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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화

Author: 양순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2-26 17:21:10

“새 이불과 옷을 챙겨왔습니다.”

커다란 보따리에 가려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얼어붙은 치맛자락이 미옥음을 알려주었다. 연호는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안개 같은 연기 너머로 걸어오는 그녀를 응시했다.

“옷을 새로 짓기라고 한 것이냐? 머리만 나쁜 줄 알았더니, 손발까지 이리 더뎌서야.”

그의 목소리는 갈라진 비단처럼 거칠고 낮았다. 하륜의 집 근처에서 습격을 당하고, 하필 이곳에 머물게 된 이 모든 상황이 누군가의 정교한 설계 같아 심사가 뒤틀렸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있다면 하륜과 황후겠지. 그리고 그들이 보낸 이 계집 또한 독을 품은 꽃일 터.’

하지만 물증은 없다.

그러니 그 분풀이를 눈앞의 계집에게라도 하고 싶어졌다.

“아니면, 그사이 밖에서 네 주인과 다른 수작이라도 부리고 온 것인가.”

미옥은 대답대신 성큼성큼 다가왔다. 처음 이 방안에 들어와서 떨던 모습은 온간데 없었다.

그녀의 손이 망설임 없이 연호의 가슴팍으로 뻗었다. 옷고름을 쥔 손가락끝이 찰나의 순간 떨리는 듯 했으나, 이내 거침없이 움직였다.

“……!”

“죽여도 좋으니 일단 벗으시지요.”

“감히 뉘 몸에 손을…!”

호통에도 미옥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되려 흔들리는 것은 연호의 눈동자가 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은 곳마다 불에 데인 듯했다. 젖은 치마에서 올라오는 한기와 그녀의 체온, 그리고 상처의 열기가 뒤섞여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눅진해졌다.

“이토록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군. 하륜 그자가, 침소에서의 예법을 아주 지독하게 가르친 모양이다.”

연호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제 가슴팍으로 더욱 밀착시켰다. 얇은 저고리 너머로 그의 가파른 심장 박동이 미옥의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사내의 몸을 탐하는 꼴이라니.”

“입고 계신 옷이 젖어있습니다.”

“뭐?”

“그리 더 계시다간 열까지 날겁니다. 천자께서 고작 한기 따위에 무너지시려 합니까.”

미옥은 지지 않고 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갈색 눈동자 속에는 흔한 교태 대신, 지독할 정도의 생존 본능과 기묘한 연민이 서려 있었다. 연호는 그 눈빛이 자신을 속이기 위한 가장 고단수의 연기라고 확신했다.

서걱, 윗옷이 벗겨져 내리자 연호의 창백하고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어깨를 관통했던 화살 자국 옆으로, 오래된 흉터들이 점철되어 있었다. 미옥의 숨이 순간 멎었다가 풀어졌다.

“……많이, 아프셨겠습니다.”

‘나무 가시 하나가 박혀도 며칠이 아픈데…, 귀하신 분이 어쩌다가.’

여느 때 같으면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했을 자리이건만, 그녀의 손끝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흉터 위를 아주 느리게 쓸어내렸다.

거칠고 투박한 손끝이 흉터 위를 스치자, 연호의 척추를 타고 낯선 전율이 일었다. 뜨겁고도 서늘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자극이었다. 그는 잇새로 낮은 신음을 삼키며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제 얼굴 가까이 끌어당겼다.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연호의 서늘한 숨결이 미옥의 입술에 흩어졌다.

“아프냐고? 아니, 감미롭지. 이 상처 하나하나가 내가 누군가를 죽이고 살아남았다는 증거니까.”

그의 눈이 번들거리는 안광을 냈다.

“그런데 너는, 감히 그 살육의 흔적을 동정하는군. 네 손길이 너무 능숙해서 도무지 노비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아. 자, 말해봐라. 이 다음은 어디를 만질 생각이지?”

“오해이십니다. 제 주제에 어찌 감히 그런 발칙한 생각을…….”

“그 말을 믿으라고? 약과 앞에서는 벌벌 떨던 손이, 내 몸 위에서는 어찌 그리도 대담하게 움직일 수 있는거지?”

“제 팔을 자르신다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믿어주십시오.제가 돌봐야 할 분이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움직였을 뿐입니다. 결코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연호는 쥐었던 머리채를 거칠게 내던지듯 놓아주었다. 바닥으로 고꾸라진 미옥이 짧은 신음을 삼켰다.

“믿으라? 내게 이런 상처를 남긴 자들이 마지막으로 구걸하던 말도 그것이었다.”

그는 제 손바닥에 남은 그녀의 머리카락 감촉을 느릿하게 갈무리하며 읊조렸다.

“그것들의 대가리가 흙바닥을 뒹굴며 눈을 깜빡이던 꼴이 꽤 볼만했지. 그러니 너도 처신을 잘하거라. 내 심기를 거스르는 순간, 너는 물론 네 주인 놈의 목숨줄도 이 방 문턱을 넘지 못할 테니까.”

‘이쯤이면 살려달라고,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울 텐가.’

하지만 미옥의 행동은 늘 그의 예상을 넘어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얼른 새 옷을 주워들어 그를 덮었다.

“아픈 팔은 소매에 넣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자꾸 건드리면 덧날 수도 있으니까요.”

“내 말이 무섭지 않아?”

“원래 노비란 언제 죽어도 이상할 바가 없습니다. 무서워한다고 달라질 처지도 아니니, 그저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밖에요.”

덤덤하게 대답하는 미옥의 눈동자는 여전히 맑았다. 연호는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내 보았다. 그의 바지춤을 잡으려 다가오는 미옥의 손가락 끝이 가늘게 경련하고 있는 것을.

‘입으로만 강한 척을 하는군.’

얄궂은 흥미가 연호의 눈가에 서렸다.

“푸는 건 혼자 할 수 있으니, 나중에 끈을 묶는 것만 도와주면 된다.”

그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미옥이 얼른 뒤로 물러섰다.

“그럼 전 이불을 새로 정돈해 놓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미옥은 빠른 손놀림으로 이불을 걷어내고 새 이불을 펼쳤다.

“누워 보시고 불편하시거든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이미 반듯한 이불 끝을 몇 번이나 당겼다 놓았다 하는 그 뒷모습에서 초조함이 고스란히 읽혔다. 저러다간 비단 이불에 구멍이라도 날 기세였다.

“그만해라. 이불이 터지겠구나.”

연호의 지적에 미옥이 흠칫 놀라 손을 멈췄다.

“이제 가까이 와서 끈을 묶어라.”

미옥이 주춤주춤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매듭을 짓는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연호가 낮게 중얼거렸다.

“믿어주마. 적어도 날 유혹하려던 수작은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

고개를 번쩍 든 미옥의 눈에 안도와 처연함이 교차했다. 그 짧은 찰나의 표정이 연호의 가슴 한구석을 기묘하게 긁고 지나갔다.

“아무렴요! 내일은 머리를 감겨드리겠습니다.”

“알아서 해라. 이제부터 난 잘 것이니 내 반상이 오거든, 네가 먹도록 해.”

햇살의 냄새를 머금은 옷의 감촉이 느껴지니, 멀리 제쳐두었던 노곤함이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저 아이 아직도 젖은 옷을 입고 있군.’

자리에 눕던 연호의 눈에 얼어붙어서 딱딱해진 그녀의 치맛자락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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