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기타 / 장순혁 중 º 단편 / Chapter 51 - Chapter 60

All Chapters of 장순혁 중 º 단편: Chapter 51 - Chapter 60

63 Chapters

아버지께

아버지, 당신께 벌써 몇 번이나 적었는지도 모를 편지를 적습니다.오늘도 몸 성히 잘 지내시는지요.저는 잘.. 저는..음..솔직히 잘 지내지는 못합니다.아버지께 보낼 편지를 적으며 새벽을 보냈던 날들이 늘어날수록제 마음은 편해졌었지만이젠 그렇게 현실을 직시하지 않기에는,현실이 너무나 커다랗게 저를 덮쳐오고 있습니다.차가운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웃돈다는 것을저는 이곳에 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누군가는 평생 모를 이 감정을,몰라야만 할 이 감정을 저는 너무나 절실하게 실감하고 있습니다.누구를 탓해야 할지도, 아니, 탓할 수도 없는 지금이 스스로를 탓하게끔 하는 듯도 합니다.어제의 악몽은 오늘의 현실이 되어가니,오늘의 악몽은 내일의 현실이 되겠지요.어쩌면 저는 낮 동안 큰 악몽 속을 헤매이다가 밤이 되어,잠에 들고 나서야 작은 악몽 속에서 숨을 돌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이렇게 편지를 적는 것도 아마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어제 잡아온 그들 중 하나가 털어놓았습니다.내일, 즉 오늘,이 새벽이 지나면 그들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하더군요.그자를 묶어 놓으려고 했지만주변 이들의 불안감 어린 눈빛을 보고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옳은 선택이었는지는 몰라도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스스로 되뇌었습니다.총에 튄 핏방울은 아직도 닦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제가 짊어지고 가야 할 업이라 생각하려 합니다.그렇게나마 제 주위 이들을 지켜주고 싶습니다.얼마 남지 않은 시간일 지라 하더라도요.탄약고와 주변 건물들, 시체들의 품까지 뒤져저희에게 남은 총알들을 모조리 모아 세어보았습니다.한 명당 서른 발 정도의 총알이 돌아갈 것 같습니다.턱없이 부족한 수입니다.한 발에 한 명을 쏴 죽인다고 해도 부족할 것 같습니다.다행히 죽는다고 해도 지옥에 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이미 저는 지옥에 있으니까요.이곳만 벗어날 수 있다면..아니, 아닙니다.이런 생각은 하지 않겠습니다.모두를 쓰러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이백명에서 백오십명으로,백
Read more

신의 불평 1

어두운 방.한가운데에는 정사각형의 탁자.그 위에는 자그마한 전등.그 옆에는 의자 세 개.전등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남자는 탁자를 향해 조심스레 걸어온다.의자를 모두 뒤로 한걸음 정도씩 빼놓는 남자.그러곤 그중 한 의자에 앉는다.눈을 감는 남자.심호흡을 하고 눈을 뜨면,나머지 의자에,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앉아있다.남자는 그들에게 간단히 목례를 한다.같이 목례를 하는 여자와 대충 손을 흔드는 늙은 남자.여자가 입을 연다.“..시작하시죠.”늙은 남자는 여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걸걸한 목소리로 시끄럽게 말하기 시작한다.“이 짓거리도 벌써 몇 번째야, 안 지치냐?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내가 먼저 미치겠어. 어?”남자가 여자를 본다.여자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입을 열지 않겠다는 무언의 뜻이 느껴진다.남자는 고개를 돌려 늙은 남자를 바라본다.어렵사리 입을 뗀다.“그.. 아시다시피, 저희로서는 이런 방법밖에는 떠올리지 못해서..죄송합니다. 그러나 저희 쪽 입장도 조금은 헤아려주십시오.”“조금은 헤아려주십시오? 이게 너네 입에서 나올 말이냐, 지금?내가 지금까지 준 기회만 수천 번이 넘어, 수천 번이! 까먹었어?벌써 까먹을 정도로, 그렇게 멍청하게 만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내가 잘못 만들었나? 내 잘못이야? 그래, 내 잘못이지, 내 잘못이야.너네같이 멍청한 놈들을 만들어버린 것도 잘못이고,너네같이 멍청한 놈들한테 기회를 줬던 것도 잘못이고.너네같이 멍청한 놈들이랑 대화가 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것도 잘못이지.”“...”“아니, 왜 니들은 니들 필요할 때만 나한테 찾아와서 이래라 저래라냐?평소에 잘하든가, 느닷없이 찾아와서 제 말 좀 들어주세요~ 하고 찡찡거리면내가 들어주고 싶겠냐?”“..그래도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기도도 드리고, 헌금도 바치고, 뭐.. 그렇게 하잖습니까?”“그게 나한테 들어오냐? 니들 대가리한테 들어가지.내가 뭐 대단한 거 바라는 거야? 아니잖아.그냥
Read more

신의 불평 2 [完]

“첫 번째. 전 세계를 통합, 관리하는 하나의 단체를 만들어 나라 간의 분쟁이나 쓸모없는 소모전을 없애겠습니다.두 번째. 평화가 곧 진리라는 당신의 뜻을 모든 나라에게,모든 나라의 언어로 전달하겠습니다.세 번째. 모두가 머리를 맞대어 이런 재앙에 대한 대비책을 미리 설립해 놓겠습니다.네 번째. 당신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를 설립하여,그 기구를 통해야만 당신께 말을 전할 수 있게끔 하여,당신의 귀찮음을 덜어드리겠습니다.다섯 번째. 모든 불행을 없애고 모두가 행복한 곳으로 만들겠습니다.”“끝?”“네.. 끝입니다.”늙은 남자의 고개가 푹, 하고 꺾인다.간신히 다시 고개를 드는 늙은 남자.그새 몇 년은 늙은 듯 보이는 표정이다.“..자, 우선 첫 번째.”“..네.”“그 단체 너네 이미 만들었잖아. UN. 근데 왜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이지?”“,,그건.”“두 번째. 이건 이미 내가 직접 수없이 보냈어. 니들도 알다시피.나사렛 예수, 석가모니, 그 외 기타 등등. 근데 니들은 걔네들 어쨌더라?나를 믿고 내 말을 따르자는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이고,나를 믿고 나처럼 살아가자는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 묶어서 굶겨 죽이고,다른 애들은 전부 다 다른 방식으로 죽였잖아.걔네들 나랑 같이 있거든?나 이제 더 이상은 걔네들 너네한테 못 보내겠어. 불쌍해서.진리를 말하고 따르자고 하면 뭐해, 니들이 그중 단 하나도 못 믿고 죽여버리는데.지금 있는 애들도 니네가 죽이고 나면 다시 안 내려보낼 거야.물론 걔네들도 나한테 말하지.다시 내려보내 주면 모든 것들이 구원받을 수 있게 만들겠다고.근데.. 안 돼. 안 되겠어, 이젠.내가 직접 보내도 내 말을 안 믿는데, 니들끼리 할 수 있다고?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그리고 세 번째.”“그..”늙은 남자는 여자의 말을 무시하며“대비책을 설립해? 그래, 니네, 대비책 설립할 수 있어.충분히 그럴만한 능력도 있고.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 줄 알아?이미 니네
Read more

전쟁중, 어느 남쪽 병사의 말 1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밤.한 손에 총을 든 군인 두 명.그 중 한 명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불을 붙인 뒤 연기를 내뱉는 군인.옆에 선 군인에게 피울거냐고 묻는 듯 담배갑을 건네지만앞만 바라보며 경계를 한다.그럼 말라는 듯, 품에 다시 담배갑을 넣는 군인.연기를 깊게 들이 마신다.군인은 담배를 피우며 입을 연다."야, 내가 죽인 북한군이 몇 명인지 알아?나도 몰라 임마, 그냥 총들고 갈기는 거야.죽이고, 죽이고, 죽이고.어쩔 땐 총알은 원래 빨간색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아군 시체들을 회수하고,적 시체들은 한곳에 모아 태우는데,그 와중에도 내가 죽인 놈들은 알아보겠더라고.신기하게도 말이야.뭐.. 미안하다거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아.그런 생각은 여기서는 사치니까.내가 먼저 죽이지 못했더라면,저놈들이 내 시체를 모아 태웠을테니까 말이야."들고있던 총을 새삼스럽게 잡아보는 군인."총이란게 이렇게 무겁고 시끄러울 줄이야.어렸을 때 나뭇가지들고 총인 척 가지고 다니던게 엇그제 같은데..지금 이 꼬라지로 살게 될 줄이야.세상일 모른다, 모른다하더니 정말이었네.하긴.. 나만 이런 것도 아닐 텐데.이런 배부른 소리를 할 수 있는 것도 살아남았으니까 가능한 거지.너는 어떻게 생각하냐?"대답도 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는 동료 군인."재미없는 놈..난 있잖아,내 반대편에 선 저놈들이 움직이면나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저놈들을 죽여.손가락 한 번 놀리면 한 명이 죽지.총알 하나의 값이 목숨 하나와 같은 값이라는 거야.이상하지 않냐?이 총과 탄창 하나가 적 한 부대와 같은 값어치를 지닌다는 소리인데..괜찮은건가? 이대로도?물론 괜찮지.난 괜찮아.아니, 괜찮아야만 해.나는 살아남을 거거든.이승만이건 김일성이건 뭔 상관이야.남쪽이건 북쪽이건 무슨 상관이냐고.개처럼 끌려온건 저 새끼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인데.도망칠 용기도 없는 쓰레기들.죽이라면 죽이고, 잠도 자지 못하고 경계 근무 서라고하면 서고
Read more

전쟁중, 어느 남쪽 병사의 말 2 [完]

"사람은 언젠가 때가 되면 다 죽어.다만 그때가 지금이라면 억울할 것 같기는 하다.그렇지?그나저나 그거 알아?언젠가부터 더이상 가족들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아.그래도 난 편지를 적어서 보내지.집에 돌아가면 우리 가족들, 하나하나 안아줄거라고.어머니, 아버지 등에 업고 동네 한 바퀴든 열 바퀴든 돌 거라고.편지 내용들도 많이 달라진 거야.처음에는 지금 처한 현실들을 적어서 보냈지.전선에 투입되고, 빨갱이들을 죽였다고. 집에 가고싶다고.지금은.. 현실보다는 꿈을 적지.집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살 거라고.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지어도 좋고,어머니를 따라 가게 일을 도와도 좋고.아니, 무슨 일이든 할 테니 살아서 돌아간다면 제일 좋고.편지를 적을 때면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져.현실과 꿈의 괴리가 느껴질수록 나는 무덤덤해지고.이젠 현실이 꿈보다 더 악몽과 가깝게 맞닿아있지.꿈 속에서 난 골백번도 넘게 더 죽었어.꿈에서 깨어나면 마치 죽으려는 듯이 달려들고.내가 죽인 놈들은 마지막으로 어떤 생각과 함께 눈을 감았을까.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알고싶지 않아도 말이야."철모를 고쳐쓰는 군인."만약 가족들이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사는 중이라나 같은 괴물이 필요하지 않아서 편지를 적지 않는 거라면 나는 만족해.피 맛을 알고 나면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단 걸 알거든.근데 만약 가족들이 다 죽어서 편지를 보내지 못하는 거라면?그래도 난 가족들한테 편지를 보낼 거야.그리고 날 밝으면 저 빨갱이들한테 총을 쏘겠지.우리 가족들 가는 저승길 동무들은 하나라도 더 많은 게 좋으니까.구름 위에서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랄 뿐이야.그곳에는 빨갱이도, 뭣도 중요한 일이 아닐 테니까."군인은 품에서 주섬주섬 사진을 꺼낸다.옆의 군인에게 보여준다."이 사진 좀 봐 우리 가족 사진이야.계속 꺼내고 쓰다듬느라 이젠 얼굴마저 희미해졌어.나, 더는 가족들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우리 아버지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라?우리 어머니 키가 어느
Read more

혼자 사는 여자

밤, 하나의 조명이 켜져 방을 자그맣게 밝히고 있다.각종 잡동사니가 가득 차 있어 어지러운 방.옷가지들과 잡지들, 스마트폰 충전기가 보인다.발 디딜 틈 없어 보이는 방에유일하다시피 깔끔한 앉은뱅이책상이 있다.어지럽혀져 있는 방안을 비추다가흰 벽 앞의 앉은뱅이책상을 화면에 담는 카메라.화면은 고정한 채로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들린다.책상에 투명한 유리잔과 맥주캔이 놓인다.누군가 벽에 편히 기대어 앉아 맥주캔을 딴다.유리잔에 맥주를 따른다.유리잔 한가득 담긴 맥주와 약간의 거품.맥주캔을 책상에 올려두고,그 앞에 있는 건 여자다.여자는 맥주가 든 유리잔을 손에 쥐고 벌컥벌컥 마신다.여자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신다.맥주가 담긴 유리잔을 반 정도 비운 여자.여자의 입가에 맥주 거품이 묻는다.여자는 팔로 대충 거품을 닦는다.문득 울리는 전화벨 소리.여자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본다.잠시 무표정이다가, 얼굴을 구기고 스마트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여자는 무심하게 유리잔에 담긴 맥주를 깔끔하게 비운다.여자는 유리잔을 옆에 두고 캔째로 맥주를 들이마신다.비워진 맥주캔.여자는 빈 맥주캔을 손으로 힘주어 구기고,방 한구석으로 집어 던진다.여자가 일어나 화면에서 벗어난다.카메라는 여전히 그대로인 채로,여자가 침대에 몸을 던지는 소리가 들린다.여자는 조용히 말한다.여자 (조용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씨발.."화면이 어두워진다.장면이 끝이 난다.*밤, 하나의 조명이 켜져 방을 자그맣게 밝히고 있다.여전히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어 더러운 방.전 장면의 물건들 위에 새로운 옷이 얹혀져 있다.카메라는 전 장면과 앵글이 같다.카메라는 흰 벽 앞의 앉은뱅이책상을 비춘다.화면은 다시 고정된 채로 걸음 소리가 들린다.책상에 투명한 유리잔과 맥주 2캔이 놓인다.여자가 벽에 기대어 앉아 첫 번째 맥주캔을 딴다.유리잔에 맥주를 따른다.유리잔 한가득 담긴 맥주와 약간의 거품.맥주캔을 다시 책상에 올려두고,
Read more

지금, 이곳은 하얀 겨울입니다

"도끼를 들고 가요어깨에 살짝 걸치고바알간 단풍 나무를 벨거랍니다도끼를 들고 가요어깨에 살짝 걸치고단풍 나무는 수액도 빨갛답니다도끼를 휘둘러요온몸에 힘을 주고선바알간 단풍 나무가 쓰러집니다도끼를 휘둘러요온몸에 힘을 주고선등허리가 꺾이고선 죽었답니다"음악이 끝나고,붉은 수액을 질질 흘리는 베어진 단풍 나무를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가는 애니메이션 주인공.점점 멀어지며 작아지다가,문득 단풍 나무를 팽게치고 달려와 화면에서 튀어나온다.자기가 쓰던, 손잡이까지 붉은 수액으로 물든 도끼를 건네준다."난 이제 필요 없어서!게다가 넌 이걸 제대로 쓸 수 있을 거야!이미 익숙하잖아, 그렇지?안녕!"다시 화면 속으로 들어가단풍 나무를 업고 집으로 향하는 주인공.고개만 돌려 윙크를 찡긋, 하더니 곧 사라진다.검은색 화면.끝, 이라는 글자가 한동안 자리하더니,테레비 화면이 꺼진다.꺼진 테레비와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과 시뻘건 도끼.그 사람은 소파에서 일어나 도끼를 주워든다.채 마르지 않아 끈적거리는 수액이 사람의 손에 들러붙는다.이리저리 도끼를 휘둘러보는 사람.고개를 갸웃하더니 테레비에 휘둘러 두동강을 내버린다.도끼를 잡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도는 사람.그러다 도끼를 놓쳐버리면서 동시에.. 펑!잠에서 깨어납니다.기지개를 켭니다.하품을 합니다.뭔가 재미난 꿈을 꾼 것 같은데..더 자고 싶지만 일어나야 합니다.오늘은 갈 곳이 있으니까요.이불을 걷고, 침대를 박차고 나섭니다.정성스럽게 이불을 갭니다.베개를 이불 위에 올립니다.음, 이정도면 충분히 깔끔해 보이네요.실내화를 질질 끌며 거실로 나갑니다.부엌에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엽니다.생수를 한통 꺼내 뚜껑을 따고 마십니다.집에 정수기가 있기는 하지만 며칠 전에 고장이 나 정수밖에 나오지 않아요.저는 냉수를 좋아하기에 전날밤이면 미리 생수통에 물을 담아 냉장고에 넣어놓습니다.어서 정수기 기사님이 오셔서 정수기를 고쳐주셨으면 좋겠네요.생수통을 비우고 분
Read more

아픔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아프다고로 나는 살아있다아픔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다아프고 나서야 우리는 해당 부위의 존재를 명명백백하게 느낀다아프기 전에, 우리는 그 뼈를, 근육을, 피부를 느낄 수 있었을까?사실상 아픔이란 그들의 비명일지도 모른다자기도 이곳에 존재한다고,자기도 이곳에서 숨 쉬며 살아 있다고,자기도, 자기도 살아 있다고내 몸이지만 역겨움이 올라온다동족혐오일까?자기와 비슷한 걸 보면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자기 자체를 싫어하는 것과 같지는 않다되려 더 나을 거다나는 나 자신을 싫어한다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뽑는다면 압도적으로 내가 뽑힐 거다내가 나를 만난다면 난 죽기 직전까지 주먹을 날리고,마지막 한방을 날려 죽여버릴 것이다그러나 나는 고통을 두려워한다그렇기에 죽지 못했다죽음과 고통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밧줄이 목을 조이는 그 잠깐의 고통조차 나는 참아내지 못했다아픈 건 싫으나 죽고는 싶다참으로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불이 붙기 위해서는 장작이 바짝 마를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갓 잘린 나무는 수분기가 많아 불을 붙여도 불이 붙지 않고 연기만 매캐하게 풍겨나온다나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그러나 언제 마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나조차도그렇기에 충분한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어야 한다그러니 지금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그러나 이런 이성적인 판단은 지금껏 지겹게 내리지 않았는가고작 그런 판단들로 만들어진 결과물이 지금의 나다복잡하게 단순한, 지금의 나때로는 나를 위해 나를 배재할 수 있어야 한다끊긴 밧줄이 눈에 들어온다인터넷으로 주문한 밧줄은 생각보다 튼튼하지 않았다현대 사회에게는 필수인 인터넷의 문제다모든 걸 쉽게 살 수 있는 대신,모든 것의 가치는 옅어진다그렇다고 해도, 직접 만지고 무게를 가늠해봤자 그 본질을 알아챌 수 있지는 못하니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모든 것이 그렇다본질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그러나 그 본질을 알아볼 수
Read more

등대 1

- 등대 (prologue)[등대지기 모집.장소 - 서해 중 하나의 섬.대상 – 스무 살 이상의 누구나.모집 인원 – 00명.월 급여 700만원.하는 일 - 등대 보수 및 유지.- 6개월 간격으로 교대 근무.- 처음 계약서를 작성하고 섬으로 출발하기 전 3개월 치 지급.- 다음 차례와 교대할 때 나머지 3개월 치 지급.- 생필품 및 각종 생존 물자 제공.- 인터넷 x, 전화 x, 편지 x.- 외부와 연락할 방법은 없음.- 신청, 면접, 등대를 다루는 일주일간의 교육. (교육비 별도 제공)]- 아버지의 죽음단순히 말하자면 안타까운 사고였다.내 아버지의 죽음은.여덟 살과 아홉 살 사이, 그 언저리에서 내가 잰걸음을 놀릴 무렵에 일어난, 사고.초등학교 교실에서 방과 후에 남아 받아쓰기를 연습하던 나에게담임 선생님께서 다가와근처 가까웠던 병원으로 가야 한다며,내 손을 잡아 이끌고 향하신.그 병원에서 아버지는 누워계셨다.아니, 쓰러져계셨다.아니, 아니다.당시의 나는 그 둘의 차이를 알지 못했으니누워계신 동시에 쓰러져계셨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아버지.나의 아버지.언제나 따스한 웃음을 지으시며나와 눈을 마주치시고는내게 오늘 학교는 어땠냐고,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냈느냐고,내게 물으시던나의 아버지.빨간 피로 범벅이 되어 웃음을 짓지도 않으시고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시던 아버지.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삐빅거리는 기계음만 들려주신 아버지.온 가족이 함께 모여 저녁 식사를 하며같이 보곤 했던 뉴스에, 아버지가 아침마다 펼쳐보시던 신문에 나오곤 했던,그래, 뉴스나 신문에서 매일 같이 나왔던음주 운전자가 차로 치어버린 불쌍한 피해자.그런 피해자가 되어버리신 아버지.아버지는 그 수없이 많은 기삿거리 중 하나였다.아마 그 밤,다른 이들의 저녁 식사 시간의자그마한 이야깃거리가 되어버리신나의 아버지.남겨진 가족들은 그 피해자의 가족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다시 말해 특
Read more

등대 2

- 병이 짙어지다 II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병실에 갔더니 형이 어떤 서류를 읽고 있었다. 내가 옆자리에 털썩, 하고 앉으면 형은 말없이 서류를 접어 품에 넣었다. 나는 굳이 묻지 않았고, 형도 굳이 말해주지 않았다. 그 날도 그렇게 지나가는 듯했다. 내가 병실을 나갈 때, 형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놀랐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며 형을 돌아보니 형은 품속의 서류를 내게 건넸다. 그러고는 나보다 먼저 병실을 나갔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서류를 펼쳐봤다. [등대지기 모집. 장소 - 서해 중 하나의 섬. 대상 – 스무 살 이상의 누구나. 모집 인원 – 00명. 월 급여 700만원. 하는 일 - 등대 보수 및 유지. - 6개월 간격으로 교대 근무. - 처음 계약서를 작성하고 섬으로 출발하기 전 3개월 치 지급. - 다음 차례와 교대할 때 나머지 3개월 치 지급. - 생필품 및 각종 생존 물자 제공. - 인터넷 x, 전화 x, 편지 x. - 외부와 연락할 방법은 없음. - 신청, 면접, 등대를 다루는 일주일간의 교육. (교육비 별도 제공)] 무슨 뜻이지? 나보고 하라는 걸까? 엄마는 자기가 돌볼 테니? 기분이 나빴다. 언제까지 아빠 행세를 할 건지. 나는 서류를 찢어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버렸다. 엄마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병실 밖으로 나섰다. 병실 밖, 벽에 형이 기대고 서 있었다. 내게 뭔가를 말하려는 듯싶었지만, 나는 무시하고 발길을 돌렸다. 형은 구태여 나를 잡지 않았다, 아니, 잡지 못했던 걸까. 뭐,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형을 본 적이 없다. 형은 소리도 없이 존재를 감췄다. 엄마의 옆에는 그때부터 나만 있었다, 나만. 형도 없이. 나만. 엄마와 함께 있었지만 고독했다. 외로웠고, 괴로웠다.
Read more
PREV
1234567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