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대표실 안은 건물 외관보다 더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거대한 통창 너머로 서울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지만, 내부는 온통 흰색과 회색,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무채색의 공간이었다. 그 공간의 중심, 거대한 책상 뒤편에 서유진이 앉아 있었다.
사진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미모. 빚어놓은 듯 완벽한 얼굴에 감정이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 그녀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지만, 마치 투명한 유리판을 통과하듯 초점이 없었다. 그녀는 나를 인간으로 인식하는 것 같지 않았다. 분석해야 할 데이터, 혹은 평가해야 할 사물로 여기는 듯했다.
[대상 ‘서유진’은(는) 강력한 정신 방어력과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성의 이끌림(Lv.1)’의 효과가 대상에게 90% 감소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경고처럼 떠올랐다. 역시나, 이 여자에게는 평범한 매력 어필이 통하지 않는다.
그녀는 내게 앉으라는 말도, 목례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디지털 타이머를 눌렀다. 붉은색 숫자가 ‘10:00’에서 ‘09:59’로 바뀌었다.
“시작하지.”
그게 그녀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나는 준비해 온 제안서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곧장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3년 전, 한 인터넷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장품은 여성들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갑옷이 되길 바란다’고.”
내 첫마디에, 그녀의 눈썹이 찰나의 순간, 1밀리미터쯤 꿈틀거렸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미세한 변화였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철벽에 첫 번째 균열이 생겼다.
“지난 3년간 알테아는 완벽한 기술력으로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갑옷’을 완성하지는 못했습니다. 기술력만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으니까요. 진정한 갑옷은 기술이라는 강철 위에, ‘공감’이라는 온기가 더해져야 완성됩니다.”
나는 숨을 한번 고르고, 핵심을 찔렀다.
“저희 이노 마케팅의 신규 브랜드는 바로 그 ‘공감’을 책임질 수 있습니다. 10대들의 피부 트러블 고민부터, 20대 사회초년생의 불안감, 30대 워킹맘의 고단함까지. 저희는 각 세대의 여성들이 겪는 현실적인 고민을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고, 알테아의 기술력은 그 고민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제시하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제품 콜라보가 아닙니다. 대표님의 창업 이념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퍼즐 조각입니다.”
나는 밤새 준비했던 데이터와 시장 분석 자료를 막힘없이 쏟아냈다. 감정에 호소하지 않았다. 김민지 비서의 조언대로, 오직 팩트와 논리, 그리고 비전으로 이야기했다. 내 말이 이어지는 동안 서유진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얼음 같은 눈으로 나를 관찰할 뿐이었다. 그녀가 내 제안에 흥미를 느끼는지, 혹은 지루해하는지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타이머의 숫자가 붉은색으로 깜빡이며 마지막 10초를 알렸다.
“…이것이 제가 제안하는, 두 회사가 함께 만들어갈 ‘자존감의 갑옷’ 프로젝트의 청사진입니다.”
내 마지막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삐- 삐- 삐-
타이머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10분이 끝났음을 알렸다.
나는 침묵 속에서 그녀의 판결을 기다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
서유진은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이내 타이머를 끄고 입을 열었다.
“자네의 10분은 끝났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실패. 머릿속에 두 글자가 떠올랐다. 역시 무리였나. 나는 애써 쓴웃음을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로 돌아가 서류 가방을 챙겨 나가려던 그 순간이었다.
“제안서.”
그녀의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그 제안서, 책상 위에 두고 가.”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내가 아닌, 내 손에 들린 제안서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Yes’가 아니었다. 하지만 ‘No’도 아니었다. 나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얼음 성벽에, 작지만 의미 있는 균열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나는 말없이 책상 위에 제안서를 올려놓고 대표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는 순간,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10분이라는 시간이 마치 1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박 부장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근처 카페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최선을 다했다. 후회는 없었다. 이걸로 안된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을까.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로 온 메시지 한 통.
[서유진입니다. 방금 보내준 제안서, 검토했습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너무 빠른 피드백이었다. 거절 통보인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몇 가지 추가로 논의하고 싶은 부분이 있군요. 오늘 저녁 8시, 그랜드 엘리시안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보죠. 혼자 오시길.]
“……!”
나는 눈을 비볐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알테아 코스메틱의 대표, 얼음 마녀 서유진이 내게 개인적인 만남을 요청한 것이다. 그것도 회사가 아닌,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이건 단순한 추가 미팅이 아니다. 그녀의 숨겨진 의도는 무엇일까. 나를 시험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제안서 내용 외에 다른 무언가에 흥미를 느낀 것인가.
확실한 것은 단 하나.
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판의 중심에, 바로 내가 서 있었다.
페드로는 수표를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다시 봉투에 넣었다. 하지만 그는 진짜 프로였다. 돈만 보고 움직이지 않았다.“돈은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자네가 말한 그곳… 지도에도 없는 땅이야. 내 정보원들에 따르면, 몇 년 전부터 ‘솜브라 카르텔’ 놈들이 자신들의 마약 플랜테이션을 숨기기 위해 그 일대를 장악했지.운 좋게 카르텔을 피한다 해도, 원주민들이 외부인의 목을 따서 장대에 매달아 놓는 곳이야. 이건 자살 임무라고.”그는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이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내가 이 모든 리스크를 이해하고 있는지. 나는 ‘통찰의 '눈’을 사용해 그의 마지막 속내를 읽었다.[대상: 페드로 선장 (본명: 박두호, 55세)][상태: 강한 흥미, 은퇴 생활에 대한 권태감][핵심 욕망: 자신의 모든 경험을 쏟아부을, 마지막 위대한 모험을 하고 싶다.][숨겨진 정보: 10년 전, ‘솜브라 카르텔’과의 교전에서 자신의 팀원 대부분을 잃은 뼈아픈 과거가 있음. 그들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음.]역시나. 그에게 이 임무는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두 번째 서류 봉투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이 임무가 위험하다는 건 압니다. 그래서 최고의 보수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선장님께는 돈보다 더 확실한 동기 부여가 될 만한 정보도 함께 가져왔죠.”페드로가 의아한 표정으로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이카루스가 태산그룹의 서버에서 빼낸, 솜브라 카르텔의 최근 활동 지역 및 병력 배치에 관한 1급 기밀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장에는, 10년 전 그의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현장 지휘관의 현재 사진과 위치 정보가 정확
“내가 왜 당신의 복수를 위해 내 돈을 써야 하지?”[질문이 틀렸어. ‘왜’가 아니라 ‘어떻게’라고 물어야지. 어떻게 해야 이 미친 프로젝트의 리스크를 감당하고, 역사에 기록될 부를 손에 쥘 수 있을까, 하고.]화면이 바뀌었다. 칠흑 같던 어둠이 사라지고, 태산그룹의 내부망 구조도가 홀로그램처럼 펼쳐졌다.[이것이 태산의 방패다. 그리고….]이카루스의 말과 함께, 화면 속 방패에 수백 개의 균열이 생기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이것이 나의 창이지. 나는 당신이 투자할 돈을 지켜주는 것을 넘어, 당신의 수익률을 극대화시켜 줄 수 있어. 태산이 차세대 바이오 기술을 발표하기 0.1초 전에 그 정보를 빼내 당신에게 줄 수도
* 괴물들의 오케스트라마지막 메시지를 끝으로, 붉은색 텍스트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화면 속 ‘이카루스’ 캐릭터는 여전히 태양을 등진 채 미동도 없었지만, 그 존재감은 연구실의 공기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었다. 5년간의 증오와 외로움을 응축시켜 디지털 세상에 현현한 복수의 화신이었다.“윤호야…”윤세아는 모니터를 어루만지며, 동생의 이름을 하염없이 불렀다. 그녀의 눈물은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되찾은 희망과, 이제는 함께 싸울 수 있다는 결의에 찬 뜨거운 눈물이었다.나는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이카루스가 보낸 계약서 파일(ICARUS_CONTRACT.docx)을 열었다. 예상대로, 그것은 법률 용어로 가득 찬 딱딱한 문서가 아니었다. 간결한 코드처럼, 그의 의지와 조건만이 담긴 선언문이었다.첫 번째 조건은 누나, 윤세아 박사의 절대적인 안전 보장이었다. 물리적 위협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나에게, 디지털 세계의 모든 위협은 자신이 직접 막겠다는 선언. 이 조항만으로도 그의 모든 행동 원리가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두 번째는 태산그룹을 향한 디지털 전쟁의 총지휘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서유진도, 차강우도 아닌, 오직 나에게만 직접 보고하겠다는 조항은 그가 나를 단순한 메신저가 아닌, 이 전쟁의 지휘관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였다.그는 자신의 복수를 위한 칼이 되겠지만, 그 칼자루는 오직 나만이 쥘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마지막 조건은 섬뜩할 정도로 비장했다. 복수가 끝난 뒤, 자신을 ‘윤윤호’로 되돌리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말라는 것. 만약 약속을 어길 시, 프로젝트의
그는 인간의 감성을 지닌, 순수한 데이터 덩어리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의 모든 것은 복수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최적화되어 있었다.한참 동안 동생의 안부를 묻고 울음을 터뜨리던 윤세아는, 마침내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지만, 그 안에는 5년 만에 되찾은 삶의 이유가 빛나고 있었다.“윤호야, 이분은 김도윤 씨야. 우리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려는 분이야.”누나의 소개에, 이카루스의 시선이 비로소 내게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화면 속 캐릭터가 움직인 것은 아니었지만, 보이지 않는 감시 카메라가 내 영혼까지 스캔하는 듯한 기분이었다.나는 모니터를 향해 정중하지만 당당하게 말했다.“윤호 씨, 아니, 이카루스라고 불러야겠군요. 누나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희는 당신에게 일을 부탁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동맹을 제안하러 왔습니다.”나는 프로젝트 프로메테우스의 전모와, 태산그룹과의 전쟁이 불가피한 이유를 설명했다.“우리는 태산그룹과 전면전을 벌일 겁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디지털 세계의 가장 위대한 장군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자원과 무대, 그리고 당신이 그토록 원했던 복수의 기회를 제공하겠습니다.”내 제안에, 채팅창은 한동안 조용했다. 잠시 후, 날카로운 문장이 떠올랐다.[SYSTEM]: 복수? 말은 쉽지. 당신들 같은 ‘장사치’들은
그녀의 트라우마는 단순히 연구 데이터를 도둑맞은 수준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거대 기업의 음모에 의해 잃어버린, 피맺힌 원한이었다.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퍼즐 조각들을 맞춰나갔다. 그리고 하나의 가설에 도달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통찰의 눈’을 사용했다.[대상: 윤세아 (32세)][상태: 깊은 슬픔, 죄책감, 희미하게 피어나는 희망][핵심 욕망: 동생 윤윤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복수하고 싶다.][숨겨진 정보: 동생이 죽기 직전, ‘이카루스의 날개는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아’라는 암호 같은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이카루스의 날개는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아.’이카루스 신화에서, 이카루스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에 날개가 녹아 추락해 죽었다. 하지만 윤호는 그 운명을 거부했다. 이것은 유서가 아니라, 생존의 단서였다.“박사님.”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윤호 씨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게 무슨…!”“그는 자신이 제거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윤윤호’라는 존재를 세상에서 지우고, 완전한 유령, ‘이카루스’로 다시 태어난 겁니다.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고서요.”나의 가설에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희망이라는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이제는 확인해 볼 시간이었다. 우리는 헤르메스가 알려준, 그리고 윤세아와 윤호의 추억이 담긴 ‘아스가
역시나. 그는 이카루스의 충실한 문지기였다. 돈으로는 그의 입을 열 수 없다. 나는 전략을 바꿨다.“저는 이카루스를 잡으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국정원도, 경찰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과 싸우려는 사람이죠.”나는 그에게 프로젝트 프로메테우스의 개요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태산그룹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가 왜 이카루스의 힘을 필요로 하는지.“저는 이카루스에게 족쇄를 채우려는 게 아닙니다. 그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거대한 놀이터를 제공하려는 겁니다.태산그룹이라는 거대한 골리앗을 상대로, 그의 천재성을 마음껏 펼칠 무대 말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이카루스를 존경한다면, 그가 어둠 속에 숨어 재능을 썩히는 걸 원치는 않을 겁니다.”내 말에 헤르메스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나는 그가 이카루스에게 진 빚과, 그를 향한 존경심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그는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며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애썼다.마침내, 그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직접적인 정보는 못 줘요. 주는 순간, 나는 물론이고 당신도 그의 표적이 될 테니까. 대신 힌트를 하나 주죠.”헤르메스는 낡은 모니터 하나를 가리켰다. 화면에는, 지금은 서비스가 종료된 20년 전의 고전 온라인 게임 로고가 떠 있었다.“이카루스는 낡은 것을 버리지 않아요. 특히 자신의 첫 번째 날개는. ‘아스가르드의 마지막 비상’ 서버… 지금은 유령들만 떠도는 그곳에서 한번 기다려 봐요. 당신에게 날개가 있다면, 언젠가 태양을 볼 수 있을 테니.”‘아스가르드’, ‘날개’, ‘태양’. 모든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