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잿빛 회상 속 너를 만나다.: Chapter 1 - Chapter 10

10 Chapters

EP 1. 백미러 너머의 폭풍

탁한 회색빛이 감도는 백미러 너머. 그곳에 그가 있었다.좁고 네모난 거울의 프레임 속,일직선으로 꽂히는 두 개의 시선.칠흑처럼 어둡고 깊은 눈동자.아스라히 일렁이는 그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여전하구나. 이 남자. 하나도… 안변했네. 사람 미치게……]유진은 입술 안쪽을 질끈 씹었다.차창 밖으로 빠르게 밀려나는 조호바루의 풍경은 온통 잿빛이었다.낮게 가라앉은 채도의 흑청색 먹구름이 하늘을 집어삼키고 있었고,차 안은 푸르스름하고 서늘한 에어컨 바람만이 감돌 뿐이었다.서유진은 가죽 시트 깊숙이 몸을 묻었다.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심장 끝이 찌릿하게 아려오는 감각.그동안의 세월을 비웃기라도 하듯,단 한 치도 변하지 않은 그 무거운 눈빛이,차 안을 지배하는 특유의 침묵까지도 전부 다,유진의 방어벽을 허무하게 무너뜨린다.그날도 그랬다.한바탕 열대성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세상이 온통 잿빛으로 물들었던 그날.*6년 전, 말레이시아 세나이 국제 공항.국제공항이라는 거창한 간판이 무색할 정도로 공항은 아담했다.스르륵ㅡ.공항의 유리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훅 하고 들이치는 정글의 열기는 흉기 같았다.숨이 턱 막히는 점도 높은 후덥지근한 공기가 온몸의 피부를 무겁게 짓눌렀다.목덜미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리려던 바로 그 찰나.유진의 시선이 한곳에 멎었다.짙은 회색 수트를 자로 잰 듯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끈적하고 불쾌한 열기 속에서도,혼자만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서늘한 청색의 기운을 뿜어내는 남자.단정하게 정돈된 머리칼과 칼날 같은 턱선.전형적인 일본인 특유의 정갈함이 온몸에서 흘러넘쳤다.유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똑바로 걸어갔다.“하지메마시테. 서유진 데스.”(처음 뵙겠습니다. 서유진이라고 합니다)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선배의 추천으로 오게 된, 유진의 인생 첫 직장.일본 대기업 전자 부품회사의 아시아 총괄 본부.경력도 없는 깡 신입인 그녀에게,이것은 절대 놓칠 수 없는 거대한 기회이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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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2. 923호

철컥ㅡ!호텔 차량 게이트가 닫히는 날카로운 기계음.그 파열음이 정적을 사정없이 깨트렸다.그 거대한 옛 기억의 해일 속에서,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빠져나왔다.“숙소는 저희 사측에서 미리 이곳 소피텔로 잡아두었습니다. 여기서 1박 하시고 내일 오전에 싱가폴로 넘어가셔서 추가 협상안을 논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차 문이 열리고 내린 소피텔 호텔의 야외 로비.6년 전과 똑같았다.지독할 정도로 선명한 에메랄드빛의 열대 식물들이 바다처럼 펼쳐진 곳.피부에 닿는 공기는 조금 습했지만,이내 가슴 깊숙이 안정감을 선사하는 이국적인 향취가 코끝을 감쌌다.가끔 이 곳이 사무치게 그리웠었다.쏟아지는 황금빛 햇살 아래,야외테라스에서 느긋하게 브런치를 먹던 그 평화로운 오전.서로의 손가락을 얽어매며 잔잔하게 속삭였던 남자의 낮은 목소리…….달콤해서 더 잔인한 기억들이 깨진 유리 파편이 되어, 사방에서 유진의 살결을 찔러댔다.하지만 어떤 말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그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임원의 옆에 차분히 서서, 딱딱한 미소를 유지했다.“그럼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싱가폴에서 뵙겠습니다.”요스케가 한 걸음 뒤에서 단정하게 목례를 건넸다.탁ㅡ. 탁ㅡ. 탁ㅡ.그의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리며 멀어져 갔다.붙잡고 있던 숨이 그제야 풀어졌다.“서 과장, 출장 첫날인데 간단히 술 한잔 어때? 저기 바 분위기 좋은데.”함께 온 박 상무가 엉큼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어깨에 슬쩍 손을 올리려 했다.유진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그의 손을 피했다.“말씀 감사한데, 오늘 회의된 내역 정리해서, 서울 사무실에 전달하고, 내일 추가협의안 수정하려면 좀 빠듯해서요. 오늘 술 한잔은 제가 싱가폴에서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오늘은 푹 쉬십시오, 상무님.”단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거절.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상사를 로비에 덩그러니 내버려 둔 채,유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직행했다.띵.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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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3. 은밀한 각인

류 요스케의 팀에서 막내 엔지니어로 살아남는 것은,매일 아침 단두대 위에 목을 대는 것과 같았다.사내에서 최고 실력을 인정받는 천재 엔지니어.하지만 그는 다정함이나 온기 따위는 없었다.지독할 정도로 말이 없었고,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강철 같은 그레이 톤의 책상 뒤에 앉아,그는 늘 ‘말하는 쪽’보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쪽’을 택했다.검은 눈동자를 가라앉힌 채,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다가,상대가 빈틈을 보이는 찰나, 그 모든 말을 혼자 분석해 허를 찔렀다.그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얼음처럼 차가운 완벽주의 전략가였다.거기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이 선 카리스마.그는 주위의 공기마저 얼려버렸다.부하직원들은 그가 지나갈 때면 숨을 죽였고,감히 쉽게 친해지거나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하지만 유진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첫날 그 백미러 너머로, 바보같이 첫눈에 반해 버렸지만,솔직히 저런 남자와 가까워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으니까.*쨍하게 밝은 백색 형광등 조명이 내리쬐는 화장실.세면대 앞, 유진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그때 거칠게 문이 열리며, 총무과 여직원들의 날것 그대로의 뒷담화가 흘러들었다.“나 어제 마리나베이에서 제품 개발 류 팀장님이랑 약혼자 봤는데……”순간 옆에 서 있던, 유진의 손가락이 그대로 굳어버렸다.“어? 진짜요? 소문처럼 그렇게 미인이에요?”“네. 싱가폴항공 승무원이라니까… 근데 여자분이 류 팀장님 몸에 착 감겨 있던데요? 완전 뜨겁게!”“둘이 오래 만나지 않았어요? 근데도 그렇게 뜨겁다고요? 듣기로는 영국 유학 시절부터 만났다던데, 도대체 몇 년을 사귄 거야?”“내가 알기로는 7년을 만났다고 들었어요.”7년. 그 무거운 숫자가 유진의 가슴에 걸렸다.“7년이요? 하기사 저런 짐승 같은 남자 밑에서 굴렀으면,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오겠어요?”“암튼……. 응큼해서는…”“뭘 또 아닌척은…ㅎㅎㅎ… 맨 날 개발팀 지나가면서 침 흘리는 거 다 아는데…”“진짜… 저 거대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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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4. 두 번의 우연 그리고 한 번의 구원

그녀가 다시 나의 세상으로 돌아왔던 세나이의 공항으로부터.4년 전.말레이시아 산다칸의 작은 게스트 하우스.공용 샤워실에서 샤워를 간단히 끝내고 1층 로비로 내려갔다.무더운 열기 속에서 5분쯤 지났을까,털털거리는 픽업 차량이 도착했고 그는 홀로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다시 몇 분 뒤, 작은 동양인 여자가 차량 안으로 들어왔다.30분 후, 차량은 오랑우탄 보호구역의 흙먼지 날리는 주차장에 도달했다.요스케 먼저 차량에서 내렸고 여자가 가장 마지막에 내렸다.그곳에는 이미 다른 차량으로 온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밝은 색상 옷 입으신 분들은 저기 마련된 스카프로 몸 두르시고 여자 분들은 특히 가는 길에 있는 원숭이 떼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무섭다고 뛰거나 소리치시면 안돼요. 그럼 위험할 수 있어요."현지 가이드의 거친 주의사항이 끝나기 무섭게,일행은 눅눅한 정글 깊숙이 발을 내디뎠다.오랑우탄들의 아침 식사, 그리고 본격적인 정글 트레킹이 시작되었다.하늘을 가린 거대한 초록색 차양 같은 숲을 지나,핏빛의 라플레시아, 짙은 갈색의 커피와 후추 나무들이 시야를 스쳤다.그리고 100년 전까지 실존했다는 식인 부족의 롱 하우스에서 아침 식사를 마쳤다.아름다운 계곡과 쏟아지는 하얀 폭포수.시원한 아침 공기가 온몸을 감싸는 기분 좋은 여정이었다.그리고 몇 걸음 떨어진 뒤편에서 걷던, 요스케의 시선이 여자와 찰나로 맞닿기도 했다.정글의 끝자락, 위태롭게 매달린 흔들다리 앞.꽤 커다란 몸집을 가진 회색빛 원숭이 떼가 다리 난간 위를 점령한 채,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여자가 겁에 질린 듯, 흔들다리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망설였다.그 순간, 두려움을 감지한 원숭이 한 마리가 그녀의 얇은 셔츠 소매를 꽉 붙잡았다.가이드의 주의사항을 떠올린 여자.그녀는 비명을 삼키며, 소리 없이 제 팔을 빠르게 뿌리쳤다.아차 하는 찰나, 다른 원숭이 한 마리가 또다시 그녀를 덮치려 손을 뻗었다.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머리를 감싸 쥐고, 그 자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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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5. 푸른 달빛. 백사장에서 첫날 밤

너무 늦어버렸던 걸까.요스케의 품에 안긴 유진은 미열로 들뜬 가파른 숨을 내뿜고 있었다.그리고 여자의 뜨거운 숨결이 요스케의 턱밑을 자극했다.요스케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이제 막 새벽 1시.이 고립된 무인도에서 나갈 수 있는 첫 배가 들어오려면 오전 6시였다.앞으로 무려 다섯 시간이나 더 버텨야 했다.“하아…… 읏, 더워…….”몸속에서부터 들끓어 오르는 열기로, 괴로워하던 유진이 이리저리 뒤척였다.땀에 젖어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엉겨 붙는 게 답답한지,유진은 작은 손을 가쁘게 움직이며,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을 움켜쥐려 애썼다.요스케는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이내 유진의 가냘픈 손목에 걸려 있던 검은색 머리끈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요스케는 끈을 빼내 들고,자신의 커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엉성하게 쓸어 올리기 시작했다.스윽-.단단한 손가락 끝이 머리카락을 스칠 때마다, 유진의 몸이 잘게 떨렸다.동시에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달콤한 그녀의 체취.순간, 요스케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아랫배가 묵직하게 조여들었다.요스케는 급하게, 조금은 거친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정수리 위로 대충 올려 묶어주었다.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그곳.엉망으로 묶인 머리카락 아래로,열대의 습한 열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순백의 목덜미에 요스케의 시선을 송두리째 붙잡았다.달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새하얀 살결.요스케의 두꺼운 목울대가 크게 출렁이며 움직였다.시선을 조금 더 위로 올리자, 비로소 여자의 얼굴이 완전하게 보였다.아기처럼 작고 귀여운 윤곽.하지만 그 안을 오목조목 꽉 채우고 있는 시원하고 선명한 이목구비.작고 오뚝하게 솟은 앙증맞은 코,그리고 짙은 장막처럼 눈가에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그 사이로 오묘하게 빛나는 헤이즐넛 빛 눈동자.오늘 낮, 현지 가이드가 던졌던 실없는 농담이 머릿속을 스쳤다.[꽤나 예쁘던데… 재미 좀 보면 어때요?]요스케의 입술 사이로 자조 섞인 낮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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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6. 폭풍전야의 야근

붉게 온 하늘을 뒤덮던 진홍빛 노을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창밖은 이미 무거운 잿빛의 어둠으로 완벽하게 변해 있었다.하지만 아스라히 타버린 옛 기억의 끝자락에,홀로 서 있는 유진의 몸은 여전히 불덩이처럼 데일 듯 뜨거웠다.끈적한 열기가 전신을 타고 지독하게 흘러내렸다.스윽-.유진은 침대 모서리를 움켜쥐었다.6년 전 그와 함께 누웠던,눈이 시리도록 하얀 침대 시트의 바스락거리는 촉감이,손바닥 아래 환각처럼 살아났다.옷자락이 살갗에 쓸릴 때마다,요스케의 단단한 손길이 마구 훑고 지나갔던,허벅지와 안쪽 살결이 미친 듯이 화끈거렸다.불안정한 맥박이 아랫배 아래쪽에서, 쿵쾅거리며 무겁게 요동쳤다.부우웅ㅡ!그 순간, 정적을 찢고 거친 진동음이 방 안을 울렸다.암흑으로 가라앉은 방 안에서,독한 형광빛 액정이 유진의 눈을 찌를 듯이 홀로 번뜩이며 빛났다.사방의 음영이 허옇게 도드라졌다.유진은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가만히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배경화면 위로 떠오른 선명한 알람 메시지.ㅡ주차장에서 기다릴게.주차장.그 단어가 시야에 박히는 순간,유진은 숨을 들이켰다.6년 전 그때와 단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소피텔 호텔의 가장 깊숙한 맨 가장자리.사람들의 시선이나 발길이 도저히 닿기 어려운 그 음침하고 어두운 야외 주차장.그가 여전히,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유진은 석상처럼 굳은 채, 한참을 망설였다.그의 짧은 메시지를 보고, 또 보고, 닳아 없어질 것처럼 노려보았다.전신이 저릿한 긴장감으로 마비되는 기분이었다.그리고 유진은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받았던 첫 번째 텍스트 메시지를 떠올렸다.6년 전, 금요일 밤 8시.사무실의 메인 조명들은 전부 꺼진 지 오래였다.제품 개발실의 가장 입구 쪽 데스크.유진은 모니터의 허연 블루라이트를 온 얼굴로 받으며,마지막으로 회의록과 제품 단가 보고서를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보통의 루틴대로라면,선임 엔지니어에게 보고서를 제출해, 1차 검토를 끝낸 후,선임을 통해 비로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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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7. 문제의 첫 저녁식사

쿠우웅-.칠흑 같은 검은색 SUV의 묵직한 문이 닫히는 순간,세상의 모든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차 안은 오직 대시보드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네온 그린빛 조명만이,두 사람의 실루엣을 비추고 있었다.숨막히게 어색한 정적이, 두 남녀의 머리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스윽-.요스케가 가볍게 고개를 돌려,조수석에서 잔뜩 경직된 채 안전벨트를 꼭 움켜쥐고 있는 유진을 슬쩍 바라보았다.그의 묵직한 시선이 유진의 붉게 달아오른 뺨을 스치듯 훑고 지나갔다.남자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저녁…… 할까 하는데. 뭐 먹을래요?”유진은 마른침을 삼켰다.목구멍이 바짝 타들어 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아무거나 괜찮습니다.”“네.”그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묵직하고 간단명료했다.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그의 무거운 침묵은,지금 유진에게 치명적인 쥐약과도 같았다.쿵쾅, 쿵쾅, 쿵쾅-.터질 듯이 가파르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이 비좁고 밀폐된 차 안의 서늘한 공기를 타고, 그에게로 그대로 생중계될 것만 같았다.흘러내린 식은땀이 손바닥 안 안전벨트를 축축하게 적셨다.최악이었다.그에게 몰래 품어버린 이 위험한 호감을 들키는 것도 죽기보다 싫었지만,깡 신입 말단 엔지니어로서,까마득한 직속 상사에게 이토록 얼어붙어,자신감 하나 없이, 모양 빠지고 능력 없는 존재처럼 비춰지는 것은 더더욱 끔찍했다.유진은 이를 악물고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부우웅-.그의 차가 거침없이 매끄러운 엔진음을 내며 익숙한 도로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창밖으로 흘러가는 조호바루의 야경이 하얗고 붉은 불빛의 궤적으로 번져 나갔다.그리고 얼마 뒤,차량이 미끄러지듯 세나이의 소피텔 호텔(Sofitel Hotel)에 도착했다.유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상사와 단둘이, 그것도 금요일 밤에 호텔로 향한다는 건……사실 너무도 위험천만한 시그널이었다.붉은 경고등이 뇌리에서 미친 듯이 점멸했다.그저 단순한 회식 겸 저녁 식사일 뿐이라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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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8. 서울 출장. 폭풍 전야

아스팔트 바닥을 잔인하게 딛는 유진의 얇은 힐의 굽소리가,야외 주차장의 정적 속에서 불안하게 흔들렸다.소피텔 호텔의 가장 어둡고 깊은 틈새.이미 예상했고, 수없이 반복하며 상상했던 그와의 재회였다.6년이라는 세월에,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마주할 수 있을 거라고,오만한 확신을 했던,스스로를 향한 뼈저린 후회가 발끝에서부터 식은땀이 되어 차올랐다.단 한 걸음도 제대로 떼기 힘들 만큼,전신이 저릿하게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이 지독한 잿빛 구덩이 속으로,제 발로 다시 걸어 들어오게 만들었던,불과 며칠 전,서울에서의 불쾌한 기억이,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솟아올랐다.차가운 실버 톤의 블라인드가 굳게 닫힌 박 상무 집무실.“서 과장, 이번 출장에 김 대리를 보내는 이유가 뭐야?”박 상무의 호출에 유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커다란 까만 책상 뒤에서, 불만과 탐욕이 뒤섞인 험악한 그의 표정이 그녀를 나무랐다.유진은 등줄기를 꼿꼿하게 편 채, 그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냈다.“김 대리가 쭉 팔로우 했던 일이니, 상무님을 잘 서포트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서 과장, 임 상무 팀 프로젝트로 움직이려는 건 아니지?”박 상무는 회사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는 유일한 라이벌이자,제품 개발 2팀의 수장인 임 상무를 노골적으로 언급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유진은 건조하게 대답했다.“아닙니다.”“임 상무는…… 서 과장도 알다시피 이 회사 후계 구도의 최일선이 아니야. 알다시피, 내 사촌이라고. 아무리 임 상무가 똑똑하게 일을 잘한다고 해도, 어차피 내 밑에서 일할 머슴에 불과해.”“…………”“그러니, 현명하게 판단하는 게, 서 과장의 커리어에 도움이 될 거야.”박 상무는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놓고 협박 투로 말했다.그리고 유진의 얇은 어깨를 향해 슬금슬금 손을 뻗어왔다.권력을 쥔 자의 추악하고 거만한 압박.유진은 바로 뒤로 반 걸음 물러서며, 그의 손길을 칼같이 쳐냈다.“전, 회사 내 정치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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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9. 비밀의 키. 풀문 파티

비좁고 밀폐된 검은 SUV 차량 안.불안하게 잘게 떨리는 두 남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교차했다.대시보드의 네온 그린빛 조명이,유진의 창백한 얼굴 위로, 기묘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스으윽ㅡ.딸각ㅡ.그의 두꺼운 손가락이 유진의 어깨 위 안전벨트를 거칠게 움켜쥐더니,그대로 끌어당겨 은백색의 버클에 매끄럽게 채워주었다.사선으로 유진의 가슴을 가로지른 벨트가, 그녀의 굴곡을 아슬아슬하게 압박했다.그제서야 가슴을 짓누르던 거대한 바위가 걷힌 듯,유진의 허파 속으로 숨이 가쁘게 들이켜졌다.유진은 타들어 가는 입술을 짓씹으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어디로…… 가려고요?”운전대를 잡은 요스케의 억센 팔뚝 위로, 푸른 핏줄이 성나게 돋아 올랐다.그는 전방의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하며, 낮고 거칠게 긁히는 음성을 뱉어냈다.“오랑우탄…… 보러 가자.”순간 유진의 헤이즐넛 빛 눈망울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거대하게 커졌다.심장이 아랫배 밑바닥까지 가파르게 추락하는 충격.유진은 본능적으로 운전대를 쥔 그의 단단한 팔뚝을 작은 손으로 꽉 붙잡았다.뜨거운 살결이 손바닥을 타고 화끈하게 번졌다.“네……?”하지만 요스케는 기포처럼 터진 그녀의 외침을 가차 없이 무시했다.콰아아아아아ㅡ!매서운 엔진음과 함께 검은 SUV 차량이 그대로 미끄러지듯 출발했고,어두운 도로 위를 향해 야수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창밖의 야경이 하얀 빛줄기가 되어 사방으로 부서졌다.이내, 빠른 속도로 질주하던 그의 차량이 싱가포르를 향해,길게 뻗은 국경선의 거대한 다리를 거침없이 건너기 시작했다.달리는 차 바퀴 소리가 웅웅거리며 차체를 울렸다.그리고……온 세상이 야경의 불빛으로 일렁이던,서울의 그 잔인했던 밤 속으로 사정없이 빨려 들어갔다.*두 사람의 지친 육체를 태운,주황색 택시가 한남대교의 거대한 상판을 매끄럽게 지나고 있었다.창밖 멀리로는 서울의 이정표인 남산타워가 독한 황금빛을 내뿜으며 솟아 있었다.한강 주위로 흩어진 수많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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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0. 지독한 꿈

[풀문 파티!!!]그 지독하고 가혹한 네 글자가,광화문 호텔 로비의 적막을 찢고 유진의 고막에 박힌 순간,사방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일시에 소거되었다.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그날 밤의 기억은 단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대신, 그날 이후 가끔씩 찾아오는 야한 꿈이 있었다.산다칸의 그 방탕하고 원시적인 풀문 파티에서 목격했던,뇌리를 찌르듯 생경하고 외설적인 풍경 속에,자신도 지독하게 얽혀 들어가 있던 바로 그 꿈.“아… 하…. 더 깊게…. 아…….”칠흑같은 바다 위,가쁜 숨을 몰아쉬며 매달리는 유진의 애원에,거구의 남자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부서져 버릴 듯 억세게 끌어안았다.살결과 살결이 빈틈없이 마찰하며,넘실거리는 파도 속에서 휩쓸리고 또 휩쓸렸다.유진은 남자의 단단한 목덜미를 악착같이 끌어안았고,자신의 가느다란 다리로 남자의 두꺼운 허리를 터질 듯 꽉 감싸 안았다.조금의 틈새도 허용하지 않은 채,완벽하게 결합해 하나가 된 서로의 뜨거운 몸.유진은 미친 듯이 치밀어 오르는 극상의 쾌락과 신음을,남자의 데일 듯 뜨거운 입술 위로 남김없이 쏟아냈다.“계속 안아주세요. 너무 좋아…. 아…. 죽을 것 같아…. 계속…. 아….”차가운 밤 바닷물 속에서, 유진은 남자에게 넝쿨처럼 엉킨 채,야수처럼 돌변한 남자에게 본능적으로 매달렸다.더 깊게, 더 난폭하게 자신의 가녀린 몸 안쪽을 박아달라며,외설적인 단어들까지 서슴없이 내뱉던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그렇게 유진은 꿈속에서,이름도 모르는 낯선 남자와,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음란한 밤을 보내곤 했었다.쿵-.그저 전 남친들과의 사이에서 쌓여왔던,지독한 성적 욕구 불만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그런데…… 지금 제 눈앞에 서 있는,서슬 퍼런 직속 상사가 자신과 그 풀문 파티의 해변에서 함께 한 남자라고………[그게……… 꿈이 아니었다고……!!!]등줄기를 타고 거대한 전율이 소름 끼치도록 쫙 돋아 올랐다.그 지독하게 야하고 외설적인 꿈의 파편들이,남자의 억센 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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