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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사랑한다고 말해줘: Chapter 571 - Chapter 580

581 Chapters

제571화

구준오는 얼굴이 굳어 있었다.괜히 입 가벼운 진호영한테 말해 줬다 싶어 눈빛으로라도 당장 진호영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원래 진호영의 입이 가벼운 건 알았지만 아까는 진짜 말해 주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구이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단호하게 부인했다.“아니거든... 오빠, 괜히 이상한 말 지어내지 마.”구준오는 달래듯 구이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알았어. 근데 이 테이블에 있는 남자들하고는 다 좀 거리를 둬. 오빠 말 좀 들어. 이 자식 중에 멀쩡한 놈은 단 하나도 없어.”민하윤은 휴대폰을 뒤집어 테이블에 놓았다.배가 고파 어지러울 지경이었지만 잠깐 당황한 얼굴의 어린 구이현을 흘끗 한 번 바라봤다.민하윤은 주머니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 포장을 뜯어 허기를 달래려 했다.그런데 다음 순간, 누군가가 그걸 가로채가 버렸다.하도진의 손은 참 곱게도 생겼다.하도진은 친구들과 웃으며 대화를 이어 가면서도 자연스럽게 포장을 대신 벗겨 줬다.“배고파?”하도진은 미간을 찌푸렸다.창백해진 민하윤의 얼굴이 영 마음에 걸렸다.민하윤은 고개를 저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아니요. 그냥 저혈당이 온 것 같아서 그래요. 괜찮아요.”그러자 하도진은 바로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고 미리 음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갈비찜, 생선탕...”하도진은 메뉴판을 빠르게 넘기며 줄줄이 메뉴를 불렀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한번 쭉 둘러봤다.“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각자 시켜.”진호영은 손을 번쩍 들어 직원을 자기 쪽으로 부르더니 메뉴판 사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이거, 이거, 이거, 그리고 이것도... 전부 빼고 나머지는 다 하나씩 주세요.”직원은 잠깐 멍해졌다가 방금 적어 놓은 메뉴 몇 개를 다시 줄줄이 지워 버렸다.“너 미쳤어? 그렇게 시켜서 다 먹기나 하겠어?”구준오는 진호영을 한 번 노려본 뒤, 고개를 돌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맵지 않은 메뉴 몇 가지를 더 추가했다.그런데 직원이 의아하다는 듯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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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2화

“네?”민하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몸이 옆으로 쓱 밀렸다.하도진은 민하윤이 앉아 있던 의자를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왜 이렇게 멀리 앉아?”민하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하도진을 봤다.“제가요?”민하윤은 그저 살짝 백누리 쪽으로 기울어 앉았을 뿐이었다.‘뭐가 그리 멀다고 그러는 거야.’왼쪽에는 하도진, 오른쪽에는 백누리가 있었다.설령 딱 가운데 정중앙에 앉는다 해도 하도진은 또 백누리의 편만 든다고 투덜댔을 게 분명했다.“멀어. 하윤아, 친구 때문에 남편을 홀대하는 행동은 좀 그만하면 안 될까?”하도진은 민하윤의 손바닥을 가볍게 꼬집듯 쥐고는 몸을 조금 뒤로 기대며 백누리 쪽을 바라봤다.“대표님, 안녕하세요.”백누리는 직장인의 태도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었다.하루 종일 촬영하고 온 상태에서도 활짝 웃으며 와인잔을 들어 먼저 대표인 하도진에게 건배를 청했다.그러자 하도진도 꽤 성의 있게 잔을 부딪쳐 줬다.“됐어요. 그렇게까지 딱딱하게 굴지 마세요. 원래 저는 누리 씨의 스타일도 아니잖아요.”“헤헤.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진호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식간에 자신이 대화에서 밀려난 기분이 들어서 괜히 심술이 났다.게다가 진호영은 집에서 오냐오냐 자랐기에 성격도 좀 있었고 말도 거칠었다.“어이, 여기는 태양도 없는데 선글라스까지 끼면 사람은 보이나요?”백누리는 웃는 듯 안 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어이”라는 호칭 하나로 백누리는 기분이 확 상했다.그래서 백누리는 못 이기는 척 선글라스를 벗었다.룸 안 조명이 정면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백누리는 잠깐 눈을 찡그렸다.그러자 화장기 없는 백누리의 얼굴이 그대로 모두 앞에 드러났다.백누리는 금세 조명에 적응했고 완벽한 사교용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저는 백누리예요. 다들 만나서 반가워요.”구준오와 송지훈은 백누리를 한번 훑어보고는 예의상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고 이내 시선을 거뒀다.백누리는 속으로 몹시 아쉬웠다.백누리는 자신이 남자 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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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3화

백누리는 딱히 진호영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표님의 친구이니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그래서 진호영이 무슨 말을 하든 하나하나 받아 주긴 했다.“우리 둘 카톡 있잖아요. 예전에 제가 몇 번 연락했는데 다 씹더라고요?”“아, 그랬나요? 촬영 들어가면 단톡방이 너무 많아서요. 아마 문자가 밑으로 밀려서 못 봤나 봐요.”“그러면 다음에 따로 한 번 볼 수 있어요? 다른 뜻은 없고 그냥 제 생각에는 누리 씨랑 잘 맞을 것 같아서요.”“좋죠. 기회 되면 그러죠. 그런데 요즘은 진짜 바빠요. 계속 촬영 중이라서...”백누리는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온 사람답게 적당히 받아넘기는 데는 도가 텄다.진호영 같은 이런 도련님 스타일은 잠깐 신선해서 찔러 보다가도 금방 흥미를 잃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조금만 지나면 진호영은 바로 흥미를 잃을 거라고 생각했다.대충 화장을 고친 백누리는 고개를 돌려 민하윤에게 물었다.“근데 우리 아직 누구를 기다리는 거야? 왜 이렇게 음식이 안 나오는 거지?”그 말을 듣고서야 민하윤도 아직 사람이 다 안 왔다는 걸 떠올렸다.민하윤은 휴대폰 잠금을 풀고 임형섭에게 문자를 보냈다.[선배, 도착하셨어요? 룸 번호 보냈어요.]그러자 임형섭은 거의 바로 답했다.[하윤아, 미안해. 가다가 살짝 사고가 났어. 오늘 저녁은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아. 날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그러자 민하윤은 눈꺼풀이 작게 떨렸고 신중한 얼굴로 핸드폰을 두드렸다.민하윤은 옆에 있는 하도진의 얼굴이 서늘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문자를 했다.손이 잠깐 멈췄다가 민하윤은 결국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네. 그러면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다음에 또 봬요.]그러자 임형섭 쪽에는 계속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민하윤은 표정이 점점 굳어졌고 그 순간 결이 선명한 손가락이 불쑥 뻗어 민하윤의 휴대폰을 가져갔다.“아...”민하윤은 고개를 들었다가 하도진의 새까맣고 깊은 두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그제야 뒤에 하려던 말도 목구멍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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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4화

하도진은 진호영을 한 번 힐끗 보더니 말했다.“그래. 잊지 말고 꼭 보내.”그날 식사 분위기는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하도진은 얼굴이 굳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민하윤에게 새우를 까 주고 반찬을 덜어 주고 생선 가시를 발라 주는 걸 멈추지 않았다.덕분에 민하윤의 앞 접시는 금세 음식이 수북해졌다.민하윤도 은근히 심술이 났기에 하도진이 직접 깐 새우는 그대로 놔두고 먹지 않았고 덜어 준 반찬과 발라 준 생선도 끝내 입에 대지 않았다.하도진은 민하윤을 한 번 흘겨봤지만 민하윤은 하도진의 시선조차 모르는 척했다.남자들은 잔을 주고받으며 서로 술을 권했고 하도진도 기분이 상해 있던 탓에 남이 따라 주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다 마셨다.호텔을 나설 때쯤에 하도진은 이미 취해 있었다.일행은 차를 나눠 타고 하나둘 자리를 떴다.하도진은 뒷좌석에 기대앉아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민하윤만 바라봤다.“날 좀 달래 줘.”하지만 민하윤은 일부러 못 들은 척했고 시선은 앞만 보고 있었다.운전석의 기사님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백미러로 슬쩍 뒤를 살폈다.좁은 차 안은 술 냄새로 가득했고 아무리 냉방을 세게 틀어도 하도진의 속에서 치미는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하윤아, 날 좀 달래 달라고 했잖아.”하도진은 짜증이 난 듯 손을 뻗어 민하윤의 목덜미를 감쌌다.그러더니 그대로 자기 품으로 민하윤을 끌어당겼다.민하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두 손으로 하도진의 가슴을 밀어냈다.“도진 씨, 진짜 왜 그래요? 유치원생도 아니고 왜 꼭 달래 줘야 해요? 왜 제가 달래야 하는데요? 먼저 표정을 구긴 건 도진 씨잖아요.”하도진은 싸늘한 표정으로 짓더니 그대로 입을 맞췄다.지금 하도진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하윤이의 입부터 막아야겠어... 듣기 싫은 말만 골라 하는 이 입을 말이야.’민하윤은 입맞춤에 힘이 풀려 손발이 맥없이 늘어졌다.하얀 얼굴에는 수상할 만큼 붉은 기운이 번졌고 숨이 가빠지면서 셔츠 단추 몇 개도 어느새 풀려 있었다.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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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5화

다음 날 아침, 하도진은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잠에서 깼다.습관처럼 침대 옆을 더듬어 민하윤을 끌어안으려 했지만 하도진은 허공만 감쌌다.민하윤은 머리를 다 말린 뒤 욕실에서 나와 하도진을 한 번 보고는 곧장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하도진은 몇 초 멍하니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그러고는 기억이 끊기기 전의 장면들이 뒤늦게 떠올랐다.하도진은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와 드레스룸 문틀에 기대섰고 목을 한 번 가다듬더니 낮게 물었다.“내 잠옷은 네가 갈아입혀 준 거야?”민하윤은 이미 흰색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서면서도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하도진을 공기처럼 무시하고 지나쳐 갔다.“어디 가?”하도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민하윤을 붙잡았고 미간을 찌푸린 채 손을 뻗어 앞을 막았다.“오늘 말 똑바로 하기 전까지는 어디도 못 가.”민하윤은 차갑고 잔잔한 눈빛으로 하도진을 올려다봤다.요염할 만큼 예쁜 얼굴인데도 감정의 물결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민하윤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휴가가 끝났어요. 은행에 출근하려고요.”“왜?”하도진은 민하윤을 훑어보았다.눈매는 날카로웠고 볼 한쪽은 살짝 붉게 부어 있었다.두 사람은 말없이 마주 섰다.잠시 정적이 흐른 뒤, 민하윤은 입술을 눌러 다물었다가 깊게 숨을 들이켰다.“이제는 출근해도 될 것 같아서요. 제가 맡고 있는 리스크관리부 S급 프로젝트도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요.”하도진은 전날 술에 취해 이후 기억이 거의 끊겨 있었다.하도진은 민하윤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내가 어젯밤에 너한테 너무 심한 짓이라도 했어?”“아니요.”하지만 하도진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그럼 내가 심한 말을 한 거야?”민하윤은 재빨리 하도진을 한 번 흘겨보며 대답했다.“아니요.”“너 설마 짐 싸고 집을 나가려는 거야?”하도진의 시선이 민하윤의 손에 들린 가방으로 떨어졌다.안에는 간단한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이 들어 있었다.민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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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6화

“임형섭은 참으로 음흉한 자식이더라.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해 놓고는 뒤로는 나한테 이런 녹음을 보내서 우리 사이를 흔들어 놓으려 하잖아.”하도진은 독하게 민하윤의 옷을 잡아당기며 목덜미를 깨물었다.그러자 저릿한 통증이 민하윤의 온몸에 번졌다.몸부림치는 순간, 민하윤의 아랫배가 갑자기 경련하듯 조여 왔다.순식간에 민하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릴 만큼 아팠다.익숙한 통증이었다.민하윤은 온몸에 경보가 울리는 것 같았다.민하윤은 그대로 손을 들어 하도진의 옆얼굴을 세게 후려쳤다.하도진은 멈췄다.조금은 정신이 돌아온 듯, 한 손으로 침대 머리를 짚은 채 충격받은 얼굴로 민하윤을 바라봤다.민하윤은 몸을 떨고 있었다.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배의 경련은 계속됐으며 목소리까지 떨렸다.“도진 씨, 취했어요.”민하윤은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저 지금 뱃속에 아이가 있어요. 무서워요. 제발 이러지 마요.’하지만 하도진의 새까만 눈을 마주치는 순간, 말은 또 목에 걸려 버렸고 아무것도 꺼낼 수 없었다.하도진이 대체 얼마나 취했는지 민하윤은 감히 내기를 걸 수 없었다....하도진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어젯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 통째로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이 자신도 답답했다.하도진은 민하윤을 잘 알았다.민하윤은 너무 차분할 정도로 차분한 여자였다.그래서 하도진은 더 확신했다.‘어젯밤에 분명 뭔가 있었어.’뺨이 은근히 욱신거리자 하도진은 다시 숨을 고르고 몸을 숙였다.두 손으로 민하윤의 어깨를 잡은 채, 쉰 목소리로 거의 부탁하듯 말했다.“어디 가지 마. 우리 얘기 좀 하자.”“죄송한데 저 정말 출근 늦어요. 진도에서 돌아오면 그때 얘기해요.”민하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가방을 든 채 나가 버렸다.하도진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숙취 때문인지 관자놀이를 파고드는 두통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하도진은 성큼성큼 창가로 걸어가 민하윤이 돌아보지도 않고 택시에 올라타는 모습을 지켜봤다.삼색이는 새끼 한 마리를 입에 문 채 한참이나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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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7화

이남주는 눈치가 빨랐다.민하윤의 손을 덥석 붙잡더니 이남주는 목소리까지 떨며 물었다.“이거... 설마 진짜예요?”민하윤은 이남주의 시선을 따라 내려다봤다.약지에 낀 분홍 다이아몬드 반지는 햇빛 아래서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10캐럿짜리 메인 다이아몬드는 아무래도 존재감이 너무 컸다.민하윤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살짝 웅크렸다.그러고는 깊게 숨을 들이쉰 뒤, 맑은 두 눈으로 이남주를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친구가 준 거예요. 가짜예요. 그냥 장난삼아 끼는 거죠.”“누가요?”이남주는 눈이 단번에 반짝였고 엄청난 이야깃거리라도 찾은 사람처럼 목소리까지 높아졌다.“무슨 친구요? 남자예요? 여자예요? 혹시 하 대표님이세요?”민하윤은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이남주는 더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얼마 전에 지벤의 어떤 재벌이 7캐럿 핑크 다이아몬드를 경매에 내놔서 뉴스에도 났거든요. 순도는 그냥 그랬다는데 컬러 다이아몬드 자체가 워낙 희귀하잖아요. 거기다 큰 캐럿이면 거의 값도 정하기 어렵다던데 그 7캐럿짜리도 낙찰가가 수십억이었대요.”민하윤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그러니까 가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진짜였으면 제가 어떻게 이렇게 대놓고 끼고 다녀요. 그냥 고급 모조품이에요.”이남주가 나간 뒤, 민하윤은 곧장 약지의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서 가방 안쪽 칸에 넣었다.짐을 다 챙기고 내려가려다가 책상 위의 작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이남주가 섹시한 잠옷을 안 가져가고 두고 갔던 것이다.민하윤은 서랍을 열어 넣으려다가 멈췄다.이런 사적인 물건을 사무실에 두었다가 혹시라도 동료들 눈에 띄면 곤란할 것 같았다.잠시 고민한 끝에 민하윤은 그 상자를 결국 가방 안에 넣었다....산부인과.민하윤은 복도 대기 의자에 앉아 있었고 휴대폰은 무서울 만큼 조용했고 아무 연락도 없었다.자기가 뭘 기대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던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다음 환자 분... 민하윤 씨.”간호사는 주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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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8화

민하윤은 하도진이 아직도 자기한테 화가 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도 민하윤은 먼저 하도진을 달래고 싶지는 않았다.민하윤은 길가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를 말했다.화려한 도시는 밤이 내리면 더욱 눈부셨다.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멀리 빌딩들은 찬란하게 빛나자 도시의 밤거리는 꿈처럼 번화했다.민하윤은 창가에 기대어 임형섭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금방 연결됐다.임형섭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묻어 있었다.“하윤아?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민하윤은 안부를 주고받을 기분이 아니었기에 곧장 본론을 꺼냈다.“선배, 그 녹음은... 선배가 보낸 거예요?”임형섭은 잠시 침묵했다.“응. 너도 알게 되었구나?”“왜 그러셨어요?”민하윤은 조용히 물었다.귓가에는 한여름 밤바람 소리가 세차게 스쳤다.민하윤은 혼란스러웠다.왜 임형섭이 그런 녹음을 남겼고 또 왜 그걸 하도진에게 보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임형섭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준 채, 긴장한 목소리로 되물었다.“하도진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선배, 왜 그러셨는지만 말씀해 주시면 안 돼요? 저는 그게 알고 싶어요.”“변명할 건 없어. 녹음은 내가 보낸 거야.”임형섭은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짧게 잘랐다.“네가 날 원망해도 좋고 미워해도 좋아. 그래도 난 후회 안 해.”“선배, 저는 선배를 원망하지도 않을 거고 미워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냥 왜 그러셨는지가 궁금한 거예요.”임형섭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하윤아, 넌 이해 못 해.”그 뒤로 두 사람은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민하윤은 직접 통화를 끊더니 창밖의 화려한 야경만 말없이 바라봤다.임형섭은 휴대폰을 조수석에 던져 놓고 핸들에 이마를 기댔다.그러더니 낮게 중얼거렸다.“난 그냥... 하도진한테 알려 주고 싶었어. 그 사람이 널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내가 널 다시 데려올 거라고.”택시는 천천히 하씨 가문의 본가 앞에 멈춰 섰다.대문 앞에는 차 두 대가 앞뒤로 서 있었다.민하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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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9화

민하윤은 눈을 들어 하도진을 바라봤다.그 순간,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목소리도 떨렸다.“건들지 마세요. 주세요.”하도진은 민하윤을 힐끗 보더니 일부러 상자를 한 번 흔들었다.그때마다 민하윤의 심장도 덩달아 출렁이는 것 같았다.하도진이 쥐고 있는 건 작은 상자 하나일 뿐인데 민하윤은 꼭 자기 심장이라도 붙든 것만 같았다.“왜? 뭘 그렇게 숨기고 싶어?”몇 시간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민하윤은 차라리 이걸 은행의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돌려봐도 상관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이걸 가방에 넣지만 않았어도...’민하윤은 까치발을 들었지만 겨우 하도진의 소매 끝만 스쳤다.하도진은 키 차이를 이용하듯 상자를 민하윤의 머리 위로 더 높이 들어 올렸다.그러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느긋하게 상자를 흔들며 말했다.“부탁해 봐.”민하윤은 이를 악물었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부탁드릴게요. 돌려주세요.”하도진의 눈빛은 깊고 검었다.하도진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가로등 불빛 아래 하얀 조명이 그대로 레이스 잠옷 위로 떨어졌다.하도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가락 하나로 가느다란 끈을 들어 올려 이게 뭔지 찬찬히 살펴봤다.하도진의 눈빛은 점점 짙어졌고 시선은 다시 민하윤에게로 떨어졌다.하도진이 목울대를 천천히 굴리자 민하윤은 반사적으로 두 손을 몸 앞에 올려 가렸다.그러고는 홧김에 하도진의 구두를 밟고 까치발을 들어 그 민망한 잠옷을 확 낚아챘다.“도진 씨, 진짜 제정신이에요?”민하윤은 화가 치밀어 거의 터질 뻔했다.당장 이걸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하씨 가문의 본가 대문 앞에 내던질 수도 없었다.결국 민하윤은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다시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민하윤은 속으로 이남주가 원망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하도진은 민하윤을 품에 끌어안으며 웃음을 참았다.“그래서 이게 무슨 뜻이냐고...”민하윤은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얼굴은 뜨거울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다.하도진은 손을 들어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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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0화

“우리 하윤이 고생 많았어.”민하윤은 얼른 고개를 저으며 울컥한 표정의 김옥자를 다독였다.“할머니,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하도진은 차를 한 모금 마셨고 긴 다리를 겹쳐 앉은 채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두 사람의 뭉클한 재회를 바라봤다.“할머니, 하윤이가 그렇게까지 좋아요?”그러자 김옥자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지. 나는 우리 하윤처럼 착한 애가 그렇게 좋더라. 인연이 안 끊어진 거지. 아미타불, 부처님이 보우하셨네.”김옥자 할머니는 눈가를 한번 훔치고는 민하윤 쪽으로 몸을 기울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떠나고 나서 도진이는 아예 사람이 확 달라졌어. 훨씬 차분해지긴 했는데 우리 눈에는 그게 더 안쓰러웠어. 웃지도 않고 꼭 영혼만 남은 사람처럼 살더라. 도진이 엄마가 맞선도 많이 잡아 줬는데 하나도 안 나갔어. 일만 붙들고 살았지. 몸도 안 챙기고 말이야. 재작년 설에는 위병 때문에 입원까지 했어. 술을 너무 마셨대.”“집에는 별일 아닌 줄 알았는데 우리가 병원에 갔더니 링거 맞으면서 헛소리하더라. 가까이 가서 들어 보니까 전부 네 이름만 부르고 있었어. 그 뒤로는 또 어떻게 된 건지 고열까지 와서 보름을 꼬박 병원에 있었지. 사람이 반쪽이 되도록 말라서 우리도 정말 놀랐어. 그때는 정말 큰일 날 뻔했어.”“아이고, 할머니... 그런 옛날 얘기를 뭐 하러 또 꺼내세요?”하도진은 여전히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눈매를 휘며 피식 웃더니 리치를 하나 까서 직접 김옥자의 입에 넣어 줬다.“입 막으려고? 난 더 말할 거야. 하윤이한테 다 말할 거야. 넌 그때 자신의 몸을 하나도 안 챙겼어. 밥도 제대로 안 먹어서 위까지 다 버려 놓고... 맨날 술이나 마시고.”김옥자는 우물우물 씹다가 씨를 뱉자 하도진은 또 하나를 까서 건넸다.민하윤은 하도진을 한참 바라봤다.할머니가 말한 감정도 없이 껍데기만 남은 사람처럼 살던 하도진과 지금 눈앞의 하도진은 쉽게 겹치지 않았다.헤어진 2년 동안, 민하윤은 항도시에서 혼자 묵묵히 사계절을 버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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