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581 - Chapter 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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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1화

“지안이는 아직 누워 있고 심종연은 어딘가에 숨어 있어. 우리가 조금만 빈틈을 보여도 또 일이 터질 수 있어. 내가 그 사람 만나서 얘기할게. 걱정 마. 그 사람이 더는 마음대로 지안이를 휘두르게 두지 않을 거야.”최수빈은 단단한 결심이 서린 주민혁의 눈빛을 바라보다가 끝내 더는 막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이렇게 한마디를 덧붙였다.“그 사람한테 전해 줘요. 지안 씨 깨어나면 보내 주라고. 더 이상 보호한다는 핑계로 새장 속 새처럼 가둬 두지 말라고. 지안 씨는 이미 그 사람의 보호 안에서 죽을 뻔했으니까.”주민혁은 가슴 한쪽이 쓰려 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할게.”그날 오후, 도시 외곽의 한 프라이빗 클럽.불필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이 그곳에는 주민혁과 장성훈, 두 사람뿐이었다.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장성훈의 얼굴은 말이 아닐 정도로 창백했다.눈에는 핏발이 가득했고 온몸에는 마치 중환자실에서 그대로 끌고 나온 듯한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먼저 입을 연 건 주민혁이었다. 그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심종연이 돌아왔어요.”장성훈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이내 그는 자리에 앉으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알고 있습니다. 주차장에서의 일도 심종연의 짓이었어요.”주민혁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안이가 중독된 일도, 뒤에서 민채영 씨를 움직인 것도 그놈이에요.”이에 장성훈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그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나 지금까지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증거를 기다리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그놈은 나를 노린 거고 동시에 지안 아가씨도 노린 겁니다.”장성훈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예전에 제가 그놈 앞길을 끊어 놨었는데 그걸 아직도 원망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아가씨가 내 약점이라는 걸 아니까, 제일 먼저 아가씨를 건드린 겁니다.”주민혁이 담담하게 말했다.“저도 그놈을 캐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제 쪽 방식은 성훈 씨하고 다릅니다.”장성훈이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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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2화

장성훈은 그 자리에 앉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살다 보면,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등을 떠밀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어느 쪽을 골라도 틀린 선택이고, 어떤 결정을 내려도 만족스러운 결말은 없었다.하지만 그도 주민혁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강지안은 이미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겼기에 더 이상 그녀를 몰아붙여서는 안 됐다.한참 뒤, 장성훈이 천천히 시선을 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습니다. 아가씨가 깨어나서 저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 물러나겠습니다. 떠나고 싶다고 하면 막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전제가 있습니다. 심종연이 먼저 잡혀야 합니다.”주민혁이 그를 바라보았다.“그건 우리 둘 다 바라는 일입니다. 우선 그놈부터 끌어내도록 하죠. 그다음엔, 성훈 씨는 성훈 씨 방식대로 지키고, 지안이는 스스로 선택하게 하면 됩니다.”그렇게 두 사람의 합의가 이루어졌다.장성훈이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진 뒤였다.그가 중환자실 문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의사가 마주 걸어 나왔다. 의사의 얼굴에는 웬일인지 옅은 안도감이 어려 있었다.“장 대표님, 환자분이 깨어나셨습니다.”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아 장성훈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깨어났다고? 아가씨가 깨어났다고?’그는 거의 비틀거리듯 유리창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한눈에 침대 위의 사람을 알아보았다.강지안은 눈을 뜨고 있었다.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입술에도 핏기가 없었으며 시선은 멍하니 천장을 향해 있었다.아직 많이 쇠약해 보였지만 분명히 살아서 눈을 뜨고 있었다.그제야 안도감이 든 장성훈은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그는 벽을 짚고 한참을 버틴 뒤에야, 간호사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그런 다음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한 걸음, 한 걸음이 꼭 허공을 딛는 것 같았다. 두렵고, 간절하고, 또 어찌할 바를 몰랐다.곧 그가 침대 곁에 섰다.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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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3화

“오래전부터요?”강지안은 멍하니 물었다.“그런데 저는 전혀 기억이 안 나요.”그녀는 고개를 돌려 의사를 바라보았다.“저 언제 퇴원할 수 있어요?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여기서 나가고 싶다.’그 말은 본능처럼 튀어나왔다.기억을 잃었어도, 뼛속 깊이 새겨진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만은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장성훈은 눈을 감았다. 심장이 산 채로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주민혁의 말과 최수빈의 말이 동시에 귓가에서 울렸다.‘보내 줘요.’‘선택하게 해요.’‘더는 가두지 마요.’장성훈은 분명 약속했고 이제 강지안은 깨어났다.하지만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저 이곳을 떠나고 싶어 했다.그런데 장성훈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 또다시 강지안을 붙잡아 둘 수 있겠는가.소식은 곧 주씨 가문에도 전해졌다. 최수빈은 전화를 받자마자 그대로 얼어붙었다.“기억을 잃었다고요?”그녀가 벌떡 일어섰다.“아무도 기억 못 한다고요? 성훈 씨도, 나도, 독을 먹었던 일도?”“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휴대폰 너머의 사람이 대답했다.“의사는 외상 후 스트레스성 기억상실로 보고 있습니다. 언제 회복될지는 확실하지 않고요.”최수빈은 손이 떨리는 탓에 하마터면 손에서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강지안처럼 자존심 강한 사람이, 끝내 모든 고통을 잊어버릴 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었다.이건 과연 다행인 걸까.아니면 더 큰 불행인 걸까.“나 지금 병원 갈래요.”최수빈이 외투를 집어 들자 주민혁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의 얼굴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같이 가.”“심종연 쪽은요?”“이미 사람 깔아 뒀어.”주민혁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지금 제일 중요한 건 지안이야.”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그 애는 기억을 잃었어. 미워했던 것도, 두려웠던 것도 기억 못 해. 성훈 씨에게는 다시 시작할 기회겠지. 하지만 우리한테는, 지안이를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도 해.”최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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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4화

주민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계속 감시해. 괜히 건드려서 눈치채게 만들지 말고. 내 명령 떨어지면 바로 덮친다.”“네.”전화를 끊은 주민혁은 병실 안을 바라보았다.강지안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최수빈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굴에는 아직 어리둥절한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장성훈은 구석에 앉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주민혁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심종연은 아직 어둠 속에 숨어 있기에 위험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강지안은 기억을 잃고 백지처럼 비어 있었다.장성훈은 손을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모든 것이 가장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었다.주민혁은 몸을 돌려 어둠에 잠긴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병실 안.강지안이 문득 최수빈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나 예전에... 많이 불행했어요?”최수빈은 순간 멈칫했다.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희미하게 떠오른 것일지도 몰랐다.“자꾸 마음 한쪽이 텅 빈 것 같아요. 조금 무섭기도 하고.”강지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마치... 계속 도망치고 싶었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던 것 같아요.”최수빈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다 지나간 일이에요. 이제 지안 씨는 자유니까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어디든 가도 돼요.”사실 최수빈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강지안이 기억을 잃은 것이 어쩌면 하늘이 내려 준 가장 나은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강지안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다시 병실 구석의 장성훈에게 향했다.‘난 분명 저 사람을 모르는데... 왜 저 사람을 보고 있으면, 가슴 한쪽이 설명할 수 없이 아픈 걸까.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린 것처럼, 삶의 한 조각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처럼...’그리고 장성훈 역시 강지안을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으나 그녀에게 장성훈은 여전히 낯선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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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5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장성훈을 두고 다투었고, 자신이 먹인 독 때문에 거의 죽을 뻔했던 사람이 지금은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눈빛이 텅 비어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같았다.‘정말 기억을 잃었나 보네. 밖에서 들려오던 소문 그대로야.’민채영은 속에서 들끓는 감정을 눌러 삼키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지안 씨, 드디어 깨어났네요. 몸은 어때요? 아직 많이 힘들어요?”강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민채영을 바라보았다.맑고, 낯설고,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빛에는 혐오도, 경계도 없었다.비웃음도, 그녀의 악의를 꿰뚫어 보는 날카로움도 없었다.그저 처음 보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었다.민채영은 그제야 완전히 안도했다.‘진짜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제비집 수프에 들어 있던 독도, 자신이 억지로 약을 먹이던 그 잔혹한 순간도, 자신의 모든 가식과 수작도 기억하지 못했다.‘잘됐어. 하늘이 날 도운 거야.’민채영은 속으로 환희에 젖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여리고 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가를 살짝 붉힌 채 강지안의 이마를 만지려 손을 뻗었다가 놀라게 할까 봐 조심스럽게 거두었다. 그 모습은 몹시도 조심스럽고 다정해 보였다.“깨어났다는 얘기 듣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밤새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탕을 좀 끓여 왔어요. 지금은 몸이 너무 약하니까 잘 챙겨 먹어야 해요.”그녀가 이렇게 말하며 보온통을 열자 은은한 향이 병실 안에 퍼졌다.탕은 진짜였고 몸에 좋은 것도 맞았다. 다만 이번에는 독이 들어 있지 않을 뿐이었다.민채영도 이런 중요한 시기에 다시 손을 쓸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강지안의 기억상실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좋은 결과였다.예전의 강지안은 장성훈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뼛속까지 새겨진 집착이자, 민채영이 빼앗을 수도 넘을 수도 없는 첫사랑 같은 존재였다.장성훈은 강지안을 위해서라면 민채영을 무시할 수도 있었고 상처를 줄 수도 있었다.강지안을 가둘 수도 있었고 약혼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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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6화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제가 기억을 잃어서 많은 일을 떠올리지 못한다고요.”“괜찮아요. 기억 못 해도 괜찮아요.”민채영이 곧장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잊어버렸으면 그냥 잊어버리면 되죠. 예전 일 기억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요. 사람이 무사한 것보다 중요한 건 없잖아요.”그 말투는 진심 어린 걱정처럼 들렸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로 민채영이 강지안을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 믿을 정도였다.하지만 민채영 자신만은 알고 있었다.그녀는 강지안이 영원히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기억상실은 강지안에게는 불행이었으나 민채영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나 다름없었다.기억을 잃은 강지안은 더 이상 장성훈을 두고 그녀와 겨룰 밑천이 없었다.과거조차 없는 사람이 무슨 수로 자신과 맞서겠는가.장성훈이 예전에 강지안을 아무리 좋아했다 한들, 이제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낯선 사람 보듯 바라보는 강지안을 마주하다 보면 마음속에 남은 미련도 언젠가는 서서히 옅어질 터였다.시간이 흐르면 결국 장성훈 곁에 남는 사람은 민채영, 자신뿐일 것이었다.그리고 그녀가 대신 죄를 뒤집어씌운 도우미 김이수는 이미 완벽하게 손을 써둔 뒤였다.김이수는 구치소에 들어가 있었고 모든 죄를 자신이 저질렀다고 못 박은 상태라 이제 와서 뒤집을 수도 없었다.장성훈이 그녀를 의심하고 있기는 했지만 증거가 없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강지안이 영원히 기억을 되찾지 못하기만 한다면.자신을 지목할 증인만 없다면.민채영은 영원히 안전했다.그렇게 생각할수록 민채영은 마음이 놓여 얼굴에 떠오른 미소도 한층 더 부드럽고 순해 보였다.“자, 국물 좀 마셔요. 지안 씨 몸 생각해서 내가 일부러 푹 고아 온 거예요. 조금만 마시면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이번에는 강지안이 전처럼 경계심과 혐오를 드러내며 밀어내지 않았다.그녀는 기억을 잃었다.민채영이 얼마나 사악한 사람인지 기억하지 못했기에 눈앞의 여자가 그저 다정하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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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7화

장성훈이 강지안을 얼마나 신경 썼는지도 잊기를 바랐다.그녀와 민채영 자신이 한때는 서로를 죽도록 미워하던 연적이었다는 사실도 잊기를 바랐다.‘영원히 떠올리지 말기를.’민채영은 벽에 기대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강지안, 목숨 하나는 질기네. 죽지 않다니 말이야.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해? 모든 걸 잊었잖아. 성훈 씨도 잊고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원한도 잊었지. 이제 다시는 나와 성훈 씨를 두고 다투지 못할 거야. 이 자리는 결국 내 거야.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어.’민채영은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순한 미소를 걸쳤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복도를 천천히 빠져나갔다....병원에 도착한 장성훈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강지안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이 그녀의 얼굴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너무나 조용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이 아플 정도였다.기척을 들은 그녀가 고개를 돌려 장성훈을 바라보았다.여전히 낯설고, 여전히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빛이었다.“왔어요?”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말투는 예의 바르지만 분명 거리를 두는 듯한 태도였다.장성훈은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저릿저릿한 통증이 가슴속으로 번져 나갔다.이어 그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되, 그녀를 부담스럽게 하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멈춰 섰다. 목소리는 한없이 낮고 부드러웠다.“아까... 누가 왔었어요?”강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민채영이라는 언니가 왔어요. 그쪽 약혼녀라고 하던데... 국도 가져다줬어요. 좋은 사람 같았어요.”“그 여자한테서 떨어져 있어요.”강지안은 복잡한 감정이 서린 그의 눈빛을 보았다. 분명 아파하면서도 어떻게든 숨기려 애쓰는 모습도 보였다.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익숙함과 불안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강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그를 믿고 싶었다.“네.”단 한 글자, 그 대답에 팽팽하게 굳어 있던 장성훈의 몸이 아주 조금 풀렸다.그는 침대 옆 의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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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8화

위로 올라갈수록 공기 속에 아주 옅지만 기분 좋은 향이 감돌았다.집에서 평소 쓰던 방향제 냄새가 아니라 장미 향이었다.거기에 아주 은은한 시더우드와 따뜻한 잔향이 섞여 있었는데 튀지 않고 부드러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향이었다.최수빈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희미한 예감 하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테라스로 나가는 문은 원목 미닫이문이었고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그녀가 가만히 밀자 문틀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그리고 다음 순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최수빈은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섰다.테라스 전체가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었다.따뜻한 노란빛의 작은 전구들이 난간을 따라 감겨 있어 마치 밤하늘의 별빛을 한 줌씩 떼어 와 걸어 둔 것 같았다.양쪽에는 풍성한 흰 장미와 샴페인 빛 장미가 가득 놓여 있었는데 꽃잎은 탐스럽게 피어 있었고 이른 아침의 물기를 머금은 듯 싱그러웠다. 부드러운 꽃향기는 사람의 마음까지 차분하게 만들었다.가운데에는 길고 하얀 식탁이 놓여 있었다. 말끔하게 다림질된 식탁보 위에는 와인잔 두 개와 미리 숨을 틔워 둔 레드와인 한 병이 놓여 있었으며 촛대 위의 가느다란 흰 초 두 개는 이미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촛불이 살짝 흔들릴 때마다 테라스 전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다정한 빛으로 물들었다.시끄러운 소리도, 불필요한 사람도 없이 오직 저녁 바람과 별빛, 꽃향기와 촛불뿐이었다.그리고 꽃과 불빛 한가운데서 조용히 최수빈을 기다리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그는 부드러운 분위기가 잘 어울리는 짙은 베이지색 니트 차림이었다. 소매는 단정하게 팔뚝까지 걷어 올려져 있었고 촛불 아래 그의 윤곽은 평소보다 훨씬 온화해 보였다.늘 침착하고 날카롭던 눈빛도, 지금은 그녀에게 머물러 있었다. 거기에는 오랜만에 보는 아주 옅은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최수빈은 할 말을 잊어 한동안 문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주민혁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비바람도 같이 맞았고, 생사의 고비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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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9화

그저 최수빈 그녀 자신으로 있어도 됐다.지칠 줄도 알고, 피곤해할 줄도 알고, 주민혁의 곁에 마음 놓고 기대어 쉴 수 있는 여자여도 됐다.“포럼은 잘 끝났어?”주민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럭저럭 잘 끝났어요.”최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다만 계속 지안 씨가 마음에 걸려서 온전히 집중하긴 힘들었어요.”강지안의 이름이 나오자 주민혁의 표정이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는 이 순간의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그래서 네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다 안정시켜 뒀어. 이제 넌 좀 쉬면 돼.”“성훈 씨 쪽은...”최수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약속한 건 지켰어.”주민혁의 목소리는 차분했다.“지안이가 보기 싫다고 하면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서 지키기만 해. 억지로 몰아붙이지도 않고, 소란 피우지도 않고, 다시 가두려 들지도 않아. 지금 그 사람의 신경은 절반은 지안이를 지키는데, 절반은 나와 함께 심종연을 찾는 데 가 있어.”최수빈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그나마 아직 사리를 분별할 줄은 아네요.”최수빈은 정말 두려웠다.장성훈이 강지안이 깨어난 모습을 보자마자 또 그 지독한 집착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다시 제 곁에 가둬 버릴까 봐 말이다.그저 지금처럼만 있으면 됐다.강지안은 무사했고,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고, 보호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단은 음모와 상처에서 떨어져 있었다.과거의 그 사랑과 미움은, 그녀의 몸이 조금 더 회복되고 위험이 지나간 뒤 천천히 이야기해도 늦지 않았다.“나 전에 성훈 씨한테 너무 실망했었어요.”최수빈이 낮게 말했다.“지안 씨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인 게 원망스럽고 한때는 미웠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조용히 누워 있는 지안 씨를 보면 가끔 그런 생각도 들어요. 어쩌면 이것도 하나의 해방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주민혁은 최수빈의 말을 끊지 않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기억을 잃었다는 건 듣기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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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0화

단 한마디, 주민혁은 최수빈의 이름을 아주 천천히 불렀다. 살짝 잠긴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으며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심장이 세차게 뛰어 최수빈은 숨을 멈춘 채 그를 바라보았다.“사실 이런 말은 지금 하고 싶지 않았어.”주민혁의 목소리는 낮았다.“지안이는 이제 막 깨어났고 아직 위험 속에 있잖아. 심종연은 어둠 속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고 해결되지 않은 일들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이런 때에 우리 이야기를 꺼내는 건 어쩌면 때에 맞지 않는 일일지도 몰라. 심지어 조금은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나 더 기다릴 수 있어. 지안이가 완전히 안전해질 때까지, 심종연이 붙잡힐 때까지, 모든 소란이 가라앉고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하늘이 맑아지고 모든 것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어.”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가볍게 목울대를 움직였다.“그런데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아. 예전에 나는 놓쳤어. 걱정이 많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로, 책임이니 신분이니 하는 것들에 묶여서 널 기다리게 했고, 불안하게 했고, 많은 일을 혼자 버티게 했어. 그 잘못은 평생 기억할 거고 평생 후회할 거야. 다시는 후회할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아. 지금 상황이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위험한 건 맞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분명히 알겠어. 내가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인지.”최수빈을 바라보는 주민혁의 눈빛에는 회피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이 오직 뜨겁고도 진지한 마음만 가득했다.“나는 널 원해. 언제나 너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너뿐이었어. 예전에는 너에게 충분한 안정감을 주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안정감을 너에게 주고 싶어.”주민혁은 깊은 눈빛으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은 우리가 함께 해결하면 돼. 위험한 일은 내가 네 앞에 서서 막을 거야. 거센 비바람은 내가 대신 맞을게. 이제 더 이상 가장 알맞은 때를 기다리고 싶지 않아. 내게는 너라면, 언제든 그때가 가장 알맞은 순간이야.”의자에 앉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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