만큼은 안전하다고 믿었는데, 그 믿음이 순식간에 흔들렸다.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창밖은 어느새 다시 흐려져 있었다."올려보내지 마세요.""이미 로비를 통과했다.""경비는 뭐 하고요.""그 자식이 로비 직원한테 뭐라고 둘러댔겠지.""아니면 다른 수를 썼거나.""그럼 저는 어떡해요.""내 뒤에 있어.""앞으로 나서지 말고.""숨는 건 이제 지겨워요.""숨으라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받겠다는 거다."문이 열렸다.태겸이 젖은 우산을 든 채 서 있었다.그의 시선이 하진을 발견하고 일그러졌다."형한테 갔다고?""너 정말 끝까지 나를 웃기네.""웃겨도 돼.""나는 이제 네 반응으로 내 가치를 정하지 않아."태겸의 눈이 가늘어졌다.그가 안으로 성큼 들어서려 하자 서우가 몸으로 막아섰다."초대받지 못한 건 너야, 태겸아.""형, 지금 이 상황 재밌지 않아?""내가 버린 걸 형이 주웠어.""내가 버린 걸 형이 주웠다고 착각하지 마."하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태겸이 그를 노려보았다."나는 버려진 물건이 아니야.""네 손에서 나온 사람도 아니고.""하진아, 너 정말 형이랑 그런 사이야?"질문이 공기를 갈랐다.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서우가 대신 낮게 말했다."하진은 네 것도 내 것도 아니다.""그 애는 자기가 갈 곳을 고른다.""형도 결국 나처럼 될 거야.""사람 이용하고, 버리고.""나는 너처럼 안 된다.""나는 놓지 않을 사람만 곁에 둔다.""웃기지 마.""형이 뭘 안다고.""적어도, 사람을 스캔들거리로 쓰는 법은 안 배웠다.""그 사람 이름은 네 입에 올릴 자격이 없어."태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그는 하진을 향해 한 걸음 다가오려 했지만, 서우가 팔을 뻗어 완전히 가로막았다."그 선택, 후회하게 해줄게, 하진아.""후회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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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셔츠 한 장의 거리
빗소리가 다시 창을 두드렸다.하진은 서우의 품에서 몸을 조금 뗐다.얼굴이 가까웠다.숨이 닿을 만큼."이런 거 처음이에요.""뭐가.""누가 이렇게 가만히 안아주는 거요."태겸은 늘 안는 것보다 확인하는 쪽이었다.얼마나 자신에게 매여 있는지, 얼마나 도망치지 못하는지.서우의 품은 그것과 달랐다.아무것도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서우의 손이 하진의 등을 느리게 쓸었다.닿는 힘은 약했다.마치 언제든 멈출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는 것처럼.손바닥의 온기가 셔츠 너머로도 선명하게 전해졌다."불편하면 말해.""불편하지 않아서 문제예요.""오히려 편해서 이상해요.""이런 편안함, 낯설어서 자꾸 의심하게 돼요."하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서우의 시선이 하진의 입술 언저리에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눈으로 올라갔다."너, 지금 위험한 얼굴 하고 있는 거 아나.""어떤 얼굴인데요.""오라고 말하는 얼굴.""지금 그 얼굴이다.""그런 얼굴, 거울로 본 적도 없는데요.""그런 얼굴, 배운 적 없는데요.""그러니까 당신 책임도 있어요.""배우는 게 아니다.""그냥 지금 네 얼굴이 그렇다는 거야."하진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부정하고 싶었지만 몸이 먼저 그를 향해 기울었다.서우는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경고했다."더 가까이 오면, 나는 참는 걸 그만둘 수도 있다.""참지 말라고 하면, 당신은 정말 안 참을 수 있어요?""자신 있게 대답해봐요.""시험하지 마.""나는 그 시험에 이길 자신이 없다.""이길 자신 없다는 말, 처음 들어봐요.""재벌가 실세가.""의외로 약점이 많네요.""재벌가 실세도 사람이다.""너 앞에서는 더더욱."하진의 손끝이 서우의 셔츠 소매를 살짝 붙잡았다.그 작은 접촉에 서우의 숨이 처음으로 흔들렸다.셔츠 천 아래로 단단한 체온이 전해졌다."이 정도 거리는 괜찮은 거죠?""괜찮은지 아닌지는, 지금 내 숨소리가 말해주고 있을 거다.""숨소리, 좀 이상하긴 해요.""놀리지 마.""나 지금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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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셔터 소리
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었다.하진은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했다.화면에 낯선 기사 알림이 떠 있었다.[한성그룹 강서우 대표, 심야에 젊은 남성과 동반 귀가 포착]사진 속 인물은 분명 자신이었다.어젯밤 로비에서, 태겸이 다녀간 그 시각에 찍힌 것 같았다.창밖은 맑았지만 하진의 속은 다시 흐려졌다.댓글 창은 이미 수백 개로 불어나 있었다.낯선 사람들의 추측이 활자로 쏟아지고 있었다."강서우 씨!"서우가 서재에서 나왔다.이미 셔츠 소매를 걷은 채 몇 통이나 통화를 마친 얼굴이었다.하진이 휴대폰을 내밀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기자 정문익이군.""아는 사람이에요?""몇 번 부딪힌 적 있다.""집요한 걸로 유명하지.""이번에도 예외는 아닐 거다.""각오는 해둬야 할 거다.""이거, 어떻게 해요.""방법은 두 가지다.""숨기거나, 정면으로 받거나.""셋째는 없다.""둘 다 무섭긴 마찬가진데요.""무섭지 않은 선택은 없다.""그래도 골라야 한다.""골라야 다음 걸음을 뗄 수 있으니까.""가만히 있는 것도 결국 선택이다.""숨기면요?""숨기면 태겸이 다음 카드를 쓴다.""더 나쁜 사진, 더 나쁜 소문."하진의 손끝이 차가워졌다.이 순간이 오래전부터 두려웠던 것 같았다.서우가 그 손을 감쌌다."겁먹지 마.""나는 이런 일, 익숙하다.""이보다 더한 일도 겪어봤다.""저는 안 익숙해요.""안 익숙한 게 당연하다.""익숙해질 필요도 없고.""익숙해지길 바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세상인 거다.""그럼 저는 평생 이런 일 겪을 때마다 이렇게 떨어야 해요?""아니.""내가 방패가 되는 법을 익힐 거다.""그러니까 내가 먼저 나선다.""네 이름은 아직 나오지 않았어.""언제까지 안 나올 수 있는데요.""오래는 못 버틴다.""그래도 며칠은 벌 수 있다.""그럼 저는 뭘 해요.""기다려.""대신 도망은 가지 마."전화벨이 울렸다.정문익이었다.서우가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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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거울 속 두 얼굴
"이용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서우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경계가 섞였다.하진은 드레스룸 거울 앞에 서서 그를 돌아보았다."숨기니까 더러운 소문이 됐어요.""그럼 반대로 가요.""계속 숨기기만 하면, 태겸 씨한테 계속 끌려다니는 것밖에 안 돼요.""공개하자는 거군.""각오는 됐나.""당장은 아니에요.""근데 언젠가 해야 할 거면, 미리 준비하는 게 낫잖아요.""준비, 라는 게 구체적으로 뭔데.""우선은 이 옷장부터요.""사진 찍혀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옷들로요.""아직은 아니에요.""근데 준비는 해야죠."서우가 다가와 하진의 뒤에 섰다.드레스룸 조명이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낮게 떨어졌다.거울 속에 두 사람의 얼굴이 나란히 비쳤다.검은 슈트를 입은 서우와, 그 옆의 하진.문득 하진의 시선이 흔들렸다."왜 그래.""거울로 보니까, 태겸 씨랑 닮은 데가 보여서요.""눈매 쪽이요."서우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하진은 그 반응에 움찔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내 얼굴에서 태겸을 찾지 마.""찾으려는 게 아니에요.""그냥, 보였어요.""무섭게 그러지 마요.""제대로 보면, 태겸이 아니라 나만 보일 거다.""자신 있게 말하네요.""자신 있는 게 아니라, 확실한 거다.""나는 나고, 그놈은 그놈이야.""그건 절대 안 헷갈린다.""제대로 보면, 당신을 원하게 될까 봐 무서워요."정적이 흘렀다.서우의 손이 하진의 어깨에 얹혔다.무겁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손끝의 무게만으로도 하진의 숨이 멎었다."그럼 제대로 봐.""도망은 그다음에 해.""그 정도 시간은 나도 줄 수 있다."하진은 거울 속 자신의 눈을 보았다.그리고 그 뒤에 선 서우의 눈을 보았다.닮았다고 생각했던 선들이, 자세히 보니 전혀 다른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하나는 차갑게 이용했고, 하나는 조심스럽게 기다리고 있었다."당신 눈은, 그 사람이랑 안 닮았어요.""이제야 보여요.""이제 알았나.""몰랐던 게 아니라, 인정하기 무서웠
last updateÚltima actualización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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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문 앞에서
밤이 깊었다.하진은 자신의 방 문고리를 잡은 채 오래 서 있었다.심장이 낯선 박자로, 오래도록 뛰었다.거울 앞에서 나눈 대화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오늘 밤, 이라고 스스로 뱉었던 말의 무게가 이제야 실감 났다.복도 끝, 서우의 방문 아래로 옅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하진은 그 불빛을 오래 바라보다가, 발을 뗐다.걸음마다 발끝이 차가운 마룻바닥의 감촉을 느꼈다.몇 걸음 안 되는 복도가, 오늘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문 앞에 서자 안에서 인기척이 멎었다.서우가 문을 열었다.셔츠 차림에 소매를 걷은 채였다.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복도의 낮은 조명이 그의 얼굴 절반만 비추고 있었다."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솔직히 조금 놀랐어.""저도 몰랐어요.""근데 발이 먼저 왔어요.""발이 먼저 왔다는 말, 핑계치고는 나쁘지 않네.""핑계 아니에요.""그냥, 참는 게 더 힘들었어요.""방에서 몇 번이나 문고리를 잡았다 놨는지 몰라요.""돌아갈 수 있을 때 돌아가.""지금이 마지막 기회다.""돌아가고 싶나, 스스로 물어봤어요.""물어봤겠지.""답은, 아니요예요.""몇 번을 물어봐도 똑같아요."서우의 숨이 낮게 가라앉았다.그는 문틀에 손을 짚은 채 하진을 내려다보았다.셔츠 소매 아래로 팔의 힘줄이 살짝 드러났다."들어오면 오늘 밤, 나는 손 하나로 참는 걸 그만둘 수도 있다.""멈추라면 멈춘다면서요.""멈춘다.""대신 네가 멈추라고 말해야 멈춰.""그 말, 몇 번이나 확인시켜줄 거예요?""네가 믿을 때까지.""그럼 오늘은 몇 번쯤 확인해야 믿을 수 있을까요.""미리 세어두고 싶은데.""오늘 하루로는 부족할 거다.""그래도 시작은 해야지.""내일도, 모레도 확인시켜줄 거니까.""지겨워질 때까지."하진은 문틀 너머, 서우의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침대 가장자리에 걸린 조명이 낮게 흔들렸다.도시 야경이 창을 채우고 있었다.그 풍경이 낯설고도 아름다웠다.협탁 위에는 물 한 잔과 얇은 담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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