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도진과 이수는 본능처럼 동시에 몸을 돌려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그러나 세자는 그 둘을 바라보는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조용히 움직이는 눈빛 속에는 말로 담지 못한 감정이 서늘한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침묵은 길지 않았으나 세 사람의 가슴에는 아주 길게 흘러갔다.세자는 이수에게도, 도진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곁을 지나쳤다.그러나, 그 지나침 속에는 수많은 말이 담겨 있었다.그리고, 그 무언의 아침이 끝나자궁에서 눈 밝은 자들은 또 다른 바람을 맡기 시작했다.세자가 곁을 스쳐 지나간 뒤,회랑에는 잠시 아무도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이수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세자의 옷자락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감히 눈을 들지 못했다.옆에 선 도진 또한, 언제나와 같은 자세로 예를 취하고 있었지만그의 어깨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멀어져 가는 세자의 뒷모습에는 단 한 마디의 말도 남지 않았다.그러나 말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빈마마.”먼저 몸을 가다듬은 쪽은 도진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이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수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방금 전까지도 대비전에서 들었던 말들이 아직 귀 안에서 잔향처럼 맴돌고 있었다.궁의 바람이 거칠어진다.눈들이 너를 보고 있다.누구의 마음에도 그늘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그 말들이, 방금 눈앞을 지나간 세자의 침묵과 함께 묵직하게 겹쳐졌다.“많이… 곤란하셨사옵니까.”도진의 목소리는 낮았다.감정을 내세우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그 낮음 속에 고여 있었다.이수는 잠시 대답을 찾지 못하다가,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경께서 보시기에는… 어떠하였사옵니까.”마치, 자신이 어떤 얼굴로 서 있었는지 그의 눈을 빌려 확인하고 싶다는 듯한 물음이었다.도진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눈앞의 그녀는 이미 마음을 추스른 얼굴이었지만,조금 전 세자의 기척이 스쳐 지나갈 때 미세하게 굳어버린 그 표정
대비전의 문이 열리자 그 안의 공기는 더 서늘하고 단단했다.향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으나 향이 주는 편안함은 없고오히려 긴장감을 조종하는 듯한 기운이 감돌았다.대비가 앉아 있었다.그 눈은 늘 한결같아 보였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더 깊은 바닥이 드러난 듯했다.이수는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소첩, 대비마마를 뵈오니 삼가 평안을 기원하나이다.”대비의 시선이 느리게 이수에게 닿았다.그 한순간이 유달리 길었다.“…어제 회랑에서 있었던 일, 빈 또한 알고 있겠지.”이수의 심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녀는 대답을 준비하려 했으나 대비가 이어 말했다.“소문은 빠르다. 그날 회랑의 바람이 어떤 이들에겐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나… 내명부는 다르다.빈의 표정 하나, 저하의 걸음 하나가 하루 만에 전각 전체를 흔든다.”이수는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노력했다.“…소첩의 경솔함으로 궁이 시끄러워졌다면, 머리 숙여 사죄드리옵니다.”대비는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았다.“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면 그 흔들림은 누구보다 먼저 눈 밝은 자들의 관심에 오르기 마련이다.빈의 뜻이 어떠했든, 저하의 마음이 어떠했든 궁은 이미 조용치 않다.”그 말은 이수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살짝 스쳤다.대비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빈. 너는 누구의 마음에도 그늘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말의 의미가 너무 명확했다.심지어, 그 말이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수는 모를 수 없었다.세자. 그리고, 도진.숨이 가라앉지 않았다.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옷자락이 스치는 기분이 들었다.대비는 마지막으로 짧게 덧붙였다.“오늘도 너를 살피려는 눈들이 많을 것이다. 그 눈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빈이 먼저 알아라.”그 말은 충고였으나, 동시에 무겁게 내린 경고이기도 했다.이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명심하겠사옵니다, 마마.”그 말을 내뱉는 순간 가슴 어딘가가 한 번 더 세게 조여 왔다.전각을 나오며 햇빛이 비로소 궁 담장 위에 걸리기 시작했다.이수는 한 걸음을
이수는 몸을 일으키며 한순간 중심을 잃을 뻔했다.궁녀가 부축하려 하자 그녀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괜찮다. 스스로 서겠노라.”그러나 그 말은 그녀의 의지일 뿐,무너지려는 마음까지 세울 수는 없었다.수련장에는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도진은 가장 먼저 나와 검을 들고 서 있었다.어제 밤의 흔들림을 그는 여기서 잘라내려 했다.검 끝에서 밤사이 얼어붙은 찬 기운이 느껴졌다.그는 자세를 가다듬고 검을 들어 올렸다.슥~단칼이 허공을 가르자 바람이 얇게 찢어졌다.그러나 칼끝은 곧 흐트러졌다.그의 중심이 미세하게 흔들린 것이다.그는 자신이 흔들린 것을 알고 눈을 감았다.'이 무슨 일인가. 칼을 든 이래 한 번도 흐트러진 적 없던 중심이…'도진은 검을 다시 들었다.이번에는 더 강하게 휘둘렀다.허공이 크게 갈라졌으나 그 힘 또한 일정하지 않았다.그는 잠시 검을 내리고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마침내 스스로에게 말하지 않던 문장을 속으로 인정했다.'빈마마가… 어제 그렇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인가.'그는 그 떨림을 떠올리며 손끝이 서늘해졌다.그녀가 아픈 듯 보였고, 위태로워 보였고, 홀로 버티는 모습처럼 느껴졌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저릿했다.왜 그러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그러나 그 떨림이 지금 그의 검끝까지 흔드는 것은 분명했다.도진은 자신의 혼란을 잘라내려는 듯 검을 다시 높게 들었다.그리고 아주 천천히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이 아침, 그의 수련은 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잡기 위한 것이었다.동궁의 복도에는 아직 태양이 완전히 비추지 않았다.그러나 궁인들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웠다.저마다 속삭이는 듯한 기류가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어제 회랑에서… 저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지요?”“빈마마께서도 얼굴이 좋지 않으셨다고…”“도진 나으리께서 곁에 계셨다는데…”“쉿, 그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 지금 전각들은 모두 예민하니”그러나 소문은 바람과 같다.막으려 해도 틈새로 스며들어 더 멀리
그는 그녀의 이름을 완전히 부르지 못했다.그저 숨결에 닿는 정도의 음으로 이름의 앞부분만 가볍게 불렀을 뿐이었다.그러나 그 가벼움이 오히려 더 큰 울림이 되어 그의 가슴을 채웠다.도진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마음이 조금씩 형태를 드러내는 것을 느꼈다.그러나 그 형태를 감히 이름 붙일 수는 없었다.세자의 침전은 밤이 깊었음에도 한 점의 어둠도 허락하지 않은 듯 등불이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세자는 외투를 벗지도 않은 채 자리 한복판에서 앉아 있었다.그의 눈은 수정처럼 맑았으나 안쪽 깊은 곳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그는 조용히 생각했다.'왜… 그대가 그렇게 떨리고 있었던 것이오.'빈의 모습은 세자의 눈에서 조금도 지워지지 않았다.그녀의 숨이 흔들리고, 목소리가 가늘어지고, 손끝이 차갑게 떨리던 모습.그 모든 것이 그의 가슴을 묘하게 죄었다.그리고, 그 모습 곁에 서 있던 도진의 그림자.세자는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주먹 안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뜨거움과 서늘함이 함께 뒤엉켜 있었다.'나는… 도진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입술이 작게 떨렸다.'하지만… 그대에게 가까워지는 모든 것들은 내게 위협이 되는구나.'그는 그 위협이 도진 때문인지, 혹은 자신의 마음 때문인지를 차마 말하지 못했다.그는 빈의 이름을 끝까지 부르지도 못하고 조용히 입술만 움직였다.“…빈…”그 음절이 가슴에서 떨어지는 순간 한 가지 사실이 또렷하게 선명해졌다.'나는… 이미 흔들리고 있구나.'그 흔들림은 세자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에게 치명적인 결함이었다.그러나 그는 그 흔들림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눈을 돌릴수록 더 분명해지는 것이 마음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그는 두 손을 내려 무릎 위에 올리고 작게, 아주 작게 내뱉었다.“그대를 잃을까… 두렵구나.”그 말은 바람조차 듣지 못할 정도로 작았지만그 속에 담긴 감정은 세자가 스스로에게조차 숨기고 싶었던 가장 깊은 핵이었다.밤은 그렇게 궁의 세 곳에서 서로 다른 고독을 품고 내
그 고백이 입술 끝에서 비틀거리며 사라졌다.그 시각 회랑을 떠난 도진은 호위무사들이 모여 있는 전각의 뜰을 가로지르고 있었다.그러나 그의 걸음은 평소의 정갈한 발걸음과 달랐다.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그의 중심이 조금, 아주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숨이 깊어지고 어깨가 미묘하게 일렁이는 것이 지나가는 무사들의 시선에도 감지될 정도였다.그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그저 이수의 떨린 숨이 떠올랐고 세자의 시선이 떠올랐고 그 둘 사이에 선 ‘자신’이 떠올랐다.'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그 질문도 대답되지 않았다.답할 수 없는 감정만이 조용히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궁 전체의 바람은 이미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회랑에서 있었던 장면은 누군가의 입에서 또 다른 입으로 번졌다.“빈마마께서 얼굴이 사색이더라.”“저하의 눈빛이… 예전에 없던 빛이라더라.”“장군 나으리가 곁에 있었다지 않느냐.”“그 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냐.”“쉿, 함부로 입 놀리면 목이 날아간다!”그러나 목이 날아갈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그만큼 오늘 회랑은 평범한 하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바람은 이미 내명부 깊은 곳과 무사들이 모여 있는 전각그리고 후궁들의 침소까지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그리고 그 바람은 결국 누군가를 향한 비극의 전조가 될 것이다.처소 안에서 이수는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조용히 떨리는 숨을 누르며 혼잣말처럼 속삭였다.“…이리 흔들리면… 안 되옵니다.”그러나 그녀의 손끝은 떨림을 멈추지 못했다.그리고 그 떨림은 세 남녀의 얽힌 운명이더 깊은 비극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밤은 오래도록 내려앉아 있었다.궁 전체가 물속에 잠긴 듯 고요했고, 등불만이 미약한 숨결처럼 흔들렸다.그런 밤의 깊은 결에서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방에서 서로 다른 고독을 견디고 있었다.빈의 침소는 너무 조용했다.이수는 등불 하나만 켜둔 채 침상 가장자리에서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
회랑을 벗어나자 햇빛이 있는 자리임에도 이수의 발끝은 서늘하게 떨렸다.걸음을 떼는 데 힘이 들 정도였다.한 걸음. 또 한 걸음.돌바닥에 닿는 소리가 가볍지 않았다.그녀의 무게가 아니라 그녀가 짊어진 기류의 무게 때문이었다.앞서 걸어가는 궁녀들은 기척만으로도 빈마마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아챘다.그러나 그들 또한 감히 묻지 못했다.궁은 상처를 묻는 곳이 아니라 상처를 지켜보는 곳이기 때문이다.이수의 숨은 회랑을 떠나는 동안에도 고르지 못했다.그녀는 손끝으로 자신의 가슴을 억누르듯 눌렀다.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 떨림을 숨기려고 했지만 숨길 수 있는 떨림이 아니었다.머릿속에는 방금 전의 장면들이 매듭처럼 계속 얽혀 있었다.세자가 다가왔던 걸음.그가 던진 오래 머무는 시선.말끝에 숨은 미세한 흔들림.그리고…그 시선이 도진에게로 넘어갔던 순간.이수는 무의식적으로 혀끝을 깨물었다.바람도 없는데 한 줄기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저하께서… 왜 도진을 그리 보신 것인가.'그 질문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피어올랐다.물론 그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세자가 읽어낸 것은 이수와 도진 사이에 떨어져 있던 아주 작은… 그러나 확실한 거리.그 거리는 아무 말도 없었으나 누군가에게는 말보다 선명한 기류였다.'저하께서… 모르지 못하셨구나.'이수의 걸음이 한순간 휘청했다.궁녀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받쳤다.“마마… 괜찮으시옵니까?”이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괘념치 않으셔도 된다. 잠시 숨이 가빠졌을 뿐이다.”그 말은 궁녀에게 던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말처럼 들렸다.반대편 회랑에 남아 있던 도진은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그의 심장은 시끄럽지도 빠르지도 않았다.다만 묵직하게, 내부에서 조용히 울리는 듯한 고동만이 남아 있었다.그가 처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 순간이었다.'왜… 저하께서 그대를 보시며 그런 표정을 지으셨소.'그 질문은 도진의 가슴 깊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