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Forgotten sons 2

Author: 장순혁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02 15:43:15

“데이지, 데이지, 데이지!”

릴리가 손가락으로 데이지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 좀! 릴리! 또 혼난다고!”

데이지 역시 작은 목소리로 릴리에게 짜증을 냈다.

“하지만 심심한걸..”

릴리가 시무룩하게 말하자 데이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중에 놀아줄게. 지금은..”

데이지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우드가 말을 걸었다.

“데이지! 내일이 무슨 날이라고?”

데이지가 당황하며 느릿느릿 일어서면서 말했다.

“어, 저요? 음, 네, 어.. 내일은 축제죠. 네, 축제. 하하.”

어색한 데이지의 말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축제지. 축제 때만큼은 지금보다는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해라. 중요한 날이잖니. 안 그래?”

“그렇죠. 중요하죠. 축제니까요..”

데이지가 릴리를 째려보며 말했다.

릴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드의 말에

집중하는 척했다.

우드가 그런 데이지를 지적하며 말했다.

“릴리는 또 왜 째려보니? 이왕 일어난 김에 축제에 대해 설명해보렴.

나는 적어도 너가 나와 함께 보낸 시간들을

일부라도 기억하기를 바란단다.”

그러자 우드의 바로 앞자리를 늘 차지하는 자스민이

어김없이 손을 들었다.

“우드! 저요! 제가 말할래요!”

우드는 부드럽게 말했다.

“자스민? 나는 데이지한테 물어봤단다. 데이지, 대답해.”

자스민이 아쉽다는 듯이 손을 내렸고

릴리는 데이지한테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말했다.

“쟤는 한결같이 재수 없다는 말이지..”

‘적어도 자스민은 나한테 피해는 안 주잖아, 이 자식아.’

데이지는 마음속으로 이 시간이 끝나면 릴리를

두들겨 패주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말하기 시작했다.

“음.. 그러니까.. 축제가 시작되면 열 분의

선택받은 사제님들이 아기를 품에 안고 나타나죠.

그리고.. 교주님이 아기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시면서

기도를 해주시고...

선택받은 사제님들 중 한 분을 다음 교주로 정하시고..

사제들 중에서 열 분의 사제들을 선택하시고.. 그분들이 새로운 선택받은 사제님들이 되세요.

그리고.. 교주가 되지 못한 분들과 함께 신께 돌아가시죠.

어.. 끝?”

우드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끝?”

데이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했다.

“네.. 끝..”

우드가 데이지에게 말했다.

“그래. 잘했다, 데이지. 자리에 앉으렴. 나와 보내는 시간을

매일 흘려보내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데이지는 냉큼 자리에 앉으면서 옆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릴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쳤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옆구리를 부여잡는 릴리를 보자

통쾌해진 데이지.

우드가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데이지의 말에 살을 덧붙여서 설명하자면, 우리에게는

신님과 직접 대화가 가능하신 교주님과 교주님이 선택하신

열 분의 선택받은 사제님들, 그리고 우리 같은

일반 사제들이 있죠. 내일 있을 축제는 새로운 교주님과

새로운 열 분의 선택받은 사제님들께 축하를 드리고

전 교주님과 교주가 되지 못한 선택받은 사제님 아홉 분께

감사와 작별 인사를 드리는 취지에요.

데이지가 말했다시피 그분들은 신께 돌아가시니까요.

축제가 언제 시작되느냐면..”

자스민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축복의 기간이 끝나면요!”

우드가 말했다.

“그래, 고맙다. 자스민. 열 분의 선택받은 사제님들은

축복의 기간 동안 정성스레 신께 기도를 드려요.

축복의 기간은 최소 일 년부터 최대 십 년까지 지속되죠.

신께서는 그분들에게 아기를 내려주세요.

그분들은 그때부터 교주 후보가 됩니다.

교주님이 그분들 중 한 분을 다음 교주로 선택하시죠.

여러분에게 이번 축제는 특히 중요해요.

여러분이 지금 몇 살이죠?”

“열일곱이요!”

“그렇죠. 열일곱이죠. 여러분은 이제 자격을 얻은 겁니다.

내일 있을 축제에서 여러분들 중 열 명은

선택받은 사제님들이 될 거예요.”

자스민이 다시 한 번 손을 들며 말했다.

“우드! 저는 무조건 선택받은 사제님들이 될 건데요.

혹시, 만약에 혹시 안 될 수도 있잖아요?

물론 당연히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되겠지만,

어떻게 하면 더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까요?

아, 물론 농사짓는 일도 괜찮죠. 우드처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재밌을 것 같아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죠?”

우드가 웃으며 말했다.

“자스민, 무슨 뜻인지 알고말고. 여러분, 교주님은

신께 말씀을 듣고 선택받은 사제님들을 고르신답니다.

열심히, 진심으로 신께 기도하는 것.

그게 유일한 조건이죠. 물론 선택받지 못한다고 해도

여러분의 삶이 끝나는 건 아니에요.

여러분은 농사를 짓고, 동물들을 기르고,

혹은 저처럼 여러분들을 가르칠 수도 있겠죠.

농사를 짓는 것과 동물들을 기르는 것,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모두 우리를 살게 하는

기초가 된답니다.

그분들이 없으면 우리는 이 삶을 이어갈 수도 없죠.

우리가 매일 떠오르는 해를 보며

신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건

모두 그분들의 헌신 덕분이랍니다.

여러분들도 언젠가는 깨닫게 되실 거예요.

각자의 자리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랄게요.”

아이들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자! 이제 여러분을 위한 수업은 끝났습니다.

모두 내일 있을 축제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거 잊지 마시고

이만 끝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명씩 손을 잡고

같이 기도할게요.”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으며

우드는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데이지의 차례가 왔고 데이지는 우드의 손을 잡았다.

우드도 데이지의 손을 맞잡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데이지, 언제나 기도하고, 또 기도하렴.

아무리 힘든 일을 맞닥뜨려도 신께서 도와주실 거야.”

데이지가 슬며시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네. 우드, 고마웠어요.”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장순혁 중 º 단편   등대 5

    - 생선 창고 I남자를 따라 도착한 곳은 부둣가에서도 외진 곳에 있는 한 생선 창고.남자는 창고의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다.나도 남자를 따라 들어간다.창고 안에 들어서면,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한쪽 벽은 상자째 쌓여있는 생선.그 반대 벽에는 작은 책상과 의자들.남자가 문을 다시 닫는다.남자 : “이쪽으로.”남자는 책상으로 가서 앉는다.나는 책상 앞 의자에, 남자를 마주 보고 앉는다.남자는 책상 위의 공책을 들어 한참을 이리저리 넘겨본다.그러다 마침내 찾은 듯, 책상에 공책을 펼쳐 내려놓는다.내가 볼 수 있게 공책을 돌려준다.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남자.담배와 라이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하얀 연기를 내뱉으며 동시에 말한다.남자 : “이연우.. 이현우 동생, 맞지?”나는 공책을 보며 대강 답한다.나 : “예.”공책에 적혀있는 건 내 신상정보다.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학력, 그리고 가족관계서.아버지, 사망.어머니, 사망....이상하다.가족관계서에 나는 외동으로 적혀있다.형이 적혀있지 않다.나 : “이거..”내 말을 끊고 남자는 묻는다.남자 :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나 : “..여기로 오라던데요?”남자 : “누가?”나 : “전화 걸어보니까요.”나는 품속에서 너절한 서류를 꺼내 남자에게 건네준다.남자는 서류를 읽는다.난 책상 위의 담배를 집고 남자를 따라 담배를 피운다.남자는 그런 나를 흘깃, 바라봤다가 다시 서류에 눈을 돌린다.곧이어 서류를 내려놓고는남자 : “이상하네.”나 : “이상하긴 하지.그나저나 너는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뼛속까지 스며든 내 반골 기질.남자 : “꼬우면 너도 반말하고.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나 : “그렇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왜 내가 외동으로 적혀 있느냐야, 이 가족관계서에.”남자는 나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남자 : “형한테 아무 얘기도 못 들었냐?”나 : “그렇게 친하진 않았거든.”

  • 장순혁 중 º 단편   등대 4

    - 오천항오천항은 생각보다 한산했다.하긴, 생선잡이 배들은 모두 새벽이 되자마자 나갈 테니까.오후 한시인 지금은생선을 잡으러 나갈 시간도생선을 잡으러 나갔던 배가 돌아올 시간도 아닌 것은 분명했다.부둣가에는 나가지 못한 배들, 쌓인 생선들을 손질 중인 아줌마들, 손수레에 얼음을 옮기며 이곳저곳 바쁘게 다니는 남자뿐이었다.그 와중에 홀로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오천항 끄트머리에멀거니 선 나.이곳저곳 고개를 돌려 둘러본다.그러나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등대지기 면접을 보러온 것 같은사람들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나 (생각) : ‘언제 온다는 거야?’그때 얼음을 옮기던 남자가 내 앞에서 넘어진다.수레에서 얼음이 요란스럽게 쏟아진다.남자는 중얼거린다.남자 : “에이씨, 진짜..”남자는 바닥의 얼음들을하나하나 줍기 시작하고,그 모습을 보던 나는남자를 도와 얼음을 수레에 담아준다.남자가 가늘게 웃으며 말한다.남자 : “아이고, 감사합니다.”나 : “별말씀을요.”다시 한번 허리를 굽히고 얼음을 집으려 할 때 남자가 내게 조용히 묻는다.남자 : “이름.”나 : “..예?”남자가 나를 보지도 않은 채얼음을 모으며 다시 묻는다.남자 : “이름.”나는 그런 남자를 바라본다.겉으로 보기에는 쓰러진 얼음을 요란스레 다시 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나는 이내 대답한다.나 : “..이연우요.”남자는 내 이름을 듣고잠시 동작을 멈춘다.이내 주변을 살펴보던 남자.수레에 도로 담은 얼음을 옆 바닷물에 쏟아버린다.바닥의 얼음들도 발로 쓸어 넣는다.나도 손에 쥐고 있던 얼음들을남자를 따라 바다에 집어 던진다.남자는 다시 손수레의 손잡이를 잡고, 남자 : “따라와.”남자는 조용히 말하고는, 뛰어가듯이 걷는다.나도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남자의 장화 모양을 따라오천항 바닥에 발자국들이 새겨지고그 발자국들을나는 말없이 바라보며남자를 따라 간다.

  • 장순혁 중 º 단편   등대 3

    - 다시, 장례식엄마가 죽었다.엄마의 장례식장은 아버지의 장례식장과 달랐다.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나는 혼자 앉아 엄마의 사진을 바라봤다.울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형과 다르니까.기도하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정말 형과 다르니까.다르고 싶었던 건지, 달라지고 싶었던 건지.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희미하게는 같았다.손님도, 통곡도 없이 엄마의 장례식은 끝이 났다.나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집 문 앞에는 세금고지서, 우편, 광고지 등등이 쌓여있었다.그것들은 모조리 집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거실 바닥에 대충 앉아 하나하나 살펴보던 중, 흰 봉투가 하나 끼워져 있음을 알았다.고개를 갸웃하며, 내용물을 꺼냈다.찢어진 것을 테이프로 하나하나, 너덜너덜하게 감은 종이였다.펼쳐보았다.그 언젠가, 형이 내게 준 서류였다.내가 찢어버렸던, 등대지기를 구한다는 서류.내용은 같았다.[등대지기 모집.장소 - 서해 중 하나의 섬.대상 – 스무 살 이상의 누구나.모집 인원 – 00명.월 급여 700만원.하는 일 - 등대 보수 및 유지.- 6개월 간격으로 교대 근무.- 처음 계약서를 작성하고 섬으로 출발하기 전 3개월 치 지급.- 다음 차례와 교대할 때 나머지 3개월 치 지급.- 생필품 및 각종 생존 물자 제공.- 인터넷 x, 전화 x, 편지 x.- 외부와 연락할 방법은 없음.- 신청, 면접, 등대를 다루는 일주일간의 교육. (교육비 별도 제공)]그러나 달랐던 것은 맨 밑 여백에 적힌 두 문장의 글.형의 글씨체로 적힌,+82 050 – 3967등대로나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뚜루루뚜루루달칵남자 목소리 : “나흘 후, 십삼 시, 서해 오천항.”달칵뚜뚜뚜전화가 끊겼다.나는 한동안 가만히 앉아있다가, 불현듯 일어나 낡은 가방에 옷가지들을 쑤셔 넣었다.그러다, 가방을 팽개치고 지갑만 챙겨 집 밖으로 나섰다.어차피

  • 장순혁 중 º 단편   등대 2

    - 병이 짙어지다 II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병실에 갔더니 형이 어떤 서류를 읽고 있었다. 내가 옆자리에 털썩, 하고 앉으면 형은 말없이 서류를 접어 품에 넣었다. 나는 굳이 묻지 않았고, 형도 굳이 말해주지 않았다. 그 날도 그렇게 지나가는 듯했다. 내가 병실을 나갈 때, 형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놀랐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며 형을 돌아보니 형은 품속의 서류를 내게 건넸다. 그러고는 나보다 먼저 병실을 나갔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서류를 펼쳐봤다. [등대지기 모집. 장소 - 서해 중 하나의 섬. 대상 – 스무 살 이상의 누구나. 모집 인원 – 00명. 월 급여 700만원. 하는 일 - 등대 보수 및 유지. - 6개월 간격으로 교대 근무. - 처음 계약서를 작성하고 섬으로 출발하기 전 3개월 치 지급. - 다음 차례와 교대할 때 나머지 3개월 치 지급. - 생필품 및 각종 생존 물자 제공. - 인터넷 x, 전화 x, 편지 x. - 외부와 연락할 방법은 없음. - 신청, 면접, 등대를 다루는 일주일간의 교육. (교육비 별도 제공)] 무슨 뜻이지? 나보고 하라는 걸까? 엄마는 자기가 돌볼 테니? 기분이 나빴다. 언제까지 아빠 행세를 할 건지. 나는 서류를 찢어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버렸다. 엄마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병실 밖으로 나섰다. 병실 밖, 벽에 형이 기대고 서 있었다. 내게 뭔가를 말하려는 듯싶었지만, 나는 무시하고 발길을 돌렸다. 형은 구태여 나를 잡지 않았다, 아니, 잡지 못했던 걸까. 뭐,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형을 본 적이 없다. 형은 소리도 없이 존재를 감췄다. 엄마의 옆에는 그때부터 나만 있었다, 나만. 형도 없이. 나만. 엄마와 함께 있었지만 고독했다. 외로웠고, 괴로웠다.

  • 장순혁 중 º 단편   등대 1

    - 등대 (prologue)[등대지기 모집.장소 - 서해 중 하나의 섬.대상 – 스무 살 이상의 누구나.모집 인원 – 00명.월 급여 700만원.하는 일 - 등대 보수 및 유지.- 6개월 간격으로 교대 근무.- 처음 계약서를 작성하고 섬으로 출발하기 전 3개월 치 지급.- 다음 차례와 교대할 때 나머지 3개월 치 지급.- 생필품 및 각종 생존 물자 제공.- 인터넷 x, 전화 x, 편지 x.- 외부와 연락할 방법은 없음.- 신청, 면접, 등대를 다루는 일주일간의 교육. (교육비 별도 제공)]- 아버지의 죽음단순히 말하자면 안타까운 사고였다.내 아버지의 죽음은.여덟 살과 아홉 살 사이, 그 언저리에서 내가 잰걸음을 놀릴 무렵에 일어난, 사고.초등학교 교실에서 방과 후에 남아 받아쓰기를 연습하던 나에게담임 선생님께서 다가와근처 가까웠던 병원으로 가야 한다며,내 손을 잡아 이끌고 향하신.그 병원에서 아버지는 누워계셨다.아니, 쓰러져계셨다.아니, 아니다.당시의 나는 그 둘의 차이를 알지 못했으니누워계신 동시에 쓰러져계셨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아버지.나의 아버지.언제나 따스한 웃음을 지으시며나와 눈을 마주치시고는내게 오늘 학교는 어땠냐고,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냈느냐고,내게 물으시던나의 아버지.빨간 피로 범벅이 되어 웃음을 짓지도 않으시고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시던 아버지.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삐빅거리는 기계음만 들려주신 아버지.온 가족이 함께 모여 저녁 식사를 하며같이 보곤 했던 뉴스에, 아버지가 아침마다 펼쳐보시던 신문에 나오곤 했던,그래, 뉴스나 신문에서 매일 같이 나왔던음주 운전자가 차로 치어버린 불쌍한 피해자.그런 피해자가 되어버리신 아버지.아버지는 그 수없이 많은 기삿거리 중 하나였다.아마 그 밤,다른 이들의 저녁 식사 시간의자그마한 이야깃거리가 되어버리신나의 아버지.남겨진 가족들은 그 피해자의 가족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다시 말해 특

  • 장순혁 중 º 단편   아픔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아프다고로 나는 살아있다아픔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다아프고 나서야 우리는 해당 부위의 존재를 명명백백하게 느낀다아프기 전에, 우리는 그 뼈를, 근육을, 피부를 느낄 수 있었을까?사실상 아픔이란 그들의 비명일지도 모른다자기도 이곳에 존재한다고,자기도 이곳에서 숨 쉬며 살아 있다고,자기도, 자기도 살아 있다고내 몸이지만 역겨움이 올라온다동족혐오일까?자기와 비슷한 걸 보면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자기 자체를 싫어하는 것과 같지는 않다되려 더 나을 거다나는 나 자신을 싫어한다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뽑는다면 압도적으로 내가 뽑힐 거다내가 나를 만난다면 난 죽기 직전까지 주먹을 날리고,마지막 한방을 날려 죽여버릴 것이다그러나 나는 고통을 두려워한다그렇기에 죽지 못했다죽음과 고통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밧줄이 목을 조이는 그 잠깐의 고통조차 나는 참아내지 못했다아픈 건 싫으나 죽고는 싶다참으로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불이 붙기 위해서는 장작이 바짝 마를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갓 잘린 나무는 수분기가 많아 불을 붙여도 불이 붙지 않고 연기만 매캐하게 풍겨나온다나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그러나 언제 마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나조차도그렇기에 충분한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어야 한다그러니 지금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그러나 이런 이성적인 판단은 지금껏 지겹게 내리지 않았는가고작 그런 판단들로 만들어진 결과물이 지금의 나다복잡하게 단순한, 지금의 나때로는 나를 위해 나를 배재할 수 있어야 한다끊긴 밧줄이 눈에 들어온다인터넷으로 주문한 밧줄은 생각보다 튼튼하지 않았다현대 사회에게는 필수인 인터넷의 문제다모든 걸 쉽게 살 수 있는 대신,모든 것의 가치는 옅어진다그렇다고 해도, 직접 만지고 무게를 가늠해봤자 그 본질을 알아챌 수 있지는 못하니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모든 것이 그렇다본질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그러나 그 본질을 알아볼 수

  • 장순혁 중 º 단편   현실 같은 꿈

    퇴근 후 집에 돌아왔다. 보글보글 된장찌개 끓는 냄새와 아빠를 부르며 현관으로 달려오는 사랑스러운 내 딸이 나를 반긴다. 이윽고 아내도 내게 와 오늘도 고생했다고 안아준다. 평범하지만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 이게 나의 평범한 현실이었다. 아름답고, 달콤한 현실. 나는 밥을 먹고, 씻고,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와 잠시 놀아준 뒤, 내일 출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다. 침대에 누워 그렇게 얼마나 잠에 들었을까? 어렴풋이 잠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켜며 깨어난다. 왠지 모르게 두 눈이 따가울 정도로 시리다. 잠시 눈을 감고, 시린 눈이

  • 장순혁 중 º 단편   자살 카페 정모 14 [完]

    - 에필로그지하실.듀크가 수술대 위의 규리를 내려다보며담배를 피운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듀크에게 다가온다.남자 : 누님, 진행할까요?듀크는 무감정한 얼굴로,듀크 : 어, 상하기 전에 가져다 줘야지.돈은 그 계좌로 받는다고 그래.남자와 같은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의료 장비와 함께 들어온다.듀크는 말없이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밖으로 나간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그 뒤를 따른다.다른 방으로 들어온 듀크와 남자.듀크는 의자에 앉아, 다른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남자는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여

  • 장순혁 중 º 단편   자살 카페 정모 3

    - 조사오카는 더 이상 테이프를 떼지 않고 만지작거리고 있다.군터가 오카에게 말을 건다.군터 : 일단 다 뜯을까요?오카는 귀찮다는 표정으로오카 : 창문 쪽은 제가 보고 있을게요.문이 열리는지나 가서 한 번 보세요.군터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가,군터 : ..네.군터는 돌아서서 문 쪽으로 향한다.규리는 군터와 오카를 번갈아 바라보다가,군터와 함께 문으로 향한다.문 틈새를 막아놓은 테이프를 군터와 규리가 함께 다 뗀다.군터가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돌려본다.그러나 미동도 하지 않는 문.밀어 봐도, 당겨봐도 움

  • 장순혁 중 º 단편   상자와 편지 4

    프레드가 사는 곳에서그롬이 사는 곳까지는말을 타고 달려도 일주일이 넘게 걸린다.그간 프레드는 몇 번이고그롬의 집으로 들이닥칠까,당장 그롬의 집으로 갈까,괴로워하며 일주일간 그롬의 답장을 기다렸다.상자를 다시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는 프레드.꽉 상자를 닫은 채 서랍장 맨 위에 넣어놓았다.조지에게 편지를 부탁한 지딱 일주일 후,누군가 프레드의 집 문을 두드렸다.프레드는 지체 없이 문을 열었고,문 앞에는 조지가 웃으며 서 있었다.또 하나의 상자를 들고."선생님, 좋은 아침입니.."조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