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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 단절

Author: 8489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20 14:59:08

별관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복도는 조용했고, 새벽 공기는 싸늘했다.

그런데도 서아는 하나도 춥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이 이상할 정도로 뜨거웠다.

방금 전 라운지에서 본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윤지연의 웃음.

태준의 침묵.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USB.

배신이라고 단정하기엔 아직 설명되지 않은 것들이 남아 있었고, 연기였다고 믿기엔 너무 차갑게 보였다.

문제는 그 둘 사이에 놓인 그 애매한 틈이, 지금 서아를 가장 미치게 만들고 있다는 거였다.

회의실 문이 닫히자 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정리하셔야 합니다.”

서아는 대답하지 않고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밤도 아니고 아침도 아닌 시간. 세상이 잠깐 숨을 고르고 있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도윤이 다시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건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태준 씨가 실제로 배신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건지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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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그 문, 내가 열게.”서아의 말이 떨어지자 강도현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기다리던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다.”서아는 바로 말했다.“대신 먼저 조건이 있어.”강도현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조건을 거는 버릇이 있군.”“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니까.”서아는 하윤이 있는 차를 가리켰다.“엄마랑 하윤이를 우리 쪽 차로 옮겨. 그다음 내가 들어가.”강도현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이 민유라가 탄 차량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민유라는 하윤을 품에 안은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떨리는 손. 그러나 아이를 안은 팔만큼은 단단했다.강도현이 낮게 말했다.“유라는 늘 도망칠 곳을 만들었다.”서아가 차갑게 답했다.“당신은 늘 그 도망칠 곳까지 따라왔고.”강도현은 서아를 보았다.“그 집을 남겨둔 건 나다.”“그러니까 이번엔 당신 뜻대로 안 들어가.”짧은 정적.“엄마랑 하윤이 먼저.”태준이 서아 옆으로 다가왔다.“내가 데려올게.”서아는 그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아니. 지연이가 가.”태준의 표정이 굳었다.“서아.”“넌 내 옆에 있어.”짧은 침묵.“저 사람은 네가 움직이는 것도 보고 있을 거야.”태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지연이 피식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나 또 쓰네.”서아가 낮게 말했다.“이번엔 믿어서.”지연의 얼굴이 아주 잠깐 멈췄다.“…그런 말 갑자기 하지 말라니까.”“가.”지연은 대답 대신 민유라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은 가벼워 보였지만, 손은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준비돼 있었다.강도현은 막지 않았다.그가 뒤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짧게 손짓했다.“물러서라.”검은 옷의 남자들이 몇 걸음 뒤로 빠졌다.민유라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하윤은 그녀의 품 안에서 잠든 채 작은 숨을 쉬고 있었다. 지연이 얼른 다가가 주변을 확인한 뒤, 낮게 말했다.“괜찮아요. 빨리 움직여요.”민유라는 서아

  • 핏빛 유산   94화 — 안전한 집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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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핏빛 유산   91화 — 본진의 문

    사고 현장 위로 아직도 카메라 불빛이 번쩍였다.회장의 피 묻은 얼굴, 찌그러진 차량, 그리고 그 옆에 선 서아. 그 모든 장면은 이미 실시간으로 퍼지고 있었다.도윤의 태블릿 화면 위 숫자는 미친 듯이 올라갔다.“공유 속도 계속 증가합니다. 회장님 발언, 주요 커뮤니티랑 언론 계정으로 퍼졌습니다.”지연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민서윤, 제대로 물 먹었네.”태준은 지연이 빼앗아온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화면 한가운데 떠 있는 단체방 이름.Committee Core서아는 그 글자를 한참 바라봤다.“열 수 있어?”도윤이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잠금은 풀려 있습니다. 방금 운전자가 급하게 도망치면서 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만 내부 메시지 일부는 자동 삭제 설정입니다.”태준이 낮게 말했다.“그럼 지금 봐야 해.”회장이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말했다.“조심해라.”서아가 그를 돌아봤다.“왜요.”회장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그 안에는 민서윤 하나만 있는 게 아닐 거다.”지연이 피식 웃었다.“위원회 본진이라 이거지.”도윤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접속합니다.”화면이 열렸다.짧은 메시지들이 빠르게 지나갔다.M.S.Y: 발표 전 차단 실패.K-Node: 회장 발언 확산 중.L-9: 혈연 프레임 전환 실패.M.S.Y: S-01 직접 대응 단계로 전환.Core-1: N-12 회수 가능성 재검토.Core-3: Y-00 노출. 기존 폐기라인 복구 필요.서아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Y-00.”태준이 낮게 말했다.“네 어머니.”지연이 화면을 노려봤다.“폐기라인 복구라니. 아직도 사람을 문서처럼 말하네.”서아는 도윤에게 말했다.“계속 내려.”도윤이 메시지를 더 열었다.그 순간 새 메시지가 떴다.M.S.Y: 회장 제거 실패. 다음 대상 전환.공기가 얼어붙었다.태준이 바로 물었다.“다음 대상?”도윤이 메시지를 따라갔다.몇 초 뒤, 다음 문장이 올라왔다.M.S.Y: N-12 위치 재탐색.

  • 핏빛 유산   90화 — 피를 인정하는 자

    도윤이 태블릿을 움켜쥔 채 말했다.“회장님 차량, 현재 올림픽대로 진입 직전입니다. 공식 입장 발표 장소는 태성 본관이 아니라 외부 기자회견장입니다.”서아가 바로 물었다.“왜 장소를 바꿨어?”태준이 낮게 답했다.“태성 본관에서 하면 내부 사람들이 먼저 막을 수 있으니까.”지연이 피식 웃었다.“회장님도 드디어 자기 집 못 믿겠다는 거네.”도윤이 화면을 확대했다.“문제는 경로가 이미 샜다는 겁니다. 민서윤 쪽에서 회장님 차량을 직접 노릴 가능성 있습니다.”서아는 하윤을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안겼다.“엄마, 하윤이 부탁해.”민유라가 떨리는 손으로 하윤을 받아 안았다.“서아야.”“응.”“이번엔… 그 사람을 구하러 가는 거니?”서아는 잠깐 대답하지 못했다.회장.자신을 알고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 엄마를 사랑했지만 지키지 못했던 사람. 진실을 쥐고도 미뤄온 사람.서아는 천천히 말했다.“구하러 가는 게 아니야.”짧은 숨.“책임지게 하러 가.”태준이 차 문을 열며 말했다.“시간 없어. 지금 출발해야 해.”지연도 따라 나서며 말했다.“나도 가.”서아가 그녀를 봤다.“하윤이랑 엄마 곁에 있어도 돼.”지연은 웃지 않았다.“민서윤이 회장을 노린다면, 그건 회장만 죽이려는 게 아니야. 공식 인정 자체를 죽이려는 거지.”짧은 침묵.“나도 그 인정 들어야겠어.”서아는 더 말리지 않았다.“도윤.”“네.”“엄마랑 하윤이는 안전한 쪽으로 빼.”도윤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제가 빠지면 회장님 차량 추적이 느려집니다.”민유라가 조용히 말했다.“나는 여기 남을게.”서아가 바로 돌아봤다.“안 돼.”“괜찮아.”민유라는 하윤을 품에 안은 채 서아를 봤다.“하윤이는 내가 지킬 수 있어. 이번엔 도망치지 않을게.”서아의 눈가가 흔들렸다.민유라는 작게 웃었다.“네가 회장에게 책임을 묻는 동안, 나는 이 아이를 지킬게.”지연이 낮게 말했다.“그럼 내가 기사 붙여둘게. 내 사람 아직 몇 명은 믿을 수 있어.”서아가

  • 핏빛 유산   5화 — 가짜 딸의 눈물

    태성가 저택은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온했지만, 그 안쪽 공기는 이미 완전히 뒤틀려 있었다.윤지연은 2층 자신의 방 거울 앞에 서 있었다.아무 표정도 없었다.그저—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진짜 딸.”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거울 속 자신을 보며, 천천히 웃었다.“웃기지 마.”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살짝 쳤다.짝.그리고—다시.짝.점점 세게.순간, 하얀 피부 위로 붉은 자국이 올라왔다.지연은 멈췄다.거울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이 정도면 되겠네.

  • 핏빛 유산   8화 — 회장의 옛사랑

    태성가 본관은 밤이 되면 더 조용해졌다.낮에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시선이 오가지만, 밤이 되면—숨겨진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서아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손에는—그 반지.피가 묻어 있는 반지.손바닥에 쥐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계속 시선이 갔다.“…엄마.”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가슴이 조였다.하지만 멈추지 않았다.걸음을 옮겼다.도착한 곳은—서재.회장의 공간.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그리고—노크 없이 문을 열었다.끼익—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강진호가 혼자 앉아 있었다.책상 위에는—사

  • 핏빛 유산   7화 — 병원에서 바뀐 운명

    태성병원은 새벽인데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응급실 쪽 복도는 여전히 분주했지만, 서아가 향하는 곳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지하 기록 보관실.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여기 맞습니다.”강도윤이 문 앞에서 멈췄다.금속 문.지문 인식.그리고—이중 잠금.“일반 접근은 안 됩니다.”“그럼?”도윤이 카드 하나를 꺼냈다.“비정상 접근하죠.”짧은 침묵.삑—문이 열렸다.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왔다.서아는 잠시 멈췄다가—안으로 들어갔다.안은 어두웠다.형광등 몇 개만 켜져 있었고, 천장에서는 낮은 기계

  • 핏빛 유산   6화 — 피 묻은 반지

    비는 그날도 내리고 있었다.마치—3년 전 그날처럼.윤서아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오래된 주택가.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장소.그리고—멈췄다.낡은 철문 앞.“…여기네.”한수민이 살던 집.어머니의 집.손을 들어 문을 밀었다.끼이익—쇠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안쪽 공기가 그대로 흘러나왔다.오래된 냄새.먼지.그리고—버려진 시간.서아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발걸음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거실.낡은 소파.뒤집힌 액자.그대로 멈춰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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