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화. 협박 메시지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하진이 메시지를 열자,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옛날, 태겸과 함께 찍었던 사진이었다.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화면 속에서 낯설게 느껴졌다.[이거 뿌리면, 네 새 소설도 못 나갈 텐데.]서우가 그 화면을 넘겨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태겸이군.”“저 사진, 어떻게 아직도 가지고 있는 거예요.”“모른다.”“근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네가 어떻게 대응하고 싶은지다.”하진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무섭지만, 숨고 싶지 않아요.”“그럼 정면으로 받자.”“명운이한테 바로 연락한다.”명운이 십 분 만에 도착했다.화면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굳었다.“발신 번호 추적하겠습니다.”“근데 이런 협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각오하고 있다.”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저 사진 뿌려지면, 저는 또 예전처럼 무너질까요.”서우가 하진의 어깨를 감쌌다.“안 무너진다.”“이번엔 너 혼자가 아니니까.”“그래도 무서워요.”“무서운 거 당연하다.”“근데 이번엔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내가 같이 있으니까.”그때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이번엔 다른 사진이었다.하진의 표정이 순간 얼어붙었다.“이건…”서우가 화면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뭔데.”“이거, 제 예전 원고 초안이에요.”“태겸이 훔쳐갔던 그 파일이에요.”“그것도 가지고 있었다는 거군.”“네.”“이걸로 절 다시 흔들려는 거예요.”[돌아와. 안 그러면 이거 다 공개할 거야.]메시지를 읽는 하진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더 이상 예전처럼 무너지는 눈빛이 아니었다.“강서우 씨.”“어.”“저 답장하고 싶어요.”서우가 잠시 그 눈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써봐.”“근데 무리하지 마.”하진이 휴대폰을 들고 천천히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뿌려. 어차피 그 원고는 이제 내 이름으로 다시 나올 거야.네가 뭘 흘리든, 나는 이제 안 무너져.]전송 버튼을 누르는 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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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2화. 전쟁의 아침“임시 안건 상정, 통과됐습니다.”명운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서우는 넥타이를 고쳐 매며 담담하게 되물었다.“안건 내용 그대로인가.”“네.”“대표님의 사생활 문제로 회사 신뢰도가 훼손되고 있다는 취지입니다.”“발의자는 강태겸 이사입니다.”“그 사람이, 아직도 이사회에 자리가 있어요?”“명목상으로는 있습니다.”“실권은 없지만, 발의권은 남아 있죠.”서우가 재킷을 걸치며 웃었다.“끝까지 발버둥이군.”“오늘 회의, 저도 가도 돼요?”하진의 물음에 서우가 잠시 멈칫했다.“위험할 수도 있다.”“카메라도 있을 거고.”“위험해도 갈게요.”“이건 저에 대한 안건이잖아요.”“제가 없는 자리에서 제 얘기가 오가는 건, 이제 싫어요.”서우가 그 눈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같이 가자.”회사에 도착하자 로비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직원들의 시선이 두 사람을 따라왔다.회의실 문 앞에서 하진이 잠시 숨을 골랐다.“떨려요.”“떨리면 내 손을 잡아.”“여기서는 아무도 뭐라 못 한다.”하진이 그 손을 잡았다.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회의실로 들어섰다.긴 테이블 상석에 오혜련이, 그 옆에 태겸이 앉아 있었다.태겸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번졌다.“형, 이 자리에 그 사람까지 데려올 줄은 몰랐네.”“내 사생활에 대한 안건이라면서.”“당사자가 없는 게 더 이상하지.”“당사자?”“그쪽은 그냥 스캔들의 원인 아닌가.”하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서우가 그 손을 더 세게 쥐었다.“태겸아.”“말 가려서 해.”“왜, 사실이잖아.”“형이 이 사람 때문에 회사 신뢰도를 얼마나 깎아먹었는지, 다들 알고 있는데.”오혜련이 손을 들어 정적을 갈랐다.“둘 다 앉아.”“오늘은 감정싸움 하는 자리가 아니야.”서우와 하진이 자리에 앉았다.태겸의 시선이 하진에게 오래 머물렀다.그 시선 속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미련과 조롱이 뒤섞여 있었다.“자, 시작하지.”“발의자 강태겸 이사, 안건 설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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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1화. 초대장“어머님이 저녁 식사에 부르셨어요.”하진이 휴대폰 화면을 내밀며 말했다.서우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 문자를 오래 들여다보았다.“그냥 식사가 아닐 거다.”“무슨 뜻이에요?”“어머니가 갑자기 부르는 자리엔, 늘 목적이 있다.”저녁, 저택의 긴 식탁에는 이미 다른 손님이 앉아 있었다.차윤서였다.하진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오혜련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두 사람 다 앉아.”“오늘은 그냥 식사 자리니까.”“어머니,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드신 이유가 있으실 텐데요.”“윤서 양 집안에서, 여전히 너와의 혼사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이사회 절반이 아직도 그쪽을 원한다.”하진의 숟가락이 멈췄다.서우가 그 손을 식탁 아래에서 조용히 감쌌다.“어머니,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났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끝난 게 아니라, 네가 끝냈다고 우기는 거지.”“회사는 여전히 그 결합을 원해.”윤서가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다.“어머님, 저도 그 결합 원하지 않아요.”“제 입장도 좀 들어주시겠어요.”식탁 위로 팽팽한 침묵이 내려앉았다.하진은 식탁 아래에서 잡힌 서우의 손을 마주 쥐었다.그 온기만이 유일한 확신이었다.오혜련의 시선이 천천히 하진에게 향했다.“하진 씨.”“이 결혼 이야기, 어떻게 생각해?”모두의 시선이 하진에게 쏠렸다.심장이 크게 뛰었지만, 하진은 고개를 들었다.“저는 그 자리에 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서우 씨 옆은, 제가 선택한 자리니까요.”오혜련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대담하네.”“솔직한 거예요, 어머님.”윤서가 끼어들었다.서우는 하진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어머니, 오늘 이 자리로 뭘 확인하고 싶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제 대답은 변하지 않습니다.”오혜련이 냅킨을 접으며 조용히 일어섰다.“두고 보지.”“이사회가 그렇게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으니까.”그 말을 남기고 그녀가 방을 나섰다.식탁에 남은 세 사람 사이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윤서가 먼저 정적을 깼다.“두 분,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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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0화. 한 계절이 지나고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었다.하진은 눈을 뜨자마자 서우의 팔 안에서 몸을 뒤척였다.“잘 잤어?”“네.”“이렇게 푹 잔 거, 오랜만이에요.”서우가 하진의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협탁 위에는 물컵과 따뜻한 담요가 놓여 있었다.“몸은 괜찮아?”“괜찮아요.”“조금 나른하긴 하지만.”“나른한 거,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오늘 회의 있지 않아요?”“미뤘다.”“이런 아침은 자주 없으니까.”하진은 그 배려에 웃음이 났다.처음 이 집에 왔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아침이었다.“강서우 씨, 저 요즘 자주 생각해요.”“뭘.”“그날 밤, 비 맞으면서 여기 왔던 거요.”“그때 제가 여기 안 왔으면 어떻게 됐을까요.”“모른다.”“근데 매일 아침, 네가 여기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저도요.”창밖으로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비 오는 밤 이 집 문을 두드렸던 그날로부터, 어느새 한 계절이 지나 있었다.“이재가 새 원고 마감 언제냐고 재촉하던데요.”“써야지.”“이번엔 마음 편하게.”“당신은요?”“이사회 일은 좀 안정됐어요?”“안정됐다.”“어머님도 이제, 가끔 먼저 연락하신다.”“신기하네요.”“그 어머님이.”“나도 아직 적응 중이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태겸은 그 뒤로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조용했다.“강서우 씨.”“말해.”“저 오늘, 그 계약서 다시 보고 싶어요.”“서랍에 있는 거.”서우가 서랍에서 낡은 종이를 꺼내 건넸다.하진은 그 위의 글자들을 손끝으로 천천히 짚었다.“이제 이 조항들, 다 의미 없어졌네요.”“의미 없어진 게 아니라, 완성된 거다.”“우리가 이렇게 될 때까지의 증거니까.”하진은 그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강서우 씨, 저 다음 소설 제목 정했어요.”“뭔데.”“그 남자의 형에게 안기면.”서우가 웃으며 하진을 끌어안았다.“그 제목, 이제 완전히 다른 뜻이 됐네.”“네.”“이제는 굴복이 아니라, 선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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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9화. 작은 축하그날 밤, 펜트하우스에는 작은 축하 자리가 마련됐다.촛불 몇 개와 와인 한 병, 그리고 두 사람뿐이었다."거창하게 안 해서 미안하다.""거창한 거 필요 없어요.""이거면 충분해요."서우가 와인 잔을 건넸다.하진은 그 잔을 받으며 웃었다."건배사, 뭐로 할까요.""네가 골라."하진이 잔을 들어 올렸다."도망이 아니라, 선택을 위하여."서우가 그 말을 따라 하며 잔을 부딪혔다."강서우 씨.""말해.""저 오늘, 진짜 행복해요.""나도.""이런 날이 올 줄, 처음엔 상상도 못 했다.""저도요.""처음 이 집 문 두드렸을 때는, 그냥 살아남는 게 목표였어요.""지금은?""지금은, 당신이랑 계속 이렇게 있는 게 목표예요."서우가 하진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췄다.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오늘은, 참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하진이 그 말에 얼굴을 붉혔다."참지 말아요.""오늘은 저도, 온전히 당신 쪽으로 갈래요.""후회 안 할 자신 있나.""후회는 도망칠 때나 하는 거라면서요.""저는 지금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서우가 웃으며 하진의 이마에 이마를 맞댔다."그 대답, 매번 나를 무너뜨린다.""무너져도 돼요.""오늘은 제가 받아줄게요."두 사람의 숨이 가까워졌다.창밖 도시의 불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부드럽게 감쌌다."문, 닫을까요.""네가 닫아.""그게 우리 방식이니까."하진이 몸을 일으켜 조용히 문을 닫았다.촛불이 조용히 흔들리며 방 안을 따뜻하게 물들였다."오늘 밤은, 애쓰지 않아도 돼요.""그냥 서로 확인만 해요.""확인, 좋다.""매 순간."서우가 하진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가며 눈을 맞췄다."지금도 괜찮아?""괜찮아요.""근데 그렇게 물어볼 때마다, 저는 더 긴장돼요.""긴장되면 멈춘다.""멈추지 마요.""그냥, 저를 이렇게 확인하는 당신이 좋아서 그래요."서우의 손끝이 하진의 쇄골에서 잠시 멎었다."네가 허락한 만큼만 갈 거다.""오늘은, 허락한 만큼이 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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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8화. 되찾은 이름법원 앞, 하진은 판결문을 손에 쥔 채 서 있었다.태겸의 계약서 위조와 사생활 침해 혐의가 모두 인정된 판결이었다.손끝이 떨렸지만, 이번엔 두려움이 아니라 벅참 때문이었다."이겼다.""완전히."이재의 목소리가 떨렸다.하진은 판결문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활자 하나하나가 눈에 박히듯 선명했다."원고 저작권, 완전히 제 이름으로 돌아온 거죠?""그래.""이제 그 책, 네 이름으로 다시 나온다."서우가 옆에서 하진의 어깨를 가만히 감쌌다."축하한다.""진짜로.""당신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아니.""너 혼자 해낸 거다.""나는 그냥 옆에 있었을 뿐이다.""옆에 있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저는 그게 제일 큰 힘이었어요.""그럼 앞으로도 계속 옆에 있어야겠군.""그래야죠.""계약서에도 그렇게 써 있잖아요."오래전 서명했던 계약서의 조항들이 떠올랐다.출판사에서 재출간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왔다.표지 시안도 함께 도착했다.하진은 그 표지에 적힌 자기 이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화면 속 활자가 눈앞에서 흐릿해질 만큼, 눈물이 차올랐다.이재가 옆에서 그 화면을 함께 들여다보았다."어때, 마음에 들어?""마음에 든다는 말로는 부족해.""이거 진짜 제 이름 맞죠?""그래, 네 이름 맞아.""이제 아무도 못 뺏어가."[윤하진 지음]그 다섯 글자가 이렇게 벅찰 줄은 몰랐다."강서우 씨, 저 이 순간 평생 기억할 것 같아요.""기억해.""나도 평생 기억할 거니까."이재가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이걸로 진짜 다 끝난 거지?""법적으로는.""근데 저는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다시 쓰는 거니까.""다음 작품은 뭐 쓸 건데?"하진은 잠시 서우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제 이야기요.""도망치던 사람이, 어떻게 선택하는 사람이 됐는지."서우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그 소설, 제목은 정했나.""아직요.""근데 마지막 문장은 정해뒀어요.""뭔데.""그 남자의 형에게 안기면, 네가 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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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45화. 닫히려는 뚜껑“공작부인.”카엘이 다시 불렀다.“저는 여기서 물러나면 계속 관을 피하는 사람이 됩니다.그들이 관을 들이밀 때마다 흔들리겠죠.”에드릭이 듣고 있었다. 황후도.“오늘 끝내고 싶어요.”아델라인은 관 앞에 섰다.머리로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몸은 관을 기억한다.나무 냄새. 어둠.뚜껑이 닫힐 때의 압박. 손톱이 부러지던 감각.한 번 길게 숨을 내보냈다.이번에는 뚜껑을 누가 닫지 않는다.닫으려 하면 부숴버릴 것이다.그녀는 관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천장이 보였다.황후도, 에드릭도 보이지 않았다.관 안에 누우면 세상이 사람 얼굴을 빼앗아간다.남는 것은 위쪽의 빈 공간뿐이다.시녀 하나가 낙인판을 작동시켰다.손목 아래에서 희미한 열이 올라왔다.뜨겁지는 않았지만 불쾌했다.낙인이 반응했다.“반응 확인. 장례 대상자와 계약 낙인이 일치하나요?”“일치합니다.”조용해졌다.아델라인은 눈을 뜬 채 기다렸다.이제 나오라는 말이 나와야 했다.그런데 황후는 말하지 않았다.대신 에드릭의 목소리가 들렸다.“뚜껑을 닫아.”리비아가 소리쳤다.“안 됩니다!”카엘의 목소리도 겹쳤다.“폐하, 이 절차는...”황후가 부드럽게 말했다.“잠시만요. 완전 확인을 위해 닫는 겁니다.”완전 확인.참 좋은 말이다.사람을 죽이기 전에도 저런 말을 붙이면, 모두가 조금 늦게 알아차린다.뚜껑이 움직였다.아델라인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관 안쪽 양옆에서 얇은 천끈이 튀어나와 팔을 눌렀다.시녀도, 카엘도 보지 못하게 숨겨둔 장치였다.뚜껑이 가까워졌다.“리비아!”바깥에서 리비아가 움직이는 소리, 베티의 비명,카엘이 누군가와 부딪히는 소리.황후의 명령이 겹쳤다.“소란을 막으세요.”뚜껑이 반쯤 닫혔다. 빛이 좁아졌다.안 된다. 이번에는 안 된다.손목을 억지로 비틀자 낙인이 뜨겁게 아팠다.천끈이 살을 파고들었다.그러다 손끝에 무언가 닿았다.베티가 준 작은 머리핀.소지품 확인 때 재채기하던 사이 몰래 넣어준 것이었다.영악한 하녀.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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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44화. 이 관에 들어가세요리비아 차례가 되자 시녀는 장례식 소유권 계약서를 확인했다.“리비아 모렌.”“네. 공작님의 애첩이자, 공작부인의 장례식 소유자.”리비아가 일부러 또렷하게 말했다.“입으로 말하니 더 이상하죠?”베티 차례에는 일이 길어졌다.앞치마 안쪽에서 머리핀, 실패, 빵 조각, 접힌 쪽지,그리고 리비아에게서 받은 귀걸이 한쪽이 나왔다.시녀가 귀걸이를 들었다.“이건 무엇입니까?”“임금입니다.”리비아가 눈을 감았다.“그걸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그럼 뭐라고 해요?”“선물이라고 해.”“모렌 양이 저한테 선물 줄 사이는 아니잖아요.”시녀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귀걸이를 돌려주었다.“소란을 일으키지 마십시오.”마지막은 아델라인이었다.시녀의 손이 소매와 옷자락을 차례로 확인했다.문제는 품 안쪽에 숨긴 장부였다.베티가 갑자기 옆에서 크게 재채기를 했다.“죄송합니다! 장례청 먼지 때문에.”시녀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베티에게 쏠린 짧은 틈,리비아가 자연스럽게 한 걸음 옆으로 와 앞을 가렸다.아델라인은 장부를 안쪽으로 더 깊이 밀어 넣었다.시녀의 손이 옷깃 근처에서 멈췄다.“무엇을 숨기셨습니까?”“제 죽음이요.”시녀의 표정이 닫혔다.“농담할 자리가 아닙니다.”“농담 아닙니다.”아델라인은 손목을 보여주었다.낙인이 남아 있었다.시녀의 관심이 그리로 내려갔다.“이 낙인은 확인됐습니다.”“그럼 제 몸은 이미 장례식 계약 대상입니다. 함부로 만지면 소유권 침해가 되나요?”리비아가 곧장 말했다.“됩니다.”시녀는 손을 거두었다.“입장하십시오.”복도에는 창문이 적었다.등불이 놓여 있었지만 밝지 않았다.방마다 팻말이 붙어 있었다.가족 확인실, 시신 보존 대기실, 사후 서명 대조실, 유언 보관실.이 별채는 궁이 아니라 죽음을 정리하는 행정실이었다.아델라인은 사후 서명 대조실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죽은 사람의 서명을 산 사람끼리 대조하는 방.자신이 쓴 편지들이 태워지고, 위조 유언장이 반듯하게 남았을 곳.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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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43화. 황후의 마차에 오르다프리드 남작이 명령서를 다시 접었다.“공작님, 이대로 두시겠습니까?”에드릭은 대답하지 않았다.아델라인을 보는 그의 눈에는 분노 대신 계산이 들어차 있었다.“보내지.”그가 말했다.카엘이 마차 문을 열며 아델라인을 향했다.“공작부인, 황궁에서는 저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알아요.”“그런데도 가시겠습니까?”“안 가면 도주범이 되고, 가면 사칭범 심문을 받아요.둘 다 나쁘면, 최소한 이름이 걸린 쪽으로 가야죠.”리비아가 아델라인의 팔을 잡았다.“부인, 황후는 공작님보다 더 지독할 수 있어요.”“알아요. 그래도 공작님한테는 없는 게 황후한테는 있어요.”“뭐가요?”“내 이름을 살 수 있는 힘요. 그 힘을 가진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게 낫습니다.힘없는 사람 앞에서 아무리 말해봐야 안 들리니까.”베티가 마차에 오르며 투덜댔다.“저는 그냥 부인 옆에 있는 게 목적이에요. 힘 있는 사람이고 뭐고.”“그거면 충분해요.”오델이 마지막으로 소리쳤다.“공작님, 이러다 정말 저 여자가 진짜로 인정받으면...”“그럼 그때 다시 생각하지.”에드릭이 오델의 말을 잘랐다.그는 마차에 오르는 아델라인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마차 문이 닫혔다.안은 생각보다 넓었다.사람 넷이 마주 앉아도 무릎이 닿지 않았다.바닥에는 짙은 융단, 창가에는 작은 향주머니.흔들릴 때마다 말린 꽃과 쓴 약초 냄새가 섞여 흘렀다.좋은 냄새였다.좋은 냄새가 나는 곳에서 나쁜 일이 더 조용히 일어난다는 걸, 이제는 안다.오른손에는 낙찰 문서, 왼쪽 품 안에는 장부가 있었다.베티가 옆에서 자꾸 품을 확인했다.“구겨지겠어요.”“뭐가요?”“둘 다요. 종이도, 부인도.”리비아가 지친 얼굴로 웃었다.“말은 잘하네.”“요즘 배웠어요. 모렌 양 보고요. 마음에 안 드는 말을 비싸게 하는 법.”카엘의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장례청 골목이 멀어졌다.그 뒤로 문장 없는 검은 마차가 따라붙었다.에드릭은 이번에도 공식 행렬에 섞이지 않았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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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42화. 흉터로 증명하는 이름“아니면 죽었다고 믿고 싶으셨나요?”아델라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칼보다 날카로울 필요는 없었다.사람들 앞에서 또렷하기만 하면 됐다.“너는 아델라인이 아니다.”에드릭이 말했다.“그럼 왜 방금 저를 따라오셨죠?”“왜 제 이름이 적힌 낙찰 문서를 빼앗으려 하셨죠?”“가짜가 내 아내의 이름을 더럽히니까.”“그 이름은 이제 제 권한 아래 있습니다.”“네 권한?”그가 웃었다.이번엔 진짜로.“죽은 아내의 이름을 훔친 여자가 권한을 말하는군.”“공작님은 오늘 입찰장에서 저를 아델라인이라고 부르셨어요.”사람들이 술렁였다.프리드 남작의 손수건이 멈췄다.오델이 나섰다.“그건 혼란 속의 착오였습니다.”“기도실에서도 불렀죠.”“오델 집사님도 들으셨고요.”“그리고 장례청 경매장에서 한 번 더.”“공작님은 가짜를 세 번이나 아내 이름으로 불렀어요.”리비아가 마차에서 내려 옆에 섰다.“제가 들었습니다.”베티도 튀어나왔다.“저도요.”카엘이 덧붙였다.“저도 증언합니다.”프리드 남작이 난감한 얼굴로 에드릭을 보았다.가짜인지 진짜인지 모르는 여자를 사람들이 공작부인으로 보기 시작했다.공식 장례청 골목에서, 낙찰 직후, 경비와 서기관들이 보는 앞에서.이제 조용히 끌고 갈 수 없다.에드릭이 다가왔다.“아델라인이라면 증명해라.”“좋아요.”그가 멈칫했다.그녀가 피할 줄 알았을 것이다.“무엇으로 증명할까요?”그녀는 손목을 걷었다.리비아의 이름이 새겨진 장례 낙인이 보였다.“죽은 공작부인에게만 새겨질 장례식 소유 낙인?”사람들이 웅성였다.리비아가 작게 말했다.“제 이름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망신당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당신 이름 덕분에 사는 날도 있네요.”“아니면 로엔베르크의 어릴 적 흉터?”그녀는 목 뒤 머리카락을 걷었다.묘지 담에서 떨어져 생긴 작은 흉터.“집사장 헬레나 그레이와 사냥터 관리인 도란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프리드 남작의 손수건이 더 심하게 구겨졌다.아델라인은 에드릭에게서 눈을 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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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41화. 시체 길로 도망치는 공작부인“시체 길이라니, 말을 골라도 꼭 그런 걸 골라요?”리비아가 뛰며 쏘아붙였다.베티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그럼 뭐라고 해요?”“장례청 뒤쪽 물건 나가는 통로?”“쫓기는 중엔 짧은 게 최고예요.”장례청 별관 뒤쪽은 앞쪽과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벽에는 흰 천, 나무 상자마다 글씨가 붙었다.인형 팔, 가짜 조문객 의상, 임시 관 장식.장례식에도 관객이 필요한 모양이었다.카엘이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를 세었다.“셋.”“오델, 경비 하나, 시종 하나.”“공작님은요?”“아직 거리가 있습니다.”“믿지 마세요.”“그 사람은 꼭 가장 불쾌한 순간에 나타나요.”품 안의 낙찰 문서가 몸에 부딪혔다.아델라인 로엔베르크.서명 하나가 장례청 전체를 뒤집어놓았다.죽은 것으로 기록된 여자가 자기 이름의 명예 보존권을 낙찰받았다.장례청이 두려워하는 건 귀신이 아니라 기록의 모순이었다.베티가 표지 없는 낡은 문 앞에서 머리핀으로 자물쇠를 땄다.안에는 장례용 인형들이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베일 쓴 것, 조문객 외투를 걸친 것.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얼굴 없는 얼굴들.내 장례식에도 저런 게 있었을까.에드릭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바깥에서 오델의 목소리가 들렸다.리비아는 인형 하나의 베일을 뒤집어썼고, 아델라인도 인형들 사이에 섰다.카엘은 받침 뒤로, 베티는 옷걸이 아래로 숨었다.문이 열리고 오델과 경비들이 들어왔다.“찾아.”경비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인형 하나가 기울어 부딪혔다.아델라인은 숨을 짧게 나눠 쉬며 움직이지 않았다.오델이 그녀 앞에서 멈췄다.“이 인형, 방금 전 이쪽을 보고 있었나?”경비가 당황했다.오델의 손이 베일 쪽으로 올라왔다.그때 반대편에서 인형 하나가 쓰러졌다.베티가 낸 소리였다.경비들이 그쪽으로 몰려갔다.오델은 여전히 앞에 남아 몸을 숙였다.“아델라인 공작부인께서는 이런 장난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늘 조용하셨지요.”“반항도 하실 줄 모르고.”속이 뒤집혔다.그들은 그녀의 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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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40화. 벨리어드를 쓰지 않았다경매관이 서기관들과 빠르게 의논했다.카엘이 내 옆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줄였다.“위험한 주장이었습니다.”“통했나요?”“일단은요.”“그럼 충분해요.”경매관이 망치를 들었다.“장례식 소유권 충돌 검토 결과,현재 물품번호 17번은 제3자 낙찰 시 장례권 분쟁이 심화될 우려가 있습니다.”“따라서 우선권은 친정 로엔베르크 측 대리인에게 부여됩니다.”“단, 담보는 즉시 효력 발생하며, 미결제 시 권한은 차순위 입찰자에게 넘어갑니다.”“이의 있다.”에드릭이 말했다.“기록하겠습니다.”카엘이 바로 받았다.“감찰관, 이건 끝나지 않았소.”“알고 있습니다.”경매관이 나를 보았다.“로엔베르크 측, 최종 의사를 밝히십시오.”나는 일어섰다.입찰장 안 모든 관심이 나를 향했다.내 이름.내 값.내 죽음.내가 사야 할 것.“낙찰하겠습니다.”경매관의 망치가 세 번 내려갔다.“물품번호 17번.”“아델라인 로엔베르크 벨리어드 공작부인의 이름 및 명예 보존권.”“로엔베르크 측 낙찰.”끝났다.아니, 시작됐다.서기관이 낙찰 문서를 가져왔다.엘라 브린이라는 이름으로 서명해야 했다.내 이름을 사면서 다른 이름으로 서명한다.우습다.이렇게 우스운 일은 더는 못 참겠다.나는 펜을 들어 첫 글자를 썼다.아.델.라.인.아델라인 로엔베르크.거기까지 쓴 뒤 손을 멈췄다.벨리어드.그 이름을 써야 할까.이 문서는 공식 문서다.아직 나는 법적으로 벨리어드 공작부인이다.그러나 오늘 내가 되찾은 것은 남편의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이다.나는 벨리어드를 쓰지 않았다.“서명이 잘못되었습니다.”서기관이 놀라 말했다.“아니요.”나는 펜을 내려놓았다.“이게 맞습니다.”입찰장 안이 술렁였다.에드릭이 나를 보고 있었다.그의 태도는 이제 숨길 수 없을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나는 베일을 완전히 걷지 않은 채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내 이름이야.'그가 알아들은 것을 보았다.카엘이 말했다.“서명자 신원은 추후 확인 절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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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29화. 문예라의 새 조건“아이의 법적 엄마 자리를 주세요.”예라가 내민 조건이었다.온실에서 무너질 뻔했던 여자는 사흘 만에 더 단단한 갑옷을 입고 돌아왔다.“출생신고에 내 이름.”“친권도 나.”“그걸 서면으로 보장해줘요.”“그럼 사모님이 말한 그 ‘진실’인지 뭔지, 협조할게요.”“당신이 낳는다고 당신 아이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들었으면서도요?”“들었으니까 이러는 거예요!”“내 배로 열 달을 키웠는데 내 아이가 아니라니, 그럼 나는 뭐예요?”“그릇이에요?”“사모님네 그릇?”“웃기지 마요.”“낳는 사람이 엄마예요.”“세상 법이 그래요.”“법 얘기를 하고 싶으면 하죠.”“그 법이 지금 당신을 어떻게 보호하고 있는데요?”“……”“권태겸이 준 서류들, 다 읽고 서명했어요?”“아니면 읽지 말라고 해서 안 읽었어요?”예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정답이었다.그녀가 잔인해진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도겸이 입수한 정보가 어제 도착했으니까.권태겸이 예라에게 혼인 무효 소송 자료를 건넸다.이록과 나의 혼인을 무효로 만들고, 예라를 새 안주인으로 앉혀주겠다는 미끼.그리고 그 미끼의 낚싯바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을 것이다.조건: 출산까지 태강의 관리에 전적으로 따를 것.버려질 것 같은 공포가 그녀를 물게 만들고 있었다.물에 빠진 사람은 구조자의 목을 조른다.“문예라 씨.”“하나만 물을게요.”“권태겸이 당신한테 뭐라고 약속했어요?”“…그건.”“안주인?”“혼인 무효?”“그 서류, 법원 접수 도장 찍혀 있었어요?”“아니면 그냥 출력물이었어요?”예라는 대답하지 못했다.접수되지 않은 소송 서류는 종이일 뿐이다.권태겸은 종이로 여자를 조종하는 사람이다.내 불임 진단서가 그랬고, 이록의 출생 기록이 그랬듯.“확인하는 법 알려줄까요?”“사건번호를 대법원 사이트에 넣어봐요.”“접수된 사건이면 조회가 돼요.”“오늘 밤에 해봐요.”“혼자서.”“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그게 조회가 안 되면요?”“그럼 당신이 쥔 건 안주인 자리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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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28화. 내 아이일 가능성유전자는 거짓말을 못 한다.사람이 종이 위에서 거짓말을 할 뿐.도겸이 정리한 타임라인이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5년 전 3월: 내 난자 채취.코드 S-01 등록.같은 해 6월: 이록의 검체 채취 기록.명목은 ‘임원 정기검진’.십 개월 전: S-01 시술실 이관.승인 백문우.같은 주: 문예라, 태강재단병원 첫 진료 기록.온사율과 권이록의 배아.그것이 문예라의 몸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이제 종이 위에서 팔 할을 넘고 있었다.그 여자의 배 속에서 자라는 심장이,내 것에서 시작됐을지도 모른다는 것.타임라인의 여백에 나는 한 줄을 더 적었다.확정 방법: 출생 후 유전자 검사.제3기관.그리고 그 줄을 적는 순간 알았다.이 확인은 아이가 태어나야만 가능하다.열 달짜리 기다림이, 증거 목록의 맨 위에 올라와 있었다.나는 예라를 온실로 불렀다.그녀는 경계하는 얼굴로 왔다.배가 눈에 띄게 불러 있었다.“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당신 아이, 해치려는 게 아니에요.”“지키려는 거예요.”“…뭐라고요?”“그 임신, 자연스럽게 됐다고 생각해요?”“태강재단병원에서 받은 시술들, 전부 기억나요?”“착상 유도 주사라던 것들, 영양제라던 것들.”“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이 아이는 사장님과 내가...”“문예라 씨.”나는 그녀 앞에 이관 기록 사본을 내려놓았다.“당신 첫 진료일 일주일 전에, 배아 하나가 시술실로 옮겨졌어요.”“그 배아의 제공자 이름을 확인할 용기 있어요?”예라는 종이를 보지 않았다.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그 회피가 대답이었다.그녀도 어딘가에서, 이미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제 몸에서 일어난 일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거짓말이야.”“나를 흔들려고…”“아이를 뺏으려고 지어낸 거잖아요.”“그랬으면 좋겠어요, 나도.”“……”“그런데 만약 사실이면, 문예라 씨.”“당신은 아이를 낳는 순간 쓸모가 끝나요.”“태강이 대리모한테 지분을 나눠줄 것 같아요?”“…나한테 왜 이래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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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27화. 빼앗긴 난자“불임이 아닙니다.”세 번째 병원.세 번째 검사.태강과 무관한 대학병원의 의사가 차트를 넘기며 말했다.“현재 소견으로는 자연 임신에 문제가 없습니다.”“다만…”“다만, 뭐죠.”“난소에 시술 흔적이 있습니다.”“과배란 유도 후 채취술 소견인데, 기록에 없다고 하셨죠?”“본인이 모르는 채취라는 건 통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있을 수 없는 일이, 5년 전 내 몸에서 있었다.진료실의 형광등 아래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 몸의 편을 들어주는 문장을 들었다.“이 소견, 진단서로 발급됩니까?”“발급됩니다.”“다만 시술 시점과 기관 특정은 어렵습니다.”“시점과 기관은 제가 특정할게요.”“선생님은 흔적만 적어주세요.”“정확하게, 빠짐없이.”불임은 진단이 아니었다.채취를 덮는 뚜껑이었다.아이를 못 낳는 여자로 만들어두면,그 여자는 평생 제 몸을 의심할 뿐 병원을 의심하지 않으니까.도겸이 다음 조각을 가져왔다.5년 전, 검진 당일의 처치 기록.삭제됐지만 보험 청구 전산에 꼬리가 남아 있었다.“검진 항목에 없는 주사 처방이 두 건 있습니다.”“처방자는 백문우 원장.”“그리고 이 약제… 과배란 유도제입니다.”“검진 열흘 전부터, ‘영양 주사’ 명목으로 투여됐어요.”영양 주사.기억이 뒤집혔다.결혼 준비로 지쳤을 거라며, 한미라가 집으로 간호사를 불러 놔주던 주사.며느리 될 사람 몸보신이라던, 열흘간의 그 주사.시어머니의 손이었다.내 팔에 바늘을 꽂게 한 손.품위 있게 웃으며, 내 몸에서 꺼낼 것들을 미리 익히고 있던 손.그 열흘 동안 시어머니는 매일 전화를 했었다.'주사 맞았니.''입맛은 어떠니.'나는 그것을 관심이라고 번역했었다.사육이었는데.“주치의 확인됐습니다.”“당시 방문 간호를 지시한 담당의...백문우입니다.”“하겸 씨 사망진단서에 서명한, 그 사람요.”전부 한 사람으로 모였다.내 불임 진단.내 난자 채취.하겸의 죽음.이록의 출생.같은 서명, 같은 손.“백문우의 지시 라인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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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26화. 배아 보관실 S-01지하 2층.온도 영하 196도.배아 보관실의 출입 기록을 손에 넣기까지 두 달이 걸렸다.도겸이 확보한 것은 기록만이 아니었다.야간 정기 점검 시간, 12분간의 공백.그 틈으로 나는 들어갔다.들어가기 전, 계단참에서 도겸의 마지막 문자가 왔다.[12분입니다. 11분째에 나오세요.마지막 1분은 제 몫으로 남겨두시고요.]문이 열리자 냉기가 밀려나왔다.스테인리스 탱크들이 웅웅거렸다.액체질소 표면에서 흰 김이 피어올랐다.이곳은 병원이 아니라 금고였다.사람의 시작을 보관하는.이록이 뒤따라 들어왔다.나는 막지 않았다.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죽을 자리엔 혼자 가지 마.'그 계약 조항을 만든 사람이 그였다.탱크마다 코드가 붙어 있었다.S-03.S-02.그리고—S-01.관리 단말기에 도겸의 계정을 넣었다.화면에 파일이 열렸다.[검체 코드: S-01][생물학적 제공자(F): 온사율][채취일: 5년 전 3월 22일][동의서: 등록 완료]3월 22일.나는 그 날짜를 안다.결혼 전 건강검진.시댁이 예약해준 병원에서, 수면마취로 받은 종합검진.자는 동안이었다.내가 잠든 열두 시간 사이에, 이 집안은 내 몸을 열고 미래를 꺼내 갔다.그리고 눈을 뜬 내게 웃으며 말했을 것이다.'검진 결과가 아주 좋습니다, 사모님.'다리에서 힘이 빠졌다.이록의 손이 내 팔을 잡았다.“사율아.”“놔요.”“지금 네 얼굴...”“놓으라고 했어요.”나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그리고 탱크 앞으로 걸어갔다.S-01.성에 낀 금속 표면에 손바닥을 댔다.차가움이 뼈까지 들어왔다.이 안 어딘가에 있었다.아니, 있었던 자리다.로그의 마지막 줄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이동 기록: 10개월 전, 시술실 이관. 승인자: 백문우]10개월 전.문예라의 임신 주수와, 정확히 겹치는 시간.숨이 조용해졌다.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대신 몸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자리를 바꾸는 것이 느껴졌다.복수라고 불러온 것이, 다른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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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25화. 남편의 생모시작은 한 장의 흑백 사진이었다.권라희가 건넨 낡은 봉투.태강가의 막내딸은 복도에서 내 손에 그것을 쥐여주고,아무 말 없이 지나갔다.스쳐 지나가며 그녀가 남긴 말은 한 문장이었다.“올케언니가 이기면, 나도 이 집에서 나갈 수 있어.”사진 속에는 젊은 한미라가 있었다.병원 앞.그리고 그 옆에, 갓난아기를 안은 낯선 여자.사진 뒷면에 연필로 적힌 날짜는 이록의 생일 사흘 뒤였다.아기를 안은 사람이, 한미라가 아니었다.나는 그 사진을 이록에게 보여주지 않았다.먼저 확인할 것이 있었다.도겸이 이록의 출생 기록을 뒤졌고, 결과는 사흘 만에 나왔다.“출생 신고 병원과 실제 분만 기록 병원이 다릅니다.”“신고는 태강재단병원.”“그런데 그 날짜에 한미라 여사의 입원 기록 자체가 없습니다.”“산부인과 어디에도요.”“사진 속 여자는요.”“신원 확인 중입니다.”“다만 하나는 확실합니다.”“이 병원 앞 사진의 배경, 태강재단병원이 아닙니다.”“지방의 폐업한 산부인과예요.”“폐업 시점이… 이록 씨 생후 백일 무렵입니다.”아이가 백일이 되기 전에, 아이가 태어난 병원이 지워졌다.이 집안의 방식이었다.기록을 지우고, 기록을 지운 기록까지 지우는.“폐업 사유는요.”“의료법 위반으로 행정처분을 받기 직전에 자진 폐업했습니다.”“원장은 처분 없이 면허를 유지했고,이듬해 태강재단병원 개원 멤버로 들어갑니다.”“이름이.”“백문우입니다.”또 그 이름이었다.내 불임 진단서.하겸의 사망진단서.배아 이관 승인.그리고 이제, 삼십오 년 전 이록의 출생까지.이 집안의 모든 갈림길에 같은 서명이 서 있었다.백문우는 의사가 아니었다.태강가의 출생과 사망을 관리하는, 인사 담당자였다.낳지 않은 아들.35년짜리 연극.밤에, 나는 사진을 서재 책상에 올려놓았다.이록은 그것을 집어 들고, 오래 침묵했다.“…알고 있었어요?”“짐작은 했어.”“언제부터요.”“열두 살.”“어머니가 나를 안아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걸 세다가.”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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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24화. 친자 결과지의 얼룩결과지의 오른쪽 아래, 쌀알만 한 갈색 얼룩.처음 봤을 때는 커피 자국인 줄 알았다.그런데 확대경 아래에서 얼룩의 가장자리가 보라색으로 번져 있었다.“닌히드린 반응이에요.”도겸이 데려온 문서감정사가 말했다.“지문 검출 약품입니다.”“이 종이는 감정 기관을 한 번 거쳤다가 다시 인쇄된 겁니다.”“원본이라면 이 약품이 묻을 일이 없죠.”“그리고 여기, 용지 재단면 보이십니까?”“정식 결과지는 기계 재단인데 이건 사무용 커터 자국입니다.”재인쇄본.예라가 흔들던 99.98%는, 누군가 한 번 뜯어고친 종이 위의 숫자였다.“고친 항목이 어디인지도 알 수 있습니까?”감정사가 결과지를 라이트 박스 위에 올렸다.글자들의 잉크 농도가 층을 이루고 있었다.“본문은 한 번에 인쇄됐는데, 이 줄만 잉크 침전이 다릅니다.”그가 짚은 줄은 검사 대상 항목이었다.태아.그 두 글자만, 나중에 얹힌 잉크였다.“원래는 다른 단어가 있었다는 뜻입니까?”“글자 수가 더 많은 단어였을 겁니다.”“자간이 부자연스럽게 벌어져 있으니까요.”태아보다 긴 단어.검사 대상 란에 들어갈 수 있는, 더 긴 단어.배아.아니면 배아 코드.“감정서로 만들어 주세요.”“법정 제출 가능한 형식으로.”“작성해 드리죠.”“다만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이 감정서는 제출 시점이 중요합니다.”“재인쇄 사실만으로는 위조 단정이 안 됩니다.”“원래 있던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입증할 다른 증거와 함께 내야 살아 있는 증거가 됩니다.”“그 증거가 나올 곳도 알아요.”“유전체분석센터 원본 서버요.”“접근이 가능하십니까?”“가능하게 만들 거예요.”“서버 관리 권한자가 누구 차를 얻어 타는지, 이미 알고 있거든요.”“검사기관 직원 동선을 추적하죠.”도겸이 유전체분석센터 직원 명단을 확보하는 데 사흘이 걸렸다.그리고 그중 한 명,결과지 발급 권한을 가진 선임연구원의 퇴근길 영상을 이록이 가져왔다.“아버지 비서실 차량이야.”영상 속에서 연구원은 검은 세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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