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10년 전, 산다칸의 푸른 달빛 아래. 이름도 모른 채 서로의 영혼을 각인했던 하룻밤. 6년 전, 말레이시아 세나이 공항에서. 완벽한 상사와 신입 부하 직원으로 만난 두 사람. 2달 후, 그 남자의 결혼식 당일, 그는 자신의 신부가 아닌 그녀를 선택하고 세나이의 소피텔 923호에서 2년 간의 그들만의 비밀 낙원을 함께 한다. 2년 후, 유진은 그와의 결혼을 꿈꾸지만, 그의 전 약혼녀가 안고 나타난 17개월 아이의 눈매 속에서 그와의 영원은 처참하게 부서져 내렸다. 죄책감과 절망 속에서, 그를 버리고 서울로 도망친 지 4년. 현재, 조호바루 소피텔 923호. 과거 우리가 몸을 섞었던 은밀한 방에서, 유진은 다시 그 남자의 문자를 받는다.
View More탁한 회색빛이 감도는 백미러 너머. 그곳에 그가 있었다.
좁고 네모난 거울의 프레임 속,
일직선으로 꽂히는 두 개의 시선.
칠흑처럼 어둡고 깊은 눈동자.
아스라히 일렁이는 그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여전하구나. 이 남자. 하나도… 안변했네. 사람 미치게……]
유진은 입술 안쪽을 질끈 씹었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밀려나는 조호바루의 풍경은 온통 잿빛이었다.
낮게 가라앉은 채도의 흑청색 먹구름이 하늘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차 안은 푸르스름하고 서늘한 에어컨 바람만이 감돌 뿐이었다.
서유진은 가죽 시트 깊숙이 몸을 묻었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심장 끝이 찌릿하게 아려오는 감각.
그동안의 세월을 비웃기라도 하듯,
단 한 치도 변하지 않은 그 무거운 눈빛이,
차 안을 지배하는 특유의 침묵까지도 전부 다,
유진의 방어벽을 허무하게 무너뜨린다.
그날도 그랬다.
한바탕 열대성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세상이 온통 잿빛으로 물들었던 그날.
*
6년 전, 말레이시아 세나이 국제 공항.
국제공항이라는 거창한 간판이 무색할 정도로 공항은 아담했다.
스르륵ㅡ.
공항의 유리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
훅 하고 들이치는 정글의 열기는 흉기 같았다.
숨이 턱 막히는 점도 높은 후덥지근한 공기가 온몸의 피부를 무겁게 짓눌렀다.
목덜미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리려던 바로 그 찰나.
유진의 시선이 한곳에 멎었다.
짙은 회색 수트를 자로 잰 듯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
끈적하고 불쾌한 열기 속에서도,
혼자만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서늘한 청색의 기운을 뿜어내는 남자.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칼과 칼날 같은 턱선.
전형적인 일본인 특유의 정갈함이 온몸에서 흘러넘쳤다.
유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똑바로 걸어갔다.
“하지메마시테. 서유진 데스.”
(처음 뵙겠습니다. 서유진이라고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선배의 추천으로 오게 된, 유진의 인생 첫 직장.
일본 대기업 전자 부품회사의 아시아 총괄 본부.
경력도 없는 깡 신입인 그녀에게,
이것은 절대 놓칠 수 없는 거대한 기회이자 동아줄이었다.
그렇기에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사전조사를 철저히 끝내두었다.
이곳에서, 반드시 살아남아 성공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지며.
그리고 드디어 마주한 유진의 첫 직속 상사.
머릿속으로 수없이 복기했던 그의 프로필이 시야 위로 겹쳐진다.
류 요스케. 32세.
옥스퍼드와 스위스 공과대학원을 거친 수석 엔지니어.
187cm의 거구. 무뚝뚝하게 가라앉은 강한 인상.
실물로 마주한 그는 소문보다 훨씬 선이 굵고 잘생긴 일본 남자였다.
허나 아무렇지 않았다. 어떤 떨림도 일지 않았다.
자신의 사전조사가 맞다면,
그는 2년째 동거 중인 여자가 있고, 두 달 뒤 결혼을 앞둔, 사실상 100% 유부남이었다.
유진에게 그는 그저 자신의 고혈을 빨아먹을 어려운 상사일 뿐이었다.
“Yosuke Ryu. I am a senior product manager.”
(류 요스케입니다. 제품 개발 팀장입니다.)
그가 먼저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굳은살이 옅게 박인, 단단하고 억센 손이었다.
“Nice to Meet you. How was your flight?”
(만나서 반갑습니다. 비행은 괜찮았습니까?)
낮고 부드럽게 긁히는 완벽한 영국식 영어 발음.
과연 옥스퍼드 출신다웠다.
“This is Watson, who will be your colleague.”
요스케의 거대한 덩치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남자,
왓슨이 중국인 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형식적이고 건조한 인사가 오갔다.
억지로 짜낸 친밀감도, 불필요한 사적인 대화도 섞이지 않은 무미건조함.
요스케가 은빛 손목시계를 슥 확인하더니,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차로 이동하면서 설명하죠.”
그때 왓슨이 눈치를 보며 말을 보탰다.
“공장으로 가기 전에, 점심을 먼저 하고 가면 어떨까요?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는데…….”
왓슨의 제안에, 요스케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짙은 흑색의 눈동자가 유진의 살짝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점심…… 괜찮습니까?”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사실 난기류 때문에 속이 뒤집혀 멀미가 올라오고 있었지만,
첫 상사가 던진 첫 질문에 감히 “No”라고 답할 수는 없었다.
“그럼 소피텔로 가죠.”
요스케가 툭, 한 걸음 다가오며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유진이 쥐고 있는 캐리어 손잡이로 향하는 손길.
짐을 대신 들어주겠다는 제스처였다.
“괜찮습니다.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유진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칼같이 거절했다.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공대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은 그녀였다.
그들에게는 별거 아닌,
그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받는 매너에 따라오는,
괜한 불이익을 감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남자들에게 웬만하면 물리적인 도움은 받지 않는다.
그것이 남자들 세계에서, 유진이 세운 철칙이자 생존 방식이었다.
유진은 검은색 대형 캐리어를 끌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의 블랙 SUV 차량.
트렁크가 열리자, 유진은 무거운 캐리어를 힘껏 들어 올려 내부로 우겨넣었다.
쿵, 소리와 함께 트렁크가 닫히고, 유진이 뒷좌석에 재빨리 몸을 실었다.
요스케가 매끄럽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창밖으로는 생경하고 거친 열대우림의 짙푸른 풍경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조수석에 앉은 왓슨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쉴 새 없이 턱을 움직이며 조잘거렸다.
하지만 유진의 귀에는 그저 웅웅거리는 백색 소음처럼 멀게만 들렸다.
“Really? Umm… Ah… Sounds good…”
유진은 영혼 없는 리액션을 던지며, 슬쩍 운전석에 앉은 요스케의 뒷모습을 살폈다.
그는 왓슨의 수다를 완전히 무시하며, 묵묵히 전방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 상사니까. 듣기 싫은 부하직원의 소리 정도야 대놓고 무시할 수 있는 포지션이니까.]
그 순간이었다.
무심코 백미러로 향했던 유진의 시선이,
쿵-.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거울의 좁은 표면 너머,
요스케의 검은 눈동자가 유진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좁은 차 안의 공기를 뚫고 두 사람의 시선이 날카롭게 부딪혔다.
정면을 주시하던 그의 단단한 눈빛이, 불안하게 일렁이며 흔들리고 있었다.
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진공 상태처럼 압착됐다.
폭풍 같은 묘한 감정이 유진의 심장 아래서부터 훅 휘몰아쳤다.
태어나서 처음 본 낯선 남자인데.
분명 오늘 공항에서 처음 마주한 상사일 뿐인데.
왜 이토록 손끝이 저릴 만큼 익숙한 감정이 드는 걸까.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쿵쾅, 쿵쾅.
귓가를 때리는 심장 소리가 가팔라졌다.
거울 속 요스케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유진의 붉은 입술,
그리고 얇은 화이트 셔츠 칼라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쇄골을,
살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순간, 그의 커다란 손길이 살갗에 직접 닿은 것 같은 지독한 환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닿지도 않은 그의 손가락이 쇄골을 지나,
셔츠 안쪽을 타고 점차 아래로 향하는 듯한 기분.
화끈거리는 열감과 함께,
유진의 아랫배가 단단하게 뭉쳐 내려앉으며 찌릿한 경련을 일으켰다.
말도 안 되는 망상. 지독한 외설.
그런데,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이 날것의 느낌이 기이할 정도로 그리웠다.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타인의 체온인데…… 그립다니.
마치 오랜 세월 동안, 그의 넓은 가슴에 안겨 몸을 섞었던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유진은 호흡을 멈췄다.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충격이 일었다.
절대 사랑해서는 안 되는 남자.
이미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있는 남자.
머릿속에, 붉은 경고등이 미친 듯이 켜졌다.
하지만 몸의 감각은 이미 이성의 속도를 저멀리 앞질러 가고 있었다.
이건 지독한 사고였다.
절대 풀어선 안 되는, 너무도 틀린 답이었다.
[풀문 파티!!!]그 지독하고 가혹한 네 글자가,광화문 호텔 로비의 적막을 찢고 유진의 고막에 박힌 순간,사방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일시에 소거되었다.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그날 밤의 기억은 단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대신, 그날 이후 가끔씩 찾아오는 야한 꿈이 있었다.산다칸의 그 방탕하고 원시적인 풀문 파티에서 목격했던,뇌리를 찌르듯 생경하고 외설적인 풍경 속에,자신도 지독하게 얽혀 들어가 있던 바로 그 꿈.“아… 하…. 더 깊게…. 아…….”칠흑같은 바다 위,가쁜 숨을 몰아쉬며 매달리는 유진의 애원에,거구의 남자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부서져 버릴 듯 억세게 끌어안았다.살결과 살결이 빈틈없이 마찰하며,넘실거리는 파도 속에서 휩쓸리고 또 휩쓸렸다.유진은 남자의 단단한 목덜미를 악착같이 끌어안았고,자신의 가느다란 다리로 남자의 두꺼운 허리를 터질 듯 꽉 감싸 안았다.조금의 틈새도 허용하지 않은 채,완벽하게 결합해 하나가 된 서로의 뜨거운 몸.유진은 미친 듯이 치밀어 오르는 극상의 쾌락과 신음을,남자의 데일 듯 뜨거운 입술 위로 남김없이 쏟아냈다.“계속 안아주세요. 너무 좋아…. 아…. 죽을 것 같아…. 계속…. 아….”차가운 밤 바닷물 속에서, 유진은 남자에게 넝쿨처럼 엉킨 채,야수처럼 돌변한 남자에게 본능적으로 매달렸다.더 깊게, 더 난폭하게 자신의 가녀린 몸 안쪽을 박아달라며,외설적인 단어들까지 서슴없이 내뱉던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그렇게 유진은 꿈속에서,이름도 모르는 낯선 남자와,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음란한 밤을 보내곤 했었다.쿵-.그저 전 남친들과의 사이에서 쌓여왔던,지독한 성적 욕구 불만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그런데…… 지금 제 눈앞에 서 있는,서슬 퍼런 직속 상사가 자신과 그 풀문 파티의 해변에서 함께 한 남자라고………[그게……… 꿈이 아니었다고……!!!]등줄기를 타고 거대한 전율이 소름 끼치도록 쫙 돋아 올랐다.그 지독하게 야하고 외설적인 꿈의 파편들이,남자의 억센 손
비좁고 밀폐된 검은 SUV 차량 안.불안하게 잘게 떨리는 두 남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교차했다.대시보드의 네온 그린빛 조명이,유진의 창백한 얼굴 위로, 기묘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스으윽ㅡ.딸각ㅡ.그의 두꺼운 손가락이 유진의 어깨 위 안전벨트를 거칠게 움켜쥐더니,그대로 끌어당겨 은백색의 버클에 매끄럽게 채워주었다.사선으로 유진의 가슴을 가로지른 벨트가, 그녀의 굴곡을 아슬아슬하게 압박했다.그제서야 가슴을 짓누르던 거대한 바위가 걷힌 듯,유진의 허파 속으로 숨이 가쁘게 들이켜졌다.유진은 타들어 가는 입술을 짓씹으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어디로…… 가려고요?”운전대를 잡은 요스케의 억센 팔뚝 위로, 푸른 핏줄이 성나게 돋아 올랐다.그는 전방의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하며, 낮고 거칠게 긁히는 음성을 뱉어냈다.“오랑우탄…… 보러 가자.”순간 유진의 헤이즐넛 빛 눈망울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거대하게 커졌다.심장이 아랫배 밑바닥까지 가파르게 추락하는 충격.유진은 본능적으로 운전대를 쥔 그의 단단한 팔뚝을 작은 손으로 꽉 붙잡았다.뜨거운 살결이 손바닥을 타고 화끈하게 번졌다.“네……?”하지만 요스케는 기포처럼 터진 그녀의 외침을 가차 없이 무시했다.콰아아아아아ㅡ!매서운 엔진음과 함께 검은 SUV 차량이 그대로 미끄러지듯 출발했고,어두운 도로 위를 향해 야수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창밖의 야경이 하얀 빛줄기가 되어 사방으로 부서졌다.이내, 빠른 속도로 질주하던 그의 차량이 싱가포르를 향해,길게 뻗은 국경선의 거대한 다리를 거침없이 건너기 시작했다.달리는 차 바퀴 소리가 웅웅거리며 차체를 울렸다.그리고……온 세상이 야경의 불빛으로 일렁이던,서울의 그 잔인했던 밤 속으로 사정없이 빨려 들어갔다.*두 사람의 지친 육체를 태운,주황색 택시가 한남대교의 거대한 상판을 매끄럽게 지나고 있었다.창밖 멀리로는 서울의 이정표인 남산타워가 독한 황금빛을 내뿜으며 솟아 있었다.한강 주위로 흩어진 수많은
아스팔트 바닥을 잔인하게 딛는 유진의 얇은 힐의 굽소리가,야외 주차장의 정적 속에서 불안하게 흔들렸다.소피텔 호텔의 가장 어둡고 깊은 틈새.이미 예상했고, 수없이 반복하며 상상했던 그와의 재회였다.6년이라는 세월에,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마주할 수 있을 거라고,오만한 확신을 했던,스스로를 향한 뼈저린 후회가 발끝에서부터 식은땀이 되어 차올랐다.단 한 걸음도 제대로 떼기 힘들 만큼,전신이 저릿하게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이 지독한 잿빛 구덩이 속으로,제 발로 다시 걸어 들어오게 만들었던,불과 며칠 전,서울에서의 불쾌한 기억이,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솟아올랐다.차가운 실버 톤의 블라인드가 굳게 닫힌 박 상무 집무실.“서 과장, 이번 출장에 김 대리를 보내는 이유가 뭐야?”박 상무의 호출에 유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커다란 까만 책상 뒤에서, 불만과 탐욕이 뒤섞인 험악한 그의 표정이 그녀를 나무랐다.유진은 등줄기를 꼿꼿하게 편 채, 그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냈다.“김 대리가 쭉 팔로우 했던 일이니, 상무님을 잘 서포트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서 과장, 임 상무 팀 프로젝트로 움직이려는 건 아니지?”박 상무는 회사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는 유일한 라이벌이자,제품 개발 2팀의 수장인 임 상무를 노골적으로 언급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유진은 건조하게 대답했다.“아닙니다.”“임 상무는…… 서 과장도 알다시피 이 회사 후계 구도의 최일선이 아니야. 알다시피, 내 사촌이라고. 아무리 임 상무가 똑똑하게 일을 잘한다고 해도, 어차피 내 밑에서 일할 머슴에 불과해.”“…………”“그러니, 현명하게 판단하는 게, 서 과장의 커리어에 도움이 될 거야.”박 상무는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놓고 협박 투로 말했다.그리고 유진의 얇은 어깨를 향해 슬금슬금 손을 뻗어왔다.권력을 쥔 자의 추악하고 거만한 압박.유진은 바로 뒤로 반 걸음 물러서며, 그의 손길을 칼같이 쳐냈다.“전, 회사 내 정치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번
쿠우웅-.칠흑 같은 검은색 SUV의 묵직한 문이 닫히는 순간,세상의 모든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차 안은 오직 대시보드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네온 그린빛 조명만이,두 사람의 실루엣을 비추고 있었다.숨막히게 어색한 정적이, 두 남녀의 머리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스윽-.요스케가 가볍게 고개를 돌려,조수석에서 잔뜩 경직된 채 안전벨트를 꼭 움켜쥐고 있는 유진을 슬쩍 바라보았다.그의 묵직한 시선이 유진의 붉게 달아오른 뺨을 스치듯 훑고 지나갔다.남자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저녁…… 할까 하는데. 뭐 먹을래요?”유진은 마른침을 삼켰다.목구멍이 바짝 타들어 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아무거나 괜찮습니다.”“네.”그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묵직하고 간단명료했다.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그의 무거운 침묵은,지금 유진에게 치명적인 쥐약과도 같았다.쿵쾅, 쿵쾅, 쿵쾅-.터질 듯이 가파르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이 비좁고 밀폐된 차 안의 서늘한 공기를 타고, 그에게로 그대로 생중계될 것만 같았다.흘러내린 식은땀이 손바닥 안 안전벨트를 축축하게 적셨다.최악이었다.그에게 몰래 품어버린 이 위험한 호감을 들키는 것도 죽기보다 싫었지만,깡 신입 말단 엔지니어로서,까마득한 직속 상사에게 이토록 얼어붙어,자신감 하나 없이, 모양 빠지고 능력 없는 존재처럼 비춰지는 것은 더더욱 끔찍했다.유진은 이를 악물고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부우웅-.그의 차가 거침없이 매끄러운 엔진음을 내며 익숙한 도로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창밖으로 흘러가는 조호바루의 야경이 하얗고 붉은 불빛의 궤적으로 번져 나갔다.그리고 얼마 뒤,차량이 미끄러지듯 세나이의 소피텔 호텔(Sofitel Hotel)에 도착했다.유진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상사와 단둘이, 그것도 금요일 밤에 호텔로 향한다는 건……사실 너무도 위험천만한 시그널이었다.붉은 경고등이 뇌리에서 미친 듯이 점멸했다.그저 단순한 회식 겸 저녁 식사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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