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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손유신
청묵이 입을 열었다.

“승상부의 둘째 아가씨와 태자 전하에 관한 일입니다. 그 사연은 삼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초군혁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청묵은 말을 이어 갔다.

“그해 태자 전하께서 다리를 다치셨을 때, 본래 혼약을 맺기로 되어 있던 셋째 아가씨 소명월이 갑자기 자취를 감췄습니다. 승상부에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같은 적녀인 둘째 아가씨를 대신 태자 전하께 혼인시키기로 했고, 그렇게 두 분은 혼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 뒤 둘째 아가씨는 태자 전하께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는 동안 곁을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태자의 다리가 회복되고, 실종됐던 소명월이 다시 나타난 거군.”

초군혁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허영심에 눈이 먼 여자였군.”

“예. 실제로도 그런 이야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소명월 아가씨는 자신이 사라져 있던 지난 이삼 년 동안 태자 전하를 위해 명의를 찾아다녔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은거한 신의를 스승으로 모셨다고도 했고요. 실제로 돌아온 뒤 어느 정도 의술을 익힌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태자 전하께서 크게 감동하셨고, 많은 사람들 역시 그녀에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여겼습니다.”

“어리석군.”

초군혁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분노를 느낀 청묵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예,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소명월 아가씨의 말을 철석같이 믿으셨습니다. 심지어 소운금 아가씨가 소명월 아가씨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기까지 했고요. 소명월 아가씨께서 돌아온 뒤에는 소운금 아가씨를 탓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혼인하는 날에는 소명월 아가씨를 같은 시각에 시집보내고, 정문까지 함께 들어오게 할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청묵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마음속의 두려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도무지 왕야가 왜 소운금의 일에 이토록 관심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왕야의 고독을 풀어 주었다는 말도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감히 묻지는 못했다.

그는 남국 제일의 전신(戰神)이자 현 황제의 막내동생이었다.

초군혁이라면 승상부는 물론 태자부의 일조차 말 한마디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자신이 어찌 함부로 캐물을 수 있겠는가.

청묵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참 뒤, 초군혁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아직 정비도 맞이하지 않았으면서 벌써 총애하는 첩을 앞세워 부인을 짓밟을 생각이나 하다니. 태자는 덕이 그 자리에 미치지 못하는군.”

청묵은 재빨리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둘째 아가씨는 정이 깊고 의리도 있는 분인데 저런 대우를 받다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여인은 이미 혼약을 맺은 몸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외모도 평범하고 체구까지 비대하지 않았던가.

그게 아니었다면 괜한 기대를 품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수년 동안 왕야가 여인에게 이토록 관심을 보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초군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선향루에서 그 여인을 만나겠다.”

“예.”

*

다음 날 아침.

소운금은 시끄러운 말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도 멀쩡하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네.”

“요 며칠 눈이 워낙 많이 왔잖아. 눈이 두껍게 쌓인 덕분에 다치지 않은 게 아닐까?”

“눈이랑 무슨 상관이래? 원래 살찐 사람은 잘 안 다치는 법 아니겠어?”

몇몇 시녀들이 일부러 비웃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미 잠에서 깬 소운금은 그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태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몸을 정돈한 뒤 창가에 놓인 동경 앞에 앉았다.

그리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반듯한 이목구비에 하얀 피부. 그리고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

이렇게 살이 오른 상태에서도 이 정도라면, 이삼십 근만 빼도 상당한 미인이 될 것이 분명했다.

소운금은 다시 자신의 맥을 짚어 보았다.

독은 이미 해독된 상태였다.

앞으로는 몸이 더 이상 불어나지 않을 것이고, 식습관만 잘 관리하면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정상 체형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문밖에서 동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소운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거울 속 자신에게 머물러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아직 완전히 자라기 전부터 그녀의 이목구비는 이미 무척 아름다웠다.

그러니 소명월이 그녀의 외모를 망가뜨리려 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소운금은 낮게 웃었다.

이 세계에 오자마자 이렇게 큰 선물을 받았으니 자신도 조만간 제대로 답례를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동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오늘은 좀 괜찮으세요?”

그 목소리에는 어딘가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큰도련님께서 아가씨께서 깨어나시면 곧바로 서재로 오시라고 하셨어요.”

“안 가.”

소운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문밖에 있는 애들도 전부 돌려보내. 앞으로 내 곁에는 너 하나만 있으면 돼.”

동이는 순간 멍해졌다.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갈수록 제멋대로 구는구나.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더니, 일어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뜰 안의 시종들을 내쫓겠다는 것이냐? 그 아이들이 성실하게 너를 모셨는데 대체 무엇이 그리 못마땅했단 말이냐?”

소운금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 풍채 좋은 젊은 사내가 어느새 문가에 서 있었다.

“어제 그토록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벌을 받지 않겠다고 버티더니, 오늘은 나조차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냐? 네 눈에 아직 이 큰오라비가 있기는 한 것이냐?”

확실히 준수한 외모를 지닌 사내였다. 하지만 소운금은 한 번 쳐다본 뒤 곧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아니요.”

그 대답에 소준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너…”

“오라버니 눈에 제가 동생으로 비친 적도 없는데, 제가 왜 당신을 오라버니로 모셔야 하죠?”

소운금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자 소준연의 눈에 순간 놀라움이 스쳤다.

오늘의 그녀는 어딘가 이상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듣자 하니 어제 임 집사를 때렸다더구나?”

“맞아요.”

“그런데도 당당히 인정하는 것이냐? 임 집사는 어릴 적부터 우리 남매를 지켜본 사람이다. 비록 시녀라 해도…”

“그 사람이 제 사람을 때렸는데, 제가 왜 못 때리죠?”

소준연은 화가 치밀었다.

“어쩌다 이렇게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이 되었느냐.”

“제가 말이 안 통한다고요?”

소운금은 비웃음을 흘리며 마침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전 오라버니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기왕 오셨으니 분명하게 말하죠.”

“첫째, 어제 저는 정말 절벽에서 뛰어내렸고, 크게 다쳤어요. 태자 전하께서 제가 뛰어내리지 않았다고 한 건 거짓말입니다. 둘째, 설령 제가 뛰어내리지 않았다고 해도 사당에 가서 무릎 꿇을 생각은 없어요.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벌을 받아야 하죠? 셋째, 승상부의 시녀들조차 알고 있는 사실을 오라버니께서 정말 모르고 계셨을까요? 그저 모른 척하고 계신 거겠죠. 넷째, 예전의 저는 너무 어리석었어요. 오라버니와 아버지의 인정과 관심을 받으려고 애썼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알았어요. 소명월이야말로 오라버니와 아버지의 보물이라는 걸요. 그러니 앞으로 오라버니는 풍림원에서 지내시고, 저는 장미원에서 지낼게요. 우물은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다고 하죠. 서로 간섭하지 말고, 누구도 먼저 찾아가지 말자고요.”

한숨에 말을 마친 소운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걸음씩 소준연에게 다가갔다.

“마지막으로, 문밖의 시녀들이 그렇게 아까우시면 전부 오라버니 처소로 데려가세요. 할 말은 다 했습니다. 오라버니, 돌아가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문밖을 가리켰다.

그 눈빛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강압감과 짙은 짜증이 서려 있었다.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압박감에 소준연은 말문을 잃었다.

눈앞의 여인이 정말 자신이 알던 그 나약한 둘째가 맞단 말인가?

“너, 네가 어떻게 그런 패륜적인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소운금은 뜨거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오라버니께 여쭤볼게요.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오라버니와 아버지, 그리고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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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옥에서 돌아온 독비   제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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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운금은 자신이 어떻게 승상부로 돌아왔는지 알지 못했다.분명 조금 전까지는 눈밭에 쓰러졌던 것 같은데, 다시 눈을 떠 보니 어느새 따뜻한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아가씨, 드디어 깨어나셨군요…”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에 소운금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녀는 침상 곁에 있는 어린 시녀를 힐끗 바라보았다.기억 속에서 이 아이는 자신의 곁을 지키는 시녀, 동이였다.동이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말했다.“아가씨, 저도 태자 전하께서 아가씨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하셨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분은 태자 전하시잖아요

  • 지옥에서 돌아온 독비   제2화

    찬 바람이 휘몰아치고 눈발이 흩날렸다.가파른 절벽은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절벽 아래 역시 두터운 눈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 눈은 한 소년의 옷자락마저 흠뻑 적셔 놓고 있었다.마치 무언가의 소리를 들은 듯, 소년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가 눈부시도록 선명한 붉은빛이 시야에 들어왔다..“왕야, 시신입니다.”소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무에 걸린 채 아무런 생기 없이 늘어진 여인을 바라보며 그가 낮게 말했다.“위에서 떨어진 것 같습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밭 위로 또 다른 흰옷

  • 지옥에서 돌아온 독비   제1화

    “소운금, 내가 분명 약속하지 않았느냐. 설령 월이가 너와 함께 시집온다 해도 태자비의 자리는 오직 네 것이라고. 이 정도면 너도 만족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런데 어째서 또 이런 소동을 벌이는 것이냐?”끝없이 펼쳐진 절벽 위, 천 년은 족히 되었을 고목 한 그루가 눈보라 속에 외로이 서 있었다.그 곁에서 소운금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그는 남국의 태자이자, 그녀의 정혼자였다.“당신도 제가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나요?”초현진은 노골적으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내가 월이를 들이겠다고 한 뒤로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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