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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作者: 레몬과 향수
옥신각신하는 사이, 유씨 노부인이 소식을 듣자마자 대전으로 달려왔다. 송씨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주었다.

“지영이는 다 좋은데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에요. 분명 마음속에 세자를 품고 있으면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못해 세자에게 심통을 부리고 있지 뭐예요. 내일 혼사가 정해지지 않으면 우리 유씨 집안은 온 인주의 웃음거리가 될 텐데 말이에요.”

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다.

유씨 노부인은 불쾌한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영아, 세자께 사죄드리거라.”

양모가 돌아가신 뒤, 유씨 노부인은 유지영을 슬하에 두고 보살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척 손녀를 총애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유씨 노부인은 담혜정이 남기고 간 거액의 지참금과 매년 담씨 가문에서 보내오는 풍성한 선물들 때문에 그녀를 떠맡았을 뿐이었다.

유지영이 말이 없자 유씨 노부인의 안색이 차갑게 바뀌었다.

“너는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느냐? 이제는 이 할미 말도 듣지 않겠다는 거니?”

말하는 사이 유씨 노부인은 손에 든 염주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표독스럽게 번뜩이는 눈에서 자비로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유지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조금 전, 배준형과 혼인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이들은 끝까지 강요하더니 이제는 불효의 죄명까지 씌우려는 듯했다.

“언니, 할머니 뜻대로 하세요.”

유선주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언니가 허락하지 않으면 저는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될 것 같아요.”

유지영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배준형을 돌아보았다.

“세자는 저와 혼인할 마음이 없다고 하셨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보아하니 선주는 세자와의 혼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군요. 제게 자꾸만 혼사를 강요하는 걸 보면 말이죠. 제가 보기엔 유씨 가문과 정왕부는 사주가 맞지 않아 사돈이 될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 그러니 세자도 더 이상 선주를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

그 말에 배준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지영아, 그게 무슨 헛소리냐?”

조급해진 송씨의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었고,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유지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세자께서는 선주와의 혼인을 원한다고 하셨는데, 정작 선주는 계속 사양하면서 자꾸만 저를 끌어들이지 않습니까. 저도 이 혼인을 원치 않으니 혼약을 없던 일로 하자는데, 제가 뭘 잘못 말했나요?”

다시 삶을 살게 된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가식적인 그들의 가면을 하나씩 모조리 벗겨낼 생각이었다.

“너….”

송씨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배준형은 눈살을 찌푸리며 유선주에게 물었다.

“정녕 이 혼사를 원치 않는 것이냐?”

유선주는 눈시울을 붉히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언니, 저는 그저 언니를 위해 그런 건데 어찌 저에게….”

말을 마친 그녀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자리를 뜨려는 순간, 유지영이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세자께서는 오늘 예물까지 준비해 여기까지 오셨어. 내가 보기엔 두 사람이야말로 잘 어울리는 한쌍 같구나. 내일 내 성년례에서 어찌할지는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단다.”

모두의 시선이 유지영에게 쏠렸다.

“지영이가 왜 그렇게 한사코 거절하나 했더니 이미 마음에 둔 이가 있었구나. 누구니? 내가 아는 사람이니? 너도 참, 그런 사람이 있으면 진작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송씨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궁금한 얼굴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반면 유씨 노부인은 비웃음을 머금은 채 호통쳤다.

“수치도 모르는 뻔뻔한 것! 너 때문에 집안 망신을 다 당하게 생겼구나!”

노부인은 연유도 묻지 않고 유지영을 단죄했다.

“언니, 어느 집 공자와 눈이 맞았나요?”

유선주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말만 하면 어머니께서 그 집안을 찾아가 혼약을 주선해 주실 거예요.”

송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 넌 이미 결백을 잃었으니 좀 부끄럽긴 해도 내가 나서서 혼약을 청하러 가마.”

세 사람은 가벼운 말 몇 마디로 유지영을 파렴치한 죄인으로 몰아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유지영에게 쏠렸다.

유지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숙모님께서는 할머니가 저를 잘못 가르쳐서 제가 외간사내와 눈이 맞았다는 뜻인가요?”

송씨는 음침하게 변한 유씨 노부인의 안색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듯 다급히 말했다.

“허튼소리!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니? 네 입으로 내일 성년례 때 대비책이 있으니 그대로 진행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니? 정왕 세자께서 너와의 혼인을 원치 않는 마당에 혼약을 정할 상대가 따로 있다면 분명 외간사내와….”

그녀는 끝내 사통이라는 단어를 차마 입에 담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언니, 사람들 앞에서 언니가 직접 한 말이잖아요.”

유선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유지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난 분명 내일 성년례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것이고 혼약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외간사내와 눈이 맞았다고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송씨 모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유선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할머니, 원래 계획이 틀어졌으니 저도 이제 마음에 없는 사람을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유씨 가문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내일 수구(양반가 규수가 공개적으로 신랑감을 간택하는 행사에서 예비신부가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비단 공)를 던져 현장에서 정혼자를 정하겠어요.”

유지영이 말했다.

“내일 저택에 적지 않은 사람이 몰릴 테니 수구를 받길 원하는 미혼의 사내들을 모두 참석시키도록 하죠. 수구를 받은 자가 누구든, 혼약이 없고 도박 같은 악취미가 없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그 사람에게 시집가겠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송씨를 돌아보았다.

“숙모님, 이래도 제가 외간사내와 눈이 맞은 건가요?”

송씨는 흠칫하더니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지.”

그 말에 유씨 노부인이 큰소리로 호통쳤다.

“무모한 짓을 하려는구나! 유씨 집안의 적장녀가 수구로 신랑감을 고르겠다니! 사람들이 우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유씨 집안 딸들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고 여길 것 아니냐!”

유지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면 누가 이런 선택을 하겠는가?

“지영아, 사실 내게 혼약이 없는 친정 조카가 한 명 있단다. 너와 나이도 비슷한데 네가 원한다면 숙모님이 주선해 주마. 송씨 가문으로 시집가면, 장차 내 얼굴을 봐서라도 그 집에서 너를 홀대하진 않을 것이다.”

송씨는 매우 신중한 어투로, 마치 다 너를 위한 일이라는 듯 말했다.

송씨가 말한 그 조카에 대해 유지영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어릴 적 낙마한 탓에 절름발이가 되었는데, 적출이라는 명분을 등에 업고 죄 없는 시녀들을 괴롭혀 죽인 못된 인물이었다. 열여덟 살에 술에 취해 귀족가 규수를 희롱했다가 상대 집안에서 몽둥이로 그의 다리를 부러뜨렸을 때도, 송씨 집안에서는 감히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런 쓰레기를 감히 추천하다니!

“어머니, 지영이는 고집이 세서 너무 높은 집안에 시집가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선주는 태어날 때부터 복덩이로 불렸으니, 정왕부로 시집가면 장차 분명히 세자의 앞길에 도움이 될 거예요.”

송씨는 웃으며 유씨 노부인을 재촉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겹경사로 치고 내일 둘이 동시에 혼약을 맺는 게 어떠신가요?”

유씨 노부인은 염주를 만지작거리며 유지영을 훑어보다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 숙모님도 다 널 위해 한 말인데,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제 혼사를 참 급하게 정한다는 느낌은 있지만, 작은어머님의 제안에 저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허나 저와 정왕부의 혼약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고, 이 일 역시 담씨 가문에서 주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약혼녀가 선주로 바뀌었으니, 그쪽에서 불쾌하게 생각해 숙모님이 욕심에 혼약을 바꾸었다고 여긴다면 유씨 가문의 명성과 작은아버지의 승진에 영향이 가지 않겠어요?”

유지영은 유씨 노부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노부인은 꿈에도 경성으로 돌아갈 날만 그리고 있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경성의 생활을 경험한 욕심 많은 늙은이가 어찌 인주의 삶에 만족하겠는가?

마침 담 대인은 이부상서로, 관원들의 승진을 관장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훼방을 놓는다면 유씨 가문이 경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역시나 노부인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럼 수구를 던졌는데 송가의 아들이 받는다면 어떡할 거냐?”

송씨가 포기하지 않고 재차 물었다.

“그럼 그것도 인연이니까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하겠죠. 사람들이 선주와 정왕 세자의 사이를 의심하지도 않을 테고요.”

그 말을 들은 송씨는 노부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사실 지영이 말도 일리가 있네요. 유씨 가문의 명성을 위해서라도 지영이가 하자는 대로 해요.”

유선주도 다급히 거들었다.

“할머니, 언니가 하자는 대로 해요.”

노부인은 두 사람이 졸라대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며 말했다.

“그럼 누가 되든 후회하지 말거라!”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그럴 일은 없어요.”

유지영은 단호한 얼굴로 답했다.

유씨 노부인은 한심한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더니 사람을 시켜 무대를 만들게 하고, 내일 가문의 장녀가 수구로 정혼자를 택한다는 사실을 공표하게 했다.

곧이어 유씨 노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준형과 유선주는 사주단자를 교환했다. 유선주와 혼인하기 위해 배준형은 중매 어멈까지 데리고 왔다.

유지영은 그들이 뭘 하든 관심이 없었기에 조용히 자리를 떠 종령원으로 돌아왔다.

정원에 들어서니 조용히 마당을 쓸고 있는 홍주가 보였다. 전생에도 그녀에게 충성하던 아이였는데, 실족사로 죽었었다.

“홍주야!”

유지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홍주를 불렀다.

홍주는 제 귀를 의심하며 쭈뼛쭈뼛 다가왔다.

“아가씨, 소인을 부르셨나요?”

“외출할 테니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거라.”

홍주는 놀란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소인은 그저 허드렛일이나 하는 삼등 시녀일 뿐인데, 어찌 저를 데리고 외출하신단 말씀이신가요?”

주향이 입을 삐죽이며 경멸 섞인 어투로 말하자, 유지영이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내가 누굴 데리고 나가든 시녀인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닌 것 같은데?”

주향은 당황하더니 싸늘한 얼굴의 유지영을 보고 다급히 사죄했다.

“소, 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오라….”

“꿇어라!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일어나지 말고 반성하고 있거라!”

유지영의 명령에 주향은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로 정원에 무릎을 꿇었다. 유지영과 홍주가 정원을 나서자, 그녀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저러니 정왕 세자께도 버림을 받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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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안을 거슬러   제320화

    전생에 유지란은 줄곧 유선주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유지영의 기억으로, 송씨는 유지란을 위해 어느 관원 집안의 적장자와 혼사를 맺어주었다.유지란에게도 좋은 일이었고, 인심을 살 수도 있었으니 일석이조였다."지란 아가씨는 아직도 혼인 상대가 엽씨 어르신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합니다. 셋째 나으리네가 이를 감추고, 밖으로는 엽씨 집안의 열여덟 살 양자와 혼인한다고 알렸답니다."유지영은 눈빛을 반짝였다. 왜 유지란이 잠잠하다 했더니, 철저히 속고 있었던 것이다."셋째 삼촌은 이해득실을 철저히 따지시는 사람이다. 둘째 삼촌네는 이미 망했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찾아가 은자까지 쥐여준 거지?"돌아가는 상황이 어딘가 수상했다.며칠 전 배현준이 정왕부 부족한 은자를 누군가 메워주었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엽씨 집안이 나섰을 가능성이 컸다.정왕부를 돕는 자는 모두 그녀의 적이었다.방비원으로 돌아온 유지영은 운청을 불렀다."엽씨 집안과 그 양자에 대해 알아보거라. 자세할수록 좋다.""예."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두워진 후에야 운청이 돌아왔다."마마, 그 양자는 엽 부인이 십오 년 전에 거둔 자입니다. 겉으로는 엽씨 집안의 공자라 하나, 실제로는 종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엽 가주는 워낙 지독한 자라, 수년간 친아들을 얻겠다며 온갖 핑계를 대고 무고한 여인들을 수도 없이 유린했다고 합니다.""보름 전 엽 가주가 지란 아가씨의 사주를 맞춰보았는데, 단번에 득남할 점괘가 나왔다고 합니다. 엽씨 가문은 대대로 모아둔 재물이 많은데, 엽 가주 대에 이르러서는 엄청난 갑부가 되었다고 합니다."유지영은 몸을 비스듬히 책상에 기댄 채,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며 입술을 깨물었다."엽 공자의 심복에게 사람을 붙여....""마마, 엽 공자는 거의 감금된 상태입니다. 문밖에 전담 호위 무사가 지키고 있고 혼사가 치러지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운청이 말했다.곁에 있던 동금이 거들었다."엽씨 집안은 꽤나 신중하군요.

  • 피안을 거슬러   제319화

    경왕은 예상보다 빨리 장부를 채워넣었다. 불과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그날 전하와 왕비께선 돌아가신 뒤 크게 다투셨다 합니다. 전하께선 왕비가 세자비 마마께 살림을 넘기시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났다며 책망하셨고, 부관에게도 곤장 열 대를 치셨다고 합니다."홍주가 들어와서 보고했다.유지영은 장부가 잘못된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이미 경왕의 소행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왕비가 이를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친척들이 순순히 집을 비운 것도 수상했다.경왕비가 사비로 은자를 냈을 리는 없으니, 남은 사람은 경왕뿐이었다.애초에 경왕비가 나서서 판을 깔아주지 않았다면 이 연극도 이렇게 완벽하게 끝맺지 못했을 것이다."마마, 하나 더 있습니다. 요 며칠 정왕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성 밖으로 적잖은 사람을 내보냈더군요."유지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명했다."사람을 붙여 감시하고 일일이 보고하거라.""예."며칠 내내 천설고를 바른 덕에 팔의 상처는 점차 아물고 있었다. 약간 가려운 것을 빼면 통증은 전혀 없었다."둘째 부인 쪽은 하루 종일 짜증을 낸다 합니다. 상처가 심하게 곪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아물지 않는 모양입니다. 의원을 여럿 불렀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하네요."홍주가 덧붙였다.유지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왕비가 지나치게 오냐오냐 키워 분수를 모르는 것이다. 시집오자마자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으니 당해도 싸지."그녀는 민경주가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모두 자업자득이었다.문득 입궁하여 태후를 뵌 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전갈을 넣고 다과를 챙겨 황궁으로 향했다. 서 태후는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담소를 나누었다.유지영은 팔을 다친 일은 꺼내지 않았고, 서 태후 역시 굳이 묻지 않았다."현준이가 내게 와서 임태비 일가족을 경성으로 부르게 해달라 청하더구나. 임태비의 몸이 허약하기도 하고, 경왕이 매일같이 임태비 곁으로 가 병수발을 들게 해달라 청했다면서 말이다."

  • 피안을 거슬러   제318화

    여러 사람이 한마디씩 떠들어대자 경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배현준을 바라보았다."사단이 난 원인이 그 십칠만 냥이니, 그 은자의 행방을 말해보거라."경왕이 덧붙였다."네가 네 고모를 때려 다치게 하고 내쫓았으니, 경왕부에서 그에 맞는 보상을 해주는 것이 도리다....""아닙니다. 그 여자가 자업자득으로 그리된 것이니, 전 인정할 수 없습니다."배현준은 코웃음을 쳤다."네 이 놈! 상대는 네 고모가 아니냐!""저는 임씨 가문과 아무런 왕래도 없었습니다.""너!"경왕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영지로 보낸 은자를 가리켰다."네 할머니께서 병환에 드셔서 은자가 필요하셨다. 할머니께 효도하는 것도 잘못이냐?"배현준이 다시 비웃듯 되받아쳤다."할머니라니요? 저의 할마마마는 지금 자녕궁에 계십니다. 일개 태비가 어찌 제 할머니가 됩니까?"그 말에 경왕은 화를 참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었다."이 막돼먹은 놈, 이제 할머니조차 모른 척할 작정이냐?""전하, 태후 마마야말로 전하의 엄연한 적모이십니다. 설마 태비를 어머니로 모시면서, 적모이신 태후 마마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까?"배현준이 반문했다.그 말에 경왕은 분통이 터져 기절할 것 같았다.선제 시절 황후는 단 한 명, 지금의 서 태후뿐이었다. 비록 서 태후의 나이가 경왕보다 어리다 해도 명백한 웃어른이었고, 선제께서 천하에 공표한 정실이었다.임태비와 숙태비는 그저 후궁일 뿐이었다.진정한 적모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 태후 한 사람뿐이었다.배현준은 비웃음을 흘리며 다시 물었다."전하께서 효도를 하실 거라면, 어찌하여 공용 장부의 은자를 훔쳐 쓰십니까?"경왕이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지만, 배현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닷새 안에 빈 장부가 채워지지 않으면, 제가 직접 집집마다 돌며 수금을 하는 수밖에요. 저택을 팔든 영지까지 찾아가 독촉하든, 동전 한 닢이라도 모자라선 안 될 것입니다.""너 감히!"경왕은 분노를 터뜨리며 손을 치켜들었

  • 피안을 거슬러   제317화

    "도련님 말씀은 전하께서 멋대로 왕부의 공용 장부 은자를 가져다 쓰셔도, 갚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까?"유지영은 턱을 치켜들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배영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배영준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반박했다."이 왕부가 아버지의 것인데, 은자 좀 쓴 게 대수입니까!"배영준은 형수인 유지영을 향한 존중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분노가 이글거리는 두 눈은 유지영을 향한 적대감으로 가득했다.유지영은 냉소를 터뜨렸다."그렇습니까? 아까 도련님께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하시더니, 남의 재산을 탐하는 행위를 참 그럴싸하게 포장하시는군요."유지영은 장부를 부관에게 집어 던지며 분노를 터뜨렸다."다들 장부가 잘못된 것을 뻔히 알면서 고의로 나를 속였구나. 내가 장부를 볼 줄 몰랐다면 오늘 꼼짝없이 내 혼수로 구멍을 메웠겠지.""세자비 마마...."부관은 연신 손을 내저었다."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더 이상 입씨름할 가치도 없었다."가서 세자께 전갈을 올려라. 내가 궁지에 몰려 죽을 지경이라고."그 말에 배영준의 기세가 순식간에 꺾였다. 그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유지영을 손가락질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지영아, 현숙한 부인이 들어와야 집안이 평안한 법이거늘, 어찌 이리 분란만 일으키느냐!"경왕비는 한치도 손해 보려 하지 않는 유지영의 언행에 화가 치밀었다.유지영은 자리에 앉자, 시녀가 차를 내왔다.그녀는 묵묵히 차를 마셨다.배현준은 그녀의 예상보다 일찍 돌아왔다. 그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굳은 얼굴로 발을 들어 배영준의 허리를 걷어차 버렸다."막돼먹은 놈, 누가 네 형수에게 삿대질하며 욕해도 된다 했느냐!"배영준은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통증에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영준아!"경왕비가 황급히 다가가 배영준을 부축했다. 화가 난 경왕비가 배현준을 쏘아보았지만, 배현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교양 없는 놈!"배영준은 분노로 숨을 헐떡였다.

  • 피안을 거슬러   제316화

    "부관이 십칠만 냥의 은자를 횡령했으니, 합당한 해명이 있어야 마땅하지요."유지영은 이리저리 말을 돌리며 그 은자를 경왕이 가져갔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했다.부관은 관아에 고한다는 말을 듣자 쉴 새 없이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세자비 마마, 억울합니다. 은자는 참으로 전하께서 가져가신 게 맞습니다. 장방에도 전하께서 은표를 가져 가신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이에 유지영은 장방 선생을 바라보았다.장방 선생은 평생 이토록 혼란스러운 광경을 겪어본 적이 없어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다. 게다가 세자비가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인물이 아님을 잘 알기에,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이상 모든 것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그, 그게... 전하께서 가져가신 것이 맞습니다."장방 선생은 다른 장부 하나를 더 꺼냈다. 그곳에는 경왕이 언제 얼마를 지출했는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그중 가장 큰 지출은 양정화가 저택을 구매하는 데 쓰인 삼만 냥이었고, 병을 치료하고 보약을 사는 데 또 만 냥 넘게쓰였다.또한 방현숙의 거처를 마련하는 데도 이만 냥이 넘게 들었다.그 밖의 친척들에게도 만 냥, 오천 냥 등 제각각 은자가 돌아갔다.심지어 사람을 시켜 영지로 삼만 냥의 은자를 보내기도 했다.기록된 날짜를 보니 모두 이번 달에 벌어진 일들이었다."전하께서 가져가신 거라면 더는 할 말이 없구나."경왕비는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무마하려 손을 휘휘 내저었다.하지만 유지영이 이대로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장부를 손에 든 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왕비께선 집안 살림을 맡아오신 지 꽤 오래되셨지요. 제게 장부를 넘기실 때 장부가 맞지 않다고 한마디 언질만 주셨어도, 제가 일을 이리 크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경왕비는 발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린 채 유지영을 노려보았다."속으로 화가 나고 전하께 불만을 품으셨더라도, 굳이 제 손을 빌려 이 일을 키우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자칫하면 제가 전하를 오해할 뻔하지 않았습니까."할 말은

  • 피안을 거슬러   제315화

    경왕비는 유지영이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수많은 시녀들 앞에서 자신의 출신을 꼬집으며 면박을 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일말의 체면도 봐주지 않은 처사였다.경왕비뿐만 아니라, 부관과 시녀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한미한 가문 출신이라 명문가의 예법을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유지영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한마디 더 보탰다."그만하지 못할까!"경왕비가 분노하며 호통쳤다."네가 두둑한 혼수를 챙겨오고 든든한 뒷배가 있다고 해서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내 출신이 아무리 미천하다 한들 엄연한 왕부의 주인이다. 아랫사람에게 비난받을 처지가 아니란 말이다!"두 사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섰다.유지영 역시 더는 화목한 척 연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왕비께서 경왕부로 오시기 전까지는 집안 살림이 아무 문제 없이 굴러갔습니다. 매년 점포와 장원에서 은자가 들어왔고, 그간 세자 혼자 지출해 봐야 얼마나 썼겠습니까. 그런데 불과 몇 달 만에 공용 장부의 은자가 바닥나고, 왕비께서는 굳이 제게 살림을 넘기셨습니다. 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러시는 겁니까."유지영은 처음 장부를 손에 쥐었을 때부터 이미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다.하지만 애써 꾹 참고 부관이 제 발로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경왕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속으로 불안감이 슬슬 치밀었지만 겉으로는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너는 왕부의 세자비이니 내 짐을 덜어주는 것이 응당한 도리다. 공용 장부에 은자가 없는 것은, 그간 현준이가 주색에 빠져 방탕하게 지낸 탓이다. 그런 짓거리들에 은자를 물 쓰듯 썼으니 남아날 리가 없지."막나가기로 작정한 듯한 경왕비의 모습에 유지영은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동금, 가서 장방 선생을 모셔 오너라!"일을 크게 벌리려 하는 유지영의 행보에 경왕비는 의구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부관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장방의 선생들이 모두 불려 왔다.유지영은 따로

  • 피안을 거슬러   제122화

    하필이면 가장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그날 밤, 유국공부의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서옥혜였다. 그녀는 동이가 아프다며 유정남을 만나게 해달라고 소란을 피웠다. 하지만 이미 상전에게 귀띔을 받은 문지기들은, 즉시 서옥혜를 거칠게 밀쳐내며 쫓아냈다."예가 어디라고 찾아와서 행패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국공부의 땅을 더럽히지 말거라!"바깥이 한창 소란스러울 때, 유지영은 잠들지 않고 소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낮에 유정남을 서류골목으로 유인해, 서옥혜가 다른 사내에게 안기는 모습과 동이의 출생의 비

  • 피안을 거슬러   제97화

    그래서 유씨 노부인도 서옥혜 모자를 좋게 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저는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처자라, 이런 일로 손님을 내보내는 것은 난감한 일입니다.”유지영이 곤란한 얼굴로 말하자, 노부인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다독였다.“그건 할미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신경 쓰지 말거라.”유국공부의 명성을 생각해서라도 유씨 노부인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유정남은 궁중 연회에 참석하러 갔고, 유국공부의 다른 사람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유지영은 침소에서 의서를 읽고 있었

  • 피안을 거슬러   제93화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배준형은 금운대 정상에 도착했다.북명대사는 약속대로 숙태비를 진료하러 정왕부로 갔다.해가 저물기 전, 숙태비는 겨우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되찾았다. 눈을 뜨자마자 북명대사가 보이자, 그녀는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대… 대사님,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북명대사는 손을 닦으며 무심하게 답했다.“태비의 손자가 지극한 효심을 보였기에 이번만 예외로 한 것입니다.”말을 마친 그는 숙태비의 말을 더 듣지 않고 곧장 자리를 떠났다.북명대사가 돌아간 뒤에야 숙태비는 시녀에게서 배준형이 어제부터 오늘 오후

  • 피안을 거슬러   제92화

    “계약하겠습니다!”대장격으로 보이는 사십 대 사내, 종철민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군주님께서 저희를 거두어주지 않으셨다면 저희는 아직도 길거리를 떠돌고 있었을 겁니다. 표국을 다시 세우는 일은 꿈도 못 꿨겠지요. 그곳은 형님의 평생이 담긴 곳이고, 저희에게도 삶이나 다름없는 곳입니다.”종철민이 먼저 뜻을 밝히자, 망설이던 사람들도 하나둘 계약서에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동금이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군주님은 좋은 분이시니, 후회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계약서가 있어야 유지영도 이들을 마음 놓고 맡길 수 있었다. 그녀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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