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지태하의 부계정에 올라온 ‘오랜 이별 끝의 재회’일기를 발견하고서야, 안제인은 결혼한 지 3년이 된 남편이 줄곧 자기 여동생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안제인이 길어야 한 달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날, 지태하는 첫사랑의 귀국을 축하하는 모임이 열린 샤브샤브 식당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앉아 있었다. 안제인의 전화를 본 지태하는 핸드폰을 조용히 뒤집어 식탁 위에 엎어 두었다. 지태하는 말했다. “나경이가 이번에 어렵게 돌아왔잖아. 이번 달은 내가 나경이 곁에 좀 있어 줄게.” 항암 치료를 받고 토하다가 정신을 잃은 날, 지태하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경이와 모교의 나무길을 걸었다. 어제 일처럼 모든 감정이 되살아났다.] 안제인이 눈앞에서 피를 토할 만큼 아파했을 때도, 지태하는 급히 자리를 떴다. “나경이 키우고 있는 강아지가 아프대. 내가 데리고 병원 좀 다녀올게.” 그해 12월 31일 밤, 안제인은 병실에서 혼자 숨을 거두었다. 그때 지태하는 ‘가족’이라는 사람들과 하늘을 수놓은 화려한 불꽃 아래에서 기념하는 잔을 들고 있었다. 숨을 거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안제인은 운명의 갈림길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지태하는 붉어진 눈으로 빗속에 뛰어들어 안제인을 붙잡으려 했다. “이번 생에는 절대 널 저버리지 않을게!” 안제인은 담담히 몸을 돌렸다. “비켜 주세요. 지태하 씨의 이번 생에 저는 함께하지 않을 겁니다.”
View More지태하는 예배당 옆 뒤편의 커다란 참나무 아래 서 있었다. 거친 나무껍질에 등을 기대고서야 무너질 것 같은 몸을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손에는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청첩장이 들려 있었다.그 안에 적힌 두 사람의 이름이 눈을 찔렀다.안제인, 주재경.정말 안제인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지태하는 미친 사람처럼 안제인의 흔적을 찾아다녔다.하지만 안제인은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연락처도 모두 바꾸었고, 국내에서 다니던 학교의 동기나 지인들조차 정확한 행방을 거의 몰랐다. 외국으로 갔고, 잘 지낸다는 소문만 어렴풋이 돌았다.안제인은 세상에서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어쩌면 일부러 지태하의 인생에서 자신이 존재했던 흔적을 모두 지워 버린 사람 같았다.지태하는 일어서 보려 했다. 일에 몰두해 보기도 했다. 분주함으로 자신을 마비시키려 했다.하지만 깊은 밤에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는 지난 생의 안제인만 떠올랐다.자신을 기다리던 눈빛, 위 통증을 참으며 창백하게 질린 얼굴, 냉장 보관함 안에 누워 있던 차갑고 여윈 모습.또 이번 생, 그 비 내리던 밤 자신을 밀어내던 눈의 무심함.두 시간대의 기억은 지태하의 마음을 찢어 놓았다. 죄책감과 후회의 통증은 밤낮으로 갉아먹었고, 지태하는 안제인처럼 새 삶을 시작할 수 없었다.지태하의 시간은 안제인이 죽었던 지난 생의 그 밤에 멈춰 있었다.며칠 전, 옛 지인이 SNS에 안제인의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글을 올리기 전까지는.지태하는 바로 가장 빠른 비행기표를 끊어 안제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오는 내내 머릿속은 어지러웠다.멀리서 한 번만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말 잘 지내는지, 행복한 모습인지 확인하고 나면 안제인을 놓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도 포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예배당 뒤쪽 어둑한 자리에서, 햇살 속의 안제인이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다른 남자를 향해 확신 있게 걸어가는 모습을 본 순간.이미 무뎌졌다고 믿었던 마음은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아팠다.식이
안제인이 지원한 학교는 엄격한 면도 있었지만, 학생들의 자율성 또한 존중하는 곳이었다.그녀가 선택한 전공도 자신의 흥미와 적성에 잘 맞았다.지도교수는 해당 분야에서 이름난 여성 교수였다. 눈빛은 예리하고 인내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안제인을 발견하고 눈여겨보았다.“안제인 학생은 타고난 연구자예요.”한 세미나가 끝난 뒤, 교수는 따로 안제인을 남겼다. 눈에는 제인을 향한 칭찬을 감추지 않았다.“생각하는 방식이 독특해요. 들뜨지 않고, 깊이 들어갈 줄 알아요. 이 방향으로 집중해서 계속 파고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교수의 인정은 안제인에게 큰 힘이 되었다.안제인은 공부와 연구에 온 힘을 쏟았다. 도서관, 실험실, 기숙사를 오가는 생활은 단순했지만 전에 없이 만족스러웠다.지식을 쌓고 사고의 폭을 넓혀 가는 과정이 좋았다.노력한 만큼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성취감도 좋았다.가끔 늦은 밤 실험실을 나와 외국의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고요한 행복이 밀려왔다.경제적으로도 임승기 부모의 도움이 순조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했다. 안제인은 노력의 결과로 장학금과 연구 조교 자리를 차례로 얻었다. 생활은 사치스럽지 않았지만, 혼자서 학업에만 집중하기에는 충분했다.낯선 도시도 조금씩 탐험했다. 박물관에 가고, 음악회를 듣고, 교외로 걸어 나갔다.지난 생에 한나경이 SNS에 올렸던 명소들도 보았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지만 뜻밖의 아름다움을 가진 작은 길도 만났다.드넓은 바닷가에 서서 짠내나는 바람을 맞을 때, 문득 이해가 갔다. 지난 생의 지태하가 왜 외국에서 넓은 세상을 보고 온 한나경을 오래 잊지 못했는지...그때 안제인은 생존의 진흙탕 속에 갇혀 있었다. 빚을 갚고, 병을 견디고,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자유’와 ‘사랑받는 삶’을 올려다보았다. 매일의 마모와 비교 속에서 마음이 변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안제인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과거에 관한 생각을 부드럽게 털어냈다.그 모든 것은 이미 지
한여름 시끄러운 매미 소리는 끝없이 맹렬하게 이어졌다. 마지막 시험 종료종이 울리면서 임승기의 수능시험은 끝났고, 거의 1년 가까이 이어졌던 안제인의 과외도 마침표를 찍었다.점수 발표는 아직 한참 동안 기다려야 하지만, 시험장을 나오는 임승기의 한결 홀가분한 얼굴과 숨기지 못하는 자신감만 보아도 결과가 나쁘지 않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임승기의 부모는 아주 기뻐했다. 안제인에게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동안의 과외비를 전부 정산해 주었고, 감사 인사라며 두툼한 봉투까지 따로 건넸다.안제인은 통장에 쌓인, 자신에게는 제법 많은 돈이라 부를 만한 금액을 바라보았다. 마음은 평온했다.꼼꼼히 계획을 세운 뒤, 그중 3분의 1쯤을 익명으로 장미희 계좌에 입금했다.그 돈이면 집안의 급한 빚 일부를 갚을 수 있을 것이고, 부모님이 당장 벼랑 끝에 서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낳고 길러 준 은혜라는 마지막 매듭을 나름대로 정리한 셈이었다.그 일을 끝내자 마음이 전에 없이 가벼웠다.남은 돈으로는 선명한 미래를 계획했다.유학.지난 생의 안제인은 빚과 병으로 인한 통증, 숨 막히는 관계에 갇혀 있었다. 안제인의 세상은 좁고 어두운 모서리뿐이었다.반면 한나경은 본래 자신의 것도 아니었던 돈을 들고 마음껏 외국으로 떠났다. 더 넓은 하늘을 보았다.안제인이 한나경을 부러워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다만 그때의 부러움에는 너무 많은 억울함과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이번 생에는 안제인이 직접 떠날 것이다.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고, 걸어 다니고, 아직 보지 못한 풍경을 보고, 오롯이 자신 앞에 펼쳐진 인생을 경험할 것이다.그리고 임승기 부모에게 조심스럽게 유학 생각을 털어놓자, 예상 밖으로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그거 정말 좋은 일이에요. 제인 씨는 성적도 좋고 성실해서 밖에 나가도 충분히 잘할 거예요.”임승기의 어머니가 손을 꼭 잡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우리도 승기를 몇 년 정도 외국에 보내려고 했어요. 남자애도 좀 독립해
지태하는 포기하지 않았다.처음의 혼란이 지나자 더 집요한 생각이 자리 잡았다. 즉, 안제인을 반드시 되돌려야 했다.운명처럼 다시 찾아온 기회였다. 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칠 수 없었다.지태하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안제인의 행방을 알아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안제인이 임승기라는 고등학생의 과외를 맡고 있으며, 임승기의 집에 머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지난 생과 완전히 달랐다.불안은 지태하의 마음속에서 무섭게 자랐다.그리고 안제인도 돌아왔다는 확신은 더 강해졌다.‘내가 이전처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돼!’‘먼저 다가가야 해!’‘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고, 내 마음도 달라졌다고 제인에게 꼭 말해야 해!’그날 저녁, 지태하는 한울대학교에서 고급 주택가로 이어지는 길목에 일찍부터 서 있었다.오늘 안제인이 수업이 있고, 끝나면 임승기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이 나타났을 때, 지태하는 숨을 멈췄다.안제인은 흰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백팩을 메고 있었다. 지난 생의 늘 슬픔과 피로가 배어 있던 모습과는 달랐다.“제인아!”지태하는 빠르게 다가가 앞을 막았다.안제인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를 보고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무슨 일이야?” 목소리는 담담했다.“우리 얘기 좀 하자.”지태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뜨거운 시선으로 안제인을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급박함과 조심스러운 확인이 뒤섞였다.“너도 나랑 똑같이 과거로 돌아온 거지? 기억하지? 그렇지?”안제인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하지만 그 침묵은 지태하에게 대답처럼 느껴졌다.복잡한 감정이 솟구쳤다.“우리 둘 다 돌아왔다는 건...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야.”지태하는 한 걸음 다가섰다. 목소리는 격해졌다.“내가 지난 생에 너한테 잘못했어. 말도 안 되게 잘못했어. 그런 글을 쓰는 것도 잘못 됐고, 너를 외면한 것도 나빴어. 마지막에 너를 그런 식으로 혼자 두지 말아야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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